'이상'에 해당되는 글 4건

  1. 2013.03.31 《삼사문학》 동인의 실체
  2. 2013.03.17 잘못된 주소
  3. 2013.02.26 이상이 그린 박태원의 초상 (1)
  4. 2013.02.26 이상의 집

삼사문학19349월 서울에서 그 창간호가 발간된다. 이상의 시 오감도의 신문 연재가 중단 된 후 그 특이한 글쓰기 자체가 문단의 화제로 떠오르던 시기에 이 작은 잡지가 초현실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문단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백수를 중심으로 이시우, 정현웅, 조풍연(趙豊衍), 한상직(韓相稷) 등의 문학지망생들이 한데 어울려서 등사판으로 만들어낸 것이 삼사문학의 창간호다. 이 동인지는 그 해 12월 제2집을 활판 인쇄본으로 간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런데삼사문학의 동인들은 1935년 무렵에 대부분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은 동경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동인지 제3(1935. 3)과 제4(1935. 8)을 계속 발간하였고, 주영섭을 비롯하여 정병호, 황순원, 최영해, 홍이섭, 김진섭, 한태천 등을 동인의 명단에 올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936년 제5(1936. 10)에 이상의 시 I WED A TOY BRIDE를 실으면서 기성 문단과도 교섭하게 된다. 종간호가 된 삼사문학(1937. 4) 6호에도 이상의 수필 19世紀式이 실렸다.

삼사문학의 창간 당시 이를 주도했던 신백수(1915-1945)는 서울 태생으로 중앙고보에서 수학한 후 연희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던 학생이었다. 그는 삼사문학의 창간호 권두에 이른바 3 4의 선언을 통해 새로운 예술로의 힘찬 추구를 내세운다. 신백수는 이 글에서 개개의 예술적 창조 행위의 방법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개방적인 자유주의적 태도를 천명함으로써 비슷한 또래의 문학청년들이 지니는 예술적 욕망을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신백수는 창간호부터 주로 시 창작에 주력하여 창간호에 얼빠진, 무게 없는 갈쿠리를 차고등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제2집과 제3집에도 시 떠도는, 어느 혀의 재간, 12월의 종기(腫氣)등을 내놓았다. 그는 스스로 초현실주의자를 자체했지만 실제로 그가 발표한 시들은 서정시의 전통적인 영역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신백수의 문학 활동은 그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하면서 일본 동경으로 그 무대가 넓어졌다.

신백수는 동인지삼사문학의 발간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동경 유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동인지 창작(創作)탐구(探求)를 간행하는 데에도 앞장선다. 193511월 동경에서 발간한 창작은 동경에 있는 문학청년을 중심으로 동경 현지에서 엮은 문학 동인지이다. 이 동인지에는 신백수를 비롯하여 주영섭, 정병호, 한천, 장영기 등의 시와 함께 한적선의 희곡과 김일영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 동인지 창작은 제2집이 19364월에 동경에서 나왔는데, 여기에 황순원이 동인으로 가담하였으며, 3(1937. 7)을 서울에서 발간한 후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 신백수는 이 새로운 동인지에 시 용명기(溶明期)에 해안(海岸)이 잇든 전설(傳說)(1)을 비롯하여 소설 송이(松茸)등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탐구의 발간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삼사문학동인의 문필활동의 외연을 확장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1930년대 중반 삼사문학을 중심으로 잇달아 등장한 탐구창작등 새로운 문학 동인지가 당대 문단에 어떤 영향을 남길 수 있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 동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시우의 경우 다음과 같이 삼사문학시대를 회고하고 있다.

 

삼사문학은 침체한 조선문단에 던지는 하나의 돌이었고 무기력한 문단인에 대한 경고와도 같았다. 그즈음 구인회라는 소위 중견 문단인 단체가 있었는데 그 중에 김기림 씨가 꾸준한 성원을 보내었고 죽은 이상이 홀로 우리들과 함께 호흡을 맞췄을 뿐 다른 대부분의 문단인들은 삼사문학을 이해하기는커녕 삼사문학의 존재조차 무시하였다.(중략) 19371월 말에 제6집을 내이고 삼사문학이 폐간된 후 (중략)삼사문학이 어찌하여 폐간하였던가는 지금 아무리 생각하여도 확실치가 않다. 그냥 흐지부지 한 권도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 계속할 흥도 일지 않았고 우리들은 또 떠들만큼 떠들었기 때문에 제풀에 지쳐 넘어져서 몇몇 아류들을 낳고는 누구의 빌표조차 기다리지 않고 그냥 흐지부지 폐간하여 버렸다. 그 누구의 말마따나 젊은 시절의 한낱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삼사문학이 한때 침체한 조선문단에 한 개 돌을 던져 창을 부수고 청신한 바람을 들이었다는 것과 그 효용을 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조선이 장차 외국의 현대문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여 놓았다는 점만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거라. -이시우, ‘()의 내력’ (상아탑, 7, 1946. 6).

