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들

심훈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와 여러 편의 소설 원고들을 사진을 통해 확인했다.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심재호(심훈의 3남) 선생의 호의로 그 사진 자료들을 받았다.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는 1932년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검열로 인하여 빛을 보지 못한 채 숨겨졌었다. 그리고 심훈 선생이 작고(1936)한 후 광복을 맞으면서 드디어 빛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이 친필 원고들은 지난 2000년 <심훈문학전집 1 그날이 오면>이 출간된 후 그 후속작업으로 계획했던 작품 원고의 영인본 출판이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여전히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 방치되고 있다. 지금 이 원고들은 모두 심재호 선생이 미국의 자택에 보관하고 있다.

 

   

시집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를 보면, 누렇게 변색된 얇은 표지에 《심훈시가집(沈熏詩歌集)》 제1집이라는 제목이 선명하다. 아마도 이 시집이 식민지 시대에 계획했던 대로 발간되었다면, 그 제목은 《심훈시가집》이 되었을 것이다. ‘1919-1932’라는 글자는 수록 작품들이 쓰여진 시기를 말해준다. ‘경성 세광사 인행’이라는 표식으로 보아 이 원고를 세광사에서 발행할 계획이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 시집은 계획대로 발간되지 못했다. 단아하게 써내려간 펜글씨의 제목 바로 옆에 ‘治安妨害(치안방해)’ ‘一部分削除アリ(일부분삭제함)’이라는 붉은 글씨의 도장이 무섭게 찍혔다. 그리고 그 밑으로 삭제된 곳에 복자(伏字)나 ‘ㅇ’ 자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되며, 삭제된 곳을 빈칸으로 남겨두어서도 안 되며, 삭제된 곳에 삭제 내용을 표시해서도 안 된다는 주의사항이 일본어로 붉게 표시되어 있다. 일본 경찰은 이 시집의 원고에 숱한 붉은 줄을 그어놓음으로써 아예 그 발간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날이 오면》의 친필 원고는 모두 전체 198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목차의 순서를 따라가면 서시(序詩)로 수록된 「밤」에 이어 모든 수록 작품이 <봄의 서곡> 14편, <통곡 속에서> 7편, <짝 잃은 기러기> 13편, <태양의 임종(臨終)> 8편, <거국편(去國篇)> 7편, <항주유기(杭州遊記)> 14편 등 전체 6부로 나뉜다. 그리고 총 64편의 끝에 <감옥에서 어머님께 올린 글월>이 붙어 있다. 이 마지막 글은 1919년 3.1운동 당시 심훈 선생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을 때 적었던 것이다. 단순한 서간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서간체 산문시로 읽을 수 있다. 이 원고의 첫머리에 ‘나는 쓰기를 위해 시를 써 본 적이 없습니다.’ 라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머리 말씀’이 가슴을 친다. 뒤로 이어지는 글귀를 옮겨보면 이렇다. ‘삼십이면 선(立)다는데 나는 배밀이도 하지 못합니다. 부질없는 번뇌로 마음의 방황으로 머리 둘 곳을 모르다가 고개를 쳐드니 어느덧 내 몸이 사십의 마루터기 위에 섰습니다. 걸어온 길바닥에 발자국 하나도 남기지 못한 채 나이만 들었으니 하염없게 생명이 좀 썰린 생각을 할 때마다 몸서리를 치는 자아를 발견합니다.’

나는 이 시집의 원고자료 가운데에서 가장 먼저 그 유명한 시 「그날이 오면」을 찾아보았다. 영국 옥스퍼드대학의 시학교수였던 바우라(C. M. Bowra)는 《시와 정치》(1966)에서 시인의 개인적 열정과 그 단순성이 얼마나 커다란 효과를 불러일으키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시 「그날이 오면」을 상세하게 분석한 바 있다. 바우라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한국의 시인은 독일 시인처럼 포악한 현실에 구속되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먼 훗날의 일일지라도 감격적인 미래가 일깨우는 격렬하고도 숭고한 그 느낌일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바우라 교수는 이 시에서 그려낸 감격의 장면을 놓고 사람과 자연이 한 덩어리가 되어 환희를 함께 하는 것이라고 적었다. 이것은 서구의 저항시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경이로운 감동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했다. 한국의 문학작품이 서구인들에게 이렇게 수준 높은 안목을 통해 소개된 적은 없다.

시 「그날이 오면」은 전체 원고에서 제1부 <봄의 서곡> 가운데 여덟 번째 작품(원고 32면)으로 수록되어 있다. 그런데 이 원문이 매우 흥미롭다. 이 작품은 대부분의 다른 시들이 모두 원고지에 펜글씨로 적혀 있는 데에 반하여 이미 인쇄된 책의 한 페이지가 그대로 오려 붙여져 있다. 이 시가 어떤 잡지에 이미 발표되었던 적이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다. 시 「그날이 오면」이 일제 식민지시대 잡지에 발표 수록된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다. 심훈 선생이 시집 발간을 시도하다가 일본 경찰의 검열로 발간이 불가능해지자 원고를 보관했고, 선생의 사후에 해방이 되면서 비로소 빛을 보게 된 것이라고 설명해 왔기 때문이다. 인쇄된 원문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단장(斷腸) 2수(首) -구고(舊稿) 중(中)에서-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三角山)이 이러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漢江)물이 뒤집혀 룡소슴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지기전(前)에 와주기만하량이면,
나는 밤한울에 날르는 까마귀와같이
종로(鍾路)의 인경(人磬)을 머리로 드리바더 울리오리다,
두개골(頭蓋骨)은 깨어저 산산(散散) 조각이 나도
깃버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한(恨)이 남으오리까

그날이 와서 오오 그날이 와서
육조(六曹)앞 넓은길을 울며 뛰며 뒹구러도
그래도 넘치는 깃븜에 가슴이 미여질듯하거든
드는칼로 이몸의 가죽이라도 벗겨서
커다란 북[鼓]을 만들어 들쳐메고는
여러분의 행렬(行列)에 앞장을 스오리다
우렁찬 그소리를 한번이라도 듯기만하면
그자리에 꺽구러저도 원(願)이 없겟소이다.

 

앞의 인용대로 이 작품은 발표 당시 원제가 「斷腸二首」였다. 심훈 선생은 시집의 출간을 계획하면서 이 제목을 ‘그날이 오면’이라고 바꾸었다. 그리고 ‘舊稿中에서’라는 부제는 아예 빼어버렸다. 작품의 본문 가운데에는 제2연의 마지막 행 종결구인 ‘願이 없겟소이다’를 ‘눈을 감겟소이다’로 바꾸었다. 이런 식의 부분 개작을 통해 시 「그날이 오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시의 제목의 교체와 마지막 한 구절의 변화를 통해 이 시는 ‘그날’을 맞이하는 순간의 기쁨이라면 죽음과도 바꿀 수 있음을 처절하게 노래한다. 하지만 이 시는 그 전문이 검열에 의해 모두 붉은 줄로 지워지고 <삭제(削除)> 당한다. 이미 잡지에 발표된 적이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일본 경찰은 이 작품이 「그날이 오면」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독자들에게 읽혀지는 것을 금지한 것이다. 식민지 시대의 검열이 얼마나 가혹한 것이었는지를 이렇게 생생하게 보여주는 예는 달리 찾아볼 수가 없다.

 

시 「그날이 오면」의 원문이었던 「단장(斷腸) 2수(二首)」는 언제 어디에 발표한 것일까? 이 작품의 집필시기(또는 발표시기)를 말해주는 작은 단서는 앞의 잡지면 위에 희미하게 연필로 표시되어 있는 ‘1930. 3. 1’이라는 글씨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시를 발표 수록한 것이 어떤 잡지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1930년 3월 1일 이후부터 이 시집 발간을 계획했던 1932년 9월(‘머리 말씀’의 말미에 표기된 날짜) 사이에 발행된 어떤 잡지였을 것이다. 지난 일년 가까이 틈나는 대로 나는 이 시기의 잡지를 뒤졌는데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당시 잡지 가운데 제대로 보관되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흩어진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심훈 선생의 친필 원고들을 소중히 보관해 오신 미국의 심재호 선생은 이 자료들을 모두 국내로 들여와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계시다. 심훈 선생의 <필경사>가 있는 충남 당진에 자료관 또는 기념관을 제대로 짓고 거기에 보존하는 방법이 가장 바람직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을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다. 심재호 선생이 내게 알려온 소장 자료 목록 가운데에는 장편소설 「상록수」, 「직녀성」, 「영원의 미소」 등의 친필원고와 단편 「황공의 최후」의 친필 원고가 있다. 그리고 소설 「상록수」 영화각본과 영화소설 「탈춤」의 각본도 보관되어 있다. 심훈 선생이 직접 각색, 감독, 촬영하고 단성사에서 개봉한 영화 「먼동이 틀 때」의 촬영 원본도 있고, 선생의 절필 「오오 조선의 남아여」가 붓끝에 살아남아 있다.

