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렬 문고>의 설치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서 재일 한국인 학자 김학렬(金學烈) 박사가 기증한 북한문학도서를 <학렬문고>라는 이름의 개인문고로 소장할 수 있게 된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이다. 김학렬 박사는 해방 직후부터 일본에서 한국어로 문학 창작활동을 해온 시인으로, 일본 소재 조선대학에서 한국문학을 연구하면서 북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운동연구>로 박사학위를 받기도 한 북한문학 전문가이다. 서울대학교중앙도서관에서는 지난 8월 10일 김학렬 박사가 평생을 두고 수집 보관해온 북한 문학 관련 도서 3,700여종을 기증받아 <<학렬문고>>를 설치하고 <<학렬문고 소장 도서목록>>을 간행하면서 <북한 도서 특별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학렬문고>>에 소장되어 있는 북한 문학 관련 도서는 해방 직후부터 최근까지 북한에서 간행된 시, 소설, 연극, 영화, 음악, 아동문학, 문학평론, 어학, 문학사연구, 문학예술정책, 각급학교 교과서, 문학예술관련 잡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도서들 가운데 해방 직후부터 1950년대에 출간된 책들은 대부분 국내의 연구기관의 북한 관련 자료 목록에서 확인할 수 없는 희귀 자료들이다.

이 자료들 가운데에는 해방 직후 월북하여 그 행방을 확인할 수 없었던 문인들의 저작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그 가운데 어문학 관련 도서를 일별해보면 다음과 같다. 해방 전부터 대표적인 국학자로서 활동했던 홍기문, 김석형, 고정옥, 유렬, 김하명 등의 국어연구, 국문학연구, 국사연구에 관련된 여러 저작이 우선 주목된다. 월북시인으로 분류되고 있는 김북원, 김상훈, 김순석, 김우철」, 민병균, 박산운, 박세영, 박팔양, 이용악, 이찬, 조벽암, 정서촌, 조령출, 백석, 조운 등이 북한에서도 활발한 시작 활동을 하였음을 그들이 남긴 시집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설의 경우에는 김영석, 이갑기, 이근영, 이기영, 박태원, 석인해, 엄흥섭, 유항림, 최명익, 한설야, 한태천, 현덕 등이 북한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극작가의 경우 송영, 신고송, 조영출, 한태천 등이 연극활동을 주도하고 있었으며, 비평가 안함광, 윤세평 등과 무용가 최승희의 월북 후 활동을 말해주는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학렬문고>>에는 북한이 정책적으로 지원했던 영화문학이나 가요 음악 분야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 자료들은 인민성을 강조해온 북한 문예정책의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다양한 경향의 영화문학과 가요를 보여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형태로 간행된 북한의 각종 사전류가 포함되어 있다. 이들 사전류는 북한의 학문체계와 그 연구 내용의 수준을 보여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특히 각급 학교의 교과용 도서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는 것이 눈에 띈다. 김일성대학에서 교육하고 있는 문학관련 교과서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다. 문학교육의 내용과 방향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학렬문고>>에는 해방 이후 북한에서 발간한 문학예술 도서의 대부분이 시대별로 수집되어 있어서 북한문학의 변화 양상과 문인들의 활동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개인문고는 북한문학의 실체를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의 보고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도서 자료들이 한자리에 모여져서 북한문학에 대한 실증적인 연구 작업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이 문고의 설치가 북한문학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관심을 제고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권영민)

( * 김학렬 박사는 2012년 일본 동경 근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시인 김기림(金起林)의 동북제대(東北帝大) 시절

오랫동안 기다렸던 편지가 왔다. 그러나 그 편지 내용이 실망스럽다. 내가 찾던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태평양전쟁 당시 미군의 폭격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고 대학도 엄청난 피해를 당했다는 사실은 나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조사했던 창고의 문서에 기대를 걸었었다. 나는 또다시 낭패감을 느꼈다.

일본의 동북지역 가장 큰 도시인 센다이(仙台)를 나는 두 번이나 찾았었다. 센다이 부근의 온천과 어울리는 풍광 대신에 나는 거기 자리 잡은 동북대학(東北大學)에 머물렀다. 그리고 대학 사료관(史料館)에서 1930년대 후반 대학 커리큘럼과 입학생 졸업생의 명단, 학적 사항 등을 조사하였다. 대학의 사무원은 매우 친절하였지만, 아주 사소한 문제도 개인정보 보호법에 의해 열람 금지사항이라고 알려주었다. 대신에 그와 같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는 간접적인 자료들을 내게 보여주었다. 예컨대 매년 대학이 공식적으로 발간하던 안내책자인 <대학기요(大學紀要)>라든지 여러 가지 학내 잡지와 신문 등이었다. 나는 내가 찾아야 할 두 개의 이름을 손에 쥐고 마음을 조렸다. 하나는 김인손(金仁孫), 다른 하나는 김기림(金起林)이었다. 첫 번째 이름은 소화(昭和) 시대 입학생 명단에 들어 있지 않았다. 나는 이 이름이 김기림의 아명으로만 사용되었던 것임을 알았다. 대신에 김기림이라는 이름에 기대를 걸었다.

김기림은 1936년 경성에서의 활동을 접어두고 일본을 떠났다. 조선일보사의 후원금으로 그가 꿈꾼 일본 유학에 다시 오른 것이다. 그는 동경 대신에 일본에서도 손꼽혔던 동북제국대학 문학부 영문학 전공을 택했다. 김기림의 나이 스물일곱이 된 때였다. 1930년대 초반부터 김기림은 한국 문단에서 손꼽히는 이론가이자 시인이었다. <구인회> 그룹을 주도했고,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로 재직하면서 본격적인 시론을 발표하였다. 함경북도 성진 태생인 그는 보성고보에서 수학한 후 처음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동북제대에 보관된 그의 학적부에는 1929년 3월 일본대학 전문부를 졸업하였고, 귀국하여 조선일보 기자로 취직하여 1936년 2월까지 기자 생활을 유지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다시 일본 동북제대에 입학한 것이 1936년 4월의 일이었다.

