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문학 연표 – 1911년

1911年

 

주요사항 

5.15 잡지 <소년> 23호로 폐간됨.

7. 조선총독부 경무국 <서사건국지> 등 발매금지.

8. 23 식민지 조선에 대한 교육정책을 규정한 조선교육령 공포.

 

    

 

작품목록

 

소설

무도생

재봉춘

매일신보

11.1.1

하관생

월하가인

매일신보

11.1.18-4.5

석춘자

화의 혈

매일신보

11.4.6-6.21

신안생

구의산

매일신보

11.6.22-9.28

옥천자

화악산

천도교월보

11.7

우산거사

소양정

매일신보

11.9.29-12.17

 

소설집

김교제

목단화

광학서포

11.5.17

김교제

치악산(하편)

동양서원

11.12.30

이해조

월하가인

보급서관

11

이해조

모란병

박문서관

11.4.5

이해조

쌍옥적

보급서관

11.12.1

이해조

원앙도

동양서원

11

이해조

월하가인

보급서관

11.12.20

이해조

화세계

동양서원

11.10.10

현공렴

동각한매

현공렴

11.9.27

현공렴

죽서루

현공렴

11.10.2

우리말의 현실

한국문화의 바탕이 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새삼스런 질문에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쓰고 있는 한국어가 우리문화의 바탕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종들은 자기 종족의 언어를 중심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며 그 문화적 기반 위에서 살아간다. 하지만 하나의 공동체가 고유 언어를 잃어버리게 되면, 그 문화적 기반을 모두 상실하게 된다. 고유 언어의 상실이 고유문화의 붕괴를 초래하고 끝내는 그 종족의 정신적 육체적 소멸로 이어진 사례는 세계 역사상 아주 흔한 일이다.

유네스코는 세계 각 지역에 분포되어 있는 종족의 언어 가운데 절반 가까운 언어가 사멸의 위기에 놓여 있다고 진단한다. 그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는 것이 다른 민족의 문화적 영향이다. 서구 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아프리카와 미주 대륙, 그리고 호주와 아시아 지역에서 그 원주민들의 고유 언어가 상당수 사멸하게 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의 문제가 아니라 그 언어를 중심으로 형성된 원주민들의 고유문화와 역사 전체의 사멸로 이어졌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소수 민족의 언어가 소멸되어 버리는 현상은 경제 운용의 통합, 정보 통신의 발달, 국제 교류의 증대에 의해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 과정 속에서 더욱 심화된다. 열세한 민족의 언어가 문화 경제적인 흡인력에 의해 우세한 민족의 문화에 휩쓸려 버리면서 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영어 때문에 난리다. 전국 곳곳에 영어마을을 만들고 있으며, 제주도에서는 아예 영어를 공용어로 한다는 말도 나온다. 지식 정보의 소통의 편의를 위해 궁벽한 우리말을 버리고 가장 편리한 영어를 쓰자는 식의 극단적인 주장이 한동안 화제가 되었던 적도 있다. 이것이 세계화 시대의 한국어가 직면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렇지만 세계화는 힘 센 남을 좇아가 따르는 것만이 아니다.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서로 상대를 배우고 이해하여 조화롭게 살아가는 것이 세계화의 목표다. 남의 것을 배우는 데에도 열중해야 하지만, 우리 것을 남에게 제대로 알리고 널리 보급하는 데도 힘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이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세계에 보급 전파하는 일이다. 세계로 하여금 우리를 이해하게 만들 수 있는 문화의 창이 바로 언어와 문화이다.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간의 이해도 불가능하고 의사소통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의 경제력이 신장되면서 세계적 위상이 높아지자, 우리말과 우리 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욕구가 커지고 있다. 우리말은 민족의 고유 언어이지만 세계 각국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배우고자 하는 세계어의 하나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세계화 시대 한국어의 지위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다. (권영민)

잡지 《탐구(探求)》, 그리고 주영섭의 시 「바 ˙ 노바」

1930년대 중반 동경 유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발간한 문학잡지《탐구(探求)》(1936. 5)에 발표된 주영섭(朱永涉)의 시 「바˙노바」를 소개하고자 한다. 주영섭은 평양 태생으로 평양 광성(光成)고보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학교 문학부에서 수학한 바 있다. 보성전문 재학중 학생회연극부를 만들어 고리키의 「밤 주막」을 공연하였고, 카프 산하 극단 「신건설(新建設)」의 제1회 공연인 「서부전선 이상 없다」(1933)에 찬조 출연하기도 하였다. 일본으로 유학하여 호세이대학(法政大學)에서 영문학을 전공하면서 동경 조선인 유학생을 중심으로 하는 연극운동을 주도하면서 1934년 마완영(馬完英)·이진순(李眞淳)·박동근(朴東根)·김영화(金永華)와 더불어 「동경학생예술좌」를 창단하고 기관지 《막(幕)》의 발간하였다. 1935년 일본에서 창간된 문예 동인지 《창작(創作)》 창간호에 시 「포도밭」을 발표하였고, 2호에 「세레나데」「해가오리」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조선에서의 신극의 확립을 창작극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1935년 6월 4일 동경의 ‘축지소극장(築地小劇場)’에서 유치진(柳致眞)의 「소」와 함께 자신의 창작 희곡 「나루」(단막극)를 공연하여 좋은 평을 받았다. 그리고 신백수, 이시우 등이 중심이 되었던 《삼사문학》에도 동인으로 참여하여 제5호(1936. 10)에 시 「거리의 풍경」「달밤」 등의 시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주영섭이 동경에서 참여한 동인지 《탐구》는 그 존재조차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1930년대의 한국문단은 수많은 문학 동인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형태의 ‘소잡지(小雜誌)’가 출현함으로써 그 새로운 문학적 충동과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에는 《시문학(詩文學)》이나 《시인부락(詩人部落)》처럼 문학사의 주류 속에서 그 위상을 높이 평가받고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개가 문단의 주변에서 그 존재조차 제대로 드러내지 못한 채 사라진 것들이 많다. 잡지 《탐구》의 경우가 바로 이에 해당한다.

