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민의 그때 그곳<3> : 광복 전후 이광수가 은거했던 남양주 사릉과 봉선사

경기 남양주시 사릉천. 하천의 오른쪽에 인가가 있지만 이광수의 농막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1945년 8월 16일 아침 이광수는 이 천변을 거닐다 광복 소식을 처음 들었다.

《 1945년 8월 16일 아침. 경기 양주(현 남양주) 진건면 사릉리에서 살던 춘원 이광수(1892∼1950)는 이날도 집 근처 사릉천변에 산보를 나갔다. 하지만 풍경이 예전과 달랐다. 개천가에서 일본 군인의 감독 아래 자갈을 파는 노역을 하던 근로보국대 대원들이 웬일인지 일을 하지 않고 삽을 든 채 서성거렸고, 그 수도 평소보다 훨씬 적어 보였다. 게다가 일본 군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그때 운허 스님이 두루마기 고름을 풀어헤친 채 바쁜 걸음으로 냇둑을 걸어오며 이광수를 향해 소리쳤다. “형님, 일본이 항복하였소. 어저께 오정에 일본 천황이 항복 방송을 했다오. 나는 지금 서울로 가는 길이오.” 이광수는 혼란스러웠다.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 》

경기 남양주시 봉선사의 다경실. 광복 후 춘원 이광수가 은거하며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쓴 곳이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난 이광수는 열 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된 뒤 친일단체 일진회의 추천으로 도일해 메이지 학원 중학부에서 공부한다. 1917년 한국 최초의 근대 장편소설인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했고, 1919년 2·8 독립선언을 주도한 후 상하이 임시정부에 참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풀려난 뒤 친일 행위가 두드러진다.

이광수는 1943년 말 도쿄에 건너가 최남선 등과 함께 일본 유학생들을 상대로 학병 지원을 격려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나 시국이 점차 험악해지자 귀국 후 서울 생활을 접었다. 이광수는 1944년 3월 아내와 자녀들을 서울에 둔 채 진건면 사릉리에 땅을 사고 조그만 초가를 지었다. 농사도 직접 지었다. 같은 정주 태생으로 불교 운동에 정진했던 삼종 이학수(운허 스님)가 근처 봉선사의 주지로 일하고 있는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비록 시골 농막으로 거처를 옮겼지만 서울의 부름에는 언제나 마다하지 않았던 그였다. 1944년 6월 18일 조선문인보국회의 평의원으로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아 결전 태세를 강조하는 강연을 하였다. 1944년 11월 11일부터 14일까지 중국 난징에서 열린 제3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했다. 광복을 맞기 직전인 1945년 상반기에도 이런저런 정치 행사에 얼굴을 내밀었고 친일 강연을 계속했다. 조선총독부는 그에게 중추원 참의 자리를 권했지만 그것만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런 행적 때문에 그가 은둔을 자처하면서 혼자 살림을 살았던 사릉의 농막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직접 소를 사서 기르며 논밭을 갈아 보기도 했지만 이것은 한낱 호사가의 일에 불과했다.

이광수는 사릉천변의 산책길에서 광복의 소식을 접하고는 잠깐 혼돈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는 자신의 삶과 그 족적을 다시 쓸어 덮을 수가 없음을 깨달았다. 차라리 죽어 버렸어야 했다고 생각했지만 죽음을 택할 용기도 없었다. 그는 병을 핑계 삼아 인근 진전읍 봉선사 절간으로 숨어들었다. 주지인 운허 스님이 경내에 작은 방 하나를 내주었다. ‘다경향실(茶經香室)’이라는 편액이 걸린 방이었다.

이광수는 여기서 몸을 숨기고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이 방에서 수필집 ‘돌베개’와 ‘나의 고백’을 썼다. 당시 문단에서는 일제강점기 문화 잔재 청산이 가장 중요한 슬로건이 되었고, 이광수의 이름 앞에는 ‘광적인 친일분자’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광수는 당시의 심경을 ‘나의 고백’에서 이렇게 털어놨다.

‘과거 칠팔 년 걸어 온 내 길이 그 동기는 어찌 갔든지 민족정기로 보아서 나는 정경 대도를 걸은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조선 신궁에 가서 절을 하고 향산광랑(香山光郞)으로 이름을 고친 날 나는 벌써 훼절한 사람이었다. 전쟁 중에 내가 천황을 부르고 내선일체를 부른 것은 일시 조선 민족에 내릴 듯한 화단(禍端)을 조금이라도 돌리자 한 것이지만 그러한 목적으로 살아 있어 움직인 것이지만 이제 민족이 일본의 기반(羈絆)을 벗은 이상 나는 더 말할 필요도 또 말할 자격도 없는 것이다. 가장 깨끗하자면 해방의 기별을 듣는 순간에 내가 죽어 버리는 것이지마는 그것을 못한 나의 갈 길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이광수의 자기비판은 단순한 개인적 윤리의식으로 치부하기 어려운 문제가 많다. 그가 살아왔던 삶과 그가 지향했던 문학은 모방과 굴종에서 비판과 저항에 이르기까지 식민지 문화가 드러내는 모든 문제성을 고스란히 배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의 때늦은 반성의 글쓰기는 친일적 행위에 대한 혹독한 자기비판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글을 통해 독자들의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길이란 글을 쓰지 않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조차 그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의 고백’은 비겁한 자기변명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달 23일 남양주를 돌며 이광수의 흔적을 찾아다녔다. 이광수가 머물렀다는 사릉의 농막(사릉리 520-1)은 지금 그 자취조차 찾을 길이 없다. 집터 근처에는 허름한 창고들이 들어섰고, 주변에 미루나무 몇 그루가 바람을 막고 서 있다. 이광수가 광복의 소식을 들었던 사릉천변에는 갈대와 잡초만 우거져 있다. 보잘것없는 이 시골 개천에 흐르는 물이 한 소설가의 영욕을 기억하는 듯하다.

