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문학 연표 – 1908년

 

1908年

 

주요사항  

1.19 정영택, 이우규, 이재익 등 기호흥학회 설립

7.26 이인직, 박창동 등 연극장 원각사 개설

11. 1 최남선, 최초의 월간종합지 <소년> 창간(1911.12. 폐간)

         (창간호에 최초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 발표)

11.11 최초의 신극 이인직의 「은세계」 원각사에서 공연

      

 

작품목록

소설

무서명

어려운 송사를 결안함

경향신문

08.1.10

무서명

법은 멀고 주먹은 갓갑지

경향신문

08.1.17

무서명

재간 만흔 도적놈

경향신문

08.1.24-2.21

소덕옹

매국노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08.10.25-09.7.14

공육

갑동이와 을동이의 상종

소년

8.11

무서명

이솝의 이약

소년

8.11

성낙윤

골계소설

기호흥학회월보5

8.12

열재

쌍옥젹

제국신문

08.12.4-09.2.12

공육

나폴레온대제전

소년

08.12-10.6

육정수

혈의 영(影)

장학월보 2

8.2

이규창

영웅의 혼

장학월보 2

8.2

동농

원앙도

제국신문

08.2.13-08.4.24

무서명

온 텬하에 무억이 뎨일 강하랴

경향신문

08.2.28-3.13

은하생

사제의 언론

태극학보 19

8.3

무서명

군사 련습시에 살인 내력

경향신문

08.3.20-4.24

이승환

몽의 형(刑)

장학월보 4

8.4

열재

구마검

제국신문

08.4.25-7.23

심우섭

몽각(夢覺)

장학월보 5

8.5

무서명

마음을 곳게 가질 일

경향신문

08.5.22

무서명

쟝고통 혈에 산소를 썼다

경향신문

08.5.29

무서명

꿩과 톡기의 깃분 수작

경향신문

08.5.8

무서명

자긔의 덕행을 시험하야 남을 가르침

경향신문

08.6.5-6.12

열재

홍도화

제국신문

08.7.24-9.17

무서명

파선 밀사

경향신문

08.7.3-09.1.8

무서명

우마쟁공

제국신문

08.8.8

열재

만월대

제국신문

08.9.18-12.3

무서명

페타대제

소년

08.9-09.2

금협산인

슈군의 뎨일 거룩한 인물 리슌신젼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08.6.11-10.24

소설집

구연학

설중매

회동서관

08.11.20

김필수

경셰종

광학서포

08.10.30

신채호

을지문덕

광학서포

08.5.30

안국선

금수회의록

황성서적업조합

08.2

유원표

몽견제갈량

광학서포

08.8

육정수

송뢰금(상)

박문서관

08.10.25

이인직

귀의 성(하편)

중앙서관

08.7.25

이인직

은세계(상)

동문사

08.11.20

이인직

치악산(상편)

유일서관

08.9.20

이채우

애국정신

중앙서관

08.1.1

이해조

구마검

대한서림

08.12

이해조

빈상설

광학서포

08.7

이해조

철세계

회동서관

08.11.20

이해조

홍도화(상)

유일서관

08.

평론

여규형

논한문국문(論漢文國文)

대동학교월보 1

08.2

신채호

국한문의 경중(輕重)

대한매일신보

08.3.17-19

정교

한문과 국문의 변별

대동학회월보 4

08.5

이보경

국문과 한문의 과도시대

태극학보 21

08.5

이종일

논국문(論國文)

대한협회회보 2

08.5

이승교

국한문론

서북학회월보 1

08.6

신채호

근금 국문 소설 저자의 주의(注意)

대한매일신보

08.7.8

신채호

문법을 의(宜) 통일

기호흥학보 5

08.12

‘아사미(淺見)문고’의 운명

프랑스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때, 구한말에 프랑스 군대가 약탈해 간 조선 시대의 고서 한 권을 들고 왔던 일이 있다.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당장 프랑스에 있는 그 귀중한 고문서들을 모두 다시 찾아와야 한다고 흥분했었다. 그 후 숱한 곡절을 거친 끝에 결국은 ‘영구대여’라는 형식을 빌어 강화도 외규장각에서 약탈해 간 의궤를 비롯한 고문서를 모두 되찾아 왔다. 다행한 일이다. 해외로 흘러나가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우리 문화재들이 많지만, 정부가 나서서 그것들을 다시 국내로 찾아 들여온 경우는 흔하지 않다. 우리 문화재들이 외국에서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도 이제는 한번 돌아보아야 하고, 해외에 흩어져 있는 우리 문화재들의 실태를 파악하여 그 귀환을 위한 노력을 꾸준히 전개해야 한다.

미국 버클리대학에 동양학 귀중 도서 문고가 설치되어 있다. 그곳에 보관되어 있는 귀중 도서 가운데 「아사미 문고」가 유명하다. 「아사미 문고」는 한국의 희귀한 고서 수천 권을 모아 놓은 것으로, 미국 내의 동양학 관계 문고 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큰 것 중의 하나다. 우리나라 어느 사대부 집안의 사랑방에서 소중하게 보관했어야 할 그 많은 책들이 ‘아사미’라는 일본 사람의 성을 따라 한데 묶여진 사연이 기가 막히다.

아사미 린따로(淺見倫太郞)는 동경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한 일본의 이름난 변호사이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구한말의 격변기부터다. 일본이 강압적으로 을사 조약을 체결한 후 통감부를 설치하고 한국의 외교 군사권을 장악하게 되자, 그는 통감부의 법률 고문으로 한국에 들어왔다. 그리고 일제 강점 이후에는 총독부에서 비슷한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아사미 린따로는 한국에 들어온 후부터 한국의 고문서와 전적에 관심을 두고 이를 수집하기 시작하였다. 그가 어떠한 경로로 고서들을 모을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어떤 것은 헐값으로 사기도 했겠지만, 어떤 것은 반강제적으로 빼앗은 것도 있었을 것이다. 그의 권세를 빌기 위해 자기 집의 문건들을 거져 내다준 못난 조선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른다.

그는 자신의 전공 분야인 법률 제도에 관심을 두어 한국의 법제도에 관한 고문서와 전적들을 모아 모두 일본으로 가져갔다. 이 고서들을 자료 삼아 그는 박사 학위 논문을 쓰기도 하였다. 그런데, 그가 1943년에 세상을 떠난 뒤, 이 고문서들은 다시 주인이 바뀌었다. 아사미 린따로의 후손들이 2차대전 직후에 미국인에게 모든 고문서와 전적들을 팔아 넘겼던 것이다. 이 고문서들은 1950년 미국으로 건너 왔고, 버클리 대학에 보관되었다. 그리고 문고의 명칭도 일본인 아사미의 성을 따라 부르게 된 것이다.

「아사미 문고」에는 조선 시대에 간행된 한국의 전통적인 법제도에 관한 서적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 그리고 경전들의 언해본과 수많은 문집도 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는 판본도 적지 않다. 고전문학 자료 가운데에는, 조선 시대 영조 때 사도세자빈이었던 혜경궁 홍씨의 유명한 <한중록(閑中錄)> 필사본은 그 내용과 필체가 진본에 가깝다. 영조 때의 가객 김수장이 엮은 시조집 <해동 가요(海東歌謠)>의 궁체 필사본은 국내에서는 볼 수 없는 최선본(最善本)으로 보존되어 있다. 고전소설의 백미로 알려져 있는 김만중의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한문 목판본이 있는데, 두 작품의 한문본은 아사미 문고본이 가장 대표적인 판본의 하나로 손꼽힌다.