《탐구》는 ‘문학계간’이라는 부제를 달고 1936년 5월 20일 그 창간호가 나왔다. 이 잡지를 발행한 ‘탐구사(探求社)’는 경성 수송정 123번지이며 발행인은 이용우(李龍雨)로 표시되어 있다. 잡지의 후기에 창간에 관한 아무런 언급도 없는데, 잡지 내용을 소개하는 간략한 몇 구절 끝에‘이십대 청년들의 일원적인 열정을 사주기 바란다.’라고 한 대목이 눈에 띈다. 발행인 이용우는 창간호에 소설 「외투」를 발표하고 있으니 아마도 동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에 틀림없어 보이는데, 그의 행적은 달리 더 확인할 길이 없다. 창간호에는 이용우의 「외투」 외에도 신백수(申百秀)의 「무대장치」와 최인준(崔仁俊)의 「이뿐이의 서름」이라는 소설이 실려 있다. 그리고 주영섭의 「바˙노바」와 정병호(鄭炳鎬)의 「의욕」이라는 시도 읽을 수 있다. 이시우(李時雨)의 평론 「비판의 심리」와 한태천(韓泰泉)의 희곡 「산월(山月)이」도 있다. 시와 소설, 희곡과 평론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표지의 장정은 정현웅(鄭玄雄)이 맡았다. 백 페이지에 미치지 못하는 이 작은 잡지의 집필진은 당시 일본 동경에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이 대부분이다. 특히 1934년 가을에 창간호를 내었던 동인지《삼사문학 (三四文學)》의 신백수, 이시우, 정현웅 등이 모두 《탐구》의 창간에 참여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 잡지는 1936년 7월 제2호가 전체 32면의 초라한 모습으로 간행된 후 폐간되었는데, 창간호에 참여했던 인물들이 대부분 필진에서 빠졌다.

주영섭의 시 「바˙노바」를 원문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불 꺼진 람프와 싸모왈-ㄹ

競馬場本柵 같은 교자.

 

     실겅우에몽켜섯는 술병 – 世界選手들

마음에맞는 술병을골라

「챤봉」을마시고

베레- 氏

루바-슈카 君

마르세에유를부르고

아리랑을노래하자.

 

     재주꾼인 마스터가

와인그라-스에비라미트를쌋는다

갖들어온「체리꼬」가

헛드리는아브상에 파-란불이붓는다

샴팡병과나무걸상

배-커스와 비-너스의肖像,

獨逸말하는 大學生이여

원카마시는 詩人이여

잠자쿠잇는 「고루뎅」바지여

제각기色다른술을붓고

다가치 祝杯를들자!

 

     낡은성냥갑을버려라,

한 대남은담배를피여물고

세시넘은 노-바를나서자.

 

이 시를 새삼스럽게 다시 넘겨보는 이유는 1930년대 전환기에 접어들게 된 한국문단의 새로운 경향과 이 시의 감각이 무관하지 않다는 판단 때문이다. 당시 동경 유학생들의 내면풍경이 특이한 문제성을 띈 채 이 시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은 주목해야할 부분이다. (권영민)

한국 근대문학 연표 – 1910년

1910年

 

주요사항 

7.30 이해조 신소설 <자유종> 발간.

8.26 경무총감부, 잡지 <소년>을 정간시킴.

8.29 한일합병에 관한 조칙 및 조약문 공포. 대한제국 국호 폐지되고 조선으로 개칭 (한일합방)

8.31 <대한매일신보>는 <매일신보>로 개제하여 조선총독부 기관지로 존속.

9.14 <황성신문> 폐간.

10.29 최남선, 조선광문회 설립을 계획, 간행물 예약금 모집허가를 경무총감부에 청원,

12.초 조선광문회 발족.