춘원 이광수

이광수가 은둔했던 봉선사를 찾았다. 광릉 숲 입구 봉선사의 일주문에 들어서면 오른편에 나란히 늘어선 승탑과 비석들 끝자락에 ‘춘원 이광수 기념비’가 있다. 운허 스님의 배려로 1975년 세워진 것이다. 다른 비석들은 화강석에 용의 무늬를 새겨 넣은 ‘이수((리,이)首)’가 비석의 머리를 장식하고 있는데 춘원의 기념비는 갓이 씌워져 있지 않은 채로 눈비를 그냥 맞고 서 있다. 당초부터 갓을 만들어 씌우지 않았는지, 아니면 비석 위에 얹은 이수를 일부러 깨뜨려 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누군가 가혹한 형벌을 비석에까지 내리고자 한 것인가.

공교롭게도 이날은 운허 스님의 32주기 기신재였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스님들과 불자들 사이로 이광수가 머물렀던 ‘다경향실’이 눈에 띈다. 지금은 조실 스님의 요사채로 쓰인다는 이곳에서 이광수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 그렇게 이광수는 우리 곁에서 애써 지워지고 있었다.

춘원 이광수. 그는 한국 근대문학의 맨 앞자리에 서 있지만 한국문학의 가장 깊은 정신적 상처다. 문학을 통해 한국 사회가 일제강점기에 추구했던 모더니티의 가치를 가장 먼저 문제 삼았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그가 서 있던 자리는 우리가 지금 서 있는 곳과 결코 다르지 않다. (2012.12.10 /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권영민의 그때 그곳<2> : 윤동주 유고 시집이 숨겨져 있던 전남 광양 정병욱 생가

《 매년 봄이 되면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 일대. 남해와 맞닿은 이 아름다운 어촌 마을엔 시인 윤동주(1917∼1945)와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의 인연이 깃든 정병욱의 생가가 남아 있다. 윤동주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비밀을 품은 집이다. 시간을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으로 돌려본다. 》

1940년 봄. 열여덟의 정병욱이 연희전문(현 연세대) 문과에 입학한 뒤 가장 먼저 친해진 선배가 윤동주였다. 신문 학생란에 실린 정병욱의 글을 보고 윤동주가 먼저 정병욱을 찾았다. 윤동주는 정병욱의 학교 2년 선배였다. 멀리 북간도 용정 땅에서 온 윤동주와 전남 광양에서 온 정병욱, 두 문청(文靑)은 글을 통해 가까워졌다. 정병욱은 연희전문 기숙사 생활부터 학교 공부까지 윤동주의 도움을 받아 낯선 서울 생활에 적응했다.

이듬해 봄 둘은 기숙사를 나와 종로 누상동에 하숙을 정했다. 광복 직후 활동했던 소설가 김송(金松)의 집이었다. 두 사람은 방을 함께 썼다. 윤동주는 늘 자신이 쓴 시의 원고를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참회록’ ‘간(肝)’ 같은 시들이 하숙방에서 탄생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윤동주가 2년 선배였지만 둘은 하숙방을 함께 쓰며 문학에 대해 고민하던 절친한 문우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문학과 예술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를 따라 정병욱도 일요일이면 교회당을 찾았다. 충무로 책방거리도 함께 거닐었고, 음악다방에 들렀다가 영화관을 찾기도 했다.

당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자신이 평소에 써두었던 시들을 정리해 시집을 펴낼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제강점기 상황에서의 시국이 허락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우리말로 된 책자 발간이 금지됐다. 윤동주는 1941년 모두 열아홉 편의 시를 자필로 정리해 놓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원고를 손수 제본해 총 세 권을 만든다. 이 시집의 서문을 시로 적은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서시(序詩)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입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거러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는 그중 한 권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이라고 썼다. 육필로 만든 단 세 권의 시집 가운데 하나를 아끼는 동생에게 준 것. 다른 한 권은 연희전문 문과 교수였던 이양하 선생께 드리면서 시집 출간을 상의했지만 무산됐다. 결국 윤동주는 남은 한 권을 지닌 채 1942년 일본으로 떠났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뒤 정병욱도 모교를 떠나야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학병에 징발되었기 때문이다.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자신의 책과 노트, 그리고 윤동주의 자필 시집 원고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하셔야 한다”는 간곡한 당부도 곁들였다. 정병욱은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부상으로 후송돼 목숨을 건졌다.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정병욱은 경성대학(현 서울대) 국어국문과에 편입해 학업을 계속하던 중에 끊겼던 윤동주의 소식을 들었다. 북간도 용정에서 광복과 함께 귀국한 윤동주의 가족을 통해서였다. 충격적이고 가슴 아린 소식이었다. 윤동주가 1943년 7월 교토의 도시샤대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등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결국 19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악형(惡刑)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 정병욱은 윤동주가 생전에 건네주었던 시집 원고를 떠올렸다.