이 고서들의 보존상태가 그리 좋은 편은 못된다. 한지로 만들어진 우리의 고서들은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눕혀 놓아야만 오래 보존할 수 있다. 아사미문고의 모든 책들은 낙질을 방지하기 위해 서투(書套)를 만들어 싸두고 있지만, 철제 책장에 꽂아 세워놓고 있다. 이렇게 되면 서배(書背)가 뒤틀려서 오래 보존하기 어렵다.

아사미 문고의 한국 고문서와 전적들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는 미국인 학자들이 별로 없다. 이 고서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는 교수도 찾아보기 어렵다. 아사미 문고를 관리하는 사서들은 어쩌다가 한국에서 찾아온 특별한 손님이 있으면 한 번씩 철장 문을 열어 서고를 보여줄 뿐이다. 일 년 내내 이 문고의 서적을 열람하는 사람이 별로 없기 때문에, 귀중한 문헌들이 철문 속에 갇혀 세월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한때의 불행한 역사로 인해 지금 엉뚱한 임자의 손에 넘어와 제대로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 고서들을 모두 다시 한국으로 옮겨오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원래 우리 조상들이 만들었고 우리 조상들의 것이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그것들을 마음대로 볼 수 있는 권한마저 없다.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라 아니할 수 없다. 우리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생긴 일이기는 하지만, 생각하면 분통이 터지고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다. 이것이 역사의 탓인가, 우리 자신의 잘못인가?

 

문학의 정신과 이념의 잣대

1930년대의 시인 김기림의 시 가운데 <나비와 바다>라는 작품이 있다. 이 작품은 매우 특이한 시적 정서를 내포한다. 감상성이라고 불리던 정서적 특성을 거부하고 대상에 대한 지적 인식을 문제삼고자 했던 시인 김기림은 이 시에서 시적 공간으로서의 바다를 독특한 이미지로 형상화하고 있다. 감정의 절제는 이 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이 시의 시적 구조는 이미지의 공간적인 배치를 통하여 그 특징이 드러난다. 이 시에서 시인이 눈앞에 두고 있는 대상은 바다와 밀려오는 파도이다. 이것은 누구나 흔히 발견할 수 있는 평범한 자연 현상이지만, 시인은 이 평범한 시적 대상을 경험적 인식의 세계에서 새로운 시적 이미지로 환치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청무우 밭과 흰나비이다. 청무우 밭 위를 나르는 흰 나비의 형상을 시인은 푸른 바다 위에서 하얗게 부서지며 밀려오는 파도와 연결시키고 있다. 대상의 시적 변용이란 바로 이를 두고 말함이다.

 

아무도 그에게 수심(水深)을 일러준 일이 없기에

흰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

 

청(靑)무우 밭인가 해서 나려갔다가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

 

3월(三月)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초생달이 시리다.

김기림이 펴낸 시집 <<바다와 나비>>(1946)에 수록되어 있는 시 <바다와 나비>는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까지 올랐던 일이 있다. 이 작품을 자세히 보면, 근대시의 고질이었던 감상성을 제거시킨 대신 명징한 이미지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바로 그 이미지의 역동성과 그 시적 변용이 놀라운 감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시를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바로 이 점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이 작품을 교과서에 수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가 교과서용으로 적절한가를 놓고 크게 문제되기도 했다. 검찰 당국이 중고교 국어와 국사 교과서를 검토한 후 이 시를 포함하여 일부 필자의 글이 우리나라의 체제를 간접적으로 비판하거나 학생들에게 가치 혼란을 줄 수 있다며 교과서에서 삭제해 줄 것을 교육부에 요구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대검과 교육부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검찰에서는 이 작품을 대검 산하의 민주이념연구소(그런 연구소에서 무슨 연구를 하는지 알 수 없지만) 자문위원인 전문가들의 검토 결과에 따른 것이라고 밝혔었고, 이 글의 직접적인 내용보다는 글쓴이의 성향이나 글에 숨겨진 의도 등에 대해 중점적으로 판단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신문들이 보도하기도 했다. 해방 직후 좌익문단에 가담하였던 김기림의 문학적 경향이 학생들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가 요즘도 교육 현장에서 논란의 대상 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지만 당시 문학과 예술에 대하여 행해지는 공권력의 검열 행위가 일종의 강압적인 이념적 요구로 비춰졌던 것은 물론이다.

문학 작품의 내용과 가치에 대한 판단은 문학 연구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문학은 문학적인 것에 의해 그 존재 가치를 인정받도록 되어 있다. 앞의 사례에서처럼 검찰에서 교과서의 수록 작품들에 대해 제기하고 있는 문제점들은 문학적인 것의 기준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어 보인다. 이 작품이 학생들에게 가치관의 혼란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게 된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궁금하다. 문학을 고정된 하나의 이념의 잣대로 보면 모든 작품들이 그 기준을 벗어나게 될 것이다. 특정한 이념을 편드는 문학은 벌써 문학이 아니라 선전물이다. 그러므로 문학다운 문학은 어떤 가치 기준으로부터도 자유로워야 하며, 어떤 규범으로부터도 속박되지 않아야 한다.

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와 정신은 법의 정신과 서로 다를 수가 있다. 법은 어떤 무엇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만, 문학은 문학 자체의 의미를 중시한다. 문학이 추구하는 가치의 자율성은 법 정신의 타율성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서양의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법은 의복과 같아야 한다.’ 는 것이다. 법의 본질을 놓고 이처럼 절실하게 비유한 말은 찾아보기 어렵다. 법은 그것이 봉사해야 할 사람들의 몸에 꼭 맞게 만들어져야 한다는 이 주장이야말로 법 정신의 참주제를 꿰뚫고 있는 셈이다. 법이라는 말은 그 글자의 형상이 재미있다. ‘법(法)’이라는 한자의 형상을 보면 ‘물이 흐르다’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물(水)’이라는 말과 ‘가다(去)’라는 말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것이 법이라는 말이다. 물은 만물의 이치를 상징한다. 물이 흘러가는 것을 놓고 법의 본질적인 개념을 생각한 것이라면, 법의 가장 중요한 요건이라는 것이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법이라는 것이 바로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면, 법은 흐르는 물이 제대로 흘러가도록 하는 데에 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법이 너무 완고하여 물이 제대로 흐르지 못하게 물길을 막으면 물은 둑을 타고 넘치기도 하고, 홍수를 이루어 농삿터를 망치기도 한다. 너무 높고 견고하게 물을 막아놓으면, 흐름을 잃은 물이 고인 채 썩는 경우도 있다. 그러므로 법은 물을 흐름을 막는 것 보다 오히려 그 흐름을 제대로 도와주는 것이 중요하다. 막기 위한 법보다 제대로 길을 터주기 위한 법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가장 엄격한 법이야말로 가장 나쁜 해악이라고 말한 서양의 학자가 있다. 법을 제대로 모르는 관리가 볼기로 위세 부린다는 우리네 속담도 귀를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그런데 문학은 법이 요구하는 규범성과는 거리가 멀다. 문학은 언제나 열린 정신을 지향한다. 문학 작품은 유일한 해석이라는 것이 성립되지 않는다. 문학 작품의 의미는 언제나 다양하게 인식되는 것이며, 작품을 보는 이의 입장과 각도와 관심에 따라서 그 의미가 달라진다. 그러므로 문학 작품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다기보다는 그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자기 방식대로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그 의미가 항상 새롭게 부여된다고 할 수 있다. 문학의 의미라는 것이 항상 새롭게 인식되는 것임을 생각한다면, 어떤 문학 작품도 하나의 의미만을 고집하는 것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나의 의미를 고집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문학은 그 의미와 가치를 하나의 잣대나 기준만으로 판별할 수 없다. 그러나 법은 이와 다르다. 법은 언제나 하나의 규범과 기준에 의해 적용된다. 법이 지켜나가야 할 하나의 기준이 무너지면, 법은 그 시행의 공정성을 잃게 된다. 하나의 기준을 고집하는 법의 논리가 다양한 기준을 필요로 하는 문학의 논리와 대응하기는 어렵다. 문학은 법대로 판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문학대로 판별되어야 하는 것이다.