 

 

작품목록

소설

이장자 뒤장이 주작  서북학회월보 19  10.1 무도생  단편소설 화세계  대한민보  10.1.1 빙허자  신소설 소금강  대한민보  10.1.5-3.6 무서명 모로는 것이 소경 경향신문 10.1.7-2.25 가인  쿠루이우프비유담  소년 10.2 고주 어린 희생  소년 14-17 10.2-5 수문생  신소설 박정화  대한민보  10.3.10-5.31 무서명 묘한 계교 경향신문 10.3.4-3.18 무서명  동국에 뎨일영걸 최도통젼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10.3.6-5.26 고주 무정 대한흥학보 11-12 10.3-4 금협산인 동국거걸 최도통  대한매일신보 10.4.12-5.27 흠흠자  신소설 금수재판  대한민보  10.6.5-8.18 고주 헌신자 소년 20  10.8 봉황산인  단편소설 모란봉  천도교회월보  10.8 무서명  옥랑젼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10.8.16-8.28 대구생  신소설 경중미인  대한민보  10.8.27 봉항산인 해당화하몽천옹 천도교회월보 2 10.9 선취자 화세계 매일신보 10.10.12-11.1.17 무서명 참 유정한군 경향신문 10.10.28-11.11 봉황산인  단편소설 가련홍  천도교회월보  10.11 무서명 악한 셔모 경향신문 10.11.18-25 톨스토이원저  너의 니웃  소년 10.12 톨스토이원저  한사람이 얼마나 땅이 잇서야하나(패셔생 번역) 소년 10.12 무서명 십구형제 도적회지 경향신문 10.12.2-16 무서명 몽즁형 경향신문 10.12.23 무서명 게와 원숭이 경향신문 10.12.30

 

소설집

박영진 요지경 수문서관 10.12.10 이해조 만월대 동양서원 10.12 이해조 자유종 광학서포 10.7.30 이해조 홍도화(하) 유일서관 10.5.10

 

평론

이광수  문학의 가치  대한흥학회보 11 10.3 최남선  소년의 기왕과 및 장래 소년 18 10.6 사설  소설과 희대(戱臺)가 풍속에 유관 대한매일신보 10.7.20 이광수  금일 아한(我韓) 용문(用文)에 대하야 대한매일신보 10.7.23-27

《삼사문학》 동인의 실체

《삼사문학》은 1934년 9월 서울에서 그 창간호가 발간된다. 이상의 시 「오감도」의 신문 연재가 중단 된 후 그 특이한 글쓰기 자체가 문단의 화제로 떠오르던 시기에 이 작은 잡지가 초현실주의의 기치를 내걸고 문단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던 신백수를 중심으로 이시우, 정현웅, 조풍연(趙豊衍), 한상직(韓相稷) 등의 문학지망생들이 한데 어울려서 등사판으로 만들어낸 것이 《삼사문학》의 창간호다. 이 동인지는 그 해 12월 제2집을 활판 인쇄본으로 간행함으로써 자신들의 존재를 어느 정도 분명히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런데《삼사문학》의 동인들은 1935년 무렵에 대부분 일본 유학길에 오르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은 동경에 머물러 있으면서도 동인지 제3집(1935. 3)과 제4집(1935. 8)을 계속 발간하였고, 주영섭을 비롯하여 정병호, 황순원, 최영해, 홍이섭, 김진섭, 한태천 등을 동인의 명단에 올릴 수 있게 된다. 그리고 1936년 제5집(1936. 10)에 이상의 시 「I WED A TOY BRIDE」를 실으면서 기성 문단과도 교섭하게 된다. 종간호가 된 《삼사문학》(1937. 4) 제6호에도 이상의 수필 「19世紀式」이 실렸다.

《삼사문학》의 창간 당시 이를 주도했던 신백수(1915-1945)는 서울 태생으로 중앙고보에서 수학한 후 연희전문학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있던 학생이었다. 그는 《삼사문학》의 창간호 권두에 이른바 「3 4의 선언」을 통해 ‘새로운 예술로의 힘찬 추구’를 내세운다. 신백수는 이 글에서 ‘개개의 예술적 창조 행위의 방법 통일을 말하지 않는다.’는 개방적인 자유주의적 태도를 천명함으로써 비슷한 또래의 문학청년들이 지니는 예술적 욕망을 동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내는 데에 성공한다. 신백수는 창간호부터 주로 시 창작에 주력하여 창간호에 「얼빠진」, 「무게 없는 갈쿠리를 차고」 등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제2집과 제3집에도 시 「떠도는」, 「어느 혀의 재간」, 「12월의 종기(腫氣)」 등을 내놓았다. 그는 스스로 초현실주의자를 자체했지만 실제로 그가 발표한 시들은 서정시의 전통적인 영역에서 크게 벗어난 것은 아니다. 신백수의 문학 활동은 그가 1935년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대학(明治大學)에 입학하면서 일본 동경으로 그 무대가 넓어졌다.

신백수는 동인지《삼사문학》의 발간에만 주력한 것이 아니라 동경 유학생들과 함께 새로운 동인지 《창작(創作)》과 《탐구(探求)》를 간행하는 데에도 앞장선다. 1935년 11월 동경에서 발간한 《창작》은 동경에 있는 문학청년을 중심으로 동경 현지에서 엮은 문학 동인지이다. 이 동인지에는 신백수를 비롯하여 주영섭, 정병호, 한천, 장영기 등의 시와 함께 한적선의 희곡과 김일영의 수필이 수록되어 있다. 동인지 《창작》은 제2집이 1936년 4월에 동경에서 나왔는데, 여기에 황순원이 동인으로 가담하였으며, 제3집(1937. 7)을 서울에서 발간한 후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한다. 신백수는 이 새로운 동인지에 시 「용명기(溶明期)에 해안(海岸)이 잇든 전설(傳說)」(제1집)을 비롯하여 소설 「송이(松茸)」 등을 발표하고 있다. 그리고 《탐구》의 발간에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삼사문학》 동인의 문필활동의 외연을 확장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1930년대 중반 《삼사문학》을 중심으로 잇달아 등장한 《탐구》와 《창작》등 새로운 문학 동인지가 당대 문단에 어떤 영향을 남길 수 있었는지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 동인 중의 한 사람이었던 이시우의 경우 다음과 같이 《삼사문학》 시대를 회고하고 있다.