김기림이 영문학을 전공한 동북제대 문학부에는 당시 일본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고 있던 영문학자 토이(土居光知) 교수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리고 영국인 랄프 호치슨 교수를 비롯한 두 명의 외국인 교수와 함께 일본인 고바야시(小林淳男) 교수도 영문학을 강의했다. 김기림은 토이 교수의 지도 아래 학부 3년 과정을 마쳤다. 당시 일본의 제국대학은 예과 3년 과정과 본과 3년 과정을 거치도록 되어 있었다. 김기림의 경우는 동경에서 수학했던 일본대학 전문부 수료를 예과 과정 이수로 인정받아 곧바로 본과 입학이 가능했다. 김기림은 1939년 문학부 영문학 전공자로서 <학사시험>에 합격하였으며 <심리학과 리차즈, Psychology and I. A. Richards>라는 졸업 논문을 제출하고 1939년 3월 26일 이 대학을 졸업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동북제국대학 문과회에서 펴내는 월간 학회지 <<文化>>(1939. 4)에 소개되어 있었다.

나는 김기림이 영어로 작성한 이 졸업 논문이 궁금했다. 모든 졸업 논문이 문학부 영문학 전공 교실에 보관되어 있다는 직원의 말을 듣고 나는 영문학 전공 교실을 찾았다. 마침 조수 한 사람이 연구실을 지키고 있었다. 내가 찾아온 연유를 알아들은 그 여성 조수는 연구실 벽에 걸린 토이 교수의 사진을 가리키면서 동북대학 영문학의 상징적 인물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자기네 대학의 선배 가운데 김기림이라는 한국의 저명 시인이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사 알게 되었다며 기뻐했다. 나는 영문으로 작성된 졸업 논문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녀는 아주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진에 대비한 건물 보강 공사가 몇 년째 계속 되고 있는데 전공 교실의 모든 자료들을 상자에 담아 다른 창고로 옮겨 보관중이라는 것이었다. 공사가 끝난 후 그 자료들을 다시 전공 교실로 가져다가 분류하여 놓아야만 확인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 후 거의 일년이 넘었는데 일본 동북대학 영문학 전공 교실에서 연락을 해왔다. 학교 공사가 마무리되고 문서들을 모두 재정리하였지만 김기림의 졸업논문은 찾지 못했단다. 1930년대 후반부터 1945년 종전 때까지의 학적 관계 문서 가운데 불행하게도 학생들의 졸업 논문 원본이 대부분 소실되었다는 사실을 학교 당국으로부터 확인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김기림이 공력을 다했던 졸업 논문은 이제 다시 어디서 찾아볼 수 있는 가능성이 사라졌다. (권영민)

위암(韋菴) 장지연(張志淵)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5일 위암(韋庵) 장지연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서훈(敍勳) 취소를 확정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장지연을 대표적 항일 언론인으로 인정하여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었다. 훈장 추서 후 50년이 지났는데 정부가 서훈 취소를 확정하였으니 훈장을 다시 반납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 ‘4천년 강토와 5백년 종사를 타인에게 봉헌하고 2천만 생령으로 타인의 노예가 되게 하였음’을 통탄한 논설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발표되었다.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이날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이 논설의 주인공이 바로 장지연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장지연은 당시 42세의 나이로 언론을 통해 민족 계몽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이 논설을 발표한 직후에 체포되었고 신문도 정간 당했다.

장지연은 1864년에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영남 유림의 본고장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31세에 진사 병과(進士丙科)에 급제하였으며, 사례소(史禮所) 직원(直員)을 거쳐 내부주사(內部主事) 등도 역임하였다. 갑오개혁이 있던 해에 이루어진 그의 진사 급제는 사환(仕宦)의 생활을 결코 순탄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격변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국운은 점차 기울어지고 민심은 혼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이 36세에 달하던 1899년 1월 장지연은 시사총보(時事叢報)사의 주필이 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을 꾀하였다. 그는 스스로 익혔던 전통 유학의 사상을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개혁시켜 나아가기 위해 힘을 기울였고 새로운 문물과 지식에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황성신문의 주필(1899. 9)을 맡으면서 언론을 통한 문명개화와 민족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이러한 애국적인 언론활동의 정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06년 황성신문에서 물러난 장지연은「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1906)」를 발기하고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에 나섰으며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1908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망국의 비운을 통분해 했던 그는 다시 귀국한 후 1909년 경남 진주에서 창간된 경남일보(慶南日報)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1910년 일본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자 경남일보 10월 11일자에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 일본 경찰에 의해 10일간 발행정지가 되었다.

한말의 지식인으로서 장지연이 보여주고 있는 행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유학자로서 자신이 익혀 온 유교의 이념을 끝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서구의 문물이 수용되기 시작하자 시대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방편을 자신의 학문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장지연은 유교의 본질을 중시하면서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였다. 그는 공자의 대동(大同)사상을 중시하였으며 ‘우리나라가 1천여 년 전부터 숭배하고 신앙한 것이 오직 공부자(孔夫子)의 교리였으니 이제 그 숭배했던 바에 나아가서 이를 혁신하고 시의에 알맞게 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개화·진보하는 시세를 맞으면서 진부한 옛 문물의 개신의 필요성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오래되면 낡아지고, 낡아지면 썩으며, 썩으면 패하는 것이 이치임을 강조하면서 동양문화의 새로운 개혁이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문을 배척하는 것은 나라에 좀벌레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진정한 유풍(儒風)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유가(儒家)의 자력 여하에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구 학문의 변용은 장지연에게 있어서 언론기관에서의 활동이 더욱 중요한 촉발점이 되었다.