나는 이 자료들이야말로 한국 현대문학 최대의 보물이라고 말하고 싶다. 일본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어떤 작가나 시인의 경우에도 이렇게 많은 친필 원고를 고스란히 보존해온 경우가 없다. 이 자료들을 잘 지켜오신 심재호 선생께 머리를 숙여 존경을 표하고 싶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부끄럽고 죄송스럽다. 한국문학을 연구해온 사람으로서 이런 소중한 자료들을 떳떳하게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널리 보여주고 아픈 상처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도록 만들지 못한 책임이 막중하다. 올해는 100년 전 일본 강점을 되돌아보는 여러 가지 행사가 열렸는 터라서 이 자료들을 생각하면 더욱 안타깝다. 심훈 선생이 살아 생전에 글을 쓰셨던 <필경사>의 관할 지역인 충남 당진군의 전(前) 군수가 비리 혐의로 수사대상이 되자 위조 여권을 들고 국외로 도피하려다가 붙잡혔다는 뉴스가 코미디 프로에서까지 풍자되고 있다. 이런 작태의 주인공이 지방자치단체의 수장이 되어 농단을 부리고 있는 동안 <필경사>는 낙후되고 그 주인이 남긴 피맺힌 원고들이 그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해외에서 떠돈다. 이 친필원고들을 국내로 모셔와 제대로 보존해야 한다. ‘그날’이 언제쯤 가능할 것인가? (권영민)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

 

미국에서 온 한국문학 담당 교수 두 사람과 만났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화제가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로 모아졌다. 영어로 변역 출간된 <Please Look After Mom>이 세계적인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의 2011년도 상반기 결산에서 ‘편집자가 뽑은 베스트 10’에 올랐다는 소식을 내가 먼저 입에 올렸더니 이런저런 통계들을 두 교수가 계속 거론한다. 나는 그런 순위보다 영어권 독자들이 이 작품에 보여주고 있는 꾸준한 관심이 더 궁금한데, 이 즐거운 화제의 마무리가 꼭 유쾌했던 것만은 아니다.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이 교수들은 신경숙의 소설이 아주 절묘하게도 타이밍을 잘 맞추었다고 말한다. 이제는 한국 작가의 소설도 영어권 독자들에게 읽힐 수 있는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미 한국의 영화와 드라마가 미국의 대학생들에게 친숙해질 정도가 되었고, 한국 대중음악도 상당수의 학생들에게는 하나의 취향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한국소설이 읽히는 것도 시간문제였다는 것이다. 앞으로는 신경숙만이 아니라 다른 작가들의 경우도 얼마든지 이런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나는 속으로 다행한 일이라고 박수한다.

그런데 이분들은 한국의 방송과 신문들이 이 뉴스를 다루는 방식을 꼬집는다. 너무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를 확대 과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에 이의를 제기한다. 이런 일은 한국문학에서 처음 생겨났고 참으로 흥분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이 냉정한 미국 교수들은 그저 웃는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신경숙의 소설은 한국에서 베스트셀러였지만 한국의 소설문학이 보여주는 정신적 거점을 이 소설이 과연 얼마나 진실하게 보여주느냐고 묻는 것이다. 미국 평단에서는 이 소설이 지나치게 ‘연파적’이라는 지적도 나왔단다. 그러기에 이 소설의 상업적 성공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비평적 관점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내게 참견한다.

그러나 나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자랑스럽다. 이 소설이 미국사회에 던진 메시지는 ‘잃어버린 엄마’를 향한 한국인의 애절한 심정만은 아닐 것이다. 엄마는 가족이라는 공동체 의식의 중심에 자리한다. 이 소중한 가치를 우리가 신경숙을 통해 미국의 독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게 된 것이 뿌듯하다. 인터넷에는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난 뒤 엄마 생각에 밤새 울었다는 독자의 독후감도 보인다. 밤늦도록 이 소설을 읽다가 고향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독후감도 올라 있다.

나는 특히 이 소설의 해외 번역 출판 방식이 마음에 든다. 이 소설의 번역자는 한국어와 영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한국인 이민 2세이다.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젊은 번역가에 의해 번역됨으로써 한국어의 언어적 장벽을 완벽하게 넘어서고 있다. 언제나 골머리를 아프게 하는 한국문학 작품의 해외 번역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실천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더구나 이 소설을 출간한 출판사도 한국문학번역원이 주는 출판지원금 따위에는 당초부터 관심도 없었다니 더욱 반가운 일이다.

다만 한 가지 지목해 두고 싶은 것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이루어내고 있는 성공이 실은 하나의 작은 성취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한국문학은 무한한 가능성을 세계의 독자들을 향해 열어두고 있으므로 제2, 제3의 소설들이 나와야 한다. 영어권만이 아니라 스페인어권, 프랑스어권, 아랍어권, 중국어권 등에서도 한국문학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날이 와야 한다. 이것은 물론 한국문학 자체에 달린 문제다. 미국의 대학들이 최근 경제 문제로 한국문학 강좌를 오히려 줄이고 있다는 우울한 소식이 더욱 마음에 걸린다. (권영민)

한국 대학의 일본어 교육

수년전 내가 일본의 메이지(明治) 대학 초청으로 잠시 동경에 머물러 있었던 때의 이야기다. 조그만 공개강좌에서 나는 한국문학에 관한 강연을 하게 되었다. 강연이 끝난 후에 청중과의 문답 시간이 주어졌다.

첫번째 질문자가 일어섰다. 그런데 그는 내 강연과 전혀 상관없는 엉뚱한 문제를 제기하였다. 왜 서울대학교에서는 대학입시에서 일본어를 제2외국어 과목의 하나로 인정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내가 질문의 내용이 강연과 상관이 없다고 하자, 그 질문자는 집요하게 나의 대답을 요구하였다. 나는 서울대학교의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전제하면서, 나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임을 내세워 두 가지 사실을 언급하였다.

첫째, 한국인들에게 일본어는, 한국어가 일본인들에게 그러하듯이 하나의 외국어에 불과하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대학에서 배우는 제2외국어는 학문의 필요에 의해 배우는 ‘학문과 과학의 언어’이어야 하는데, 일본어는 학문과 과학의 언어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학생들이 배우는 일본어는 학문과 과학을 위해서가 아니라, 실용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구태여 대학 입시에서 그 능력을 평가할 필요는 없다고 언급했던 것이다.

둘째, 서울대학교의 입시제도는 서울대학교가 대학의 여러 가지 요건을 감안하여 정하는 것임을 말하였다. 서울대학교에서 공부하게 될 대학생을 선발하는 것이므로, 대학 입시의 시험 과목을 서울대학교 밖에서 시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라는 점도 지적하였다. 동경 대학이 어떤 과목을 입시 과목으로 내세우건 한국 사람들은 아무 상관없다고 덧붙였던 것이다.

요즈음도 가끔 서울대학교에서 왜 일본어를 정식 교과목으로 교육시키지 않는가에 대해 물어오는 분들이 있다. 서울대학교가 세상 물정도 모르고 일본어에 대한 무조건적인 배타적 태도를 고루하게 지키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힐난조로 묻는 사람도 더러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다. 서울대학교 어학연구소에서는 오래전부터 일본어를 실용언어 중심의 별도 강좌로 개설하여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대학에서의 모든 강좌는 교육의 목적에 맞게 개설되는 것이며, 그래야만 그 효율적인 교육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권영민)

 

일본의 동경대학 풍경

동경대학의 정식 명칭은 <국립대학법인 동경대학>이다. 2003년 7월 국립대학법인법이 의회에서 통과된 후 동경대학은 국립대학으로서의 지위를 잃어버렸으며 2004년 4월 1일부터 국립대학법인 동경대학으로 그 운영체제가 바뀐 것이다. 이른바 법인화 논의가 시작된 1996년부터 진통을 겪으면서 끌어왔던 문제가 8년만에 결말이 난 셈이다. 1990년대 중반부터 문제가 된 대학 진학자의 인원 감소현상이 대학의 구조조정과 운영체제의 개혁에 대한 논의로 이어지면서 동경대학을 비롯한 일본의 국립대학들은 상당한 진통을 겪어 왔다. 물론 문부과학성에서는 대학의 반발을 예상하고 여러 가지 대안 모색에 힘을 썼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국립대학 교원의 정년 연장 방안이다. 만 60세 정년을 지켜온 국립대학 교원들의 정년을 5년간 더 연장하여 만 65세로 정년을 정했다. 이 새로운 방안은 고령화 사회를 이루고 있는 일본의 현실에서 볼 때 획기적인 방안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문부과학성은 <대학의 구조개혁 방안>에 기초하여 이른바 <21세기 COE 프로그램>을 시행하면서 ‘연구 거점 형성비 보조금’의 지원을 약속한다. 물론 이 연구보조금은 대학간 경쟁을 통해 학문의 분야별로 국제적 경쟁력을 갖춘 대학에 지급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일본 국립대학은 이러한 정부의 대학 개혁 정책을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동경대학의 경우에도 법인화 방안에 대한 교수 찬반 투표에서 찬성으로 결론을 내렸다. 정부가 정년 연장이라는 당근을 내세워 국립대학의 구조 조정을 법인화의 방법으로 밀어붙이고 있다는 일부의 반대 의견이 나오기는 했지만 그것이 큰 영향을 발휘하지 못했다.