 

《삼사문학》은 침체한 조선문단에 던지는 하나의 돌이었고 무기력한 문단인에 대한 경고와도 같았다. 그즈음 「구인회」라는 소위 중견 문단인 단체가 있었는데 그 중에 김기림 씨가 꾸준한 성원을 보내었고 죽은 이상이 홀로 우리들과 함께 호흡을 맞췄을 뿐 다른 대부분의 문단인들은 《삼사문학》을 이해하기는커녕 《삼사문학》의 존재조차 무시하였다.(중략) 1937년 1월 말에 제6집을 내이고 《삼사문학》이 폐간된 후 (중략)《삼사문학》이 어찌하여 폐간하였던가는 지금 아무리 생각하여도 확실치가 않다. 그냥 흐지부지 한 권도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 계속할 흥도 일지 않았고 우리들은 또 떠들만큼 떠들었기 때문에 제풀에 지쳐 넘어져서 몇몇 아류들을 낳고는 누구의 빌표조차 기다리지 않고 그냥 흐지부지 폐간하여 버렸다. 그 누구의 말마따나 젊은 시절의 한낱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도 모르겠으나 《삼사문학》이 한때 침체한 조선문단에 한 개 돌을 던져 창을 부수고 청신한 바람을 들이었다는 것과 그 효용을 더 실제적으로 말하면 조선이 장차 외국의 현대문학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여 놓았다는 점만은 누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거라. -이시우, ‘「역(曆)」의 내력’ (상아탑, 제7호, 1946. 6).

 

앞의 회고에서 이시우는 《삼사문학》이 침체한 조선문단에 한 개 돌을 던져 창을 부수고 청신한 바람을 들이었다고 평가하면서 당시 문단의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던 「구인회」 의 김기림, 이상 등이 자신들의 문학을 각별히 성원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특히 ‘장차 외국의 현대문학을 받아들일 준비’를 위해 《삼사문학》의 문단적 의의를 인정할 수 있다고 단언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이 바로 이시우가 지목하고 있는 「구인회」의 김기림, 이상 등에 대한 언급이다. 그 이유는 「구인회」 특히 김기림과 이상의 문학활동과 그 영향권 안에서 《삼사문학》의 문단적 위치를 가늠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인지《삼사문학》을 중심으로 《창작》과 《탐구》등을 한데 놓고 보면, 《삼사문학》 동인의 주축을 이루었던 것은 신백수, 이시우, 주영섭, 한태천 등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은 1930년대 한국문학사 연구에서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나 있지만, 이들이야말로 1934년 이상의 유명한 시 「오감도」에 등장했던 ‘무서운 아해들’이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들은 스스로 ‘34’라고 명명하면서 자신들이 문단적 위치를 규정했으며, 이상의 시 「오감도」 속의 ‘무서운 아해들’이 되어 이상의 문학적 행보를 따르면서 그 활동 영역을 넓히고자 힘썼다. 그렇지만 이상이 철저하게 당대 문단에서 외면당한 것처럼, 이들의 새로운 문학적 시도 역시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새로운 문학정신은 일본 식민지 지배세력이 군국주의로 치닫던 1930년대 중반 이후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문제성을 지닌다. 특히 이상 문학과의 연관성을 놓고 본다면 그 전위적 실험성의 의미를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 이상이 동경에서 만나 것이 《삼사문학》의 동인들이고 이들의 문학적 열정과 새로움의 세계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면 마땅히《삼사문학》의 문학적 정서를 다시 짚어 볼 필요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나는 《삼사문학》 제6호를 확인하고 싶다.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을 법한데 아직 찾아보지 못했다. (권영민)

간판시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친구가 왔다. 딸아이의 결혼식을 서울에서 올렸다.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점심 때 만나 냉면이라도 한 그릇 같이 하잔다. 아마도 시집보낸 딸 때문에 그 친구 마음이 좀 허전해졌는지 모르겠다.

둘은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 만났다. 냉면 이야기를 했던 친구는 빈대떡이 먹고 싶단다. 나는 친구를 끌고 음식점들이 늘어선 골목으로 접어든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골목에 가득하다.

‘저게 뭐지?’

그 친구가 가리킨 집은 커다랗게 ‘XX 수산 센터’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푸른 색 바탕의 간판에 파도까지 넘실대고 고기가 튀어 오르는 모양까지 그려져 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 친구가 다시 묻는다.

‘생선 가게?’

나는 생선을 팔기는 하지만 가게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생선으로 요리를 해서 파는 음식점이라고 설명한다. 그 친구가 그제사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웃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참 이상도 하다. 음식점에 왜 저런 간판을 달지? 수산 센터라니. 생선가게라면 몰라도. 서울의 거리에 간판이 너무 크고 많아. 레스토랑의 간판을 꼭 저렇게 크게 써붙여야 하나?’