장지연이 자신의 유학사상을 스스로 개신하여 나간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자각과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문명과 지식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사회의 모든 부문이 새로이 진보하는 기풍을 드러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외세의 침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국력을 발전시키고 국권을 신장하는 방법으로서 그는 자강주의(自强主義)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뜻있는 지식인들과 함께 발기한 「대한자강회」는 자강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단체였으며, 국권 회복과 국력 배양을 목표로 교육과 산업을 추진하는 길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장지연이 일찍부터 국문의 중요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전통적인 한문을 배우고 익히며 한문을 통해 유학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민족 교육의 우선적인 과제로서 국문 교육의 시급한 확장을 강조하였다. 국문이 지니고 있는 실용적인 편의성뿐만 아니라 자국의 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 함께 작용했던 것이다. 그는 「국문관계론」이라는 논설에서 ‘진실로 교육을 발달시키고 우리 독립을 만회하고자 한다면 오직 국문을 확장하는 데에 있나니 한문은 말할 것도 없이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는 스스로 국문 전용을 실천하여 「애국부인전」(1907)이라는 영웅 전기를 남겼다. 프랑스의 애국적인 여성 잔 다크의 생애를 그려낸 이 작품은 애국사상의 계발, 역사 지식의 보급, 민족의식의 자각 등 계몽적인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지연의 사회활동과 그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가 전통적인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스스로 개혁해 나간 계몽사상가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유학사상을 새로이 개신하여 현실의 문제에 적용코자 하였으며, 서구의 신학문을 수용하여 민족의 살 길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망국의 슬픔을 겪었고 구국의 일념으로 민족 자강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하지만 망국의 비운을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어렵게 되자, 그 자신의 사회적 실천운동을 내면화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연구와 한문 시문의 정리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유교연원(儒敎淵源)》《동국유사(東國類史)》 《대동시선(大東詩選)》 《농정전서(農政全書)》《일사유사(逸士遺事)》 《위암문고(韋庵文庫)》 《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 《대동문수(大東文粹)》 《대동기년(大東紀年)》 《화원지(花園誌)》 등을 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만세운동 직후인 1921년이었고 그 때의 나이는 58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부음을 슬퍼하는 한 신문의 기사 중에 ‘선생은 생(生)하여 의(義)가 존(存)하며, 지(志)가 일(一)하니 그 생(生)이 난(難)하였으며, 의(義)가 성(成)치 못하고 지(志)가 전(全)치 못하니 그 사(死)가 또한 난(難)하도다.’ 라고 하였다. 옳고 바른 것에 일관한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더욱 고통스러웠음을 말하면서도 그 뜻이 제대로 펼쳐질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더욱 통탄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자신의 뜻을 끝까지 지켜나간 지식인이 많지 않다. 장지연의 경우에도 1914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친일적인 성향의 글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친일 불교단체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의 간사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협력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런 연유로 <친일인명사전>에도 그의 이름이 올랐고, 결국은 서훈 취소 확정까지 이르게 되었다. 참으로 아타까운 일이다. 그가 친일적인 문필활동도 했다는 사실 자체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더구나 그가 보여준 애국적인 활동과 계몽운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이 마당에 내세워 비교하고자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모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장지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건국훈장을 추서한 것도 대한민국 정부이고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여 서훈을 취소한 것도 대한민국 정부라는 사실이다. 국가의 결정은 엄정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역사적 가치 기준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모든 국민들이 동의하고 수긍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장지연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국민장에 대해 서훈 취소라는 엄청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어떤 역사적 가치 기준을 따랐는가 하는 점은 반드시 모든 절차와 함께 공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결정이 엄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권영민)

마샬 필 교수에 대한 추억

미국의 하와이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쳤던 마샬 필(MARSHALL R. PIHL) 교수는 1995년 7월 11일 세상을 떠났다. 필 교수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던 분이다.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 기반이 거의 없는 미국에서 한국문학 작품을 번역 출간하고 학생들을 키워온 그동안의 노력을 제대로 꽃피우지도 못한 것이 못내 안타깝다.

마샬 필 교수는 미국의 명문 하버드 대학 출신이다. 1960년 4.19 학생 혁명 직후에 그는 서울로 유학을 와서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공부하였다. 이미 고인이 되신 서울대학교의 정병욱 교수와 연세대학교의 김동욱 교수로부터 판소리에 대해 강의를 들은 후, 그는 판소리의 독특한 예술 형태에 매력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서울 유학을 마친 후에 다시 하버드대학으로 돌아가서도, 그는 한국의 판소리 연구에 전념하였고, 한국문학 작품의 번역 소개에도 힘을 기울였다.

1976년에 그는 하버드 대학에서 심청가의 음악적 형식과 그 사설 구조를 관련시켜 연구한 「판소리 심청가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것은 한국문학 전공의 박사학위를 미국의 대학이 수여한 최초의 일이 되고 있다. 그러나 마샬 필 교수는 박사학위를 받은 뒤에 한동안 교수직을 얻지 못하여 안정적인 연구 생활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미국 최고의 명문 하버드대학에서 박사가 되었지만, 한국문학 강좌를 개설하고 있는 대학이 당시에는 미국 본토에 한군데도 없었기 때문이다.

마샬 필 교수는 대학생 시절 한국어를 배우면서부터 학문적인 동지가 하나도 없이 고독과 싸워야했다. 한국전쟁이 막 끝이 난 후, 한국어 강좌가 처음 하버드 대학에 개설되었다. 한국어를 처음 가르친 교수는 한국 역사 학자인 에드워드 와그너 교수였다. 그는 와그너 교수의 한국어 강좌 첫학기 내내 유일한 수강생이었다. 그는 가족들 모두가 말리는 한국어 공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내가 마샬 필 교수를 처음 만난 것은 80년대 초의 일이다. 하버드 대학의 초청을 받아 일년동안 연구생활을 하게 되었던 때이다. 마샬 필 교수는 하버드의 한국문학 강사였다. 마침 내가 머물렀던 바로 그해 봄에 하버드에 처음으로 한국문학 강좌가 개설되었다. 마샬 필 교수와 나는 새로 생긴 이 강좌가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많은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막상 강좌를 열고 보니, 학생이 겨우 세명 뿐이었다. 한국문학 강좌는 당연히 정식 강좌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하지만 우리는 그 강좌를 폐강하지 않고 계속하였고, 한국문학에 관한 여러 문제들을 서로 깊이있게 토론하였다. 그리고 내가 펴낸 「해방 40년의 문학 –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여, 「유형의 땅 (LAND OF EXILE)」이라는 책으로 펴냈다.

마샬 필 교수가 하와이 대학의 정식 교수로 채용되었을 때, 이미 오십대 후반이었다. 그는 아주 기뻐하면서 그 즐거운 소식을 내게 전했다. 그리고, 너무 오래 기다렸던 일이지만, 그래도 아직 늦은 것은 아니라고 내게 말했다. 나는 진심으로 축하를 드렸다. 그리고, 마샬 필 교수가 재직하고 있는 하와이대학을 중심으로 우리는 함께 국제한국문학회도 만들었고, 한국문학의 해외소개를 위해 국제회의도 여러 차례 개최하였다. 최근에는 영문판 한국문학총서 6권(미국 콜럼비아대학 출판부)을 공동 편집하게 되었다.

마샬 필 교수가 환갑을 맞았을 때 나는 환갑을 축하드리면서 환갑 이후 덧붙여지는 나이는 거꾸로 감산하여 나가겠다는 제안을 하였다. 앞으로 몇년이 지나면 마샬필 교수와 내가 동갑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더니, 그는 너무나도 반가워하며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기도 하였다.

마샬 필 교수가 하와이대학에 자리잡은 후에 학생들 사이에도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이 커졌고, 대학원에서 한국문학을 공부하는 학생들도 늘어났다. 마샬 필 교수는 한국문학에 대한 연구와 작품의 번역 소개 작업을 계속하면서 그의 관심사였던 판소리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의 판소리 연구는 판소리의 사설과 그 음악적 형식의 결합에 대한 질문이 핵심을 이루고 있다.