 

앞의 회고에서 이시우는 삼사문학이 침체한 조선문단에 한 개 돌을 던져 창을 부수고 청신한 바람을 들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당시 문단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던 구인회의 김기림, 이상 등이 자신들의 문학을 각별히 성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장차 외국의 현대문학을 받아들일 준비를 위해 삼사문학의 문단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이시우가 지목하고 있는 구인회의 김기림, 이상 등에 대한 언급이다. 그 이유는 구인회특히 김기림과 이상의 문학활동과 그 영향권 안에서 삼사문학의 문단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인지삼사문학을 중심으로 창작탐구등을 한데 놓고 보면, 삼사문학동인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은 신백수, 이시우, 주영섭, 한태천 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은 1930년대 한국문학사 연구에서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나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1934년 이상의 유명한 시 오감도에 등장했던 무서운 아해들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은 스스로 ‘34’라고 명명하면서 자신들이 문단적 위치를 규정했으며, 이상의 시 오감도속의 무서운 아해들이 되어 이상의 문학적 행보를 따르면서 그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힘썼다. 그렇지만 이상이 철저하게 당대 문단에서 외면당한 것처럼, 이들의 새로운 문학적 시도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새로운 문학정신은 일본 식민지 지배세력이 군국주의로 치닫던 1930년대 중반 이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성을 지닌다. 특히 이상 문학과의 연관성을 놓고 본다면 그 전위적 실험성의 의미를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상이 동경에서 만나 것이 삼사문학의 동인들이고 이들의 문학적 열정과 새로움의 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마땅히삼사문학의 문학적 정서를 다시 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나는 삼사문학6호를 확인하고 싶다.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법한데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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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터무니없는 질문은 한국문학사에 참으로 오랜 숙제로 남아 있다. 이상 문학의 어떤 윤곽이 독자 앞에 드러나게 된 것은 <<이상선집>>(백양당, 1949)의 출간과 때를 같이한다. 시인 김기림에 의해 엮어진 이 한권의 책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육사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과 함께 불행한 시대를 마감하는 한국문학의 하나의 표석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인 김기림의 이름 위에 월북문인이라는 붉은 줄이 그어지자 독자들의 기억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이상의 문학에 대한 논의는 새로운 세대의 몫이 된다.

나는 일본 동경대학에서 한국근대문학 강의를 담당하면서도 틈만 나면 이상을 찾아다녔다. 이상은 1936년 늦가을부터 1937417일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동경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묵었던 동경의 하숙집 주소는 간다구(神田區) 진보쪼(神保町) 3조메(丁目) 101-4번지 이시카와(石川) (). 동경대학 캠퍼스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몇 차례나 고서점가에 인접해 있는 이상의 하숙집을 찾았다. 그러나 이상이 묵었던 간다 진보쪼의 하숙집은 그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진보쪼 3조메는 그리 넓은 구역은 아니지만 그 복판에 동경에서도 전통이 있는 센슈대학(專修大學) 캠퍼스가 자리하고 있다. 도저히 번지수를 찾을 길이 없었다. 복덕방에 들어가서 101-4번지를 물었지만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소화(昭和)16(1941) 동경 인문사(人文社) <간다구(神田區) 상세도(詳細圖)>를 도서관에서 복사하였다. 그리고 먼저 그 지도 위에서 이 하숙집의 번지수를 찾아 그 위치를 가늠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진보쪼 3조메에는 101-4번지가 없다.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진보쪼 3조메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체 지번이 29번에서 끝이 난다. 나는 결국 구역소에 찾아가서 다시 지번을 확인하였다. 담당직원은 진보쪼 3조메에는 29번지를 넘는 지번이 당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1번지는 있을 수 없다면서 담당직원은 내가 알고 있는 주소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망연했다.

내가 이상의 동경 하숙집 주소를 처음 확인한 것은 임종국(林鍾國) <<이상전집(李箱全集) 3 >>(고대문학회, 1956)을 통해서이다. 이 전집은 이상 문학의 텍스트에 대한 총체적인 정리 작업을 통해 이상 문학의 범주를 확정해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뒤에 발간된 대부분의 책들이 이 전집에 빚지고 있다. 이 전집은 시와 소설과 수필 등으로 넓혀져 있는 이상의 글쓰기 영역을 세 권의 책으로 묶어내었기 때문에, 이상의 사후 20년에 이루어진 중요한 문학사적 정리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집 제3권 부록에 수록된 이상의 연보에 동경의 하숙방 주소가 진보쪼 3조메 101-4번지로 표시되어 있다. 나는 이 주소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진보쪼 3조메를 헤매다가 3조메 구역에서 소화(昭和) 이래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오래 된 쌀가게를 찾게 되었다. 가게 주인은 소화 연간의 회원 명단(단골 손님의 명단)을 위층 서재에서 꺼내다가 내게 보여주면서 친절하게도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3조메에는 101-4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런데 3조메 10번지의 지번이 둘로 나뉘어 있어서 10-110-2로 표시해 왔다는 점, 내가 알고 있는 101번지는 10-1번지일 것이라는 점, 10-1번지에는 당시에 모두 14가구가 살았다는 점 등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가게 주인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들 열 네 가구의 주소가‘10-1 번지의 1’‘10-1번지의 2와 같은 방식으로 표시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이상의 동경 하숙집 주소는 진보쪼 3조메 101-4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3조메 10-1번지 4의 오기였던 것이다. 지금은 이 지번 위에 수년전에 새로 지었다는 센슈대학의 현대식 회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잘못된 주소를 찾아다녔다. 이상의 문학이 오리무중이었던 것처럼.