정병욱은 고향 집을 찾았다. 광복 후 어수선한 서울을 떠나 오랜만에 찾은 귀향길이었다. 고향집은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에 있는 점포형 주택. 그의 부친은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향리의 청년 교육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정병욱은 집에 들어서자 바로 어머니에게 전에 맡겼던 책과 노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었다. “잘 간수했으니 걱정 마라”고 말한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싸 놓은 책과 노트를 꺼내왔다. 보자기를 푼 정병욱은 자신의 책과 노트 사이에 있는 윤동주의 시 원고를 보자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는 혹 남들 눈에 띌까, 이들 자료를 양조장 큰 독 안에 감추었다가 지금껏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해 왔다고 전했다.

정병욱은 서울로 올라오자 곧바로 시집 원고를 윤동주의 가족에게 보였고, 이 원고와 함께 윤동주의 시 작품들을 조사하여 시집 발간 작업을 서둘렀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마침내 나오게 된다.

도시샤대 영문과 선배였던 시인 정지용은 이 시집에 이런 글을 붙였다. ‘청년 윤동주는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지난달 말 망덕포구에 있는 정병욱의 생가(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23)를 찾았다. 1925년 건축된 일본식 목조건물인 이 집은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을 기려 200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집은 원래 건평만 264m²(약 80평)였지만 지금은 반파돼 105m²(약 32평·방 5칸)의 한 건물만 남았다. 생가 옆에서 횟집을 하는 정병욱의 외조카 박춘식 씨(57)가 현재 소유주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을까. 날 좋은 주말이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적지 않단다. 다만 이들을 맞을 안내자도, 변변한 공중화장실조차 없다는 게 아쉽다고 박 씨는 전했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 원고. 표지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드림)’이라고 적었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정신과 그 맑은 영혼을 가슴 깊이 간직하기 위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를 한자로 바꾼 ‘백영(白影)’을 아호로 삼았다. 두 사람의 우정이 아니었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의 말을 듣고 원고를 고이고이 간직했던 노모(老母)의 자상함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눈을 돌려 바라본 섬진강의 물결은 이날도 말없이 평안하고 푸르렀다. (2012.11.26 /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권영민의 그때 그곳<1> : 1942년 봄 경주 건천역, 박목월-조지훈의 첫 만남

* <동아일보>에 연재 중인 <권영민의 그때 그곳>을 전문 게재합니다.

《 문학작품은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것은 작가가 바라보는 세상, 그가 만나는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잉태되는 결실이다. 한국 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들의 잊을 수 없는 공간과 만남들을 더듬어 숨겨진 이야기를 찾아내는 시리즈를 시작한다. 이는 개인과 시대의 문학세계라는, 강(江)의 발원지를 알려주는 지도와도 같다. 권영민 단국대 석좌교수와 기자가 함께 전국을 돌며 발품을 팔았다. 먼저 청년 목월과 지훈이 처음 만났던 1942년 봄으로 시간을 돌려 경주 건천역을 찾았다. 》

일제강점기 말, 촉망받는 시인 두 명이 문단에 나란히 얼굴을 내밀었다. 1939년 잡지 ‘문장’을 통해 데뷔한 박목월(1916∼1978)과 이듬해 같은 잡지를 통해 시단에 나온 조지훈(1920∼1968)이었다. 당대 명망 높았던 정지용 시인은 목월을 추천하며 “북에는 소월이 있었거니, 남에 목월이 날 만하다”고 극찬했다.

지훈은 목월이 어떤 시인인지 궁금했지만 만날 도리가 없었다. 일본의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모든 신문과 잡지들이 문을 닫던 때라 ‘문장’도 곧 강제 폐간됐다. 갓 등단한 지훈과 목월은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지훈은 혜화전문(동국대의 전신)을 졸업한 뒤 바로 오대산 월정사로 들어갔고, 목월은 고향 경주에 머물며 금융조합 서기 일을 했다. 누구도 이들을 시인으로 알아주지 않던 시기였다.

1941년 겨울 지훈은 서울로 돌아왔다. 그는 다른 문우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듬해 봄 지훈은 옛날 잡지에 실린 주소를 확인해 목월에게 편지를 썼다. ‘근황이 궁금하다, 얼굴 한번 보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큰 기대를 하지 않던 지훈에게 뜻밖에도 며칠 뒤 목월의 답장이 닿았다. ‘경주박물관에는 지금 노오란 산수유 꽃이 한창입니다. 늘 외롭게 가서 보곤 하던 싸느란 옥적(玉笛)을 마음속 임과 함께 볼 수 있는 감격을 지금부터 기다리겠습니다.’

지훈은 생전 처음 경주 구경도 하고, 만나고 싶었던 목월을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벅찼다. 목월도 곤궁한 생활이었지만 벽지에서 귀한 문우를 맞을 생각을 하니 설렜다.