필 교수가 펴낸 「이야기를 노래하는 한국의 소리꾼」(KOREAN SINGER OF TALES)은 그의 반평생의 연구를 집약시켜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판소리 광대의 연원과 그 사회적인 신분의 변화를 통해 판소리의 공연형식의 예술적인 변천을 설명하고자 하였다. 지배계층을 패트론으로 하여 발전한 판소리가 오히려 지배층의 권위와 가치에 도전하면서 평민 대중을 상대로 하는 민중예술로 확대되는 과정을 그는 판소리의 내적인 구조를 통해 설득력있게 설명하였다.

이 책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책의 부록 덧붙여져 있는 영역본 판소리 「심청가」이다. 「심청가」의 여러 판본을 검증하여 판본을 확정하면서, 마샬 필 교수는 20여년에 걸쳐서 그 번역 작업을 해왔다. 판소리 사설의 까다로운 고사와 난해한 한문 구절의 의미를 풀어놓는 일도 힘든 것이었지만, 사설에 섞인 전라도 사투리를 제대로 해독하는 작업이 더 큰 어려움이었다. 그는 「심청가」의 사설을 창(唱)으로 노래불려지는 부분과 아니리로 서술되는 부분을 구별하여 놓았다. 그리고, 그 운문적인 특성과 산문적인 특성을 대조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영어 번역에서도 각각 시적인 운문체와 소설적인 산문체를 활용하였다. 그 결과로 이 영역본을 통해서도 판소리의 문체의 이중성을 쉽게 식별하여 볼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는 이 영역본으로 판소리를 읽게 되는 독자들에게 판소리의 구성적인 특징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고 있다.

마샬 필 교수의 「이야기를 노래하는 한국의 소리꾼」은 그의 마지막 업적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책이야말로 해방 이후 이루어진 한국문화예술의 해외 소개 작업 가운데 가장 빛나는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마샬 필 교수가 다하지 못한 일들은 그분의 뜻을 따르는 후학들의 노력에 의해 계속 이어질 것이다. 외롭게 한국문학 연구의 길을 살아오신 마샬 필 교수의 헌신적인 노력에 다시 고개 숙여 감사를 드릴 뿐이다. (권영민)

권영민의 그때 그곳<8> : 10주기 맞은 이문구의 보령 생가터, 집필실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 계곡에 있는 이문구의 집필실을 찾은 권영민 교수. 10년 전 주인을 잃은 집필실은 찾는 이 없이 을씨년스럽게 남아있었다.

《 ‘관촌수필’의 작가인 이문구(1941∼2003)가 글쓰기를 위해 기거했던 오두막은 충남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의 계곡에 자리 잡고 있다. 그가 10년 전 세상을 떠난 후 이 집은 그대로 비어 있다. 이제는 찾아오는 이도 별로 없다. 나는 동향의 문단 후배가 되어 몇 차례 이곳에서 이문구와 만났었다. 집필실이라는 말에 그는 크게 웃었다. 이 조그만 오두막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곳 진당산 아래 골짜기는 조선 후기 유학자 토정 이지함을 배향하던 화암서원(花巖書院)이 가깝다. 나지막한 산자락 끝으로는 청천저수지가 널따랗게 펼쳐있다. 이문구는 1989년 이곳으로 내려오면서 온몸으로 가담했던 민주화운동 대신에 온몸으로 글다운 글을 쓰겠노라고 했다. 방 한 칸에 마루 하나 그리고 작은 부엌을 갖춘 이 집에서 그는 십년이 넘게 글을 썼다. 》

이문구는 충남 대천 갈머리(관촌마을)에서 1941년 토정과 같은 한산 이씨 가문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이 열 살이 되던 해 6·25전쟁이 터지자 남로당 간부였던 아버지는 예비검속에 걸려 처형당했고, 끌려간 형들마저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전쟁이 끝난 후에 조부도 세상을 떠났고, 화병을 앓던 모친도 잃었다. 중학을 겨우 나온 이문구는 결국 고향을 등진 채 서울로 올라갔다.

그는 자신이 겪은 끔찍한 전쟁을 아버지의 이름과 함께 지워버리고자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큰 상처로 덧났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던 그는 글쓰기에 매달렸다. 힘든 고학으로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소설가 김동리의 추천으로 1966년 ‘현대문학’에 단편 ‘백결’로 등단했다.

올해는 ‘관촌수필’의 작가 이문구의 10주기를 맞는 해다. 그는 유언대로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 갈머리의 솔밭 길 사이에 뿌려졌다. 동아일보DB

작가가 된 후 그는 1970년대의 살벌했던 시대상황에 맞서 가슴 속 깊이 숨겨두었던 한 맺힌 고향 이야기를 마치 아름다운 화폭을 펼치듯 써내려갔다. 그것이 그의 대표작 ‘관촌수필’(1977년)로 완성되었다. 자신의 기억 속에서 지워나갔던 고향 갈머리를 서사의 공간으로 살려내고는, 그 속에 온전하지는 않지만 빼앗긴 아버지와 형의 존재를 기억의 끝자락에 매달았다. 그는 1974년 한국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이후 민족문학작가회의에서 이사, 부이사장, 이사장을 차례로 맡았다. 군사독재에 항거하며 민주화투쟁에도 적극 가담했지만, 한편으로는 소설가라는 이름으로 살아남기 위해 힘썼다.

그의 작품 ‘관촌수필’을 통해 갈머리가 문학적 명소(名所)로 살아났다고 하자, 생전 그는 웃으면서 자신의 아호인 명천(鳴川)을 한자로 내게 써보였다. 나는 ‘울음내’라는 대천 인근의 옛 지명을 댔다. 그러자 그는 “알고 있네” 하면서 반겼다. 관촌수필만으로는 성이 차지 않아서 아예 울음내를 아호로 쓰기로 했다는 거였다. 이제는 좀더 깊이가 있고 듬직하게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쓰고자 서울을 떠났다고 그는 말했다. 단단히 결심을 하고 귀향한 그는 소설 ‘매월당 김시습’(1992년)을 썼다. 상당한 부수가 팔렸다. 자신의 뜻을 독자들이 알아주는 것 같아서 반가웠다고 그는 말했다. ‘장곡리 고욤나무’(1995년) ‘만고강산’(1998년) 등 후기 작품도 잇달아 나왔다.