나는 이 친구의 시비에 대해 할 말이 없다. 그저 웃으면서 들어줄 수밖에.

둘이는 ‘원조 빈대떡’ 집으로 들어선다. 허름한 탁자와 의자가 원조라는 이름에 어울린다. 빈대떡에 보쌈 한 접시를 더하고 소주도 한 병을 시킨다. 그리고 창 너머 골목길 풍경을 내다본다.

길 건너편 집에는 ‘제주 흑돼지’라고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의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다. ‘제주 흑돼지’ 옆에는 그보다 더 크고 뻘겋게 간판을 그려놓은 ‘강원도 멧돼지’ 집이다. 기왕 이런 식으로 시작된 돼지들의 싸움터니까 ‘원조 족발’이 나오고, ‘왕족발’이 옆에서 또 트집을 걸어야 한다. ‘멧돼지 통구이’ 옆에는 ‘흑돼지 삼겹살’이 나와야 제격이다. 그리고 ‘돼지갈비 고추장구이’도 거기 끼어든다. 참으로 웃기는 간판들의 행렬이다.

‘간판들이 도무지 너무 커. 아무 실속도 없는 싸움터야.’

친구는 음식점 간판들에 여전히 시비를 건다. 그러면서도 ‘원조’를 내세운 빈대떡의 맛에는 만족이다.

친구의 말대로 서울 거리는 간판들의 전쟁터다. 이 싸움에는 양보의 미덕도 없고 작전의 규칙도 없다. 그저 크기로만 승부한다. 남보다 더 커야만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옆집 가게의 간판이 조금 커 보인다 싶으면 어떻게든 그보다 더 크게 간판을 내달아야 한다. 도시 거리의 미관이니 뭐니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내 집 간판만 잘 보이면 그만이다.

이 무지막지한 간판의 싸움에서 크기로 승부가 나지 않을 듯싶으면, 잽싸게 갯수를 늘인다. 하나만으로 부족해 보이면 둘을 달고, 둘로도 성미에 차지 않으니까 기다랗게 입간판을 또 내세운다. 이렇게 되니 건물의 외벽은 모두 간판으로 가려진다. 창문까지도 온갖 글씨로 도배질을 한다. 그러나 이 허망하기 그지없는 물량주의의 싸움에 실속을 챙기는 것은 간판장이들뿐이다. 더 크게 더 많이! 를 외치며.

서울의 어느 구역인가 아름다운 거리 만들기를 추진하면서 작고 이쁜 이름의 간판 달기 운동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관청에서 돈까지 대준단다. 그러나 얼마나 새롭게 이 험난한 싸움터를 평정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쯤 서울의 거리 전체가 요란스런 간판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다. 아직은 큰 것이 더 잘 보이고 많은 것이 더 나아 보이지 않는가? 자기 얼굴보다 더 크고 많은 명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듯이, 간판이 날로 더 커지고 더 많아지지 않겠는가? (권영민)

 

소설가 김지원씨가 마지막 남긴 장편 시극 「국경의 밤」

재미 소설가 김지원씨가 세상을 떠났다. 김지원씨는 오랜 동안 미국에서 창작 활동을 했다. 아버지인 시인 김동환과 어머니인 소설가 최정희 사이에서 태어났고, 동생인 김채원(소설가)과 함께 문학의 길을 걸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1997년 소설 <사랑의 예감>으로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지원씨가 세상을 떠나기 전에 집필했던 마지막 작품이 장편 시극 「국경의 밤」이다. 이 작품은 두 해 전에 김지원씨가 암 투병을 하면서 펜으로 썼던 것으로 문학사상에 소개된 바 있다. 아버지 김동환이 1925년 발표한 서사적 장시 「국경의 밤」을 시극의 형태로 고쳐쓴 것이다.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납북된 후 그 종적을 알 수 없는 아버지 김동환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 이 작품을 만들어내게 된 동기라고 할 수 있다.

시극 「국경의 밤」은 모두 4막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이야기는 원작인 「국경의 밤」의 서사적 전개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극중의 이야기는 한반도와 만주가 접해 있는 두만강변의 작은 마을을 시적 배경으로 하여 여주인공의 사랑과 그 갈등이 주조를 이룬다. 그러나 이 사랑 이야기의 배경에는 북국의 겨울밤이 주는 암울한 분위기가 강조됨으로써 각박한 현실을 살아가던 당대 민중의 고통과 불안이 잘 암시되고 있다. 김지원씨는 원작의 전편에 흐르던 정서의 진폭을 극적 갈등과 긴장의 상황으로 변화시켜 차원 높은 시극으로 발전시켜 놓는다. 이러한 변화는 여주인공과 그녀를 중심으로 하여 갈등하는 두 남성의 극적 설정을 통해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물론 김지원씨는 여주인공이 두 사내의 중간에서 겪게 되는 삶의 고된 역정을 원작과 마찬가지로 강조한다. 이 시극은 원작의 시적 진술에서 드러나는 어조의 단일성을 등장인물의 극적 대화로 바꿈으로써 변화와 긴장을 살린다. 그리고 극중에 해설자를 등장시켜 극의 전개 양상을 돕는다든지 인물의 대화를 시 작품의 진술 내용에서 그대로 옮겨 온다든지 하여 시적 의미를 그대로 살려낸다. 특히 전체 3부로 나누어져 있던 장시 「국경의 밤」에서 제3부를 3막과 4막으로 구분하여 놓음으로써 극적 장면 연출과 이야기의 전환을 용이하게 만든 것은 주목을 요한다.