나는 동경에서 긴자(銀座)의 거리와 신주쿠(新宿)의 골목을 기웃대었던 이상의 환영(幻影)과 수없이 마주쳐야 했다. 이상은 1936년 가을 새로운 문학을 꿈꾸 일본 동경을 찾았다. 그리고 진보쪼 3조메 10-1번지 4호에 하숙을 들었다. 하지만 동경이라는 도시가 자신이 꿈꾸던 현대적 정신의 중심지가 아님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서구 세계를 치사하게도 흉내내고 있던 동경의모조(模造)된 현대(現代)’에 절망하고는 봄이 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거동 수상자라는 이유로 그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차디찬 동경의 늦겨울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견뎌야했다. 이 불행한 정신은 그 육신과 함께 거기서 무참하게도 허물어졌다.

이상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새삼스럽다. 이상을 다시 묻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상의 글쓰기는 지금도 한국문학이라는 이름 앞에 문제적인 상태로 놓여 있다. 여기서 굳이 글쓰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의 글들이 어떤 양식의 영역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양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으며 텍스트의 상호연관성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 그리고 모든 글들이 서로 이어져 동시적 질서라는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겉으로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언제나 그 자체의 지향을 분명히 보여주는지도의 암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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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이 화가를 꿈꾸며 그렸던 그림 몇 편이 남아 있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그의 자화상(自畵像)이다. 자신의 붓끝으로 자기 얼굴을 그려내는 이 특별한 형식의 그림은 그리 단순하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얼굴은 자기 눈으로 직접 들여다볼 수가 없다. 거울을 통하여 비춰진 영상을 통해서만 간접적으로 인지할 수 있을 뿐이다. 거울 속의 얼굴 모습은 사실적 형상의 입체성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거울은 모든 것을 평면적 영상으로 재현하기 때문에, 거울을 통해 보이는 코의 높이도 눈의 깊이도 제대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사람들은 누구나 거울을 보면서 자기 얼굴 모습에 관심을 기울이고 거기에 집착한다. 물론 다른 사람의 얼굴을 바로 눈앞에 대놓고 보듯이 그렇게 생생하게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 모습을 알아볼 수 없는 일이다. 자기 얼굴을 그리는 작업은 초상화(肖像畵)의 사실주의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 자기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부분이 더욱 강조되고 관심을 두지 않고 있는 부분은 소홀하게 취급되기 일쑤다. 그러므로 자화상은 자기 집착을 드러내는 욕망의 기표로도 읽힌다.

이상의 자화상으로 알려진 그림 가운데 1976년 잡지 독서생활(1976. 11)<이상의 마지막 자화상>으로 소개된 것이 있다. 이 그림은 이상 연구의 선봉에 섰던 임종국에 의해 발굴된 것으로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덧붙여져 있다.

 

 

재미있는 책이 발견되었다. 이상의 자화상과 친필 사인과 낙서 한 구절이 적혀 있는 이상의 장서 한 권이다. 책 이름은 줄 르날의 전원(田園)수첩(手帖)이다. 동경 간다구(神田區) 진보정(神保町) 3정목(三丁目) 21번지 금성당(金星堂) 발행이며, 역자는 廣瀨哲士, 中村喜久夫 양인. 소화(昭和) 9, 1934910일 발행된 2백면의 책이다.

이상이 이 책을 소유했던 시기는 첫째 국내 시장에 배부되는 시간을 계산해서 1935년무렵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발행 19359월인 책이 국내 시장에 배포되려면 아무래도 6개월 정도는 걸리지 않겠는가?

둘째 193610-19374월에 걸쳤던 동경 시절의 장서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근거는 그 책이 동경 간다구 진보정 3정목 21번지에 주소를 둔 금성당 발행이라는 점이다. 당시 이상의 동경 주소는 간다구 진보정 3정목 101-4(이 주소는 3정목 10-1-4를 잘못 읽은 것임) 이사카와(石川)라는 사람의 집이었다. 몰후 이상의 유물은 부인의 손으로 일체 한국으로 옮겨졌다.

이러한 경위는 어떻든 간에 이상의 지문이 어딘가에 남아 있을 손때 묻은 장서가 40년이 지난 오늘에 발견 됐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그 책을 1935년 무렵에 소유했다고 하면 다방 <제비>를 폐업하기 전후가 된다. 이때 이상은 <제비> 다방 뒷방에서 금홍이와 동거했으며 <제비>를 폐업한 후 <69> <무기()> 같은 다방과 카페 <쓰루()> 등을 경영하다 모두 실패해 버린다. 그리고 재생을 기약하며 동경으로 탈출하는 것이다.

반면에 동경 시절의 장서였다면 사상 혐의로 일경에 체포되기 직전이다. 까치 둥우리 같은 두발과 서가에서 발견된 불온한 몇 권 책으로 해서 이상은 서간다(西神田) 경찰서에 구금된다. 건강 악화로 보석된 지 1개월 미만에 그는 영면하고 말았다.

이 책에 적힌 다음의 낙서(원문 일어)는 그 어느 시기의 심경의 고백이다.

 

이놈은 아주 패가 붙어버린 요시찰 원숭이

수시로 인생의 감옥을 탈출하기 때문에

원장님께서 심려한단 말이다.