문학적 성과들은 나왔지만 그는 “글쓰기가 자꾸 더 힘들어진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매월당 김시습’을 쓰면서 몇 번이나 충남 부여군의 무량사(無量寺)라는 옛 절간을 찾아갔었다고 했다. 현실 정치를 뒤로 하고 김시습이 숨어 지냈던 무량사는 대천에서 성주산을 넘으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거기 그 절간을 가보면 그래도 옛날 모습이 남아 있어. 매월당이 어떻게 그 구석까지 숨어들어 왔었는지….” 상념에 젖은 이문구는 이야기 끝에 “한잔 할까? 그래도 바다가 보이는 곳으로 가야지” 하면서 나를 이끌곤 했다.

지난해 말 보령에 내려가 이문구의 생가 터와 집필실을 둘러봤지만 뒤늦게 글을 쓴다. 25일 이문구의 10주기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기억되기 위해서다. 그가 떠난 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그의 갈머리 생가 터는 휑하고, 집필실은 찾는 이 없이 쓸쓸히 서 있었다. 흐릿한 날씨 때문인지 더 처연하게 느껴졌다.

그간 고인을 기리는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문구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삶과 그 문학을 기리기 위한 이런저런 모임들이 생겼다. 그리고 ‘이문구 문학관’을 만들자는 계획도 세워졌다. 보령에서도 뜻있는 이들이 상당히 적극성을 보였다. 그런데 갈머리 생가 터에 문학관을 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생각과 보령시의 계획이 서로 어긋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두막 집필실에 남겨져 있던 유품의 보관에 대해서도 유족들과 갈등이 생겼다. 갈머리 생가 터에 문학관을 짓고 오두막 집필실을 기념관으로 보존하고, 보령시의 축제와 연계해 이문구 문학제를 개최하자고 했던 계획이 모두 중단되었다. 그가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살아남은 이들이 아무것도 한 일이 없으니 부끄럽다.

이문구는 무덤을 남기지 않았다. 그는 위암으로 투병 중일 때에도 글 쓰는 일만을 생각했다. “좁은 땅덩어리에 내 봉분까지 만들 필요가 없다. 내가 태어난 고향 뒷산에 재 한 줌을 뿌리면 되지”라던 그의 말은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그는 한 줌의 재가 되어 고향 갈머리의 솔밭 길 사이에 뿌려졌다. 허망한 이름자를 새기는 비석도 필요 없다고 했다.

문학관을 세우고 문학제를 열고 하는 일들도 이문구가 살아있다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라고 나무랐을 것이 뻔하다. 하지만 그의 고향 갈머리의 뒷동산 솔밭 길이 너무도 허전하다. 그나마 그가 남긴 소설들은 스물여섯 권의 전집으로 묶였지만,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마지막 집필실이 이렇게 날로 퇴락해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이 마음 아프다.

(2013.2.18 /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권영민의 그때 그곳<7> : 한국 첫 예술전문 교육기관, 상고예술학원

6·25전쟁 기간에 우리나라 최초의 예술전문기관으로 세워진 ‘상고예술학원’이 있던 자리를 권영민 교수(왼쪽)와 이주형 경북대 명예교수가 둘러보고 있다. 사진 왼쪽 담이 있는 자리 일대(대구 남산동 657 일대)에 상고예술학원이 있었지만 지금은 주택가로 변해 흔적을 찾을 수 없다.

《 소설가 최정희 선생(1906∼1990)은 1952년 첫 수필집 ‘사랑의 이력’을 펴냈다. 6·25전쟁의 혼란이 한창이던 서울에서였다. 먹고살기에도 바쁜 시절에 책을 낸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힘들었던 때였지만 화가 김환기가 표지 장정 그림을 맡았고 계몽사가 선뜻 출판했다. 소설가 김동리는 이 책이 나오자 ‘평범한 말, 부드러운 문장으로 정한의 세계를 솔직하게 기록한 책’이라고 평하기도 했다. 이 책을 펴면 최정희 선생이 대구에 피란 갔던 시절을 전하는 대목이 눈에 띈다. 》

1930년대 대구 남산동 교남학교에서 교사를 했던 시인 이상화(가운데 앉아 있는 사람)와 학생들 모습. 뒤편에 보이는 교남학교 건물은 1950년대 초 상고예술학원 교사로 사용됐다. 이상화기념사업회 제공

‘요새는 상고예술학원을 세울 계획을 하고 교무처장인 최인욱 씨가 교사를 얻으러 분주히 돌아다니시고, 조지훈 박기준 박영준 구상 이분들은 벌써부터 교수할 준비에 바쁘십니다. 상고예술학원은 상화와 고월의 유고집(1951년)이 나온 것을 계기로 하여 세우게 된 학교인데, 상화(尙火·이상화)의 상(尙)자와 고월(古月·이장희)의 고(古)자에서 두 자를 따서 상고예술학원이라 이름 지었습니다. 뒷돈은 이곳 유지들이 담당하고, 교수는 우리들이 담당하기로 합니다. 문학 외에 음악과도 두고 미술과도 두게 한답니다. 하루 바삐 교사가 얻어지기를 모두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선 매주 토요일마다 문예강좌를 하기로 되었습니다.’

대구 출신의 문우(文友)였던 이상화(1901∼194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의 시인)와 이장희(1900∼1929·‘봄은 고양이로다’의 시인)의 호에서 한 자씩을 딴 ‘상고예술학원’이란 무엇인가.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이 학원을 기억하는 문인은 별로 없다. 6·25전쟁 당시 ‘피란도시’ 대구에 설립되었던 이 학원은 당대 최고의 교수진을 갖춘 국내 최초의 본격적인 예술학원이었다.

대구에 피란 온 예술가들이 중심이 되어 대구·영남 문인 예술가들과 힘을 합쳐 결성한 이 학원에는 무려 90명의 예술가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소설가 박종화 김기진 김말봉 김동리 장덕조 최정희 정비석 최상덕 최인욱 박영준 김영수가 있고, 시인 이은상 오상순 유치환 구상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양명문 김달진 박귀송이 뜻을 더했다. 국문학자 양주동 이숭녕, 평론가 최재서, 아동문학가 마해송, 극작가 유치진, 연극인 이해랑, 수필가 전숙희, 음악가 김동진 김성태 등 문학을 넘어 여러 예술 분야의 인사가 참여했다. 대구의 문화예술인 가운데는 시인 백기만 이효상 이호우 이설주 이윤수와 소설가 김동사, 국문학자 김사엽 왕학수, 화가 서동진 박명조 등이 대구의 유지들과 뜻을 합하여 참여했다.