문학은 생각을 한 가지로 묶어 두지 않고,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 속에 열어 둔다. 문학을 공부하는 것도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이다. 문학의 정신이 지향하는 자유로움을 부정하고 특정의 이념적 요구에 의해 그것을 속박하는 것은 문학에 대한 도전이다. 아니 가장 자유로운 인간 정신에 대한 부정이다. 이념의 잣대를 내세워 문학의 정신을 억압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행패일 뿐이다. (권영민)

한국 근대문학 연표 – 1907년

현대문학 연구자나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을 위하여 한국 현대문학 작품을 망라한 연표를 공개합니다. 계속해서 업데이트될 예정이니 공부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907年

 

주요사항

3. 3 재일 동경 대한유학생회, <대한유학생회보> 창간

5.23 <대한매일신보>, 국한문판 외에 순 한글판 신문 발간

7. 박은식 <서사건국지> 발간

7. 8 학부에 국문연구소 설치 (소장 윤치오)

7.18 <대한신문> 창간됨 (경영난에 빠진 <만세보>를 인수, 이완용 내각의 기관지로 출발)

8.24 재일 동경 유학생, <태극학보> 창간

10. 장지연 <신소설 애국부인전> 발간

        

 

작품목록

소설

무서명 백옥(白屋) 신년 만세보 07.1.1. 백악춘사  다정다한  태극학보  07.1-2 무서명 애국정신담 조양보 07.1 백악춘사 다정다한 태극학보  07.1 윤태영 골계소설 야뢰  07.2 백악춘사 춘몽(春夢) 태극학보 8 07.3 무서명 허생전 제국신문 07.3.20-4.19 현채  이순신전  야뢰 07.4 조종관  피득대제전  공수학보  07.4-10 국초 혈의 누(하)  제국신문 07.5.17-6.1 무서명  라란부인전  대한매일신보 국문본  07.5.23-7.6 이해조 고목화 제국신문 07.6.5-10.4 노백린 역  애국정신담  서우 07.6-9 백악춘사 월하의 자백  태극학보 13 07.8 반아 몽조(夢兆) 황성신문 07.8.12-9.17 무서명  크롬웰전  태극학보  07.10 숙매생 한 태극학보 14  07.10 무서명 밋은 나무에 곰이 퓌다 경향신문 07.10.18-11.1 이해조 빈상설(鬢上雪) 제국신문 07.10.5-08.2.12 무서명 쇠가 무거우냐 새 깃이 무거우냐 경향신문 07.11.15 무서명 동전 서푼에 소주가 한 통 경향신문 07.11.22-12.6 무서명 님금의 마음을 용케 돌님 경향신문 07.11.8 무서명 쇼년에 백발 경향신문 07.12.13 무서명 친구 심방하다가 말을 일헜네 경향신문 07.12.20-08.1.3

 

소설집

김병헌 서사건국지 박문서관 07.11.10 박은식 서서건국지(瑞士建國誌) 대한매일신보사 07.7 미상 라란부인전 대한매일신보사 07.8 이인직 귀(鬼)의 성(聲)  광학서포 07.10.3 이인직 혈(血)의 누(淚)  광학서포 07.3.17 장지연 애국부인전 광학서포 07.10.3

 

평론

주시경 국어와 국문의 필요 서우 2 07.1 강전 국문 편리 급(及) 한문 폐해의 설(說) 태극학보 6·7 07.1 박태서 국어 유지론 야전 1 07.2 한흥교 국문과 한문의 관계 대한유학생회보 1 07.3 주시경 필상자국문언(必尙自國文言) 황성신문 07.4.1-6 매심자 국문론 경향신문 07.5.10-17 지석영 대한(大韓) 국문설(國文說) 대한자강회월보 11-13 07.5-7. 박은식 문약지폐(文弱之弊)는 필상기국(必喪其國) 서우 10 07.9

한국 근대문학 연표 – 1906년

현대문학 연구자나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을 위하여 한국 현대문학 작품을 망라한 연표를 공개합니다. 계속해서 업데이트될 예정이니 공부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906年

주요사항 

1. 6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보> 창간.

2.28 <황성신문> 복간

6.17 천도교에서 인쇄시설을 갖추고 <만세보>를 창간 (사장 오세창, 1907.6.30 폐간)

7.31 대한자강회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 창간.

11. 1 소년잡지 <소년한반도> 창간 (통권 6호로 종간)

12. 1 서우학회 기관지 <서우> 창간

          

 

작품목록

소설

일학산인 일념홍(一念紅) 대한일보 06.1.23-2.18 무서명 거부(車夫)오해(誤解) 대한매일신보 06.2.20-3.7 금화산인 용함옥(龍含玉) 대한일보 06.2.23-4.3 무서명 청루의녀전(靑樓義女傳)  대한매일신보 06.2.6-2.18 무서명 시사문답 대한매일신보 06.3.8-4.12 무서명 참마검(斬魔劍) 대한일보 06.4.18-26 무서명 반혼향(返魂香) 대한일보  06.4.27 백운산인 여(女)영웅 대한일보 06.4.5-4.29 무서명 신단공안(神斷公案) 황성신문 06.5.19-12.31 우허자 몽등천문(夢登天門)) 대한매일신보 06.5.27-29 이인직 혈(血)의 누(淚)  만세보 06.7.22-10.10 국  초 소설 단편  만세보 06.7.3 무서명  비스마-ㄱ전  태극학보  06.7-10.5 무서명 쇼설 제국신문 06.9.18 무서명 쇼설 제국신문 06.9.19-21 무서명 쇼설 제국신문 06.9.22-23 이기  무제  대한자강회월보  06.10 박용희  클럼버스전  태극학보  06.10 이인직 귀(鬼)의 성(聲)  만세보  06.10.10-07.5.31 무서명 보응(報應) 소조 제국신문 06.10.17-18 무서명 견마(犬馬)충의(忠義) 제국신문 06.10.19-20 무서명 살신성인(殺身成仁) 제국신문 06.10.22-11.3 무서명 정기급인 제국신문 06.10.9-12 홍필주  무제  대한자강회월보  06.11 이해조 잠상태(岑上苔) 소년한반도1~6  06.11~07.4

 

평론

이능화 국문 일정법(一定法) 의견서(意見書) 황성신문 06.6.1-2 주시경 국문 가정잡지 3 06.8 미상 국문 원류 소년한반도 1 06.11

한국문학과 노벨문학상

해마다 10월이 되면 노벨상 소식이 화제에 오른다. 외신들이 전해오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나라에서는 언제쯤 누가 노벨상을 받게 될지를 묻는 사람도 많이 있다. 나이 사십이 넘어서도 상 받기를 기다린다면 그런 사람은 영원히 어른이 되기 어렵다고 어느 비평가가 말했지만, 노벨상의 권위와 영예는 어디에도 견줄 수가 없다.