1942년 이른 봄날 해질녘의 건천역. 하늘에서는 봄비가 분분히 흩어져 내렸다. 목월은 한지에 ‘박목월’이라고 자기 이름을 써 들고 기차가 오기를 기다렸다. 기차가 역 구내로 들어와 멈추자, 큰 보퉁이를 머리고 이고 있는 시골 아낙네 서넛과 촌로 두엇이 플랫폼에 내렸다. 마지막으로 천천히 내려선 사내. 훤칠한 키에 긴 머리를 밤물결처럼 출렁거리던 신사. 조지훈이었다. 목월은 자기 이름을 적은 한지를 높게 흔들었다. 단박에 서로 알아본 두 청년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 안았다. 목월은 스물여섯, 지훈은 스물둘이었다.

암흑의 시대를 절망 속에서 살아가던 두 시인은 이렇게 건천역에서 처음 만난 뒤 따뜻한 문학적 동지가 되었다. 둘은 폐허의 고도 경주의 여관에서 거의 매일 뜬눈으로 밤을 새우며, 문학과 역사에 대한 얘기를 나눴다. 지훈은 시인이라는 자기 존재를 귀히 여기는 목월이 고마웠고, 무엇보다 그가 발표할 수도 없는 시를 써 두고 있는 점이 믿음직했다. 경주를 처음 찾은 지훈을 위해 목월은 안내자를 자처했다. 석굴암을 찾으니 대숲 사이로 복사꽃이 발갛게 고개를 드러낸다. 진눈깨비가 흩날려 제법 쌀쌀했다. 불국사 나무 그늘에서 찬술에 취하여 떨고 있는 지훈을 목월은 외투로 감싸 주었다. 둘은 경주의 왕릉 사이 오솔길을 걸으며 솔밭 아래 바람 소리를 모으기도 했다.

조지훈은 열흘이 넘게 경주에 머물렀다. 그리고 둘은 헤어졌다. 지훈이 자기 고향인 경북 영양에서 목월에게 고마움의 편지를 보내왔다. 거기에 목월을 위해 정성스레 쓴 시 한 편이 덧붙여져 있었다. ‘목월에게’란 부제가 붙은 시 ‘완화삼’이었다.

‘차운 산 바위 우에/하늘은 멀어/산새가 구슬피/울음 운다.//구름 흘러가는/물길은 칠백 리//나그네 긴 소매/꽃잎에 젖어/술 익는 강마을의/저녁 노을이여//이 밤 자면 저 마을에/꽃은 지리라//다정하고 한 많음도/병인 양하여/달빛 아래 고요히/흔들리며 가노니….’

지훈의 편지를 받아 들고 감격한 목월은 밤새 화답시를 준비한다. 그것이 바로 목월의 시 ‘나그네’다.

‘강나루 건너서/밀밭 길을//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길은 외줄기/남도 삼백 리//술 익는 마을마다/타는 저녁 놀//구름에 달 가듯이/가는 나그네.’

경주를 처음 찾은 조지훈을 위해 박목월은 안내자를 자처했다. 1942년 봄 석굴암 앞의 지훈(왼쪽)과 목월. 동리목월문학관 제공

두 시인의 아름다운 만남은 광복 후 박두진과 함께 엮은 3인 시집 ‘청록집’으로 꽃을 피우게 된다.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한국 현대시의 정신적 좌표가 됐다. 건천역에서 이루어진 두 청년 시인의 만남이 한국 현대시의 흐름을 바꾸게 한 것이다.

지난달 중순 찾은 경주시 외곽의 건천역. 중앙선 지선의 열차가 하루 상행과 하행 각각 네 차례씩 정차한다는 작고 한적한 역이었다. 70여 년 전처럼 보따리 장사를 하는 할머니들은 여전하지만, 그때 시인들은 간 곳이 없었다. 텅 빈 플랫폼 한 자락에서 청년 목월과 지훈의 뜨거운 포옹을 그려 보았다.

건천역에서 차로 10여 분 가면 목월이 살던 집(경주시 건천읍 모량리 471)이 있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난 목월은 어릴 적 이곳으로 이사와 유년과 청년 시절을 보냈다. 지금은 집터만 남아 있다. 2014년 말까지 복원이 이뤄질 예정이다. 집터를 둘러본 뒤 시내로 나오는 길. 농수로 옆 작은 골목길은 굽이굽이 이어졌다. 지훈을 만나기 위해 건천역으로 나왔던 청년 목월의 뒷모습이 모퉁이 끝에서 언뜻 보이는 듯했다.(2012.11.12 /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12월 문학콘서트 안내

 

권영민의 문학콘서트 일곱 번째 이야기

 

안녕하세요. 2012년 마지막 문학콘서트가 경기도 용인에서 열립니다.

윤후명, 홍선란 시인과 함께,  ‘문학의 경계 넘어서기’에 대한 권영민 교수의 흥미로운 강의가 펼쳐집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권영민의 문학 이야기 : 문학의 경계 넘어서기

초대손님 : 윤후명 (시인. 소설가), 홍성란(시조시인)

특별공연 : 박종순 명창 외

 

일시 :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3시

장소 : 경기도박물관 강당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상갈동 85 // 전화번호 : 031-288-5300)

 

 