 

이상의 경우라면 동경으로 갔다는 자체가 인생의 감옥을 탈출함이었다. 세기말적 불안 속에서 이방인처럼 살다간 이상은 결국 그 자신의 낙서가 고백하듯이 아주 고약한 패가 붙어버린 한 마리의 요시찰 원숭이가 아니었을까? 일상의 틀 속에서 수시로 탈옥을 감행하던 위험하기 짝이 없는 원숭이...... 

이 자화상은 이상의 가장 말기의 것이다. 그뿐 아니라 이상의 친필 사인은 필자가 아는 한 이것이 최초로 발견된 유일한 것이다. 지금까지 이상의 필적은 있었지만 친필 사인 만큼은 발견된 것이 없었다. 따라서 희한하고 소중한 서명이다. <姜敏(시인)씨 소장>

 

 

이상 연구의 권위자인 임종국에 의해 소개된 이 글은 <자료>라는 이름으로 이상의 그림 한쪽과 함께 잡지의 권두에 수록되어 있다. 임종국의 소개에 의해 이 글과 함께 소개된 이상의 그림은 의심할 여지없이 이상의 자화상으로 인정되어 널리 알려졌음은 물론이다.

임종국이 이 글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실 가운데 줄 르나르의 <전원수첩>에 관한 이야기는 이상을 추억하는 여러 사람들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물론 이러한 사실 하나로 이 책의 소장자를 이상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이 책에 그려놓은 그림에 붙인 李箱이라는 사인을 보면 이 책이 이상과 관련된다는 점을 부인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이상이 줄 르나르의 <전원수첩>을 즐겨 보았다는 사실은 다음과 같은 기록들을 통해 확인된다.

 

(1) 어느날 상허(尙虛)의 경독정사(耕讀精舍)에서 몇 사람의 벗이 저녁을 먹은 일이 있다. 그 자리에서 시인 이상은 줄 르나르의 <전원수첩> 속에서 읽은 것이라고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였다.

겨울날 방안에 가두어 두었던 카나리아는 난로불 온기를 봄으로 착각하고 그만 날개를 푸닥이며 노래하기 시작하였다고-.

우리는 르나르의 기지와 시심을 일제히 찬탄했다. 그러나 결국은 시가 오류의 심리까지 붙잡은 것은 아니다. 사실은 시인이 그 자신의 봄을 그리는 마음을 카나리아의 뜻없는 동작에 투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그 이야기를 꺼내놓은 이상의 마음에도 역시 봄을 그리는 생각이 남아 있어서 그 감정을 그러한 실없는 듯한 이야기속에서라도 풀어버리는 게 아닐까. (김기림, 봄은 사기(詐欺), 1935)

 

(2) <제비>에 또한 실패한 이상은 그래도 단념하지 않고 明治町에다 <무기()>라는 다방을 또 만들어 놓았다. 그곳의 실내 장식에는 <제비>의 것에보다도 좀더 이상의 괴팍한 취미 내지 악취미가 나타나 있었다. 결코 다른 茶店에는 통용되지 않은 괴이한 형상의 다탁이며 사면벽에 그림이나 사진을 걸어놓는 대신 르나르의 <전원수첩>에서 몇 편을 골라 붙혀놓는 등 일반 선량한 끽다점 순방인의 기호에는 결코 맞지 않는 것이었다. (박태원, 이상의 편모, 1937)

 

(3) 그가 경영하느니보다는 소일하는 찻집 제비회칠한 사면 벽에는 주르 르나르의 에피그람이 몇 개 틀에 들어 걸려 있었다. 그러니까 이상과 구보와 나와의 첫 화제는 자연 불란서 문학, 그 중에도 시일밖에 없었고, 나중에는 르네 클레르의 영화, 단리의 그림에까지 미쳤던가 보다. (김기림, 이상의 모습과 예술, 1949)

 

 

이상이 줄 르나르에 대해 지니고 있던 관심은 이러한 기록들이 그대로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상의 마지막 자화상으로 소개된 그림 자체이다. 이 그림은 연필 또는 펜으로 그려진 간단한 스케치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림의 왼쪽으로 일본어로 쓴 문구가 적혀 있고 우측 하단에는 이상의 자필 사인이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내용으로 보아 이상 자신이 그림을 그리고 거기에 문구를 적어넣고 자신의 사인을 표시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할 만하다.

그러나 이 그림이 과연 이상의 자화상일까? 나는 여기에 대해서는 찬동하지 않는다. 이 그림은 이상의 얼굴 모습을 그린 것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이 그림의 대상 인물이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이상은 시력이 약하긴 하였지만 안경을 낀 적이 없다. 이상과 가장 절친했던 친구 중의 하나인 문종혁의 증언에 따르면 이상은 안경은 쓴 일은 없지만 강렬한 빛을 정시하지 못하였다. 시력이 약한 편’(몇 가지 이의, 문학사상, 1974, 4)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의 주인공은 둥근 테의 안경을 끼고 있다.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이상의 사진 가운데에도 안경을 낀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므로 이 그림의 주인공이 이상 자신이라고 추단한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 그림의 인물이 이상의 절친한 문우였던 구보 박태원이라고 생각한다. 이 그림은 이상이 그린 박태원의 초상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림의 왼쪽에 적어 넣은 일본어 문구를 좀더 정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일본어 원문을 그대로 옮기고 이를 풀어보면 다음과 같다.