국립대학법인 동경대학의 요즘 풍경이 궁금하다. 동경대학 캠퍼스는 그리 넓지 않다. 전통적인 아카몽[赤門] 안으로 들어서면 그 왼편에 대학 안내소가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그곳은 단순한 안내소가 아니다. 동경대학 브랜드 상품 100가지가 진열되어 있어서 방문객들의 눈길을 끈다. 대학의 구석구석에 자리잡고 있던 생협(학생소비조합)이 운영하던 매점들은 대부분 문을 닫은 대신에 ‘스타벅스’ 같은 커피점이 들어와 있거나 ‘세븐 일레븐’과 같은 편의점이 새로 문을 열었다. 늘 조용하게 느껴지던 캠퍼스 여기저기에서 공사가 진행 중이다. 새로 들어서는 건물은 어떤 재벌이 기증한 돈으로 세워진다는 공사 설명 간판이 세워져 있다. 낡은 나무 의자가 볼품없이 놓여 있던 캠퍼스 구석은 모두 말끔하게 치워지고 새로 조명등이 서 있는 아래로 깨끗하게 벤치가 놓여 있다. 동경대학이 겉으로 보기에도 많이 바뀌고 있다.

캠퍼스를 바쁘게 걸어가는 교수들의 어깨는 무거워 보인다. 동경대학 문학부 교수는 누구나 수요일 오후에 강의 시간을 배정하지 않는다. 매월 두 차례 문학부 교수회의가 열리기 때문이다. 모든 교수들은 그 회의에 참석해야 한다. 문학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행정 업무, 교수 연구 업무, 학생 업무, 대외 협력 업무 등에 대한 세부 사항을 보고받고 결정하기 때문이다. 대학 당국에서는 매번 교수회의 참석자 명단을 확인하고 나서 회의를 시작한다. 어떤 때는 저녁 7시가 넘도록 회의가 이어진다. 학부 전체 교수 회의를 마친 후에는 다시 전공별 교수 회의를 가져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전체 교수에서 결정한 사항을 전공별로 다시 확인하고 그 실천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서이다. 도대체 회의 때문에 못살겠다고 교수들이 아우성이지만, 이제 동경대학에서는 교수들이 모두 대학 운영에 참여하여 문제를 논의하고 방향을 결정한다. 대학 운영의 자율과 책임이 모두 교수들의 몫으로 넘어온 셈이다.

동경대학의 학생들은 입학 후 2년간 교양학부에서 수학한다. 이들은 교양과정을 이수한 후 자신이 소속된 입학 단위별로 전공학부로 진입한다. 학부에서는 2년간 전수과정이라는 전공 교육을 받게 된다. 입학 단위별로 문과1류에 속해 있는 학생들은 법학이나 정치학 분야로 진입하고 문과 2류의 학생들은 경제학과 사회과학 분야로, 문과3류는 문학부로 진입해야 한다. 그러나 법인화 시행 이후 이러한 입학 단위별 정원에 대한 규제를 크게 완화하고 있다. 각 단위별로 30%까지 진입 인원을 확대할 수 있도록 전공별 문호를 개방했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전공 선택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서다. 그 결과 가장 큰 문제에 직면한 것이 문학부의 여러 전공 분야다. 이 새로운 제도가 시행된 첫해부터 문학부의 몇몇 전공 분야에는 한 명의 학생도 진입하지 않는 곳이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벌써 몇 해째 지속되고 있다. 몇몇 전공분야의 경우는 학부 강의를 제대로 운영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지만 이른바 교육 수요자 중심이라는 원칙 때문에 아무도 이를 문제삼을 수가 없다. 학생들은 장래가 더욱 확실하게 보장될 수 있는 학문 분야를 찾는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인기 전공분야와 비인기 전공분야가 확연하게 구분된다. 학생들은 인기 학문 분야로 진입하기 위한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한다. 앞으로 비인기 학문 분야는 동경대학 전수과정에서 모두 도태될 가능성도 없지 않다.

동경대학 운영에 관한 중요 과제는 총장을 중심으로 하는 대학위원회에서 결정한다. 교수의 퇴임 이후 그 자리에 신규 교수를 채용하는 문제도 모두 대학위원회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동경대학 문학부의 경우 법인화 시행 후 여러 명의 교수들이 퇴임하였지만 한 사람도 신규 채용을 하지 못하고 대학위원회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다. 대학위원회는 현실 사회에서 그 실효성을 인정받지 못하는 학문 분야나 경쟁력을 제대로 갖추지 못하고 있는 분야는 여러 가지 방식의 평가를 통해 모두 도태시키겠다고 공언한다. 국립대학법인 동경대학이 경쟁력을 살리고 세계적인 대학으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이라니 누구도 이에 항변하지 못한다.

동경대학은 세계적인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일본 최고의 대학이다. 동경대학의 힘은 동경대학 학문에서 나온다. 일본 최고의 인재들이 동경대학의 여러 연구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연구에 전념한다. 그러니 그 가운데에서 노벨상 수상자도 나온다. 대학의 경쟁력은 그 학문의 수준에서 오는 것이지 대학운영의 방법에서 오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학교는 ‘서울대학교 학문’이라고 내세울 만한 것이 별로 없다. 이공계나 사회과학 분야의 경우 대부분의 뛰어난 재능을 지닌 학생들이 모두 미국 유학을 떠난다. 서울대학교 박사 학위 논문이 세계 수준의 성과를 올렸다는 말을 우리는 별로 들은 적이 없다. 그러면서도 학문의 경쟁력을 운위한다. 서울대학교도 동경대학처럼 법인화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동경대학은 법인화를 위해 8년 동안이나 준비했다는데 우리네는 어찌됐는가? 그저 한심할 뿐이다. (권영민)

 

잘못된 주소

이상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터무니없는 질문은 한국문학사에 참으로 오랜 숙제로 남아 있다. 이상 문학의 어떤 윤곽이 독자 앞에 드러나게 된 것은 <<이상선집>>(백양당, 1949)의 출간과 때를 같이한다. 시인 김기림에 의해 엮어진 이 한권의 책은 비슷한 시기에 나온 <<육사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등과 함께 불행한 시대를 마감하는 한국문학의 하나의 표석이 된다. 그러나 이 책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시인 김기림의 이름 위에 월북문인이라는 붉은 줄이 그어지자 독자들의 기억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이상의 문학에 대한 논의는 새로운 세대의 몫이 된다.

나는 일본 동경대학에서 한국근대문학 강의를 담당하면서도 틈만 나면 이상을 찾아다녔다. 이상은 1936년 늦가을부터 1937년 4월 17일 세상을 떠나게 될 때까지 동경에 머물러 있었다. 그가 묵었던 동경의 하숙집 주소는 간다구(神田區) 진보쪼(神保町) 3조메(丁目) 101-4번지 이시카와(石川) 방(方). 동경대학 캠퍼스에서 그리 먼 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몇 차례나 고서점가에 인접해 있는 이상의 하숙집을 찾았다. 그러나 이상이 묵었던 간다 진보쪼의 하숙집은 그 위치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진보쪼 3조메는 그리 넓은 구역은 아니지만 그 복판에 동경에서도 전통이 있는 센슈대학(專修大學) 캠퍼스가 자리하고 있다. 도저히 번지수를 찾을 길이 없었다. 복덕방에 들어가서 101-4번지를 물었지만 주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소화(昭和)16년(1941년) 동경 인문사(人文社) 판 <간다구(神田區) 상세도(詳細圖)>를 도서관에서 복사하였다. 그리고 먼저 그 지도 위에서 이 하숙집의 번지수를 찾아 그 위치를 가늠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진보쪼 3조메에는 101-4번지가 없다. 지도 위에 표시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진보쪼 3조메는 크게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전체 지번이 29번에서 끝이 난다. 나는 결국 구역소에 찾아가서 다시 지번을 확인하였다. 담당직원은 진보쪼 3조메에는 29번지를 넘는 지번이 당초부터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101번지는 있을 수 없다면서 담당직원은 내가 알고 있는 주소가 잘못된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망연했다.