윤후명 (尹厚明)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연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의 새>가 당선되었다. 1969년 강은교, 김형영, 박건한 등과 함께 시 동인지 『70년대』를 창간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1977년 첫 시집 『명궁』을 낸 후 시집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1992)을 출간하였고, 최근 신작 시집 『쇠물닭의 책』(2012)을 펴냈다.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산역』이 당선되어 소설가와 시인의 길을 병행하면서 1980년 김원우, 김상렬, 이문열, 이외수 등과 함께 소설 동인지 『작가』를 창간하였다. 소설집으로는 『敦煌의 사랑』(1983), 『부활하는 새』(1986), 『원숭이는 없다』(1989), 『오늘은 내일의 젊은 날』(1996), 『귤』(1996), 『여우 사냥』(1997), 『가장 멀리 있는 나』(2001) 등과 장편소설 『별까지 우리가』(1990), 『약속 없는 세대』(1990), 『협궤 열차』(1992) 등이 있다. 이 중 단편 「둔황의 사랑」 「원숭이는 없다」 「사막의 여자」 등이 각각 프랑스어, 중국어, 독일어, 영어 등으로 번역되어 해외에 소개된 바 있다. 녹원문학상, 소설문학작품상, 한국창작문학상, 현대문학상, 이상문학상, 김동리문학상을 받았다. 현재는 창작에 전념하면서 문학비단길 고문과 국민대 문창대학원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홍성란

1958년 충남 부여 태생. 1989년 중앙시조백일장으로 등단하였다. 성균관대학교에서 현대시조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성균관대와 방송대에서 강의하면서 유심시조아카데미원장을 맡고 있다. 시조집『황진이 별곡』『겨울 약속』『따뜻한 슬픔』『바람 불어 그리운 날』외 시조선집『명자꽃』『백여덟 송이 애기메꽃』등이 있다. 연간 시조전문지 <유심시조 아카데미>를 발행하고 있다. 1995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2003년 유심작품상, 2005년 중앙시조대상, 2007년 현대불교문학상, 2008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2009년 이영도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주관 : 용인문학회

후원 : 경기문화재단, 문학사상사, 용인시, 용인신문사

 

 

최명길, <농사꾼 아버지> 외

농사꾼 아버지  / 최명길

밤 이슥토록 밭도랑을 파내면서

앞드로 논물 대던 날 밤 그 기억의 파편을

한 삽 퍼내 올렸다.

 

가물 타 논바닥이 물을 달라고 쩍

벌어지고야 말던 날

나는 괭이를 들러 메고 윗논 물꼬를 땄다.

그 윗논 물꼬를 따고

그 윗논 물꼬도 따고

또 그 윗논 물꼬를 따고

남의 물꼬를 따고 따

두어 시간이나 따고 올라가 마침내

물 한 줄기가 겨우 우리 논 물꼬에 닿으며

멍석 한 닢만큼 물자리를 폈을 때

논바닥이 물 먹는 소리를 꼬르륵 꼬르륵

냈을 때

 

아버지는 마른 부시를 그었다.

부싯돌과 부시가 부딪쳐 튀는 불꽃이

섬들 버덩 어둠을 건너뛰며 번쩍여

마치 별을 데리고 노는 듯

도깨비를 데리고 노는 듯 했다.

 

평생 지게 등짐 무게에 짓눌려

다리뼈가 바깥으로 휘어 튕겨져 나갔던

농사꾼 아버지

 

 

 

강릉 노파 생각  

야야 네 몰골이 매련읎다.

패래서 빼깡챙이가 됐다이

 

우연히 고향 마실에 들렸다가

어른을 만나 이런 말을 듣노라면

나 참 달부 어여워서 꼭 가랑낭그뗑이 같은

벌거지를 씹는 듯하다.

 

뙛에서 시집 와 구매 비얄에 살던 그 새댁은

얼굴이 곱사라했으나 꼬불아져

몸을 오부뎅이로 질목쟁이 돌방구에 기댄 채

걱정이 죄련찮다.

 

올해는 날쌔가 노박 사무루워서

논다랑이에 복새가 들고 피가 개락이라

입쌀 구경 하기는 다 틀렸다.

 

사랑모텡이 그 참꽃낭근 별탈 없던가

 

하지만 몇 년 전 그 어른 가시고 나자

마실에는 이제 나를 알아보는 이 아무도 없다.

천지 사이가 텅 비었다.

 

그래 어픈 가. 어여 살페가우야

자가 왜 저닷타게 패랬지

*가랑낭그뗑이: 마른 갈참나뭇가지

 

약력 : 1940년 강릉 출생.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화접사』『풀피리 하나만으로』『반만 울리는 피리』『은자, 물을 건너다』『콧구멍 없는 소』『하늘 불탱』등이 있고 명상시집『바람 속의 작은 집』을 펴냈다.

정일근, <미래에서 온 편지> 외

 

*호드기라고 하는 것은 버드나무인데요 버드나무/버드나무 물오를 때 살살 손으로 이리 틀면/그게 물이 올라가지고/나무는 나무대로 껍데기는 껍데기대로/이리 틀어가지고 인제/껍데기는 껍데기대로 알맹이는 알맹이대로 나오면/칼로 잘라가지고 인제/겉껍데기는 벗겨버리고 속껍데기가 또 있거든/ 속껍데기 그것을 이렇게 불면 호드기가 불리고/피리라 하는 것은 풀잎으로 부는 것이 피리고/ 피리라 하는 것은 잘 부는 사람은 뭐/무엇이라도 입에 대면 뭐 다 소리가 나고/못 부는 사람은 그 피리 퉁소는 공부 퉁소요/피리는 팔자 팔자있다 하는 거야. (2009년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에서 채록된 ‘경남지역어 조사보고서’ 중에서)