김동환의 「국경의 밤」의 전체 내용을 김지원씨의 시극의 구성에 비추어 간단히 소개하기로 한다. 원작 「국경의 밤」은 전체 3부 72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경의 밤」의 제1부(1장~27장)는 추운 겨울 눈 속에서 소금 밀수꾼 남편이 두만강을 건너 간 후, 남편의 안전을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여주인공의 심리적 갈등을 보여준다. 이 같은 시적 정황은 빛과 소리로 구체화된 감각적인 이미지의 결합을 통해 더욱 뚜렷한 시적 효과를 거두고 있다. 그런데 이 여주인공에게 한 사내가 찾아온다. 오랫동안 고향을 떠났던 이 청년의 등장으로 인하여 이 시에서 노래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서사적 구조가 분명하게 제시된다. 김지원씨의 시극 제1막에서 이 장면들이 그대로 재현된다.

제2부(28장~57장)는 회상적 과거가 서사시의 화폭을 장식한다. 여주인공과 그녀의 남편, 그리고 첫사랑이었던 청년 등의 과거 이야기가 회상의 형식을 빌려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여주인공의 신분과 내력이 밝혀진다. 여진족의 후예이면서 재가승(在家僧)의 딸이었던 여주인공이 청년과 만나 서로 사랑하였던 옛 추억도 살아난다. 그리고 두 사람이 서로 헤어져야 했던 가슴 아픈 사연도 펼쳐진다. 이러한 시적 진술을 통해 사랑의 기쁨과 그 아름다움이 이별의 고통으로 바뀌는 과정 자체가 밀도 있게 그려지고 있으며, 정서적 균형도 유지되고 있다. 김지원씨의 시극에서는 제2막에 해당한다. 무대가 과거의 기억 속에서 재구성되고 있으며 극적 갈등이 고조된다.

「국경의 밤」에서 가장 격렬한 정서적 충동이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 바로 제3부(58장~72장)이다. 이 부분에 이르러 긴장은 고조되고 격렬한 사랑의 감정이 시적 정서의 충일 상태로 뒤바뀐다. 여주인공을 찾아온 청년은 그녀에게 사랑의 결합을 호소하지만, 여주인공은 끝내 이 청년의 사랑을 거절한다. 그러나 이 작품이 강을 건넜던 남편이 마적의 총에 희생되어 주검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결말에 이르기 때문에, 비극적이 사랑의 이야기가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열려지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여주인공에게 있어서 남편의 죽음은 인습에 얽혀있던 결혼 생활의 종말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목은 김지원씨의 시극에서 제3막과 제4막으로 구분되고 있다.

원작인 「국경의 밤」은 서사적 화폭을 그려내는 언어 표현의 변화와 활달한 수사적 기교가 뛰어나다. 전체적인 시적 어조를 통제하며 시적 형식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는 리듬 의식도 정서의 기복을 드러내기에 적합하다. 김지원씨는 이러한 요소들이 서사적 장시로서의 양식적 속성을 유지하는 데에 적절하게 기능하고 있다는 점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자신이 구상한 새로운 시극에서 이것들을 재편하면서 시적 어조의 극적 전환에 힘을 기울였다. 김지원씨의 문학을 다시 돌아보기 위해 이 시극이 무대에 올릴 날을 기다려본다. 김지원씨의 명복을 빈다. (2013.2, 권영민)

한국 근대문학 연표 – 1909년

1909年

 

주요사항 

 

2.12 신문관, 십전총서의 첫권으로 <걸리버 유람기> 간행

2.23 출판법 공포 (출판물의 원고 검열 및 배일적인 출판물 압수, 연말까지 5,767권)

3.20 일본유학생의 대한흥학회, <대한흥학보> 창간

9. 이해조 신소설 <원앙도> 간행

12.14 <한성순보> 재정난으로 휴간

    

 

작품목록

소설

공육

민충정공 소전

소년

09.1

스위프트원저

로빈슨무인절도표류기

소년

09.1

무서명

무식하면 그러치

경향신문

09.1.15

무서명

분수에 넘는 일을 말라

경향신문

09.1.22

무서명

이인 사외를 엇어

경향신문

09.1.29

무서명

빈대도 량반은 무서워 한다내

경향신문

09.1.8

무서명

술에 미척고나

경향신문

09.2.12

열재

모란병

제국신문

09.2.13-28

무서명

다람뒤와 호랑이

경향신문

09.2.19

무서명

게우가 죽엇나 살엇나

경향신문

09.2.26-3.12

무서명

죠선은 량반이 됴하

경향신문

09.2.5

이장자

갑을문답

서북학회월보 10

09.3

무서명

곤장맛고 벼슬 떠러졋네

경향신문

09.3.19-3.26

무서명

녀중군자

경향신문

09.4.2-4.9

무서명

금의 환향

경향신문

09.4.30-5.7

무서명

까리발띄

소년

09.4-09.11

북악산인

춘추몽

교남교육회잡지 2

09.5

하우쏘온원저

꽃에 관한 동화

소년

09.5

무서명

용맹한 쟝사 김쟝군

경향신문

09.5.14

무서명

뛰는 즁에 나난 이도 있다

경향신문

09.5.21

무서명

우는 눈물은 죄악을 씻는다

경향신문

09.5.28-6.11

신안자

현미경

대한민보

09.6.15~7.11

무서명

사람은 몬져 그 눈을 볼 것이라

경향신문

09.6.18

도화동은

화수(花愁)