이 학원의 설립취지문을 보면 ‘선인의 업적과 민족예술의 전통을 깨우치게 하여 뒷날의 대성이 있게 하고자 한다’고 그 목적을 밝혔다. ‘대구지역을 대표하는 신문예 초창기의 시인 이상화와 이장희의 뜻을 기린다’라는 뜻도 담아 지역 유지들의 지지를 얻어낼 수 있었다.

1951년 10월 대구 남산동 향교 북쪽 편 길 건너 모퉁이의 단골 술집에 모인 문인들은 학원장에 마해송을 선임했다. 소설가 최인욱은 교무 담당, 시인 조지훈 구상, 소설가 박영준 최정희 등은 전임 강사가 됐다. 그리고 남산동 657 오르막길 옆에 있던 교남(嶠南)학교를 학원 교사로 정했다.

교남학교는 일찍부터 영남지역 근대교육의 출발점이었으며 이상화 시인이 1930년대 교편을 잡았던 곳이었다. 교남학교가 1942년 수성동으로 이전한 뒤 그 자리에 자리 잡은 상고예술학원은 교육기간 6개월 단위로 하는 단기 강습학원이었다. 하지만 당대 최고의 예술인들로 구성된 강사진과 수준 높은 강의 내용으로 전란 중에도 문학예술을 꿈꿀 수 있는 새 희망의 배움터가 되었다. 문학 음악 미술의 세 개 학과가 운영됐다. 수강 학생과 교수 모두가 강의가 끝나면 단골 막걸리집에 모여 피란생활의 고달픔을 서로 달래곤 했다.

상고예술학원은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우리나라 최초의 문학예술 전문교육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예술의 꽃을 피우고자 하는 뜨거운 열망도 가득했다. 당시 전쟁은 국군의 서울 수복 후 중공군의 남하로 더욱 치열해진 상황이었다. 서남지역에서는 공비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민심이 극도로 흉흉하였고, 국민 모두가 생계를 꾸리기 어려울 정도로 궁핍한 지경에 빠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지역의 유지들은 피란 문인들의 뜻을 받들어 학원 설립 자금을 지원했다. 학원의 운영은 처음부터 적자를 면하기 어려웠지만 여기 참여한 강사들은 열의를 갖고 가르쳤다. 하지만 학원은 개교 후 2년 반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사실상 폐교하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물론 경영상의 적자였다. 1953년 휴전회담이 진전되면서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문인과 학생이 속출하면서 설립 당시의 열정이 식어버린 것도 한 이유였다.

지난달 24일 학원이 있었던 대구 남산동 657 일대를 찾았다. 그 옛날 강사와 학생이 어울리던 뒷골목 싸구려 막걸리집도 다 사라졌고, 주택가가 생겼다. 한편에는 주상복합아파트가 하늘을 찌를 듯 서있다.

생활고와 미래에 대한 불안 속에서도 예술에 매진했던 당시 예술인들의 뜻이 무위로 돌아간 것일까. 아니다. 비록 학원은 흔적조차 사라졌지만 그 취지는 이어졌다. 소설가 김동리 등이 중심이 되어 설립했던 ‘서라벌예술대학’이나 극작가 유치진이 세웠던 ‘서울예술전문학교’ 등으로 뜻이 이어졌다.

(2013.2.4 /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권영민의 그때 그곳<6> : 가람 이병기가 말년 보낸 ‘현대 시조문학의 성소’ 익산 생가

《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인 가람 이병기(1891∼1968)의 생가는 전북 익산시 여산면 원수리 573번지에 남아있다. 한국 근대문인의 생가 가운데 그 단아한 초가집의 원형이 유일하게 그대로 보존돼있다. 가람은 이 집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보냈고, 노후에 이곳을 찾아 자족하며 시조를 짓고 화초와 벗 삼았다.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 바로 이 집이 내려다보이는 뒷산 언덕에 묻혔다. 이곳에 가람의 삶이 그대로 담겼고, 그 문학의 향취가 살아있는 것이다. 》

날이 풀려 고드름이 똑똑 물방울을 떨어뜨리던 14일 오후 이곳을 찾았다. 학생들과 답사차 몇 번 왔는데 헤아려 보니 벌써 10여 년 만이다. 가람 생가 입구에 서니 가장 먼저 반기는 자그마한 모정(茅亭)인 승운정(勝雲亭)이 정겹다. 그 옆으로 담도 대문도 시작되기 전에 사랑채부터 일자형으로 길게 자리 잡고 있다. 그 곁에 파놓은 작은 연못은 눈에 덮여 형체를 알아볼 수 없다.

사랑채의 툇마루 앞을 지나노라면 지금도 누군가 문을 열고 헛기침을 하면서 마루로 나올 것 같다. 진수당(鎭壽堂)이란 편액을 걸어놓은 사랑채의 끝방은 가람이 책방으로 사용했단다. 평소 기거했던 곳은 한 칸 건너 수우재(守愚齋)라는 편액이 붙은 작은 방이다. 수우재와 진수당 사이는 칸 전체를 다락으로 만들었고, 툇마루에 서면 건너편 들판이 한눈에 들어온다. 앞이 탁 트여 시원하다.

사랑채를 둘러본 뒤 대문간을 들어서면 좁은 안마당을 사이에 두고 안채와 마주하게 된다. 자연석으로 쌓은 축대 위에 높다랗게 지은 안채는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부엌이 다락처럼 돌출해 있는데, 비어 있는 안마당이 그저 아늑하다. 이 집은 가람의 조부 시절에 지었다고 전해지니 그 나이가 이백 살에 가까운 셈이다. 안채와 사랑채가 서로 어울려 집 전체가 아늑하고 너무도 소박하다.

가람은 이 집에서 소년 시절을 보내며 한문 공부에 매달렸다. 그러나 신학문에 관심을 갖게 되자 나이 스물에 전주고보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가 한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이때 그가 만난 이가 한글학자 주시경이다. 그는 주시경 선생이 운영하는 조선어강습원에서 우리말 문법을 처음 배웠다. 학교를 졸업한 후 7, 8년간 전주 등지에서 교편을 잡았다. 이때부터 민간에 흩어져 있는 우리 고문헌을 수집 정리하고 우리말과 우리 문학에 대한 연구에 전념했다. 가람이 생전에 수집한 문헌들은 우리나라에서도 손꼽히는 방대한 장서를 이루었는데, 말년에 서울대에 기증해 서울대 중앙도서관에 ‘가람문고’로 보존돼 있다.