 

 

아래 승기, 곁에 성기

경상도 사람에겐

단모음 으/어 구별이 없는데

내 친구 김승기

아무리 자기 이름 승기라고

성기가 아니라 승기라 해도

듣는 귀도 성기로 듣고

말하는 입도 성기라 따라하는데

이 친구 그때마다, 꼭

‘곁에 성’이 아니라 ‘아래 승’이라고

‘곁에 성기’가 아니라

‘아래 승기’라고 강조하는데

어느 날 그 말 듣고 있던

불콰한 형님 왈

성기라 하면 좆인데

그 좆이 아래에 달렸지

곁에 달린 좆이 어디 있나

그런 좆 있으면 구경 좀 하자고

불호령 내렸는데

그래서 김승기는

여전히 김성기인데.

 

약력 : 경남 진해 사람. 1984년 <실천문학> 신인상과 198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으로 <바다가 보이는 교실><마당으로 출근하는 시인><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등. 소월시문학상, 영랑시문학상, 지훈문학상(시 부문), 이육사시문학상 등을 수상. 경향신문, 문화일보 기자를 거쳐 현재 경남대학교 교수, 청년작가아카데미 원장.

나기철, <명순이> 외

 

* 서카름 : 서동네

 

 

젤라의 꽃 6

내 수호 성인

프란치스꼬

가신 날

 

책상에

*고장 없다

 

나중에

떼쓰니

 

**물애기,

물애기,

라고

놀린다

  

* 꽃

** 낳은 지 얼마 안 되어 몸이 굳지 않은 아이

 

약력 : 1987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으로 『섬들의 오랜 꿈』『남양여인숙』『뭉게구름을 뭉개고』『올레 끝』등. <작은 詩앗 채송화> 동인. 현재 제주도 신성여고 교사.

고재종, <십일월> 외

 

 

 

한바탕 잘 끓인 추어탕으로 

우리 동네 성만 씨네 산다랑치논에, 그 귀퉁이의 둠벙에, 그 옆 두엄자리의 쇠지랑물 흘러든 둠벙에, 세상에, 원 세상에, 통통통 살 밴 누런 미꾸리들이, 어른 손꾸락만한 미꾸리들이 득시글벅시글 난리더랑께!  

그걸 본 가슴팍 벌떡거리는 몇몇이, 요것이 뭣이당가, 요것이 뭣이당가, 농약물 안 흘러든 자리라서 그런가 보다며 너도 나도 뛰어들어, 첨벙첨벙 반나절 요량을 건지니께, 양동이 양동이로 두 양동이였것다!

그 소식을 듣곤, 동네 아낙들이 성만 씨네로 달려오는디, 누군 고사리를 삶아오고 실가리를 추려오고, 누군 들깨즙을 내오고 태양초물을 갈아오고, 누군 육쪽마늘에 다홍고추를 다져오고, 잰피가리에 참기름에 사골에, 넣을 것은 다 넣게 갖고 와선, 가마솥 한가득 붓곤 칙칙폭폭 칙칙폭폭, 미꾸리 뼈 추릴 새도 없이, 호와지게 끓여내니께,

그 벌건, 그 걸쭉한, 그 땀벅벅 나는, 그 입에 쩍쩍 붙는 추어탕으로 尙齒마당이 열렸는디, 그 허리가 평생 엎드렸던 논두렁으로 휜 샛터집 영감도, 그 무르팍이 자갈밭에 삽날 부딪는 소리를 내는 대추나무집 할매도, 그 눈빛이 한번 빠지면 도리 없던 수렁 논빛을 띤 영대 씨와, 그 기침이 마르고 마른 논에 먼지같이 밭은 보성댁도 내남없이, 한 그릇 두 양푼씩을 거침없이 비워내고 봉께

봉두난발에, 젓국 냄새에, 너시에, 반편이로 삭은 사람들이, 세상에, 원 세상에, 그 어깨가 눈 비 오고 바람 치는 날을 닮아 버린 그 어깨가 풀리고, 그 핏줄이 평생 울분과 폭폭증으로 맥혀 버린 그 핏줄이 풀리고, 그 온몸이 이젠 쓰러지고 떠나 버린 폐가로 흔들거리는 그 온몸이 풀리는지, 모다들 면상이 발그작작, 거기에 쐬주도 몇 잔 걸친게 더더욱 발그작작해서는, 마당가상에 아직 못 따 낸 홍시알들로 밝았는디,

때마침 안방 전축에선, 쿵짝 쿵짝 쿵짜자 쿵짝 네 박자 속에 사랑도 있고 눈물도 있고 이별도 있다 허니, 한번 놀아 보장께, 기필코 놀아 보장께, 누군가 추어 대자, 모다들 박수 치고 보릿대춤 추고 노래 부르고 또 쐬주 마심서, 아 글쎄 늦가을 노루꼬리만한 해 넘어가는 줄도 모르고 한바탕 잘 놀다봉께, 아 글쎄, 청천하늘의 수만 별들도 퉁방울만한 눈물 떼를 글썽이며 귀경 한번 잘 하더랑께!