대한민보

09.6.2-6.3

톨스토이원저

사랑의 승전

소년

09.7

백학산인

소설 만인산

대한민보

09.7.13-8.18

무서명

디구셩미래몽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09.7.15-8.10

무서명

젹은 나라에는 이인이나 명쟝이 업다

경향신문

09.7.16

무서명

휘황찬란한 일

경향신문

09.7.2-7.9

무서명

의긔 남자

경향신문

09.7.30-8.6

무서명

국치전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09.7.9-08-6.9

톨스토이원저

조손삼대

소년

9.8

무서명

보응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09.8.11-9.7

무서명

맹랑한 말

경향신문

09.8.13

굉소생

풍자소설 병인간친회록

대한민보

09.8.19-10.12

무서명

규중 호걸

경향신문

09.8.20-9.3

무서명

미국독립사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09.9.11-10.3.5

무서명

샹쾌한 일

경향신문

09.9.24

무서명

쟝관의 노름 끝헤 큰 젹선이 생겨

경향신문

094.16-4.23

무서명

절개잇나ᅟᅳᆫ 여인

경향신문

09.10.1-10.15

백치생

절영신화(絶纓新話)

대한민보

09.10.14-11.23

무서명

굴을 차자드러가다 난감한 일을 당함

경향신문

09.10.22-29

스위프트원저

거인국표류기

소년

9.11

톨스토이원저

어룬과 아해

소년

9.11

일우생

오경월(五更月)

대한민보

09.11.25-12.28

무서명

도량이 넓은 처녀

경향신문

09.11.26-12.24

무서명

인력거군수작

서북학회월보 18

9.12

무서명

어리석은 자의 락

경향신문

09.12.31

신채호

최도통전

대한매일신보

09.12.5-10.5.27

 

소설집

이해조

원앙도

중앙서관

09.

최병헌

성산명경

황화서재

09.3.10

현순(玄楯)

포와(布?)유람기

현공렴

09.1.20

 

평론

원석산인

어학의 성질

대한협회회보 11

09.2

신채호

천희당 시화

대한매일신보

09.11.9-12.4

신채호

소설가의 자세

대한매일신보

09.12.2

한국 근대문학 연표 – 1908년

 

1908年

 

주요사항  

1.19 정영택, 이우규, 이재익 등 기호흥학회 설립

7.26 이인직, 박창동 등 연극장 원각사 개설

11. 1 최남선, 최초의 월간종합지 <소년> 창간(1911.12. 폐간)

         (창간호에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발표)

11.11 최초의 신극 이인직의 「은세계」 원각사에서 공연

      

 

작품목록

소설

무서명

어려운 송사를 결안함

경향신문

08.1.10

무서명

법은 멀고 주먹은 갓갑지

경향신문

08.1.17

무서명

재간 만흔 도적놈

경향신문

08.1.24-2.21

소덕옹

매국노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08.10.25-09.7.14

공육

갑동이와 을동이의 상종

소년

8.11

무서명

이솝의 이약

소년

8.11

성낙윤

골계소설

기호흥학회월보5

8.12

열재

쌍옥젹

제국신문

08.12.4-09.2.12

공육

나폴레온대제전

소년

08.12-10.6

육정수

혈의 영(影)

장학월보 2

8.2

이규창

영웅의 혼

장학월보 2

8.2

동농

원앙도

제국신문

08.2.13-08.4.24

무서명

온 텬하에 무억이 뎨일 강하랴

경향신문

08.2.28-3.13

은하생

사제의 언론

태극학보 19

8.3

무서명

군사 련습시에 살인 내력

경향신문

08.3.20-4.24

이승환

몽의 형(刑)

장학월보 4

8.4

열재

구마검

제국신문

08.4.25-7.23

심우섭

몽각(夢覺)

장학월보 5

8.5

무서명

마음을 곳게 가질 일

경향신문

08.5.22

무서명

쟝고통 혈에 산소를 썼다

경향신문

08.5.29

무서명

꿩과 톡기의 깃분 수작

경향신문

08.5.8

무서명

자긔의 덕행을 시험하야 남을 가르침

경향신문

08.6.5-6.12

열재

홍도화

제국신문

08.7.24-9.17

무서명

파선 밀사

경향신문

08.7.3-09.1.8

무서명

우마쟁공

제국신문

08.8.8

열재

만월대

제국신문

08.9.18-12.3

무서명

페타대제

소년

08.9-09.2

금협산인

슈군의 뎨일 거룩한 인물 리슌신젼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08.6.11-10.24

소설집

구연학

설중매

회동서관

08.11.20

김필수

경셰종

광학서포

08.10.30

신채호

을지문덕

광학서포

08.5.30

안국선

금수회의록

황성서적업조합

08.2

유원표

몽견제갈량

광학서포

08.8

육정수

송뢰금(상)

박문서관

08.10.25

이인직

귀의 성(하편)

중앙서관

08.7.25

이인직

은세계(상)

동문사

08.11.20

이인직

치악산(상편)

유일서관

08.9.20

이채우

애국정신

중앙서관

08.1.1

이해조

구마검

대한서림

08.12

이해조

빈상설

광학서포

08.7

이해조

철세계

회동서관

08.11.20

이해조

홍도화(상)

유일서관

08.