가람은 1920년대 중반부터 시조 창작을 통해 널리 대중적인 호응을 얻었다. 그는 최남선의 시조부흥운동에 적극 동참하면서 시조의 원류에 대한 학문적 연구는 물론이고 현대시조 창작에 관한 실제적인 방법을 다양하게 제시했다. 그는 최초의 시조 연구 창작 모임인 ‘시조회’를 결성해 시조에 관심을 갖는 시인들을 모았다. 그가 발굴한 시조시인 조남령 김상옥 이호우 등은 모두 가람시조의 정신을 계승하면서 현대시조의 거장이 됐다. 가람이 발간한 ‘가람시조집’(1939년)은 현대시조의 전범(典範)이다.

가람은 현대시조의 시적 형식에 감각성이라는 고도의 미의식을 부여했다. 가람시조는 전아한 기품을 자랑하고 있지만 사실은 단조로움에 빠져들기 쉬운 시적 진술에 특유의 감각성을 부여하고 있는 게 두드러진 특징이다. 가람은 시조의 격조를 현대적으로 살려내기 위해 우리말의 음절량과 그 이음새에서 나타나는 말의 마디를 자연스럽게 변형시키면서 율격을 지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특징은 시조의 시적 형식이 어떤 틀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인에 의해 그렇게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그러므로 ‘난초’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절제된 감정과 언어의 감각을 가람시조의 미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한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드는 볕 비껴 가고 서늘바람 일어 오고/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시조 ‘난초 1’ 전문)

가람은 초창기 국문학자로서 연구 활동에도 진력했다. 그는 1921년 권덕규 임경재 등과 함께 조선어문연구회를 조직해 우리말과 글의 연구 보급에 앞장섰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으로 일하면서 우리말 맞춤법 통일안의 제정에 깊이 간여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옥고를 치렀다.

1959년 예순여덟의 가람. 동아일보DB

가람은 한국 고문헌의 고증과 주석 작업에도 힘쓰면서 ‘한중록’ ‘인현왕후전’ ‘요로원야화기’ 등을 발굴 소개했고, ‘춘향가’를 비롯한 신재효의 판소리를 발굴 소개하여 구비문학 연구의 기반을 만들었다. 광복이 되자 가람은 서울대 교수가 돼 한국문학의 근대적인 교육 연구 체제를 확립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6·25전쟁 직후 서울대 강단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가 전북대에서 강의하다 1956년 퇴임했다.

가람은 강단에서 물러난 후 고향인 여산에 돌아와 자연을 벗 삼고 시조를 노래하며 풍류를 즐겼다. 그는 스스로 ‘술 복’과 ‘글 복’ ‘제자 복’을 타고난 ‘삼복지인(三福之人)’이라 자처하며 술을 즐기고 시를 사랑하고 제자를 아꼈다. 가람의 집에는 가람을 존경하고, 가람의 시조를 사랑하며, 그 풍모를 따르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우리 현대시조의 문학적 성소(聖所)가 바로 이곳이다.

집은 그곳에 사는 사람에 따라 그 성격과 의미가 정해진다는 말이 있다. 가람의 생가를 둘러보면 이 말이 더욱 실감난다. 이 작은 초가집이 더 특별하게 다가온다. 요즘은 세상이 변해 버젓이 살아있는 사람의 기념관이나 문학관이 들어서기도 한다. 생가는 보존됐지만 가람의 문학을 돌아볼 수 있는 학술적 공간이 없어 아쉽다. ‘가람시조문학관’ 같은 것이 왜 아직도 서지 못했는지 궁금하다. 가람이 평생을 두고 썼던 일기는 한국 근대문학 최대의 보물이다. 이 장대한 기록문학을 제대로 보관할 수 있는 기념관이 어서 들어서길 기대한다.
(2013.1.21 /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제37회 이상문학상 대상 : 김애란 <침묵의 미래>

월간 문학사상이 주관하는 제37회 이상문학상 대상에 소설가 김애란씨(33)의 ‘침묵의 미래’(대산문화 겨울호)가 8일 선정됐다. 김씨는 소설집 <달려라 아비>, 장편소설 <두근두근 내 인생> 등 4권의 책을 내는 동안 한국일보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신동엽창작상, 김유정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만 8개째 받는 상복 많은 작가다. 하루 전 한무숙문학상 수상자로도 선정된 그는 이상문학상 최연소 수상자이기도 하다.

이날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김씨는 “계속 상을 받는 게 부담스럽지만 엄살 부리지 말자고 다짐했다. 바깥의 반응보다는 첫번째 독자로서 내가 좋아할 수 있는 소설을 쓰도록 노력하겠다”고 소감을 밝혔다.

문학사상 권영민 주간은 심사위원회(김윤식·윤후명·서영은·권영민·윤대녕)를 대표해 “김애란의 작품 ‘침묵의 미래’는 문명 비판을 위한 일종의 우화”라며 “언어의 생성과 그 사멸의 과정을 인간 자신의 운명처럼 그려내고 있는 이 관념소설은 내면적인 사유의 공간을 이야기의 무대 위로 끌어올려놓고 있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이어 “이 작품이 보여주는 소설적 상상력이 최근 일상성의 깊은 늪에 빠져 있는 우리 소설의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가는 데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상문학상은 지난 1년간 주요 문예지에 발표된 중·단편을 대상으로 한다.

김씨는 수상작에 대해 “지구상에 6500여개 언어만이 남았고 그나마 절반가량은 곧 소멸될 위기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 언어의 영혼을 주인공으로 삼아 말의 운명을 생각해 보았다”고 설명했다. 또 “지난해 4번째 책(단편집 <비행운>)을 내면서 비로소 소설에 대해 궁금해지고, 해보고 싶은 게 많아졌다”면서 “계간 ‘문학동네’ 봄호부터 연재하는 두번째 장편을 무사히 끝내는 게 올해의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상문학상 대상 상금은 3500만원이며 시상식은 11월 초 열린다.