일본 작가 오에 겐사부로가 94년도 노벨문학상을 수상했을 때의 일이다. 미국 버클리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가르치고 있던 나에게 그 지역 신문의 기자가 전화를 해왔다. 한국문학 연구자의 입장에서 오에 겐사부로의 노벨상 수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오에 겐사부로의 수상 소식은 사실 내게는 뜻밖이었다.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나 자신은 오에 겐사부로의 문학에 대해 언급할 입장이 못된다. 그러나 미국에서 웬만한 대학가 서점이라면, 어디서든지 영어로 된 일본 문학 관계 서적을 쉽게 구해 볼 수 있다. 일본문학은 이미 세계의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일본문학이 이번에 다시 노벨상의 영예를 안게 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나의 이러한 대답에 그 기자는 한국문학자다운 코멘트라고 응수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대답은 하였지만, 마음이 편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다. 일본의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가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이 60년대 후반이다. 그때 우리 나라에서도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모두가 깨달았다. 그리고 정부까지 나서서 문학 작품의 번역 작업을 지원해왔다. 그렇지만, 그 결과가 무엇인가? 한국문학을 세계의 독자들에게 얼마나 알린 것인가?

일본의 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두 번씩이나 받을 정도로, 일본 문학은 이미 세계 문학의 한복판에 들어서 있다. 미국의 웬만한 서점 문학 코너에 가보면, 일본 문학에 대한 책들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작품을 번역 출간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전문적인 연구 서적도 적지 않다. 외국의 유명 대학에는 일본문학 전문가들이 많이 있고, 일본 문학을 공부하는 외국인들이 수없이 많다. 한국문학은 이러한 일본문학의 수준을 따를 수가 없다. 어느 큰 서점을 가 보아도 한국문학에 대한 책은 찾아볼 수가 없다. 한국문학에 대한 해외의 전문가가 별로 없고, 그들이 한국문학을 연구한 업적이 제대로 책으로 출간된 경우도 없다. 한국문학 작품이 외국어로 번역되어 외국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 일으킨 경우는 거의 없다. 물론 외국의 대학 도서관에는 한국문학 책들을 비치한 곳도 있지만,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아서 구석에 쳐박혀 있다. 한국문학을 제대로 가르치는 곳이 적으니, 이 책들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국문학의 해외 번역 소개 작업이 이처럼 한심한 지경에 놓여 있는데, 한국에 앉아서 노벨문학상 타령을 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욕심이다. 우리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외국인들에게 제대로 한국문학을 가르친 적도 없고, 외국인 번역 전문가를 양성한 적도 없다. 도대체 그런 일에 관심을 기울인 일이 별로 없다. 우리 문학 작품을 제대로 번역 출판하여 해외에 소개하기 시작한 것도 최근의 일이다.

우리의 이러한 사정을 놓고 보면, 노벨문학상을 말하는 것이 터무니없는 일처럼 생각된다. 물론 노벨문학상이 세계 문학의 수준을 따지는 척도는 아니다. 한국문학의 목표가 반드시 노벨문학상을 타는 것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나, 노벨문학상은 한 나라의 문학이 세계문학 속에 얼마나 널리 알려져 있는가를 확인할 수는 근거가 된다. 한국문학이 세계의 모든 문학 독자들을 상대로 하여 그 기반을 확대할 수 있을 때, 노벨문학상의 영예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1952년에 노벨평화상을 받은 슈바이처 박사의 이야기가 재미있다. 슈바이처 박사는 일생을 아프리카 밀림 속에서 원주민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그들에게 인술을 베풀었다. 그가 노벨평화상 수상자가 된 것은 인류를 위한 희생과 봉사의 삶 때문이었다. 노벨평화상을 슈바이처 박사에게 수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불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너무나 당연한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정작 영예의 주인공이 된 슈바이처 박사는 노벨상 소식에 전혀 놀라지도 흥분하지도 않았다. 스웨덴 한림원에서 수상식에 참가해 달라는 통지가 왔을 때, 슈바이처 박사는 병원에서 그의 일을 돕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병원 일이 이렇게 밀려 있는데, 상패 하나를 받으러 스웨덴까지 오라니. 그럴 시간이 어디 있는가?” 이 대목에서 슈바이처 박사가 노벨상의 수상식장에 나갔는지 가지 않았는지를 따질 필요는 없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했던 슈바이처 박사의 인품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가장 관심을 두고 있는 노벨문학상은 첫 수상자가 나온 것이 1901년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노벨문학상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노벨문학상이라는 것이 20세기 세계문학에 있어서 하나의 독특한 문화적 제도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 노벨문학상은 화려한 명성과 함께 최고의 영예를 인정받는 것이지만, 시행되던 첫해부터 그렇게 세계인의 관심을 모으지는 못하였다. 노벨문학상의 이름에 영예가 덧붙여지고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세계의 문학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게 된 것은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아나톨 프랑스, 예이츠, 버나드 쇼오, 베르그송, 토마스 만, 유진 오닐 등이 잇달아 수상자가 되면서 노벨문학상은 세계인들의 관심을 끌었고, 자연스럽게 그 권위와 영예를 인정받게 된 것이다.

노벨문학상은 이 세상에서 상금이 가장 많다. 전 세계의 문학인을 대상으로 노벨문학상의 수상 후보자를 추천받는다. 그러나 수상자 선정 방법이나 과정은 전혀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가장 보편적인 가치 기준을 중시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만하다. 물론 지난 한 세기 동안 서구 제국주의의 가치와 이념과 질서를 노벨문학상을 통해 세계적으로 확산시킨 것이 아니냐고 꼬집는 사람도 있다.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동양인이나 아프리카인은 별로 없다. 동양권에서는 인도의 타고르가 1913년에 수상자가 되었고, 일본의 경우 가와바다 야스나리와 오에 겐자부로가 각각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되었다. 중국의 망명 극작가 까오싱젠(高行健)이 그 영예의 반열에 올랐지만 동양의 문학인이 겨우 네 사람에 불과하다. 이러한 서구 편중주의를 놓고도, 서구인들이 내세우고 있는 가치의 보편주의에 부합되는 세계적인 활동을 보여준 인물이 적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진정으로 노벨상의 영예를 원한다면, 다시 한번 우리는 자신에게 이렇게 물어야 할 것 같다. 우리에게 과연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해온 지도자가 있는가? 우리에게 과연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진지하게 숙고하고 그것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세계 문단에 이름이 알려진 문학가가 있는가? 우리에게 인류 문화의 발전을 위해 획기적인 발명을 이룬 과학자가 있는가? 인류의 안식과 번영에 기여할 수 있는 위대한 발견을 이룬 의학자가 있는가? 인류 사회를 위해 새로운 삶의 가치와 원리를 창조한 학자가 있는가? 우리가 과연 노벨상을 받을 수 있는 어떤 일을 이룬 것이 있는가?

그러면서도 문득 우리 문학이 노벨문학상을 받는 순간을 생각하게 된다. 한국적인 특수성을 인류적인 보편성으로 바꾸는 것도 생각하고, 한국적인 지방성에서 지구적인 세계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찾아보기도 한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묻는다. 우리 문학을 세계의 독자들이 널리 읽을 수 있도록 제대로 번역하여 펼쳐 보인 적인 얼마나 되는가? 우리 문학인들의 피나는 노력의 성과에 힘껏 박수를 보낸 일은 얼마나 되는가? 노벨문학상이 우리 문학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한용운의 일본 시절 한시

한용운의 일본 시절이라는 표제는 그의 행적과 서로 부합되지 않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한용운의 일생이 불교와 관련되어 있는 데다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저항운동이 그의 생애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용운이 일본에 체류했던 것은 일년이 되지 않는 아주 짧은 기간이다. 한국에 대한 일본의 강점이 이루어지기 직전에 결행된 일본행에 대하여 한용운은 다음과 같이 술회한 바 있다.