내가 이상의 동경 하숙집 주소를 처음 확인한 것은 임종국(林鍾國) 편 <<이상전집(李箱全集) 3 >>(고대문학회, 1956)을 통해서이다. 이 전집은 이상 문학의 텍스트에 대한 총체적인 정리 작업을 통해 이상 문학의 범주를 확정해 놓은 것으로 유명하다. 뒤에 발간된 대부분의 책들이 이 전집에 빚지고 있다. 이 전집은 시와 소설과 수필 등으로 넓혀져 있는 이상의 글쓰기 영역을 세 권의 책으로 묶어내었기 때문에, 이상의 사후 20년에 이루어진 중요한 문학사적 정리 작업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전집 제3권 부록에 수록된 이상의 연보에 동경의 하숙방 주소가 ‘진보쪼 3조메 101-4번지’로 표시되어 있다. 나는 이 주소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진보쪼 3조메를 헤매다가 3조메 구역에서 소화(昭和) 이래로 장사를 하고 있다는 오래 된 쌀가게를 찾게 되었다. 가게 주인은 소화 연간의 회원 명단(단골 손님의 명단)을 위층 서재에서 꺼내다가 내게 보여주면서 친절하게도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3조메에는 101-4번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그런데 3조메 10번지의 지번이 둘로 나뉘어 있어서 10-1과 10-2로 표시해 왔다는 점, 내가 알고 있는 101번지는 10-1번지일 것이라는 점, 10-1번지에는 당시에 모두 14가구가 살았다는 점 등을 설명해 주었다. 나는 가게 주인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들 열 네 가구의 주소가‘10-1 번지의 1호’‘10-1번지의 2호’와 같은 방식으로 표시되었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이상의 동경 하숙집 주소는 진보쪼 3조메 101-4번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3조메 10-1번지 4호’의 오기였던 것이다. 지금은 이 지번 위에 수년전에 새로 지었다는 센슈대학의 현대식 회관 건물이 들어서 있다. 우리는 너무도 오랫동안 잘못된 주소를 찾아다녔다. 이상의 문학이 오리무중이었던 것처럼―.

나는 동경에서 긴자(銀座)의 거리와 신주쿠(新宿)의 골목을 기웃대었던 이상의 환영(幻影)과 수없이 마주쳐야 했다. 이상은 1936년 가을 새로운 문학을 꿈꾸 일본 동경을 찾았다. 그리고 진보쪼 3조메 10-1번지 4호에 하숙을 들었다. 하지만 동경이라는 도시가 자신이 꿈꾸던 현대적 정신의 중심지가 아님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서구 세계를 치사하게도 흉내내고 있던 동경의‘모조(模造)된 현대(現代)’에 절망하고는 봄이 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거동 수상자’라는 이유로 그는 일본 경찰에 검거되어 차디찬 동경의 늦겨울을 경찰서 유치장에서 견뎌야했다. 이 불행한 정신은 그 육신과 함께 거기서 무참하게도 허물어졌다.

이상 문학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새삼스럽다. 이상을 다시 묻는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상의 글쓰기는 지금도 한국문학이라는 이름 앞에 문제적인 상태로 놓여 있다. 여기서 굳이 ‘글쓰기’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이상의 글들이 어떤 양식의 영역에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글들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양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으며 텍스트의 상호연관성에 의해 새로운 의미를 생산한다. 그리고 모든 글들이 서로 이어져 ‘동시적 질서’라는 새로운 개념을 형성하고 있다. 그것은 겉으로 닫혀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언제나 그 자체의 지향을 분명히 보여주는‘지도의 암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권영민)

 

새로 찾은 정지용의 시 <추도가(追悼歌)>

시인 정지용이 남긴 시 한 편을 새로 찾았다. <추도가(追悼歌)>라는 제목으로 1946년 3월 2일 대동신문(大東新聞)에 실린 작품이다.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를 위해 쓴 것으로 행사용 가창곡의 가사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정지용은 해방 직후 시를 제대로 발표하지 못하였다. <애국(愛國)의 노래>(대조, 창간호, 1946. 1), <그대들은 돌아오시다>(혁명, 창간호, 1946. 1), <곡마단(曲馬團)>(문예, 7호, 1950. 2), <늙은 범 외 (4 4조 5수)>(문예, 8호, 1950. 6) 등이 그동안 조사되었던 전부이다. 그러니 이 한 편의 시가 새로이 연보에 추가될 수 있게 된 것이 반갑다. 작품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국토(國土)와 자유(自由)를 잃이우고

원수(怨讐)와 의(義)로운 칼을 걸어

칼까지 꺾이니 몸을 던져

옥(玉)으로 부서진 순국열사(殉國烈士)

 

(후렴)

거룩하다 놀라워라

우리 겨레 자랑이라

조선(朝鮮)이 끝까지 싸왔음으로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빛내니라

 

2

조국(祖國)의 변문(邊門)을 돌고 들어

폭탄(爆彈)과 육체(肉體)와 함께 메고

원수(怨讐)의 진영(陣營)에 날아들어

꽃같이 살어진 순국열사(殉國烈士)

 

거룩하다 놀라워라

우리 겨레 자랑이라

조선(朝鮮)이 끝까지 싸왔음으로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빛내니라

 

3

조차 뼈 모다 부서지고

최후(最後)의 피 한 점 남기까지

조국(祖國)의 혼령(魂靈)을 잘지 않은

형대(刑臺) 우에 성도(聖徒) 순국선열(殉國先烈)

 

거룩하다 놀라워라

우리 겨레 자랑이라

조선(朝鮮)이 끝까지 싸왔음으로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빛내니라

 

4

소년(少年)과 소녀(少女)와 노인(老人)까지

자주(自主)와 독립(獨立)을 부르지저

세계(世界)를 흔들고 적탄(敵彈) 앞에

쓰러진 무수(無數)한 순국선열(殉國先烈)

 

거룩하다 놀라워라

우리 겨레 자랑이라

조선(朝鮮)이 끝까지 싸왔음으로

인류(人類)의 역사(歷史)에 빛내니라

 

정지용은《정지용시집》(1935),《백록담》(1941년)을 통해 일제 식민지 시대를 살았던 가장 빛나는 시 정신의 하나로 기억된다. 그의 언어적 절제와 뛰어난 감각, 시적 대상과 자아와의 긴장 등은 한국의 현대시가 도달했던 시적 성과에 해당한다. 그런데 정지용이 1930년대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으로서 《시문학》에서부터 《文章》으로 이어지는 문학사적 흐름을 주도했던 점을 생각한다면, 그가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시 창작을 지속하지 못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그는 시를 쓰는 대신에 정치적 현실에 더욱 민감했고, 새로운 조국의 건설에 더욱 열정적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념의 대립과 분열이 거듭되는 현실 상황 속에서 끝내 ‘백록담’처럼 차고 맑게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백록담’이 아닌 ‘대하장강(大河長江)’의 현실을 꿈꾸고 있었던 것일까? 해방 공간에서 그가 시를 잃어버린 대신 새롭게 얻어낸 것은 무엇이었을까?

 

일제시대에 내가 시니 산문이니 죄그만치 썼다면 그것은 내가 최소한도의 조선인을 유지하기 위하였던 것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해방 덕에 이제는 최대한도로 조선인 노릇을 해야만 하는 것이겠는데 어떻게 8.15 이전같이 왜소위축한 문학을 고집할 수 있는 것이랴?

자연과 인사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 문학에 간여하여 본 적이 없다. 오늘날 조선문학에 있어서 자연은 국토로 인사는 인민으로 규정된 것이다. 국토와 인민에 흥미가 없는 문학은 순수하다고 하는 것이냐? 남들이 나를 부르기를 순수시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스스로 순수시인이라고 의식하고 표명한 적이 없다. 사춘기에 연애 대신 시를 썼다. 그것이 시집이 되어 잘 팔리었을 뿐이다. 이 나이를 해가지고 연애 대신 시를 쓸 수야 없다. 사춘기를 훨석 지나서부텀은 일본놈이 무서워서 산으로 바다로 회피하려 시를 썼다. 그것이 지금 와서 순수시인 소리를 듣게 된 내력이다. 그러니까 나의 영향을 다소 받아온 젊은 사람들이 있다면 좋지 않은 영향이니 버리는 것이 좋을까 한다.

…………….(중략)……………..

시와 문학에 생활이 있고 근로가 있고 비판이 있고 투쟁과 적발이 있는 것이 그것이 옳은 예술이다. 걸작이라는 것을 몇 해를 두고 계획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것은 불멸에 대한 어리석은 허영심이다. 어떻게 해야만 옳은 예술을 급속도로 제작하여 전국 투쟁에 이바지하느냐가 절실한 문제다. 정치와 문학을 절연시키려는 무모에서 순수예술이라는 것이 나온다면 무릇 정치적 영향에서 초탈한 여하한 예술이 있었던가를 제시하여 보라.