출처 : 경향신문(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301082129555&code=960100), 한윤정 기자 (yjhan@kyunghyang.com)

권영민의 그때 그곳<5> : 시인 박인환이 1945년부터 3년간 낸 서점, 서울 종로3가 ‘마리서사’

《 프랑스의 여성 시인이자 화가인 마리 로랑생(1883∼1956). 로랑생은 조르주 브라크, 파블로 피카소 등과 교유하면서 현대미술의 새로운 경향에 일찍 접했고, 기욤 아폴리네르의 연인으로 장 콕토, 앙드레 지드 등과도 함께 어울리면서 프랑스 예술계의 중심에 서 있었다. 시인 박인환(1926∼1956·사진)은 이 자유분방한 여성 예술가의 이름을 따 광복 직후인 1945년 말 서울 종로3가 2번지에 서점 하나를 차린다. ‘마리서사(茉莉書舍).’ 시인이 열아홉 살 때 일이다. 》

 

강원 인제 태생인 박인환은 평양의학전문학교에서 공부하다가 광복을 맞았고 학업을 중도에 포기하고 서울로 올라온 후 부모의 도움을 받아 이 책방을 열었다. 박인환은 유난히도 책을 좋아했다. 책방은 20평(약 66m²) 남짓이었지만 서구의 예술과 문학 관련 서적을 많이 비치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마리서사가 문을 열자 새로운 예술에 목말라 하던 문인 예술가들에게 알려졌고, 곧바로 종로의 명소가 되었다. ‘말리(茉莉)’라는 한자어는 일본 모더니스트 시인 안자이 후유에(安西冬衛)의 시집 ‘군함 말리(軍艦茉莉)’에서 차용했다.

마리서사는 신간 서적만을 취급하는 고급 서점은 아니었다. 당시의 서점이 대개 신간과 중고 서적을 함께 취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마리서사에서는 광복 후 혼란기의 한국 서적보다 일본어판 세계문학전집이나 일본에서 간행된 세계 여러 문인의 시집과 소설집, 그리고 화집들이 서가를 장식했다.

당대의 시인이던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이시우 이한직 이흡 등이 단골손님이 되었고, 청년 문사였던 김수영 양병식 임호권 등도 이 서점을 드나들면서 박인환의 친구가 되었다. 새로운 미술에 뜻을 둔 화가들도 드나들었고, 영화인들도 거기에 끼어들었다. 문학을 열망하던 청년 박인환은 마리서사를 찾는 당대의 모더니스트, 자유분방한 예술가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자기 문학 세계의 기반을 만들었다. 이러한 예술적 분위기를 놓고 김수영은 수필 ‘마리서사’를 통해 이렇게 평했다. ‘우리 문단에도 해방 이후 짧은 시간이기는 했지만 가장 자유로웠던, 좌우의 구별 없던, 몽마르뜨르 같은 분위기가 있었다.’

당시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던 좌우 문단의 분위기와는 달리 마리서사에 모여든 예술가들은 자유롭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개될 새로운 문학 예술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마리서사에서는 누구나 자신이 꿈꾸던 예술의 세계를 당당하게 이야기했다. 좌익 문단 조직인 조선문학가동맹의 시분과를 책임지고 있던 김기림은 이곳에 자주 들러 오장환 설정식 이흡 등과 어울렸고 김광균 이한직 등과도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당시 한낱 문학 지망생에 불과했던 박인환은 이 같은 문인들과의 만남 속에서 문단의 분위기를 익혔다. 그리고 동년배의 김수영 조우식 임호권 등과 자유롭게 어울리면서 자기만이 누릴 수 있는 문학의 세계를 꿈꾸었다. 이렇게 마리서사는 광복 후 새로운 문학 예술이 싹트는 작은 텃밭이 되었다. 이 자유로운 공간 속에서 1930년대 김기림 등에 의해 이 땅에 뿌리를 내렸던 모더니즘 시운동의 기운이 문단의 신세대로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하지만 박인환은 1948년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지 못하던 마리서사의 문을 닫았다. 개점 후 3년이 채 안 됐다. 대한민국 정부가 들어설 무렵부터 그는 자유신문사 경향신문사 등에서 기자로 근무하면서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작했다. 1949년 김경린 김병욱 등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을 발간하였고, 김수영 김경린 양병식 임호권 등과 함께 합동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1949년)을 펴냈다. 이 젊은 시인들의 사화집(詞華集)은 일제강점기에 왜곡된 근대를 비판하던 모더니즘 시 운동을 광복 후 새롭게 부활시켰고, 한국 현대시의 한 경향으로 자리 잡게 하는 신호탄이 됐다. 박인환은 1950년 6·25전쟁 당시에도 김차영 김규동 이봉래 등과 피란지 부산에서 문학 동인 ‘후반기(後半紀)’를 결성하고 모더니즘 시 운동을 이어 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55년 대표작 ‘목마와 숙녀’가 실린 첫 시집 ‘박인환선시집(朴寅煥選詩集)’을 낸 이듬해에 서른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평생 심취한, 스물일곱에 요절한 천재 시인 이상처럼 짧은 생을 살았던 것이다.

마리서사에 드나들면서, 박인환과 함께 어울리면서 문학의 꿈을 키웠던 시인으로 김수영을 손꼽을 수 있다. 박인환보다 다섯 살 위인 김수영은 수필 ‘박인환’에서 ‘그처럼 재주 없고, 그처럼 시인으로서 소양이 없고, 그처럼 경박하고, 그처럼 값싼 유행의 숭배자가 없었다’라고 박인환을 회고했다. 표면적으로 읽으면 폄훼하는 글 같지만, 사실 이 수필은 박인환의 죽음 뒤에 부쳐진 가장 속 깊은 우정의 만장(輓章)이다. 한 인간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과 신뢰가 없다면 아무도 이런 글을 쓸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김수영은 다른 수필인 ‘마리서사’에서 박인환의 작은 서점 마리서사가 광복 직후 문학 예술계에 새로움을 꿈꾸게 만든 환상의 공간이었음을 말해 주고 있지 않은가?

수은주가 영하 16도까지 떨어졌던 3일 마리서사를 찾아 나섰다. 탑골공원 정문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가다 낙원동으로 들어서는 골목 모퉁이다. 지금은 한 보청기 가게가 들어섰다. 이 가게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60여 년 전 서울의 내로라하는 예술인들이 여기 모였던 것을 알까.

서울 종로에서 마리서사 같은 작은 서점의 간판을 찾아보기 어렵다. 시인 예술가들이 서로 만나서 자유롭게 새로운 예술을 논할 수 있는 열린 공간도 드물다. 마리서사는 인제에 세워진 박인환문학관에 복제된 모형으로 남아 있고, 박인환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에 쓴 시 ‘세월이 가면’만이 가끔 흘러간 옛 노래처럼 불려지고 있을 뿐이다.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바람이 불고/비가 올 때도/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사랑은 가고/과거는 남는 것/여름날의 호수가/가을의 공원/그 벤치 위에/나뭇잎은 떨어지고/나뭇잎은 흙이 되고/나뭇잎에 덮여서/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그의 눈동자 입술은/내 가슴에 있어/내 서늘한 가슴에 있건만’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권영민의 그때 그곳>을 전문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