 

これはこれつきの要視察猿

トキドキ人生脫出スルノデ

園長さんが心配スルノテアル

(, 이거야말로 꼬리표가 달린 요시찰 원숭이

때때로 인생의 울타리()를 탈출하기 때문에

원장님께서 걱정한단다)

 

여기 적어넣은 문구는 그림의 대상이 되는 인물의 행태를 재미있게 묘사한 것이다. 특히 이 인물을 꼬리표 달린 원숭이()’라고 지칭한 것은 주목을 요한다. 여기서 ()’은 박태원의 이름의 끝 글자인 ()’과 발음이 같은 데에서 연유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상 자신은 이미 삶의 일상적인 테두리를 벗어난 인물이다. 그러므로 때때로 인생의 울타리를 벗어나려고 한다는 설명은 이상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오히려 정상적인 가정을 이끌면서도 예술적 충동을 이기지 못했던 박태원의 경우에 이러한 설명이 붙을 법하다.

 

이 그림을 박태원의 당시 사진과 견주어 보면 나의 주장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상이 인쇄소 창문사에서 일하고 있었던 때(1935-1936) 이상과 김소운이 나란히 책상 앞에 앉고 뒤에 박태원이 서서 찍은 사진이 하나 남아 있다. 여기에 나온 박태원의 모습만을 떼어내어 보자. 둥근 테의 안경을 낀 표정, 더벅머리에 갸름한 얼굴, 뚜렷하게 드러나는 입술과 콧날과 인중의 윤곽, 이런 것들이 모두 그림 속의 인물과 흡사하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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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꽃신 2015.04.15 00:46 Address Modify/Delete Reply

    자화상의 원본이 어느것인지 알고싶습니다.
    http://blog.daum.net/gapgol1/161546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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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종로구 통인동 154-10번지 낡고 작은 한옥에 이상을 기리는 제비다방이 문을 열었다. 이 집은 철거 대상이었던 것을 2003년 김수근문화재단(이사장 김원)이 매입하여 제비다방이라는 이름으로 작은 공간을 꾸몄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사장 김종규)과 재단법인 아름지기(이사장 신연균)20134월 이상의 기일까지 통인동 제비다방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일반에게 개방 운영한다. 이상과 관련된 문화예술의 소모임에 활용할 수 있고, 서촌 지역 주민들도 이용할 수 있다.

제비다방이라는 간판을 내건 이 한옥은 이상을 양자(養子)처럼 데려다 키운 백부(伯父)의 집이 있던 자리에 서 있다. 이상은 바로 세 살 아래의 친동생 운경(雲卿)이 태어난 직후 생부모의 곁을 떠나 백부가 세상을 떠난 뒤까지 20년 가까이 통인동 154번지의 큰집에서 살았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보성고보를 마친 것도 이곳이다.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3년 동안 다닌 것도 이곳이다. 그리고 조선총독부 건축과의 기사로 취직하여 출근했던 곳이 이곳이다. 그의 첫 장편 <십이월십이일>(1930)과 첫 단편소설 <지도의 암실>(1932)이 여기서 씌어졌고, 일본어 시 <이상한 가역반응>과 일본어 연작시 <조감도(鳥瞰圖)> <선에 대한 각서> <건축무한육면각체> 등도 모두 여기서 발표했다. 이상의 삶의 상당 부분이 이곳에서 이루어졌으니 이상의 삶과 그의 문학을 기리는 새로운 공간이 여기에 들어서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하지만 이 자리에 얽힌 사연이 기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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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집이 세간의 관심을 끌게 된 것은 20031월 철거 직전에 건축가 김원 씨가 김수근문화재단을 통해 매입한 후 이상이 살았던 집으로 추정하여 문화재청에 근대문화재로 등록(20049, 등록문화재 88)하면서부터이다. 당시 통인동 골목길가에 서 있던 이 작고 낡은 집에는 작은 서당과 옷수선 가계가 있었다. 집 주인은 이 집을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팔아넘기려고 계약을 맺었다. 천재 시인 이상의 창작 산실이었던 공간이 부동산 개발업자에게 팔려 곧 헐리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김 원씨는 종로구청에 탄원서를 내고 건축가협회의 도움을 받아 위약금까지 물어준 뒤 매매계약을 파기하도록 했다. 김원씨는 이 집터에 이상 생가를 복원한다는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이 집은 이상이 살았던 곳이 아니라 이상 사후에 이 땅을 매입한 사람들에 의해 새로 지어졌다는 사실이 확인되면서 20086월 근대문화재 등록이 말소되었다. 이런 저런 논란이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일부 언론에서는 문화재 당국의 서투른 행정을 지탄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이 집을 20097월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 그대로 매입하였다. 비록 근대문화재 등록이 말소되었다 하더라도 이 공간의 역사적 가치를 인정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문화유산국민신탁에서는 이 자리에 이상의 생가를 복원하고 작은 기념관을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이 계획도 차질이 생겼다. 서촌주거공간연구회를 비롯하여 일부 주민들이 이 한옥의 원형 보존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문화유산신탁은 20106월 재단법인 아름지기의 협조를 얻어 통해 4명의 건축가의 공동설계를 통해 한옥의 원형을 살리면서 소규모 문화예술의 활동공간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오늘의 제비다방을 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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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개인적 관심으로 이 집을 여러 차례 찾았었다. <이상전집>(2009)을 새로 엮고 이상의 생애를 다시 추적하기 위해서였다. 이상이 살았던 통인동 154번지를 토지대장과 지적도를 통해 확인도 하였고, 이상의 생가와 백부의 가계(家系)를 확인하기 위해 제적부 등본을 찾았다. 그리고 이러한 조사를 통해 이상의 출생과 성장 과정에 읽힌 여러 가지 사실들을 밝혀내게 되었다.