(정지용, 《산문》 동지사, 1949, p. 28~32)

   

정지용이 자신의 시적 경험을 시대상의 변화에 비춰 반성적으로 회고 있는 이 글은 해방 공간에 서 있던 한 시인의 내면적 자기 모색의 단면을 보여준다. 정지용은 일본 식민지 말기 잡지《문장》이 폐간될 무렵을 자신의 시적 생활 가운데 가장 피폐했던 시기로 기억하고 있다. 정치감각과 투쟁의욕을 시에 집중시키기에는 그 자신이 무력한 소시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그는 오직 왜소위축한 시에 매달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해방과 더불어 새로운 발전과 비약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그도 최대한도의 조선인임을 자각하게 된다. 그가 시를 버리고 산문의 현실로 뛰어든 것은 ‘막대한 인민의 호흡과 혈행과 함께 문화검열에서 전진’하기 위한 일이라고 한다. 해방 이전의 자신의 시를, 아니 한국의 문학 모두를 스스로 거부하고 있는 시인 정지용은 민족문학의 노선과 민족의 정치노선이 결코 이탈될 수 없다는 신념으로 시의 문화적 전위의 입장을 고집한다. 그러나 건국투쟁에 이바지할 수 있는 시를 강조하고 있는 정지용 자신은 사실 시의 창작에 제대로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문화적 전위로서의 시란 설명만으로 가능할 뿐 실제로는 하나의 정치적 구호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권영민, 2009. 8)

백철(白鐵)과 일본 동경의 《지상낙원(地上樂園》시대

비평가 백철(1908-1985)의 동경 시대는 1927년부터 시작된다. 그가 동경고등사범학교 영문과에 입학한 것이 바로 그해이며, 그때부터 그의 문학 수업이 이루어진다. 그는 동경고등사범 2학년 때부터 시인을 꿈꾸며 시 전문지 《시신(詩神)》을 구독하고 학교에서 간행하는 교우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한다. 그의 시가 일본인 문학도들의 눈에 띄게 되면서 처음 대면하게 된 일본 동경의 문단 풍경은 백철의 자서전 《진리와 현실》(박영사, 1975)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시라가와[白川 *백철의 동경고사 동창생]의 안내로 민중 시인이라고 이름한 시라도리 쇼오고[白鳥省吾]의 문을 두드린 것도 이 무렵(*1929년 백철이 동경 고사 3학년에 재학하던 시절)이다. 시라도리 쇼오고는 《지상낙원(地上樂園》이라는 시지(詩誌)를 동인제로 간행하고 있었다. 시라도리는 그때 후꾸다(福田正夫) 등과 함께 휘트먼의 시풍을 따라 일본의 민중시파를 이끄는 권위같이 알려져 있었고, 저널리즘에선 한물 가버린 인상을 주는 기성파의 한 사람이었다. 시라가와는 전부터 시라도리 쇼오고씨와 안면이 있는 듯했다. 그는 나를 조선 출신의 젊은 문학 재사라고 추천 소개했다. 그때, 시라도리 쇼오고씨는 내개 김소운을 아느냐고 물었다. 김씨가 한때 《지상낙원》의 동인이었다는 말과 일본어 재주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일러 주었다.

나는 찾아간 날로부터 《지상낙원》의 동인이 되었고, 그 동인의 자격으로 시편을 동시에 발표하기 시작했다. 동인 중엔 치바현[千葉縣] 출신으로 미즈하라[水原 * 백철의 자서전에 나와 있는 이 시인은 이름은 잘못된 것임. 市原이라는 이름임을 시 작품 <송림 松林>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음]라는 교원 시인이 있어서 나와 가깝게 사귀게 되어 치바 현으로 놀러간 일도 있는데, 치바 시 근방의 임업 시험장에서 취재한 <삼림(森林)> (* 이 작품의 제목은 ‘송림’으로 되어 있는데, 백철이 잘못 기억하고 있다. 1930년 6월에 발표하였다.)이란 내 시편이 평판작이 되었다. 하늘을 뻗치듯이 자라나는 신록의 수림에다가 야망에 찬 청춘의 정렬적인 이미지를 오버랩시켰던 것이다. 발표된 동인의 시편들에 대한 월평적인 시평문을 발표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내가 《지상낙원》에 동인으로 머문 것은 약 일년간, 차츰 이 《지상낙원》파에 대하여 싫증을 느끼게 되었다. 거기 모인 시인들은 대개가 농촌 자연을 따르는 전원파로서 젊은 사람들의 눈에는 그 시풍이 낡아빠진 것을 감촉하게 되었을 뿐더러 내가 개인적으로 더 그들을 경멸하게 된 동기는 동인회 같은 것이 있을 때마다 그들은 생활과 시에 대한 태도나 취미가 한인적(閑人的)인 안이성의 것으로 도무지 진지한 경건성을 느낄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예를 들면, 모임 뒤에 회식 같은 것을 할 때만 해도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의 내용이 진취적인 진지한 것이 없고, 마치 일본인의 ‘만자이[漫才]와 같이 재담을 경쟁하는 것같은 이야기들이 내 비위에 거슬라고 구역질나는 기분이었다. 아마 이것은 이때 벌써 나는 그 시대 풍조인 마르크시즘의 사상에 물들어가는 증거의 반영일는지 몰랐다. 왜 그러냐 하면, 나의 고사 3학년, 그러니까 1929년 경부터 나는 어느 새 마르크시즘의 근처를 드나들고 있었던 것이다.

교내에서 열리는 R.S라는 데도 가 앉아보고, 《자본론》같은 것도 뒤쳐보고, 그들의 사회 활동에도 관심을 가져보고, 그쪽에서 동정하는 좌익파의 급우들과도 접촉하는 일이 많게 되었다. 조선 사람과 같이 특수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들로서 먼저 그들에게 호감을 갖게 되는 것은 그들의 인간적 태도였다. 그들에겐 민족적인 차별 의식이 전혀 없고 동등한 종지의 입장으로서 대해오는 그 태도에 친근미가 느껴졌다. 오직 ‘도오시[同志]’라는 말이 그들의 계급적인 단결을 약속하는 평등의 호칭이었는데 이런 것들은 내게다 새로운 관심을 갖게 하였다. (140-142면)

 

백철이 처음으로 만났던 일본 동경의 문단 풍경은 앞의 인용을 통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일본 동경고등사범학교 학생 신분으로 백철이 처음 발을 내딛게 된 동경 문단의 《지상낙원》은 무엇인가?

일본 근대문학관에서 펴낸 《일본근대문학대사전》을 보면, 《지상낙원》에 대해 다음은 내용의 해설이 붙어 있다. 《지상낙원》은 시 전문지로서, 동경 대지사(大地舍)에서 1926년(대정15년) 6월에 창간되었다. 1938년(소화 13년) 4월에 통권 87호로 종간되었다. 시라도리 쇼오고가 편집을 담당하였으며, 국정순일(國井淳一), 월원등일랑(月原橙一郞) 등이 동인으로 참가하였다. 민요의 창작과 보급에 힘썼으며, 지방 문화 의 향상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 시 잡지를 주간한 시라도리 쇼오고는 와세다 대학 영문과 출신으로 1914년 경부터 시 창작활동을 하였으며, 시에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강조하고, 국가 권력에 대결하여 이를 비판하는 작품을 많이 발표하였다. 그는 민중시 운동의 적극적인 실천가로서 소박한 정서를 바탕으로하는 평이하고도 주조가 분명한 시들을 발표하며 주목의 대상이 되었고, 시집 《대지의 사랑》, 《공생의 깃발》, 《낙원의 도상》 등을 내었다.

백철이 시 전문지 《지상낙원》에서 활동한 것은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일년 동안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잡지에서의 창작 활동을 기반으로 백철은 곧바로 동경에서 《전위시인》과 《일본프롤레타리아시인회》 등의 좌익 문단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러므로 《지상낙원》 시절의 백철의 활동이 매우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일본 동경의 일본근대문학관에 보관 중인 시 잡지 《지상낙원》을 보면, 백철이 여기에 발표한 작품은 시 9편, 비평 2편이다. 작품들의 서지 사항을 밝혀보면 다음과 같다.