 

약력 : 1957년 전남 담양 출생. 1984년 <실천문학> 신작시집으로 등단. 시집 『날랜 사랑』『쪽빛 문장』 외 다수. 신동엽창작상, 소월시문학상 등 수상. 현재 계간 <문학들> 기획의원

구재기, <서릿발 아침> 외

 

*치나! : 저리 가!(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치나랑게! : 저리 가라니까!(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흉작凶作

어이서* 푸작나무*

뒤집어 말리는 소리

그라고*, 가랑잎 긁어대는

갈쿠질* 소리

갑자기 밀려온 추위에

구들장 온기마저

죄다* 사라진 탓이다

다 저녁 때

기뚜래미* 울음소리마저도

고뿔*에 든 것 같다

모탱이*에 내동댕이쳐진

부시땅*이라도 밀어 넣고

아궁이에 풀무질*을 해댈까

왼죙일* 치질해 보아도

남은 나락 별반 없고

봉창*마저 텅 비어버린

굶품한 이 가을

굴타리먹힌* 감 하나

푸지게* 먹을 수 없구나

 

*어이서 : 어디에서(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푸작나무 : 산에서 땔감으로 베어온 잔 나뭇가지와 억새풀 등(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그라고 : 그리고(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갈쿠질 : 갈퀴질(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죄다 : 모조리, 모두 다(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고뿔 : 감기(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기뚜래미 : 귀뚜라미(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보탱이 : 모퉁이(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부시땅 : 부지깽이(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왼죙일 : 온 종일(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봉창 : 호주머니(충남 서천지방 사투리)

*푸지다 : 매우 많고 넉넉하다

*굴타리먹다 : 벌레 등이 파먹다

 

약력 : 1950년 충남 서천 출생.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편안한 흔들림』과 시선집 『구름은 무게를 버리며 간다』등 다수. 충남도문화상, 시예술상본상, 충남시협본상 등 수상.

방언의 시학 혹은 사투리로 시 쓰기

오늘 나는 이곳 공주에서 열게 된 여섯 번째의 문학콘서트를 ‘사투리로 시 쓰기’라는 특이한 제목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주제를 택하게 된 것은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고장에서 시를 쓰며 살아온 나태주 시인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해오셨습니다. 나 시인은 훌륭한 시는 ‘시인의 영혼이 스며들어 있는 시’라고 늘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언어와 합치하여 이들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 참된 시인의 작업이라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적 태도를 통해 전통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일상적인 삶의 정경이라든지 인정과 사랑의 깊은 의미를 자신의 언어로 노래하였습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력과 깊은 사색은 모두 그 질박한 언어를 통해 풍부한 시적 형상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주선해 주신 나태주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나태주 시인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시인 다섯 분을 이곳 공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분들께 자기 지역의 사투리를 시어로 활용한 시를 한번 써 주십사는 당부를 드렸지요. 여기 자료집에 다섯 분의 시가 나란히 실렸습니다. 이 시들을 함께 즐기면서 오늘의 주제인 ‘사투리로 시쓰기’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여기서 먼저 박목월의 시 「이별가」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이 시에서 경상도 사투리 ‘뭐락카노, 뭐락카노’의 반복을 통해 거두고 있는 정서의 깊이와 그 확대는 특기할 만합니다.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경상도 사투리의 묘미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뭐락카노’라는 이 한마디 말은 매우 복잡한 내면적 정서의 표출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당위적인 것에 대한 반문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선행하는 진술 자체에 대한 일종의 자기 확인법으로도 쓰입니다. 박목월은 이 한 마디의 말을 통해 토착어의 시적 기능을 절묘하게도 살려내고 있습니다. 자기 지역의 특징적인 방언 한 마디를 골라 이토록 가슴 저미는 시어로 만든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토속어의 시적 활용이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1930년대의 시인 백석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백석의 시에 그려지는 시적 정황과 그것을 묘사하고 있는 언어는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을에서는 세 벌 김을 다 매고 들에서

개장취념을 서너 번 하고 나면

백중 좋은 날이 슬그머니 오는데

백중날에는 새악시들이

생모시치마 천진푀치마의 물팩치기 껑추렁한 치마에

쇠주푀적삼 항라적삼의 자지고름이 기드렁한 적삼에

한끝나게 상나들이옷을 있는 대로 다 내입고

머리는 다리를 서너 켜레씩 들어서

시뻘건 꼬둘채댕기를 삐뚜룩하니 해 꽂고

네 날백이 따배기신을 맨발에 바꿔 신고

고개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가는데

무썩무썩 더운 날에도 벌 길에는

건들건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허리에 찬 남갑사 주머니에는 오랜만에 돈푼이 들어 즈벅이고

광지보에서 나온 은장도에 바늘집에 원앙에 바둑에

번들번들하는 노리개는 스르럭스르럭 소리가 나고

고개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오면

약물터엔 사람들이 백재일치듯 하였는데

붕가집에서 온 사람들도 만나 반가워하고

깨죽이며 문주며 섶가락 앞에 송구떡을 사서 권하거니 먹거니 하고

그러다는 백중 물을 내는 소내기를 함뿍 맞고

호주를 하니 젖어서 달아나는데

이번에는 꿈에도 못 잊는 붕가집에 가는 것이다

붕가집을 가면서도 칠월 그믐 초가을을 할 때까지

평안하니 집살이를 할 것을 생각하고

애끼는 옷을 다 적시어도 비는 시원만 하다고 생각한다

 