이상의 호적(제적부등본)에 따르면 부친은 김영창(金永昌)이며, 모친은 박씨이다. 그동안 대부분의 연구서들이 이상의 부친을 김연창(金演昌)으로 표시했다. 이제는 잘못된 기록을 김영창으로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김영창은 강릉 김씨 김석호(金錫鎬)의 차남으로 1884817일 생으로 표시되어 있다. 이상의 모친 박씨의 이름은 박세창으로 알려져 있지만 호적에는 박씨또는 박성녀(朴姓女)’로 표시되어 있다. 이름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대로 표기하지 못했음을 말해준다. 이 기록에 따라 모친의 성함도 근거가 불분명한 박세창을 버리고 박씨또는 박성녀로 고쳐야 할지 모르겠다.

이상의 부친인 김영창의 호적 사유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몇 가지 특이한 점이 발견된다. 일반적으로 차남은 결혼 후에 전 호주의 호적에서 분가되어 새로운 호주가 된다. 그러나 김영창의 경우는 결혼 후에 그의 형인 김연필의 호적에서 분가하여 새로운 호주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양조부(養祖父) 김학교(金學敎)의 후사로 입양되어 그 가계를 이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 대해서는 좀더 정확한 사실 관계의 확인이 필요하지만 이상의 가계에 관한 모든 기록은 1947년 소실되어 버렸고, 그후 재편된 호적에는 더 이상의 기록 내용을 찾을 수 없다. 이 호적의 기록을 따라가 보면 이상의 증조부(曾祖父) 김학준에게는 아우 김학교(金學敎)가 있었다. 김학교는 이상에게는 종증조부에 해당한다. 김학준의 경우는 아들 하나를 두었는데 그가 바로 이상의 조부인 김병복(金秉福)이다. 김병복의 소생인 두 아들이 이상의 백부인 김연필과 친부 김영창이다. 그러나 종증조부인 김학교는 딸 하나만을 두게 되어 후사를 이어갈 수 없게 된다. 이런 연고로 이상의 부친 김영창은 김학교의 처인 강씨(김영창의 양조모)가 세상을 떠난 후 대정 2(1913) 113일 호주를 승계하여 종증조부의 가계를 잇게 된다. 결국 이상의 부친인 김영창이 종조부(從祖父)인 김학교의 양손(養孫)으로 그 호주를 승계한 셈이다. 이런 방식으로 호주 상속이 이루어지게 됨으로써 이상의 부친 김영창은 실형인 김연필과 호적상으로 6촌으로 갈라지게 된다. 이상의 나이가 네 살이 되던 해의 일이다.