 

반도 안에 국척하여 있는 것이 어쩐지 사내의 본의가 아닌 듯하여 일본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때는 조선의 새 문명이 일본을 통하여 많이 들어오는 때이니까 비단 불교문화 뿐 아니라 새 시대 기운이 융흥한다 전하는 일본의 자태를 보고 싶던 것이다. 그리하여 마관(馬關)에 내리어 동경에 가서 조동종(曹洞宗)의 통치기관인 종무원을 찾아 그곳 홍진설삼(弘眞雪三)이라는 일본의 고승과 계합이 되었다. 그래서 그분의 호의로 학비 일푼 없는 몸이나 조동종대학(曹洞宗大學)에 입학하여 일어도 배우고 불교도 배웠다. 그럴 때에 조선에서 최린(崔麟), 고원훈(高元勳), 채기두(蔡基斗) 제씨가 유학생으로 동경에 건너왔더라. 그러다가 나는 다시 귀국하여 동래 범어사로 가 있다가 다시 지리산으로 가서 박한영(朴漢永), 전금파(全錦坡)(고인이 되었으나)의 세 사람과 결의까지 하였다. (한용운, 나는 왜 중이 되었나)

 

한용운의 일본 체험은 앞의 인용에서 간단하게 언급되어 있다. 그러나 그가 언제 일본에 건너가 일본에서 어떤 일을 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 없다. 앞의 기록에 의하면 한용운은 일본의 새로운 문물과 일본 불교에 대한 관심 때문에 일본행을 결심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가 찾은 곳이 바로 일본 불교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조동종의 본산이었다는 사실도 앞의 기록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필자는 한용운이 체류한 일본 조동종 대학이 지금은 고마자와대학(駒澤大學)으로 개명되어 있음을 확인하고, 이 대학을 방문하여 한용운에 대한 기록을 조사하였다. 그러나 한용운이 이 대학에 입학하여 학적을 보유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학적 사항에 대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었다. 다행히도 대학 관계자가 고마자와대학 이전의 학교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자료실에서 조동종 대학림 시절의 몇 가지 자료를 보여주었다. 그 가운데 필자의 관심을 끌었던 자료가 바로 조동종 청년 승려들이 주축이 되었던 화융회(和融會)의 기관지《和融誌(화융지)》라는 방대한 잡지였다. 이 잡지는 1898년(명치30년)부터 1914년(대정3년)까지 발간된 것으로서 일본 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를 주도했던 많은 논설을 수록하고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필자는 이 잡지를 조사하다가 한용운이 1908년(명치41년) 5월 9일부터 9월 1일까지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동종(曹洞宗)이 운영하는 조동종 대학림(曹洞宗 大學林 *현재 駒澤大學으로 발전)에서 수학하게 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그가 화융회(和融會)의 기관지 《和融誌(화융지)》에 여러 편의 한시를 발표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한용운에 대한 기록이 《화융지》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08년(명치41년) 6월에 발간된 《화융지》 제12권 6호이다. 이 잡지의 <사조(詞藻)> 난에 한용운의 한시 두 편이 아무 언급 없이 수록되어 있으며, 잡지 말미의 <휘보(彙報)>(527면)에 <우리 동문이 5월 9일 한용운군을 맞이하였다. 한용운군은 한국 강원도 간성군 건봉사(乾鳳寺)의 도제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한용운이 일본에 건너와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화융지》 편집실에 들러서는 필담으로 의사 소통을 한 점, 조동종 동경 출장소에 들러 홍진사(弘津師 * 앞의 한용운의 글에는 홍진 대사의 한자 표기가 다르다)의 소개로 조동종 대학림에 오게 된 연유 등도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한용운이 타국에 와서 느낀 감회를 손수 한시로 쓴 것을 사조란에 게재한다는 것도 밝혀놓고 있다.

한용운은 조동종 대학림에서 체류하는 4개월 동안 매달 《화융지》에 한시 작품을 발표하였다. 한용운의 한시 작품들은 한문 원문이 그대로 잡지에 수록되었으며, 조선 승려 한용운이 투고한 것으로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이 잡지(1908년 10월호, 제12권 10호)의 휘보의 <동인 소식>란에 <한용운군이 9월 1일 귀국하였다. 금년중에 다시 돌아올 것임>이라고 적고 있다. 이러한 기록에 근거할 경우, 한용운 1908년 5월 9일부터 9월1일까지 일본 조동종 대학림에서 체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추가해야 할 사항이 있다. 한용운이 일본에서 귀국한 다음 해에 일본은 한국을 강점하였다. 한국 불교는 이미 일본 통감부가 들어선 뒤 1908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중심이 되어 원종(圓宗) 종무원을 설립하였다. 이회광은 원종 대종정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일본 불교와의 교섭을 주도하였다. 그는 한국불교와 일본 조동종과의 연합을 획책하였고, 합방 직후 조동종과 조약까지 체결하였다. 이같은 이회광의 행태에 반발한 한국의 일부 승려들은 원종의 정통성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임제종(臨濟宗)을 내세워 일본 불교와의 연합을 반대하였다. 이 반대 운동에 앞장 선 승려가 바로 한용운이다. 한용운은 일본으로부터 귀국한 후에 이회광 일파가 주도했던 한국불교와 일본 조동종의 연합을 반대하고 한국불교의 주체적인 변혁과 그 대중화를 선도하게 되는 것이다.

한용운이 《화융지》에 발표한 한시 작품들을 발표 순서에 따라 소개한다. 자료 조사에 도움을 주신 고마자와대학 도서관 참고계의 鈴木英子 선생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독자 여러분께는 《한용운 전집》 제1권의 한시 부분에 이 작품 가운데 일부가 출전이 밝혀지지 않은 상태로 수록되어 있음을 참고하실 것을 권한다.

 

1. 《和融誌, 第12卷 第6號》(1908. 6)

(1) 고향을 그리며(思鄕)

차가운 등불심지 자르지 않아 붉은 불빛 이어지는데

온갖 마음 가라 앉아 혼을 보지 못하겠네.

매화가 꿈길에 들어 학으로 변하더니

옷섶을 잡아 끌며 고향을 얘기해 주네.

寒燈未剔紅連結

百髓低低不見魂

梅花入夢化新鶴

引把衣裳說故園

* 不見魂: 見性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파악함.

 

(2) 산사에서 홀로 새는 밤(山寺獨夜)

이슬 내린 고운 숲엔 달빛이 싸락눈마냥 비추는데

강 너머로 들리는 다듬이 소리, 강 마을 처녀는 처량쿠나.

강 양쪽 푸른 산은 萬古에 변함없어라

매화가 갖 피려하니 스님은 禪定에서 돌아오겠지.

玉林垂露月如霰

隔水砧聲江女寒

兩岸靑山皆萬古

梅花初發定僧還

 

 

2. 《和融誌, 第12卷 第7號》(1908. 7)

(3) 빗속에 홀로 읊조리며(雨中獨唫)

海國이라 비바람 잦아

높은 누대는 오월에도 차갑다.

心懷 많은 이국 만리 나그네

말없이 청산을 마주하노라.