백석의 시 가운데 민중들의 소박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칠월 백중」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시적 대상에 대한 묘사의 사실성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각각의 시행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듯한 서술적 효과를 드러내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백중날 약물터에 놀이를 나가는 새악시들의 모습을 그 옷치레부터 수선스럽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넘고 넘어 약물터에 모여든 사람들의 흥겨운 모습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작품 속에 묘사되는 대상들이 백중날 약물터라는 하나의 구체적인 시적 공간 속으로 집약되면서 시적 감흥도 고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정서적 고양 상태에서 ‘백중 물을 내는 소내기를 함뿍 맞고’ 모두가 후줄근하게 젖지만, 오히려 마음은 차분하게 다가올 살림살이를 생각하면서 ‘붕가집’으로 향합니다. 이러한 시적 진술을 통해 시인은 감각적인 시적 심상들을 공간적으로 병치시키면서 동시에 그 공간 자체를 한 폭의 풍경으로 꾸며내고 있습니다. 백석의 시는 이야기조의 서술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지배적 인상을 포착해내는 언어의 감각성을 이처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앞의 시 「칠월 백중」에서 처럼, 백석은 자신이 설정하고 있는 시적 공간에 자신의 말과 시적 화자의 말을 동시에 서로 다른 관점과 방향으로 펼쳐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험적 자아로서의 시인의 입장을 감추고자 하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백석의 시는 시적 화자의 일관된 언어 체계와 미묘하게 경계를 이루는 시인 자신의 토속적 언어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언어들은 규범적인 표준어와 지역적인 방언 사이의 대화 공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통해 자기와 다른 언어 체계를 지니고 있는 시적 화자와 대화적 공간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치밀한 전략과 언어적 직관이 필요합니다. 시인 백석의 문학적 재질이 바로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적 정서도 그 스스로를 소리로 드러내게끔 하지 못한다면, 그 시적 묘사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서의 세계는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인상으로 묘사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두 편의 시를 예롤 들어 보았습니다만, 시에서 토속어 또는 사투리라는 것이 가지는 시적 담론의 특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한번 같이 생각해 봅시다. 시 속에서 사투리가 시적 담론의 체계를 형성하는 데에 가장 기능적인 것은 일차적으로 어휘의 변별성에서 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휘론적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휘의 다양한 활용 형태의 변화에서 특징이 드러납니다. 낱낱의 어휘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의미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그 정서적인 요소를 최대한 확대하고 있는 것이 지역의 사투리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문체론적인 특징에 해당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을 간과해버림으로써 사투리의 지역적 특성과 개인적 언어의 감각을 무시해버리는 일도 생깁니다. 사투리와 표준어의 간격으로 인하여 시적 언어의 해석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이육사의 <광야(曠野)>를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의 첫 연에서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는 구절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사용된 ‘어데’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라고 생각합니다. 경상도 사투리에서 ‘어데’라는 말은 표준어의 ‘어디’와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은 뒤에 이어지는 시적 진술에 대한 강한 부정과 의문을 표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구절은 ‘닭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태고의 적막’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시를 해석하고 있는 대부분의 평자들은 그러한 사투리의 특징을 외면하고 표준어 ‘어디’로 이 구절을 읽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천지의 개벽을 알리듯 들려오는 것’으로 아주 엉뚱하게 해석해버리고 있습니다. ‘어데/어디’라는 사투리와 표준어의 간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생겨난 일입니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여흰 서름에잠길테요

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날

떠러져누은 꼿닙마저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쳐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찰란한슬픔의 봄을

 

이 시의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구절을 주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쓰인 ‘하냥’ 이라는 시어도 사투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에 ‘늘’이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례로 들고 있는 것이 바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이 구절입니다. 금성출판사 판 <<국어대사전>>에도 ‘한결같이 줄곧’이라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으며, 역시 그 용례로 이 싯구를 들고 있지요. 대부분의 교과서도 모두 이같은 풀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냥’이라는 말이 일상적인 용법에서 ‘늘’과 같이 시간을 표시하는 말로 쓰이는 예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충청도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 ‘ 하냥’이라는 말이 쓰이는 예로 ‘(1) 나하고 하냥 가자. (2) 온 식구들이 모두 하냥 사는 것이 소원이다.’ 등과 같은 말을 들 수 있지요. 이러한 예로 본다면 ‘하냥’은 ‘함께 더불어’ 또는 ‘ 같이 함께’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삼백 여순날 함께 섭섭해 우옵내다’로 읽어야만 합니다. 시적 주체로서의 <나>는 떨어지는 모란을 보고 그 모란과 <하냥>(함께) 다시 모란이 피어날 때까지 울면서 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기다리는 정서>와 <잃어버린 설움>을 절묘하게 대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투리는 이렇게 일상적인 개인의 감각과 지역적 정서를 서로 밀착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외면하면 시의 내적 공간이 협소해집니다.

저는 우리 시인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언어 감각과 지역적 정서를 절묘하게 결합시킬 수 있는 시어로서의 사투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투리는 그동안 표준어 중심의 국어교육의 현장에서 모두 밀려났고, 이제는 매체 환경의 변화를 따라 언어의 지역적 편차가 사라지면서 모두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문학의 영역에서만 사투리가 사투리로서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작은 자리를 남겨두고 있지요. 시를 통한 사투리의 부활이라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시어로서의 사투리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 자리에 나오시게 될 다섯 분의 시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