호적의 사유 란에는 김영창이 박씨와 결혼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두 사람 사이에는 21녀의 소생을 두었다. 그 첫째가 김해경(金海卿)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시인 이상이 바로 이 사람이다. 이상은 김영창과 박씨 사이의 장남으로 명치 43(1910) 820일 경성부 북부(北部) 순화방(順化坊) 반정동(半井洞) 46호에서 출생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의 날짜는 음력이며, 이를 양력으로 바꾸면 1910923일 토요일이다. 그런데 여기 표시된 순화방(順化坊) 반정동(半井洞) 46호의 현주소를 확인할 수가 없다. 조선 말기의 구역 표시였던 순화방에는 반정동이라는 지명이 없다. 이 지명은 일제 초기에 모두 바뀌었으므로 호적의 재편제과정에서 생겨난 오기일 가능성이 높다. 유사 지명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박정동(朴井洞, 博井洞)이 있는데, 궁정동과 사직동의 중간 지역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현재의 통인동도 여기 포함된다. 기록상으로는 이상이 백부의 집에 양자로 입적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 이상의 결혼에 관한 내용도 호적상에 기록되지 않았다. 1936년 변동림과 결혼하였지만, 결혼 신고를 하지 않은 채 일본 동경으로 떠났다. 그러나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1937417일 오후 1225분 동경시 본향구(本鄕區) 부사정(富士町) 1번지 동경제국대학 의학부 부의원(附醫院)에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망 신고는 동거자 변동림(卞東琳)에 의해 계출되어 동월 22일 접수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2남 김운경(金雲卿)으로 대정 2(1913) 629일 생이며, 셋째인 장녀 김옥희(金玉姬)는 대정 5(1916) 1128일 생이다. 이상의 남동생 운경의 경우에도 호적부에는 결혼 사유가 없다. 김옥희는 평안북도 선천군 심천면(深川面) 고군영동(古軍營洞) 713번지 문병준(文炳俊)194265일 혼인 신고하였으며, 동월 29일 제적되었다. 김옥희는 해방 이후 서울에 거주하였고, 1970년대까지 생존하여 문학사상을 비롯한 여러 잡지에 이상에 대한 회고담을 들려준 바 있다. 김옥희의 회고 <나의 오빠 이상>에 의하면 김운경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월북한 것으로 되어 있으며, 김운경의 호적은 2008년에 말소 처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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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성장과정에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백부 김연필의 가계를 제적부 등본을 통해 살펴보기로 한다. 김연필은 부 김병복(金秉福)과 모 최 씨 사이에서 명치 15(1883) 123일 장남으로 태어났다. 1914년 김병복의 사망으로 호주를 상속받게 되었고, 본적은 경성부 통동 154번지이다. 김연필은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재산을 모았고 하위직 관리로 일했던 중산층이었다. 김연필에 관한 공식적인 기록은 그의 제적부가 전부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대한 제국 관보를 뒤지다가 우연히도 김연필에 관한 기록을 하나 찾았다. 융희(隆熙) 31909526일자 관보의 휘보가운데 학사란에 당시 관립 공업전습소(工業專習所)의 제1회 졸업생 명단 金工科 專攻生 七人 金演弼 朴永鎭 李容薰 洪世煥 崔天弼 鄭致燮 李宗泰의 맨 앞에 김연필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다. 관립 공업전습소의 기원은 대한제국이 설립한 농상공학교(1904)에서 시작한다. 이 학교가 19068월에 농과는 수원농림학교, 공업과는 관립 공업전습소로 분리되었다. 공업전습소는 1907년에 관립공업전습소 규칙에 의거하여 한성부 동서 이화동에 설립되었는데 토목과, 염직과, 도기과(陶器科), 금공과(金工科), 목공과, 응용화학과, 토목과를 두었다. 공업전습소는 실제 업무에 종사할 기술자를 양성하는 것을 그 주요 목표로 하여 보통학교나 소학교 졸업자들에게 입학 자격을 부여하였으며, 그 수업연한은 2년이었다. 1912년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가 설립되면서 시험소의 부설 공업전습소로 귀속되었으며, 19164조선총독부 전문학교 관제에 따라 경성공업전문학교가 설립되면서 기존의 공업전습소는 학교의 부속기관으로 흡수되었다. 19223조선총독부 제학교 관제가 공포되자 경성공업전문학교가 경성고등공업학교로 개편되었다. 관립 공업전습소의 제1회 졸업생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김연필이 이상의 백부 김연필과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은 공업학교 계통의 교원으로 계시다가 나중엔 총독부 기술직으로 계셨던 큰아버지 김연필 씨라는 김옥희의 증언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는 일이다. 특히 이상의 경성고공 입학이 백부의 뜻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은 공업전습소 출신이었던 김연필의 경력으로 미루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다.

김연필은 결혼 후 본처(기록상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음)와의 사이에 소생이 없었다. 강릉 김씨 양반을 자처하던 집안 장손의 후대가 끊어지게 되자 김연필은 아우 김영창의 장남 김해경(이상)으로 하여금 자신의 후사를 이어가게 할 계획을 세웠다. 김영창은 두 아들(해경과 운경)과 딸 하나(옥희)를 두고 있었다. 마침 김영창이 종조부인 김학교의 양손으로 입적하어 호주를 상속하게 되어 지손(支孫)으로 분가하게 되자 김연필은 조카인 김해경을 그의 집으로 데려가게 되었다. 이상이 백부 김연필의 양자였다는 말이 나돌게 된 연유가 여기 있다.

그런데 이상의 누이동생 김옥희의 회고에 의하면, 총독부 하급직 관리로 일했던 김연필은 결혼 후 자식을 두지 못하자 본처를 두고 어디서 아들이 하나 딸린 여인(호적상의 김영숙)을 소실로 맞았다는 것이다. 한 집안에 본처가 살고 있는데 소실로 김영숙이 들어와 한동안 함께 지내게 되자, 이상에게는 큰어머니가 두 사람이 된 셈이었다. 하지만 본처가 곧 집을 나가버리자 김영숙이 정식 재판을 거쳐서 김연필의 처로 입적하였다. 이상이 경성고공에 입학했던 1926년의 일이다. 김연필은 김영숙이 데리고 들어온 아들도 자신의 아들로 입적시켰다. 그가 바로 김문경(1912년생)이다. 제적부 등본에는 김영숙이 대정 15(1926) 714일 경성지방법원의 허가 재판에 따라 취적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그 아들인 김문경이 바로 뒤를 이어 대정 15723일자로 호적에 입적되었다는 사유도 기록되어 있다. 김연필의 법적인 처가 된 김영숙(金英淑)은 평안북도(平安北道) 자성군(慈城郡) 자하면(慈下面) 송암리(松岩里) 382번지 부 김준병(金準柄)과 모 김씨의 3녀로 명치 24(1892) 89일에 태어났다. 그런데 김연필과 김영숙의 사이에 김문경(金汶卿) 대정 원년(1912) 1111일 경성부 통동 154번지에서 장남으로 출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 김문경도 호적에 입적한 것은 대정 15(1926) 723일이다. 모친 김영숙이 재판에 의해 취적 허가를 받은 후에 그 아들 김문경이 호적에 입적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알 수 있다.