海國多風雨

高樓五月寒

有心萬里客

無語對靑巒

* 原文注: 山田湖南이 말하기를 “시어는 적으나 그 뜻이 유장하여 더욱 가작으로 추천하였다”고 하였다.(山田湖南曰 語短意長 尤推佳作)

 

(4) 봄꿈(春夢)

꿈은 지는 꽃 같고 꿈도 꽃과 같나니

사람은 어떤 호랑나비며 나비는 어떤 사람인고?

나비나 꽃, 꿈 등은 한결같이 마음에 달린 것

봄 신에게 하소연하여 봄날을 붙잡아 달래야지.

夢似落花花似夢

人何胡蝶蝶何人

蝶花人夢同心事

往訴東君留一春

* 人何胡蝶蝶何人: <莊子> 「齊物論」에 나오는 胡蝶夢의 고사를 변형한 것이다. 莊周가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다가 깨어나서는, 자신이 꿈에 호랑나비가 되었는지, 혹은 호랑나비가 꿈을 꿈을 꾸어 자신이 된 것인지를 분간하지 못하였다는 이야기다. 흔히 物我相忘의 경지를 뜻하지만, 여기에서는 일순간의 꿈이나 덧없이 지는 꽃 등이 모두가 마음에 달린 일일 뿐이므로, 호랑나비와 장주의 관계처럼 애써 구분할 것이 없다는 뜻으로 쓰였다.

 

(5) 한가로이 읊다(閑唫)

집 한 칸이 太古와 같아

세상과 더불어 상관치 않는다.

종소리 지난 후에 숲은 고요하고

차 연기 사이로 꽃은 한가롭다.

참선하는 마음은 백옥과 같은데

기이한 꿈길이 청산에 이르는도다.

다시 별세계를 찾아가다가

우연히 새 시를 얻어 돌아오도다.

一堂似太古

與世不相干

幽樹鐘聲後

閒花茶靄間

禪心如白玉

奇夢到靑山

更尋別處去

偶得新詩還

 

(6) 제목 없는 시(失題)

인간만사 勝敗란 빈 바둑판과 같은 것

헛되이 천금을 던져 옛 약속을 지키는구나.

호해의 일탕한 심정일랑 모두다 한 올 터럭일 뿐이요

풍진세상 남은 꿈은 몇 번이나 삼생을 거쳤던고?

푸른 산의 황토는 반쯤이 사람의 뼈요

맑은 물의 부평초는 세간의 인정과 같을레라.

책 읽어도 興亡의 구절을 보지 않나니

말없이 달 밝은 동창에 누워 있노라.

輸嬴萬事落空枰

虛擲千金尋舊盟

湖海蕩情都一髮

風塵餘夢幾三生

靑山黃土半人骨

白水蒼萍共世情

讀書不讀興亡句

無語東窓臥月明

 

3. 《和融誌, 第12卷 第8號》(1908. 8)

(7) 날 개이자 읊다(唫晴)

한줄기 맑은 경쇠소리가 막 불단에 떨어지니

다시금 새 차잎을 넣고 난간에 기대었노라.

파초우가 갖 개이자 살풋 서늘함이 도는데

빈 주렴에 낮 기운이 수정처럼 차갑도다.

淸磬一聲初下壇

更添新茗倚欄干

蕉雨纔晴輕凉動

空簾晝氣水晶寒

 

(8) 생각 많은 밤에 빗소리를 들으며(思夜聽雨)

동경의 팔월 시절, 편지가 드물게 오는데

가을 상념 아스라하여 의지할 곳 없구나.

가랑비 속 외로운 등잔불에 빗소리도 차갑나니

작년에 병져 누웠을 때와 너무도 비슷하구나.

東京八月雁書稀

秋思杳茫無處期

孤燈小雨雨聲冷

太似去年病臥時

 

(9) 홀로 있는 창가에 비바람은 부는데(獨窓風雨)

사천리 이역 땅에서 홀로 앓는 이 가슴

날마다 귀밑머리결에 센 머리 생겨나네.

낮잠을 놀라 깨니 사람은 보이지 않고

비바람이 창에 몰아치다 종소리가 들려오네.

四千里外獨傷情

日日鬢邊白髮生

驚罷晝眠人不見

壓窓風雨又鐘聲

 

4. 《和融誌, 第12卷 第9號》(1908. 9)

(10) 가을 어느날의 새벽(秋曉)

빈 방에 저절로 微明이 생겨나니

은하수 기울어 누대로 들어온다.

가을바람은 옛 꿈결에 불어오고

새벽달은 새로 생긴 근심을 비추도다.

잎 진 나무 사이로 등불 하나 보이고

오래된 연못에는 찬 냇물이 흐른다.

유독 두려운 건, 돌아가지 못한 이 나그네

거울 속에 흰 머리만 가득하게 되는 것.

虛室自生白

星河傾入樓

秋風吹舊夢

曉月照新愁

落木孤燈見

古塘寒水流

偏恐未歸客

鏡中霜滿頭

 

(11) 가을 밤 빗소리를 듣다 느낀 바가 있어(秋夜聽雨有感)

영웅도 배우지 못했고 신선도 배우지 못한 채로

국화를 구경하자던 가을날 맹세마저 헛되이 저버렸도다.

파르스름한 등불 아래 비치는 흰 머리, 감개는 끝없는데

가을 비 가을 바람 속에 어느덧 서른 해.

不學英雄不學仙

寒盟虛負黃花緣

靑燈華髮感無限

秋雨秋風三十年

* 黃花緣: 陶淵明처럼 은거하면서 국화를 기르겠다는 뜻으로 풀이됨.

 

(12) 교외로 나갔다가(郊行)

필마로 쓸쓸히 석양에 지나노라니

강둑에 버들은 막 누렇게 시들었네.

고개 돌려도 고향길은 보이지 않으니

만리이역 가을 바람에 고향을 생각하네.

匹馬蕭蕭渡夕陽

江堤楊柳變新黃

回頭不見關山路

萬里秋風憶故鄕

* 原文注: 山田湖南이 말하기를, “篇篇이 모두 고향 그리는 정을 서술하였으니, 천애의 외로운 나그네라면 정녕코 이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어버이을 떠나 출가를 하였다면 心機一轉해야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山田湖南曰 篇篇皆叙懷鄕之情 天涯孤客固應如此 然已辭親出家 宜心機一轉)

권영민의 그때 그곳<10·끝> : 한용운의 첫 집이자 마지막 집, 서울 성북동 심우장

 

만해 한용운(萬海 韓龍雲·1879∼1944·사진)이 말년을 보낸 서울 성북구 성북동 심우장(尋牛莊)은 작은 암자처럼 고즈넉하다. 심우장에 오르는 좁은 비탈길은 겨우내 쌓였던 눈이 녹아 어지럽고 지저분하다. 성북동에서도 가장 후미진 이 언덕배기 동네는 재개발 지역으로 지정돼 주민들의 심경도 복잡한 듯하다. 담벼락에 온갖 욕설까지 섞인 구호가 덕지덕지 붙었다. 한용운이 살아서 이런 정경을 본다면 얼마나 난감했을까.

한용운은 충남 홍성의 외진 촌락에서 태어났다. 향리의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했던 그는 동학에 가담하면서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고 가난한 백성을 구해야 한다는 큰 뜻을 세웠다. 그러나 동학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몸을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설악산 오세암에 숨어든 것은 나이 스물이 훨씬 넘어서의 일이었으며 이때부터 불가에 입문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점하기 직전 그는 일본에 건너가 새로운 문물을 두루 살피고 돌아왔다. 경술년(1910년) 국치를 당하자 그는 망국의 한을 품고 만주로 떠돌다가 마음을 다잡고 돌아와 침체한 불교의 혁신운동을 내세워 유명한 ‘불교 유신론(維新論)’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의 불교운동은 종교적인 측면에만 국한되지 않고 민족의 독립운동으로 확대되었다. 불교계를 대표하여 33인 중 한 사람으로 3·1운동에 참여한 한용운은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어 3년 가까이 투옥됐고, 옥중에서 ‘조선 독립의 서(書)’를 기초하였다.