<시 작품 목록>

雹の降った日 (우박이 내리던 날), (4권 11호, 1929, 11)

妹よ(누이여), (4권 12호, 1929, 12)

彼等だつて……(그들 또한 ……), (5권 1호, 1930, 1)

追悼(추도) (5권 3호, 1930, 3)

隅田川, 夕陽(스미다가와, 석양) (5권 4호, 1930, 4)

Xされた仲間へ( X당한 동무에게) (5권 5호, 1930, 5)

鷗群(해오라기 떼) (5권 5호, 1930, 5)

春とXはれた同志 (봄과 X당한 동지) (5권 6호, 1930, 6)

松林(송림) (5권 6호, 1930, 6)

 

<평론 목록>

プロレタリア詩の現實問題について(프롤레타리아시의 현실문제에 관하여) (5권 5호, 1930, 5)

プロレタリア詩論の具體的 檢討(프롤레타리아시론의 구체적 검토) (5권 6호, 1930, 6)

 

백철이 《지상낙원》 시대에 발표한 시 작품들은 모두 격렬한 투쟁적인 구호로 일관되어 있다. 그는 궁핍한 재난에 허덕이는 농민들의 삶의 참상을 시 <우박이 내리던 날>에서 “그들은 이렇게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어버렸다./빼앗길 것은 이것저것 모두 줘버리면 된다./가엾게도 그들이 자작농이나 소지주를/꿈꿔온 작은 희망은 이젠 사라지고,/말없이 쓰러져있는 벼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다./「그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나는 그것이 답답하다.”고 노래하고 있다. 노동자로 전락하여 일본으로 흘러 들어오는 조선인 노동자들의 고초를 그려 놓은 시 <그들 또한>에서 “몇번이고 베어도 묵묵히 자라나는 잡초처럼/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현해탄을 넘고 있다./그것이 지금에는/가는 곳곳의 길가에 보이는 잡초처럼/일본의 어느 시골에서도 여기저기/때 묻은 흰옷이 눈에 띈다.”고 적고 있다. 이같은 백철의 현실 인식은 당시의 조선인 유학생의 입장으로서는 유별난 것이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한 강한 반발을 담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백철의 현실 비판 의식이 새로운 가능성의 세계를 향해 열리고 있는 것은 <추도>와 <스미다가와, 석양> 등의 시에서 암시하고 있는 노동자의 단합된 힘을 추구하는 정신에서 찾아진다. 노동 운동을 선도하다가 체포되어 죽음을 맞게된 동료의 희생을 추모하는 <추도>의 경우, 단결과 투쟁으로 승리를 쟁취해야 한다는 새로운 각오를 보여주고 있으며, 노동자들의 고통이 어린 스미다가와 강물을 바라보면서, “모두다 여기 와 보라./어느 곳에 과연 평화가 있는가./어디에 아름다움이 있는가!/이처럼 수면이 두꺼운 원한의 빛으로 물들어 있는 것도,/모두, 가난한 이들의 죄라 할 것인가.”라고 절규하고 있다. 이러한 절규는 <X당한 동무에게>에서 작업 중 고장난 기계의 철판을 맞고 죽어간 노동자의 희생을 놓고 분개하는 장면에서 극치를 이룬다. 그리고 이 비극의 장면에서도 어김없이 노동자의 단결과 복수의 의지를 강지한다.

백철의 시 가운데 고양된 의식의 시적 형상화를 추구하고 있는 것은 <갈매기떼>와 <송림>을 들 수 있다. 바닷가에 몰려드는 갈매기떼를 노동자의 무리로 환치시키고, 서녘 하늘로 넘어가는 붉은 태양에 물드는 대지를 보며, 평화와 자유와 평등을 꿈꾸는 청년 백철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 <송림>의 경우는 이미 앞에 인용한 자서전에서 당시에 평판작이 되었음을 밝히고 있거니와, 우거진 소나무 숲에서 견고하게 서로 어깨를 나누면서 곧게 자라는 나무를 보며, 전진하는 노동자들의 강인한 투쟁 의지를 발견하고 있다.

이러한 백철의 시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미에서 볼 때, 우리 시문학사상에서 보기 드믄 사례에 해당한다. 우선, 이 작품들이 1929, 30년에 동경에서 발표되었다는 점이 주목된다. 당시 일본 동경에는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 동경지부가 존재하였으며, 그들이 <무산자>사를 설립하고 이를 근거로 조선공산당의 재건 운동을 꾀했던 것이다. 백철은 이들 조선인 프로 문단과는 관계없이 일본 문단에서 일본인들을 상대로 극렬한 투쟁적인 저항시를 일본어로 발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시작활동을 통하여 그는 다시 좌파 시동인지인 《전위시인》에 가담하였고, 다시 《일본프롤레타리아시인회》의 중요 구성원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 우리 문학인들이 일본어로 쓴 작품들이 대부분 친일적인 경향에 빠져들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백철의 시작품들은 일본어를 바탕으로 성립된 식민지 문화에 대한 색다른 문화적인 도전에 해당하는 셈이다.

백철은 《지상낙원》에 두 편의 평론을 발표하였다. 그가 관심을 두고 있던 문제는 프롤레타리아 시의 형식 문제이다. 그가 1930년 이후 《전위시인》과 《프롤레타리아시》 등의 잡지에 이른바 ‘슈프레히콜’이라고 명명된 집단 낭창시의 형태를 처음으로 소개하여 일본 프로 시단에 정착시켰던 것은 이미 알려진 일이다. 그는 《지상낙원》 시대부터 프로시의 형식 문제에 관하여 각별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그가 발표한 두 편의 평론이 모두 이 문제를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백철은 프롤레타리아 시의 현재 문제를 제재의 탐구와 형식의 탐구라는 두 가지로 구분하여 검토하고 있다. 그는 프로 시에서 제재의 탐구는 당면한 현실 운동에 기초할 것을 주장한다. 1928, 1929년에 일본에서 일어난 사회주의 운동가들에 대한 대검거 이후 프롤레타리아 운동이 침체에 빠져 있는데, 과거의 실패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운동 방향을 정립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시가 새로운 운동의 전개 방향에서 하나의 무기가 될 필요가 있음을 주목하면서,특히 자본가의 횡포에 대응하기 위한 ‘스트라이크’ 시를 제작해야 한다고 하였다. 프로 시의 형식은 자유시의 비대중성을 극복하고 노동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시가 되는 것에 목표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 백철의 견해다. 백철은 노동 대중의 생활 감각을 살릴 수 있는 음악성을 담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백철의 주장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프롤레타리아 시론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새로운 시형식의 창조문제와 관련되어 있다. 당시 일본 문단의 일각에서 제기된, 프로시의 대중성 확보를 위해 민요시의 차용이 불가피하다는 주장에 대해 백철은 생활 감정의 변화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우선 문제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그는 프로 서사시에 대해서도 공장과 기계를 상대로 하는 무산 대중의 생활감각이 과연 과거 서사시의 집단적 정서와 같을 수 없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오히려 무산 대중의 생활 감정을 살려낼 수 있는 새로운 힘있는 서정시의 구현이 중요함을 지적하고 있다.

백철은 1931년 동경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하였지만, 당연시되었던 일본 중학교 교사 직을 포기하고 새로운 길은 선택한다. 그것이 바로 국내 문단으로의 진출이다. 3년 동안 투쟁적인 시인으로서 쌓아올린 동경 문단의 경력을 안고 1930년대의 우리 문단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졸업 후 귀국을 늦춘 그가 동경의 하숙에서 탈고한 야심적인 평론 <농민문학 문제>가 조선일보에 발표된것은 1931년 10월이며, 그의 새로운 문학적 인생도 이 평론을 기점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지상낙원》에 발표된 백철 시 작품은 모두 일본 동경의 <일본 근대문학관>의 도움을 얻어 찾아내었다. <일본근대문학관>의 관계자께 고마음을 표한다. 그 가운데 두 편을 초역하여 여기 소개한다.

 

<우박이 내리던 날>

구름 구름 구름 구름

무수한 구름떼가 대군처럼 밀려간다.

……

「굉장한 구름이군!」

어머니는 한숨을 쉬었다.

「제기럴, 또 내리려누나,

내리는 것도 좋지만, 우리에겐 생사가 걸린 문제다.」

 

얼마전 그 홍수의 광경이

여윈 형의 옆얼굴에 창백하게 비쳤다.

큰비! 홍수!

다리가 떠나가고 가옥이 뒤집히고

가엾은 짐승들은 비명을 지르며 거친 물살 속으로 휩쓸려들어간다.

그리고, 논밭은 물에 잠기고 벼는 모두 썩어버렸다.

 

「오늘밤도 또 그럴까?」

나는 불안하게 형의 얼굴을 보았다.

그런데 갑자기!

엄청난 번개가 지하의 다이나마이트처럼 꽝하고 울렸다.

그리고 그것을 뒤따르듯 우르르꽝하고 울려오는

천둥!

우리는 모두 함께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뜰로 뛰어내려갔을 때

불가사의한 하얀 포탄이 수없이 흩어져 있었다.

프랑스를 구하기 위해 소녀가 용감히 폭탄을 맞았던 것처럼,

어머니는 마을을 구하려는 생각에 그 불가사의한 우박을 입에 집어넣었다.