이상의 누이동생 김옥희는 198511월 잡지 레이디경향의 인터뷰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 모르고 있습니다만 큰어머니는 한분이 아니라 두 분이 계셨습니다. 오빠가 처음 큰집으로 들어갔을 때는 집안에 자식이라곤 없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도 살아 있는 XX 씨는 나중에 들어온 새로운 큰어머니가 데리고 온 아들이지요.’ 라고 밝힌 바 있다. 김연필은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재빨리 신분의 변신을 꾀함으로써 집안을 일으켜 세웠고 총독부의 일을 그만두고 뛰어든 작은 사업으로 서북지역에 갔다가 애 하나 딸린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김연필이 자신과는 혈연이 닿지 않는 김문경을 아들로 호적에 입적시킴으로써 김연필은 법적으로 소생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김연필이 사망한 뒤에 재산 상속 등의 문제와 결부되어 가족 내에 갈등을 야기하게 된다. 김연필이 193257일 경성부 통동 154에서 나이 50으로 사망하자, 이 해 84일 김문경이 호주를 상속하였다. 양자 입적을 계획했던 이상은 백부의 집안과 더 이상 관계를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이상은 이 해에 건강상의 이유로 조선총독부 건축기사를 사임하였고, 1933년 황해도 배천 온천에서의 요양 생활 후 백부의 소상을 치룬 뒤에 큰집과의 관계를 실질적으로 청산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이상이 백부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은 김연필의 사망 직후의 일이지만, 그는 이미 1926년 경성고공에 입학하던 해에 김연필의 법적 후계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있었다. 새로 들어온 백모 김영숙이 정식으로 김연필의 처로 호적에 오르고 그녀가 데리고 들어온 사내아이가 김문경이라는 이름으로 입적되어 김연필의 법적 상속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의 백부 김연필은 1931년 통인동 154번지를 지분 분할을 통해 154-1154-2로 나누어 매도했다. 토지대장과 지적도의 기록을 보면, 통인동 154번지는 당시의 가옥과 대지를 합쳐 300평이 넘는 땅이었다. 이러한 정황에 대해서는 이 집에서 하숙을 하였던 이상의 친구 문종혁의 회고 <심신산천애 묻어주오(여원 1969. 4)>에도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이상의 집(실은 상의 백부님 집)은 통동 154번지이다. 지금의 중앙청과 사직공원 중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순수한 주택으로서 안채와 뒷채, 그리고 행랑방이 하나, 따로 떨어져 있는 송판제 바라크 변소가 하나 이렇게 구성되어 있다. 기와집이었으나 얕고 낡아서 명실 공히 서민층의 고옥이었다.

이 집의 특색이라면 대지가 넓었다. 백여 평도 넘는 밭을 이루고 있었고, 밭에는 철따라 마늘이니 상추 같은 것이 심어지고 있었다. 늦가을이 되면 옥수수와 수수대만이 꺼칠하게 서 있었다. 흙냄새를 풍기는 집이었다. 바라크 변소가 이 밭 가운데 외롭게 달랑 서 있다. 후일 상은 이 변소에 앉아 달과 이야기하며 시상(詩想)에 잠기곤 했다.

안채는 우리나라 전형적 건물이다. 즉 안방에 대청 건너 건넌방, 안방에는 부엌이 달려 있다. 안방은 2간 장방이요 외광도 좋다. 상의 백부님과 백모님과 사촌동생 문경이의 거실이다. 대청 건너 건넌방은 안방과는 대조적이다. 좁기도 하지만 어두컴컴하다. 햇볕이라고는 연중 들지 않는 방이다. 이 방이 상과 상의 조모님의 거실이다.

김연필은 1931년 앞의 문종혁의 회고에서도 확인되는 백여평이 넘는 집뒤 텃밭을 154-2로 분할하여 매도하였다. 그리고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집만을 154-1로 소유하였다. 그런데 이 집마저 김연필이 세상을 뜬 직후인 1933년 다시 둘로 쪼개졌다. 이번에는 김영숙과 그 아들인 김문경이 154-1번지를 지분 분할하여 매도한 것이다. 결국 154-1번지는 다시 154-5154-6으로 나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상과의 갈등이 적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 내막은 확인할 가능성이 없다. 한편 김연필이 분할 매도한 154-2번지는 뒤에 154-3154-4로 다시 분할되었고, 154-4는 다시 154-7, 154-8, 154-9, 154-10 등으로 분할되어 자잘한 집들이 들어서게 되었다. 지금 남아 있는 154-10번지의 작은 한옥이 바로 이 중의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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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문학과 예술을 기리는 뜻으로 <제비다방>이 다시 문을 열었다. 통인동 154-10번지 열평 남짓한 한옥을 개조하여 만든 이 새로운 공간은 그간의 논란에도 불구하고 작고 알차게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문화유산신탁과 재답법인 아름지기의 노력이 있었기에 이나마 가능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방식의 작은 공간이 과연 어떤 역할을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다시 생각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자리를 더욱 넓혀서 여기에 제대로 된 이상 기념관을 세우고 이상의 성장기의 요람이었던 옛집도 제대로 복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서촌의 주민들도 이런 계획이라면 흔쾌히 동조할 것으로 믿는다. 재단법인 아름지기가 주민들을 설득하면서 발전적인 대안을 만든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이상의 집이 살아나고 통인동을 비롯한 서촌 마을도 함께 살아나 문화의 향기가 풍기는 서울의 명소가 되길 기대한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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