심우장 안에는 만해의 초상화와 시집 ‘님의 침묵’을 비롯한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하지만 대부분 복제품이다.

그는 감옥에서 풀려나온 후 백담사로 다시 들어가 거기서 시집 ‘님의 침묵’(1926년)을 내놓았다. 이후 많은 한시(漢詩)와 시조를 발표하면서 불교 개혁의 구상을 실천해 나아갔다. 그는 한국 불교의 근대화를 위해 앞장섰던 승려였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던 저항적인 지식인이었다.

심우장은 한용운이 평생에 가져본 유일한 집이었다. 서울에서 지낸 말년의 삶이 그대로 이 집에 담겨 있다. 백담사를 떠나 서울에 올라와 이곳저곳 절간을 떠돌며 지내고 있던 그가 1933년 유숙원(兪淑元·1898∼1965) 여사와 혼인하자 지인들이 뜻을 모아 이 집을 지어주었다. 그는 승려의 결혼을 지지했다.

한용운은 집이 생기자 심우장이라는 택호를 붙였다. 불도(佛徒)의 한 사람으로 초심(初心), 구도(求道)의 뜻을 표현하기 위해 이 이름을 붙인다는 설명도 하였다. 그리고 그 유명한 ‘십우송(十牛頌)’을 쓰기도 하였다. ‘십우송’ 10편의 시 가운데 첫 수인 ‘심우(尋牛)’는 이렇게 시작된다. ‘원래 못 찾을 리 없긴 없어도/산속에 흰 구름이 이리 낄 줄이야!/다가서는 벼랑이라 발 못 붙인 채/호랑이 용 울음에 몸을 떠느니’

한용운은 심우장에 기거하는 동안 부처의 말씀이 아니라 중생의 언어와 씨름했다. 그는 ‘심우장 산시(散詩)’를 썼고, 장편소설 ‘흑풍’ ‘박명’ ‘후회’ 등을 발표했다. 그리고 잡지 ‘불교’를 속간해 ‘신불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내면서 많은 불교 관련 논설을 직접 썼다. 그는 일제가 강요했던 창씨개명운동을 거부하였고, 이광수 등이 조선인 학병 출정을 권유하는 연설을 하고 다닐 때 그에 반대하는 의견을 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심우장은 늘 일본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1944년 그는 한평생을 바쳐 투쟁하며 열망했던 조국의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하고 이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용운의 위대함은 그의 투철한 삶과 의지를 통해 확인되는 것이지만 특히 그의 글쓰기가 이를 입증한다. 투철한 역사의식도 글쓰기를 통해 구현되었고 깊은 정서도, 높은 이상도 글을 통해 구체화하였다. 특히 오랫동안 한학 수업을 받았을 뿐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 통한 신학문 접근이 전혀 불가능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시집 ‘님의 침묵’에 수록된 한용운의 시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13일 찾은 심우장은 찾는 이 없이 고즈넉했다. 마당 앞에 수령 90년이 넘은 커다란 소나무가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다. 심우장 본채는 작은 기와집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이 일대가 재개발되어 성북동 언덕보다 더 높은 아파트로 둘러싸이면 어쩌나 걱정이다. 저 큰 소나무와 어울리는 ‘만해공원’이라도 들어선다면 어떨까. 돌아 내려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2013.3.18,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심훈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들

심훈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와 여러 편의 소설 원고들을 사진을 통해 확인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심재호(심훈의 3남) 선생의 호의로 그 사진 자료들을 받았다.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는 1932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검열로 인하여 빛을 보지 못한 채 숨겨졌었다. 그리고 심훈 선생이 작고(1936)한 후 광복을 맞으면서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친필 원고들은 지난 2000년 <심훈문학전집 1 그날이 오면>이 출간된 후 그 후속작업으로 계획했던 작품 원고의 영인본 출판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지금 이 원고들은 모두 심재호 선생이 미국의 자택에 보관하고 있다.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를 보면, 누렇게 변색된 얇은 표지에 《심훈시가집(沈熏詩歌集)》 제1집이라는 제목이 선명하다. 아마도 이 시집이 식민지 시대에 계획했던 대로 발간되었다면, 그 제목은 《심훈시가집》이 되었을 것이다. ‘1919-1932’라는 글자는 수록 작품들이 쓰여진 시기를 말해준다. ‘경성 세광사 인행’이라는 표식으로 보아 이 원고를 세광사에서 발행할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시집은 계획대로 발간되지 못했다. 단아하게 써내려간 펜글씨의 제목 바로 옆에 ‘治安妨害(치안방해)’ ‘一部分削除アリ(일부분삭제함)’이라는 붉은 글씨의 도장이 무섭게 찍혔다. 그리고 그 밑으로 삭제된 곳에 복자(伏字)나 ‘ㅇ’ 자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삭제된 곳을 빈칸으로 남겨두어서도 안 되며, 삭제된 곳에 삭제 내용을 표시해서도 안 된다는 주의사항이 일본어로 붉게 표시되어 있다. 일본 경찰은 이 시집의 원고에 숱한 붉은 줄을 그어놓음으로써 아예 그 발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는 모두 전체 19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의 순서를 따라가면 서시(序詩)로 수록된 「밤」에 이어 모든 수록 작품이 <봄의 서곡> 14편, <통곡 속에서> 7편, <짝 잃은 기러기> 13편, <태양의 임종(臨終)> 8편, <거국편(去國篇)> 7편, <항주유기(杭州遊記)> 14편 등 전체 6부로 나뉜다. 그리고 총 64편의 끝에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이 붙어 있다. 이 마지막 글은 1919년 3.1운동 당시 심훈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을 때 적었던 것이다. 단순한 서간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서간체 산문시로 읽을 수 있다. 이 원고의 첫머리에 ‘나는 쓰기를 위해 시를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머리 말씀’이 가슴을 친다. 뒤로 이어지는 글귀를 옮겨보면 이렇다. ‘삼십이면 선(立)다는데 나는 배밀이도 하지 못합니다. 부질없는 번뇌로 마음의 방황으로 머리 둘 곳을 모르다가 고개를 쳐드니 어느덧 내 몸이 사십의 마루터기 위에 섰습니다. 걸어온 길바닥에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나이만 들었으니 하염없게 생명이 좀 썰린 생각을 할 때마다 몸서리를 치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나는 이 시집의 원고자료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그 유명한 시 「그날이 오면」을 찾아보았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시학교수였던 바우라(C. M. Bowra)는 《시와 정치》(1966)에서 시인의 개인적 열정과 그 단순성이 얼마나 커다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시 「그날이 오면」을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바우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시인은 독일 시인처럼 포악한 현실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일지라도 감격적인 미래가 일깨우는 격렬하고도 숭고한 그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우라 교수는 이 시에서 그려낸 감격의 장면을 놓고 사람과 자연이 한 덩어리가 되어 환희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이것은 서구의 저항시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경이로운 감동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문학작품이 서구인들에게 이렇게 수준 높은 안목을 통해 소개된 적은 없다.