-조선의 전설에

(그것은 나의 먼 어린 시절 어느 날의 기억 속에 있었다.)

내리기 시작하는 우박을 부인이

주워먹으면 갑자기 멎는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번은 그렇게 멈춰설 것이 아니였다.

순간순간 세력은 커져갈 뿐이다.

1분, 2분, 30분

아- 그것은 얼마나 오랜 시간이였을까.

「제기럴! 멋대로 쏟아져라」

형이 투덜거리자 곧 우박이 멈췄다.

그런 것을 알아차리기도 한 듯 딱 멎어 버렸다.

서쪽으로는 어처구니없게도 푸른 하늘까지도 보였다.

「벌써 농작물은 다 휩쓸려 버렸다」

형의 얼굴 근육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문앞으로 두세명의 젊은 농부들이 격분한 어조로 무언가 떠들어대며 지나갔다.

우리들도 어떤 무서운 예감에 휩싸여

그들의 뒤를 따라 들로 나갔다.

겨우 30분!

그러나 어처구니없는 일이 생겨 버렸다.

오늘 점심때 까지만 해도 솩솩, 파도치던 논과 밭이였는데,

벼잎 하나 남김없이 깨끗이 쓰러져 있었다.

단지, 퍼어런 벼 줄기만이 보기 흉하게 쓰러져 있을 뿐이다.

어느 것 하나 수리가 정돈 되지 않은

이 농촌.

옛 원시인들이 하던 그대로의 경작법으로,

어제는 내려쬐는 햇볕으로 가뭄이 들고, 오늘은 홍수로 떠들썩해 있는 그들

단 하루만이라도 편안한 밤을 맞이해 본 날은 없다.

그래도 살아가는데 이 길밖에 없다고 여기는 그들은

몇번이고 몇번이고 삽과 괭이를 다시 든다.

그처럼 힘들이고 고생하여 겨우 키워논 작물들이었거늘.

오늘은 또 이와같은 뜻하지 않은 재난이 엄습해 왔다.

아아- 말끔히 걷혀진 저녁 하늘

그들은 이렇게 완전히 빈털털이가 되어버렸다.

빼앗길 것은 이것저것 모두 줘버리면 된다.

가엾게도 그들이 자작농이나 소지주를

꿈꿔온 작은 희망은 이젠 사라지고,

말없이 쓰러져있는 벼의 잔해를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을 생각해야 할 것인가」

나는 그것이 답답하다. (1929.11. pp. 38-39)

 

<누이여>

누이여.

아니, 아름다운 한 사람 소지주의 따님이여.

너는 잘도 그런 건방진 말을 할 수가 있었구나.

그 소작인의 딸들은 얼마나 더러운지 몰라요.

마치 우리들과는 종자가 틀린

돼지새끼들처럼

일생, 한번도 씻어 본 일이 없는 듯한 흙투성이의 얼굴

누덕누덕 기어입은 옷.

그런데다 특유의 악취까지 풍기는

저는 그녀들 근처에 가는 것조차 싫어요.

그러기에 저는 미친듯이 소작인들을 위해 일하는 오빠의 마음을

헤아릴 수가 없어요……라고.

누이여,

네가 하는 말은 정말이다. 아니 사실이다.

그러나 누이여,

네게 그런 경멸의 마음을 갖게 할 정도로 그녀들을 천하게 만든 놈은 누구인가.

돼지새끼로까지 그녀들을 타락하게 만든 것은 어느놈인가.

그녀들로부터 입을 것 먹을 것을 빼앗은 자들은 어디의 어느놈인가.

지금 여기에 앉아 있는 너 또한 그 중 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네가 자신의 아름다움에 도취될 정도로 너를 아름답게 만들어 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네게 그 화려한 옷과 네 소중한 화장품을 만들어 준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저 안락의자에서 잠들고 있는 너의 부친이나 그외의 자본가들은 단 한번이라도 삽이나 괭이를 쥐어 본 일이 있는가.

그녀들은 영하 20도의 겨울이라 해도 불타오르는 듯한 여름이라 해도,

단 하루라도 편안히 지낼 시간을 갖지 못한다.

첫새벽 5시부터 일어나 발밑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분주히 일하는 그녀들이다.

그럼에도 제대로 밥조차 먹지 못하는 그녀들이 아닌가.

새로 베옷 한벌 만들지 못하게 지주들이 전부 거두어 간다.

그런데-

너는 지주의 딸이라 하여

매일-

아침에는 마음껏 늦잠을 잘 수 있고,

끼니 때마다 달고 맛있는 것을 실컷 먹을 수 있고,

하루에 몇 번이고 아름다움에 실증날 정도로 화장할 수가 있다.

(그것은 정말 따분한 생활이련만)

이것이 너의 자랑스런 생활 모습이다.

 

누이여

이래도, 너는 나의 일하는 마음을

모르노라 하겠는가.

너는 너와 너의 벗들만이 깨끗한 인종이라고 정하고 있구나.

그러나 그 소작인의 딸들에게도 너의 화려한 옷과 화장품을 주어보렴.

분명히 너 이상으로 아름답게 보일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돼지 새끼들 같은 그녀들을 너 이상의 아름다운 인간으로 만들기 위해서

이 일을 하는 것이다.

더 이상 너로부터 천대와 멸시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누이여,

너는 이러한 마음이 헤아려지지 않노라 할 수 있겠는가. (1929.12. p.28)

낙향(落鄕)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러다가 뚜뚜뚜 하고는 소리가 끊긴다. 나는 다시 전화번호를 확인한다. 틀림없이 번호를 제대로 눌렀다. 다른 때 같으면 ‘안녕하세요.’라고 사모님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다.

이른 봄 고향 나들이 길에 선생님 댁에 전화를 드렸다. 중학 시절 은사님이시다. 퇴임 후 낙향을 하셨다. 선생님과 사모님 내외분이 조그만 아파트에 살고 계시다. 조용한 시골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선생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곤 했다. 두 내외분이 늘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수십 년 전 지난 이야기들을 돌이키면서 선생님은 인근 동리의 문화 유적들의 보존 상태를 걱정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요즘은 무슨 연구를 하는지 궁금해 하시곤 하였다. 이번 고향 길에 잠깐 찾아뵈려고 전화를 드렸는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혹시 두 분이 외출을 하셨나 보다 하고는 두어 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드렸다. 여전히 응답이 없다.

나는 댁으로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선생님께서 사시는 아파트 문 앞에서 인터폰을 눌렀다. 안에서 누군가 목소리가 들린다. 아아 계시구나 하고 나는 안심했다. 그런데 문을 여는 젊은 부인은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얼굴이다. 나는 선생님께서 댁에 계신가를 물었다. 그 부인은 나를 한번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혹시 집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어이가 없다. 선생님 성함을 대고는 문간에 표시된 아파트의 동호수를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작년 연말까지도 선생님께서 이곳에 사셨는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제사 그 부인은 자기네가 두어 달 전에 새로 이사를 왔다고 말한다. 전에 사시던 분들이 어디로 가셨는지 모른다면서 문을 닫는다. 나는 멍 하니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파트 관리소의 경비 아저씨가 그분네들 서울로 아주 떠나셨다고 알려준다. 겨울부터 선생님 건강이 나빠졌단다. 이 시골에 두 노인이 사시기 힘들어서 자손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올라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마음이 무겁다. 선생님께서 바깥출입도 못할 정도였었는가 하고 물었다. 지난 가을에도 정정하시지 않았던가? 경비 아저씨는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손을 내젓는다. 겨울에 자꾸 편찮으시니까 서울 사시는 아드님이 내려와 모셔갔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나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사하셨다는 서울 집의 전화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답답하다.

고향 마을은 도회지에서 떨어진 시골이니까 공기 맑고 조용하다. 그러니 노인들 지내기 편할 것이라고 나는 으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변변한 병원도 없고 제대로 된 약국도 가까이에 없다. 교통도 불편하다. 잘 차려진 수퍼마켓이 있는 것도 아니니 시장 보기도 힘들다. 말로만 전원생활이지 모든 것이 다 불편하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고 지내는 것이 시골생활이다. 노인들에게 결코 편할 리가 없다.

내 주변의 친구들 가운데 노후에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마음먹는 이들이 많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며 아주 낭만적인 낙향을 꿈꾼다. 정년퇴임을 하면 좀더 편안하고 여유있게 고향에 돌아가서 노후를 즐기며 살리라. 그러나 그런 생각은 늘 잠깐뿐이다. 지금 우리네 고향은 그런 꿈속의 땅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곳.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 위에 늙은이들만이 남아서 쪼그리고 살아간다. 모두가 나이 들어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면 그 노인네들도 자식들 찾아 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더 늙어 병든 이들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우리네가 떠나온 고향은 그렇게 버려져서 더욱 찌들어가는 땅이 될 것이 뻔하다. 언제까지 마음속으로만 낙향을 꿈꾸어야 할 것인지- (권영민)

박사(博士)가 된 제자

내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받은 C군이 전화를 해왔다. 연말이 되기 전에 나를 한번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대학 연구소에서 계약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제자의 전화에 나는 그저 민망할 뿐이다. 그러나 저녁이라도 사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약속 날짜를 잡았다.