평론

여규형

논한문국문(論漢文國文)

대동학교월보 1

08.2

신채호

국한문의 경중(輕重)

대한매일신보

08.3.17-19

정교

한문과 국문의 변별

대동학회월보 4

08.5

이보경

국문과 한문의 과도시대

태극학보 21

08.5

이종일

논국문(論國文)

대한협회회보 2

08.5

이승교

국한문론

서북학회월보 1

08.6

신채호

근금 국문 소설 저자의 주의(注意)

대한매일신보

08.7.8

신채호

문법을 의(宜) 통일

기호흥학보 5

08.12

‘아사미(淺見)문고’의 운명

프랑스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구한말에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 간 조선 시대의 고서 한 권을 들고 왔던 일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당장 프랑스에 있는 그 귀중한 고문서들을 모두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흥분했었다. 그 후 숱한 곡절을 거친 끝에 결국은 ‘영구대여’라는 형식을 빌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 간 의궤를 비롯한 고문서를 모두 되찾아 왔다. 다행한 일이다. 해외로 흘러나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들이 많지만, 정부가 나서서 그것들을 다시 국내로 찾아 들여온 경우는 흔하지 않다. 우리 문화재들이 외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도 이제는 한번 돌아보아야 하고,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들의 실태를 파악하여 그 귀환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해야 한다.

미국 버클리대학에 동양학 귀중 도서 문고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 도서 가운데 「아사미 문고」가 유명하다. 「아사미 문고」는 한국의 희귀한 고서 수천 권을 모아 놓은 것으로, 미국 내의 동양학 관계 문고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 어느 사대부 집안의 사랑방에서 소중하게 보관했어야 할 그 많은 책들이 ‘아사미’라는 일본 사람의 성을 따라 한데 묶여진 사연이 기가 막히다.

아사미 린따로(淺見倫太郞)는 동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일본의 이름난 변호사이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구한말의 격변기부터다. 일본이 강압적으로 을사 조약을 체결한 후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의 외교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는 통감부의 법률 고문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일제 강점 이후에는 총독부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아사미 린따로는 한국에 들어온 후부터 한국의 고문서와 전적에 관심을 두고 이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어떠한 경로로 고서들을 모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것은 헐값으로 사기도 했겠지만, 어떤 것은 반강제적으로 빼앗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권세를 빌기 위해 자기 집의 문건들을 거져 내다준 못난 조선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법률 제도에 관심을 두어 한국의 법제도에 관한 고문서와 전적들을 모아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 고서들을 자료 삼아 그는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1943년에 세상을 떠난 뒤, 이 고문서들은 다시 주인이 바뀌었다. 아사미 린따로의 후손들이 2차대전 직후에 미국인에게 모든 고문서와 전적들을 팔아 넘겼던 것이다. 이 고문서들은 1950년 미국으로 건너 왔고, 버클리 대학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문고의 명칭도 일본인 아사미의 성을 따라 부르게 된 것이다.

「아사미 문고」에는 조선 시대에 간행된 한국의 전통적인 법제도에 관한 서적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경전들의 언해본과 수많은 문집도 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판본도 적지 않다. 고전문학 자료 가운데에는, 조선 시대 영조 때 사도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유명한 <한중록(閑中錄)> 필사본은 그 내용과 필체가 진본에 가깝다. 영조 때의 가객 김수장이 엮은 시조집 <해동 가요(海東歌謠)>의 궁체 필사본은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최선본(最善本)으로 보존되어 있다. 고전소설의 백미로 알려져 있는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한문 목판본이 있는데, 두 작품의 한문본은 아사미 문고본이 가장 대표적인 판본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고서들의 보존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못된다. 한지로 만들어진 우리의 고서들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눕혀 놓아야만 오래 보존할 수 있다. 아사미문고의 모든 책들은 낙질을 방지하기 위해 서투(書套)를 만들어 싸두고 있지만, 철제 책장에 꽂아 세워놓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서배(書背)가 뒤틀려서 오래 보존하기 어렵다.

아사미 문고의 한국 고문서와 전적들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미국인 학자들이 별로 없다. 이 고서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교수도 찾아보기 어렵다. 아사미 문고를 관리하는 사서들은 어쩌다가 한국에서 찾아온 특별한 손님이 있으면 한 번씩 철장 문을 열어 서고를 보여줄 뿐이다. 일 년 내내 이 문고의 서적을 열람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귀중한 문헌들이 철문 속에 갇혀 세월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한때의 불행한 역사로 인해 지금 엉뚱한 임자의 손에 넘어와 제대로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고서들을 모두 다시 한국으로 옮겨오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원래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고 우리 조상들의 것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권한마저 없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다. 이것이 역사의 탓인가, 우리 자신의 잘못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