시 「그날이 오면」은 전체 원고에서 제1부 <봄의 서곡> 가운데 여덟 번째 작품(원고 32면)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원문이 매우 흥미롭다. 이 작품은 대부분의 다른 시들이 모두 원고지에 펜글씨로 적혀 있는 데에 반하여 이미 인쇄된 책의 한 페이지가 그대로 오려 붙여져 있다. 이 시가 어떤 잡지에 이미 발표되었던 적이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시 「그날이 오면」이 일제 식민지시대 잡지에 발표 수록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 심훈 선생이 시집 발간을 시도하다가 일본 경찰의 검열로 발간이 불가능해지자 원고를 보관했고, 선생의 사후에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 왔기 때문이다. 인쇄된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단장(斷腸) 2수(首) -구고(舊稿) 중(中)에서-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이러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전(前)에 와주기만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저 산산(散散) 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길을 울며 뛰며 뒹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븜에 가슴이 미여질듯하거든
드는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소리를 한번이라도 듯기만하면
그자리에 꺽구러저도 원(願)이 없겟소이다.

 

앞의 인용대로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원제가 「斷腸二首」였다. 심훈 선생은 시집의 출간을 계획하면서 이 제목을 ‘그날이 오면’이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舊稿中에서’라는 부제는 아예 빼어버렸다. 작품의 본문 가운데에는 제2연의 마지막 행 종결구인 ‘願이 없겟소이다’를 ‘눈을 감겟소이다’로 바꾸었다. 이런 식의 부분 개작을 통해 시 「그날이 오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시의 제목의 교체와 마지막 한 구절의 변화를 통해 이 시는 ‘그날’을 맞이하는 순간의 기쁨이라면 죽음과도 바꿀 수 있음을 처절하게 노래한다. 하지만 이 시는 그 전문이 검열에 의해 모두 붉은 줄로 지워지고 <삭제(削除)> 당한다. 이미 잡지에 발표된 적이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은 이 작품이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검열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를 이렇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

 

시 「그날이 오면」의 원문이었던 「단장(斷腸) 2수(二首)」는 언제 어디에 발표한 것일까? 이 작품의 집필시기(또는 발표시기)를 말해주는 작은 단서는 앞의 잡지면 위에 희미하게 연필로 표시되어 있는 ‘1930. 3. 1’이라는 글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를 발표 수록한 것이 어떤 잡지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1930년 3월 1일 이후부터 이 시집 발간을 계획했던 1932년 9월(‘머리 말씀’의 말미에 표기된 날짜) 사이에 발행된 어떤 잡지였을 것이다. 지난 일년 가까이 틈나는 대로 나는 이 시기의 잡지를 뒤졌는데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 잡지 가운데 제대로 보관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흩어진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심훈 선생의 친필 원고들을 소중히 보관해 오신 미국의 심재호 선생은 이 자료들을 모두 국내로 들여와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계시다. 심훈 선생의 <필경사>가 있는 충남 당진에 자료관 또는 기념관을 제대로 짓고 거기에 보존하는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 심재호 선생이 내게 알려온 소장 자료 목록 가운데에는 장편소설 「상록수」, 「직녀성」, 「영원의 미소」 등의 친필원고와 단편 「황공의 최후」의 친필 원고가 있다. 그리고 소설 「상록수」 영화각본과 영화소설 「탈춤」의 각본도 보관되어 있다. 심훈 선생이 직접 각색, 감독, 촬영하고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촬영 원본도 있고, 선생의 절필 「오오 조선의 남아여」가 붓끝에 살아남아 있다.

나는 이 자료들이야말로 한국 현대문학 최대의 보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본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어떤 작가나 시인의 경우에도 이렇게 많은 친필 원고를 고스란히 보존해온 경우가 없다. 이 자료들을 잘 지켜오신 심재호 선생께 머리를 숙여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한국문학을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이런 소중한 자료들을 떳떳하게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널리 보여주고 아픈 상처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 책임이 막중하다. 올해는 100년 전 일본 강점을 되돌아보는 여러 가지 행사가 열렸는 터라서 이 자료들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다. 심훈 선생이 살아 생전에 글을 쓰셨던 <필경사>의 관할 지역인 충남 당진군의 전(前) 군수가 비리 혐의로 수사대상이 되자 위조 여권을 들고 국외로 도피하려다가 붙잡혔다는 뉴스가 코미디 프로에서까지 풍자되고 있다. 이런 작태의 주인공이 지방자치단체의 수장이 되어 농단을 부리고 있는 동안 <필경사>는 낙후되고 그 주인이 남긴 피맺힌 원고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해외에서 떠돈다. 이 친필원고들을 국내로 모셔와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날’이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권영민)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

 

미국에서 온 한국문학 담당 교수 두 사람과 만났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화제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로 모아졌다. 영어로 변역 출간된 <Please Look After Mom>이 세계적인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의 2011년도 상반기 결산에서 ‘편집자가 뽑은 베스트 10’에 올랐다는 소식을 내가 먼저 입에 올렸더니 이런저런 통계들을 두 교수가 계속 거론한다. 나는 그런 순위보다 영어권 독자들이 이 작품에 보여주고 있는 꾸준한 관심이 더 궁금한데, 이 즐거운 화제의 마무리가 꼭 유쾌했던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 교수들은 신경숙의 소설이 아주 절묘하게도 타이밍을 잘 맞추었다고 말한다. 이제는 한국 작가의 소설도 영어권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미국의 대학생들에게 친숙해질 정도가 되었고, 한국 대중음악도 상당수의 학생들에게는 하나의 취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소설이 읽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신경숙만이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경우도 얼마든지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나는 속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박수한다.

그런데 이분들은 한국의 방송과 신문들이 이 뉴스를 다루는 방식을 꼬집는다. 너무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를 확대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런 일은 한국문학에서 처음 생겨났고 참으로 흥분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냉정한 미국 교수들은 그저 웃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신경숙의 소설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였지만 한국의 소설문학이 보여주는 정신적 거점을 이 소설이 과연 얼마나 진실하게 보여주느냐고 묻는 것이다. 미국 평단에서는 이 소설이 지나치게 ‘연파적’이라는 지적도 나왔단다. 그러기에 이 소설의 상업적 성공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비평적 관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내게 참견한다.

그러나 나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자랑스럽다. 이 소설이 미국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잃어버린 엄마’를 향한 한국인의 애절한 심정만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의 중심에 자리한다. 이 소중한 가치를 우리가 신경숙을 통해 미국의 독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 뿌듯하다. 인터넷에는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난 뒤 엄마 생각에 밤새 울었다는 독자의 독후감도 보인다. 밤늦도록 이 소설을 읽다가 고향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독후감도 올라 있다.

나는 특히 이 소설의 해외 번역 출판 방식이 마음에 든다. 이 소설의 번역자는 한국어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한국인 이민 2세이다.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번역가에 의해 번역됨으로써 한국어의 언어적 장벽을 완벽하게 넘어서고 있다. 언제나 골머리를 아프게 하는 한국문학 작품의 해외 번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실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이 소설을 출간한 출판사도 한국문학번역원이 주는 출판지원금 따위에는 당초부터 관심도 없었다니 더욱 반가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지목해 두고 싶은 것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이루어내고 있는 성공이 실은 하나의 작은 성취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한국문학은 무한한 가능성을 세계의 독자들을 향해 열어두고 있으므로 제2, 제3의 소설들이 나와야 한다. 영어권만이 아니라 스페인어권, 프랑스어권, 아랍어권, 중국어권 등에서도 한국문학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날이 와야 한다. 이것은 물론 한국문학 자체에 달린 문제다. 미국의 대학들이 최근 경제 문제로 한국문학 강좌를 오히려 줄이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