나는 C군의 대학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다. 내가 담당했던 강의에서 첫번째 리포트에 A+를 받은 유일한 학생이었다. C군은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면서 전공 문제를 내게 상의하였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시작하였다. 제 발로 고생길에 접어든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부지런하게 공부를 해서 교수들의 칭찬을 자주 들었던 C군은 대학원에서도 착실하게 자기 연구에 몰두했다. 석사과정에 적을 두고는 군대를 끝냈고, 석사 논문도 꽤 무게 있는 주제를 다루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주목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면서 결혼도 했다. 내가 주례를 맡았다. 변변한 직장도 없이 색시를 들이게 된 C군의 형편을 생각하여, 나는 좀 과하다싶게 주례사에서 신랑 자랑을 늘어놓았다. 곧 박사가 될 것이고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라고 했던가? C군은 대학을 졸업한 후 10년이 훨씬 넘은 삼십대 후반에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벌써 결혼 생활도 5년이 지났고,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그러나 박사학위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끔 찾아가는 한정식 집에서 C군을 만났다. C군은 큰 가방을 들고 넥타이까지 맸다. 일주일에 한 차례 지방 대학에 출강을 하고 있는데, 성적 처리 때문에 내려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힘들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여간 죄스럽다는 표정이다. 지난 한해도 교수님께 걱정만 드렸어요. 제대로 취직을 못하고… C군은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 잇는다.

박사학위를 받고는 바로 취직이 될 것으로 모두들 기대를 했지요. 계약제 연구원으로 2년을 보냈는데 그나마 연구프로젝트가 모두 끝나는 바람에 재계약은 없다고 하네요. 내년에는 강사 자리를 두어 군데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요즘은 강사료가 박하지는 않아서 그럭저럭 작은 살림을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활이 언제쯤 끝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동안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했고, 해마다 두세 편씩 논문도 발표하였지요. 제 깐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지난 일 년 동안은 지원서조차 낼 곳이 없었어요. 계약제 강의교수는 강사 노릇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전임 자리는 전혀 보이지 않네요.

C군의 말에 힘이 없다. 나는 C군의 손을 잡는다. 교수님 댁과 마찬가지로 저도 부양가족이 셋이나 되는 가장이 되었어요. 이제는 처가 식구들에게도 면목이 서지 않아서 아내에게 늘 미안하지요. 나는 C군에게 맥주 한잔을 권한다.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자에게 나도 그저 미안할 뿐이다.

내년 일 년이 지나면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 나는 다시 C군의 맥주잔을 채운다. 공부한다는 것. 언제나 그랬어. 사실은 언제나 전망이 밝았던 것은 아니야. 내가 대학원을 다녔던 70년대를 생각해 보면 똑똑하고 재바른 친구들은 모두 사회로 빠져 나갔지. 좀 우둔하고 느린 자들이 연구실 주변에 남아 있었어. 그래도 한 가지 자존심은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겠는가? 학문이란 것- 나 자신이 그것을 좋아서 택했다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일생동안 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네. 자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네. 공부… 자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 누가 무어래도 당당히 할 수 있지? 일본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 대학교수는 그렇게 상위의 직종은 아니야.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계약제 조교수로 여기저기 떠돌다가 종신제 교수직을 얻지 못하면 그걸로 끝나지. 그래도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지. 그 이유가 뭔지 알겠나?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야.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평생 동안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나는 이렇게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마음이 걸린다. 사십 줄에 가까이 들어선 박사 제자에게 환갑이 지난 선생이 할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속으로 그저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하고 되뇌일 뿐이다. (권영민)

<청록집(靑鹿集)> 그 후 60년

1946년 해방 1주년을 맞는 우리 문단에서 광복의 열정을 실감 있게 보여주는 한 권의 시집이 출간된다.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의 공동시집 <청록집>이 바로 그것이다. 문단의 좌우 대립과 이데올로기의 요구가 결렬했던 해방 공간에 등장한 <청록집>이라는 작은 시집은 경이로움 그 자체에 해당한다. 문학의 정치시대라고 말 할 수 있는 해방 공간에서 우파 문단을 주도했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이 시집을 해방 1주년을 맞는 기념출판물로 내세운 바 있다.

 

<청록집>은 각기 다른 시적 개성을 보여주었던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이라는 세 시인의 초기 시들을 묶은 것이지만, 한국 현대시에서 ‘자연의 발견’이라는 명제가 가장 적절하게 시적 형상성을 획득하고 있는 경우로 그 의미가 규정된다. 그리고 1930년대 말기의 시와 해방 이후의 시를 잇는 서정시의 맥락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문학사의 위치가 평가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순수시의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서정적 자아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이들이 발견한 <자연>이라는 것에서 내면적 역동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비판도 제기된 적도 있지만, 박목월의 언어 감각과 토속성, 박두진의 시적 의지와 이데아 지향, 그리고 조지훈의 고전적 정신 등은 우리 시단에 폭넓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청록집>의 시들이 보여주고 있는 시적인 정서가 삶의 현실의 여러 문제를 폭 넓게 수용하게 되는 과정은 <청록집> 이후 세 시인의 시 세계의 확대과정을 통해 확인된다.

박두진은 <오도(午禱)>(1953)에서부터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수석열전(水石列傳)>(1973) 등 수많은 시집을 내놓으면서 반복적인 율조와 절창의 언어를 통해 자기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그는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하기도 하고, 자연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를 노래하기도 한다. <산아. 우뚝 솟은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청산도 靑山道)에서 처럼, 자연을 대상으로 읊어지는 박두진의 시들은 존재의 심연을 헤매는 기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생명에의 경외감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정서적 갈등의 내면화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박두진이 노래하고 있는 자연은 자아와의 일치를 보이기 때문에, 시적 긴장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친화력에 의해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되고 있으며, 거기서 오는 영원한 생명력이 시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박목월은 <산도화>(1954)를 비롯하여 <난(蘭)․기타>(1959)에서 <경상도 가랑잎>(1968)에 이르기까지 고유의 정서와 리리시즘을 섬세한 감각으로 재현하면서, 일상의 현실과 삶의 체험을 자신의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시인 박목월이 순수한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현실로 그의 시선을 돌리면서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것은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과 거기에 깃들인 인정미이다. 예컨대 「오늘 나의 밥상에는 / 냉이국 한그릇. / 풋나물무침에 / 新苔. / 미나리김치. / 투박한 보시기에 끓는 장찌개. // 실보다 가는 목숨이 타고난 祝祿을. / 黙禱를 드리고 / 젓가락을 잡으니 / 혀에 그득한 / 자연의 쓰고도 향깃한 것이여. / 경건한 봄의 말씀의 맛이여.」(「소찬(素饌)」)와 같은 싯구에서 그는 애환이 담긴 삶이지만 소탈한 일상에 만족한다. 특히 그는 초기 시에서와 같이 자연이라는 시적 대상을 관조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현실에 자리 잡고 그 생활 속에서 작은 기쁨을 누리는 인간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박목월은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의 체험영역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초기시의 감각적 단순성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변모를 놓고 박목월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리리시즘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목월은 일상의 체험을 서정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지만, 현실에서의 갈등이나 대립을 초극하기 위한 의지를 노래하지 않는다. 자기 정서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삶의 애환을 포괄하면서도 그 현실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내세우는 법이 없이, 천품의 가락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일상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조지훈은 <풀잎 단장>(1952) 이후 <조지훈시선>(1956), <역사 앞에서>(1959) 등의 시집으로 시적 세계를 정립하고 있다.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 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한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기도 하지만, 조지훈은 변화의 시인은 아니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그리고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킬 뿐이다. 조지훈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목소리, 그것은 그의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를 고정시켜 놓고 있는 징표임이 분명하다.

<청록집>은 해방 시단에서 가장 커다란 주제로 부각되었던 정치시의 가능성을 시적 실천을 통해 거부했던 역사적 성과로 자리한다. 되찾은 모국어의 감각과 기법을 실험하면서 한국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했던 <청록집>의 시인들의 노력은 혼란의 해방 공간을 벗어난 후 지금까지도 이들을 따르는 수많은 시인들에 의해 다양한 상상력으로 발전한다. 시가 민족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생성되는 영혼의 노래이며, 그 자체의 언어와 형식도 시의 정신에 따라 스스로 갱신해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은 <청록집> 이후 60년의 한국 시단을 돌아보는 모든 문학인들에게는 새삼스런 감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