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향(落鄕)

아무래도 이상한 일이다. 신호는 가는데 전화를 받지 않는다. 그러다가 뚜뚜뚜 하고는 소리가 끊긴다. 나는 다시 전화번호를 확인한다. 틀림없이 번호를 제대로 눌렀다. 다른 때 같으면 ‘안녕하세요.’라고 사모님의 목소리가 들렸을 것이다. 그런데 아무 반응이 없다.

이른 봄 고향 나들이 길에 선생님 댁에 전화를 드렸다. 중학 시절 은사님이시다. 퇴임 후 낙향을 하셨다. 선생님과 사모님 내외분이 조그만 아파트에 살고 계시다. 조용한 시골 생활을 하겠다고 결심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고향에 내려갈 때마다 선생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곤 했다. 두 내외분이 늘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수십 년 전 지난 이야기들을 돌이키면서 선생님은 인근 동리의 문화 유적들의 보존 상태를 걱정하셨다. 그리고는 내가 요즘은 무슨 연구를 하는지 궁금해 하시곤 하였다. 이번 고향 길에 잠깐 찾아뵈려고 전화를 드렸는데 아무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혹시 두 분이 외출을 하셨나 보다 하고는 두어 시간 후에 다시 전화를 드렸다. 여전히 응답이 없다.

나는 댁으로 직접 찾아가기로 했다. 선생님께서 사시는 아파트 문 앞에서 인터폰을 눌렀다. 안에서 누군가 목소리가 들린다. 아아 계시구나 하고 나는 안심했다. 그런데 문을 여는 젊은 부인은 전혀 알 수 없는 낯선 얼굴이다. 나는 선생님께서 댁에 계신가를 물었다. 그 부인은 나를 한번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혹시 집을 잘못 찾아온 게 아니냐고 묻는다. 나는 어이가 없다. 선생님 성함을 대고는 문간에 표시된 아파트의 동호수를 다시 확인한다. 그리고 작년 연말까지도 선생님께서 이곳에 사셨는데 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그제사 그 부인은 자기네가 두어 달 전에 새로 이사를 왔다고 말한다. 전에 사시던 분들이 어디로 가셨는지 모른다면서 문을 닫는다. 나는 멍 하니 서 있다가 발길을 돌렸다.

아파트 관리소의 경비 아저씨가 그분네들 서울로 아주 떠나셨다고 알려준다. 겨울부터 선생님 건강이 나빠졌단다. 이 시골에 두 노인이 사시기 힘들어서 자손들이 살고 있는 서울로 올라가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마음이 무겁다. 선생님께서 바깥출입도 못할 정도였었는가 하고 물었다. 지난 가을에도 정정하시지 않았던가? 경비 아저씨는 그렇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고 손을 내젓는다. 겨울에 자꾸 편찮으시니까 서울 사시는 아드님이 내려와 모셔갔다는 것이다. 나는 그대로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서울로 돌아오면서 나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사하셨다는 서울 집의 전화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답답하다.

고향 마을은 도회지에서 떨어진 시골이니까 공기 맑고 조용하다. 그러니 노인들 지내기 편할 것이라고 나는 으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내 생각이 잘못된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변변한 병원도 없고 제대로 된 약국도 가까이에 없다. 교통도 불편하다. 잘 차려진 수퍼마켓이 있는 것도 아니니 시장 보기도 힘들다. 말로만 전원생활이지 모든 것이 다 불편하다. 이런 불편을 감수하고 지내는 것이 시골생활이다. 노인들에게 결코 편할 리가 없다.

내 주변의 친구들 가운데 노후에 고향으로 내려가겠다고 마음먹는 이들이 많다.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보며 아주 낭만적인 낙향을 꿈꾼다. 정년퇴임을 하면 좀더 편안하고 여유있게 고향에 돌아가서 노후를 즐기며 살리라. 그러나 그런 생각은 늘 잠깐뿐이다. 지금 우리네 고향은 그런 꿈속의 땅이 아니다. 젊은이들이 모두 떠나버린 곳. 아무도 돌보지 않는 땅 위에 늙은이들만이 남아서 쪼그리고 살아간다. 모두가 나이 들어 더 이상 움직이기 힘들면 그 노인네들도 자식들 찾아 가버릴 것이다. 그리고 더 늙어 병든 이들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우리네가 떠나온 고향은 그렇게 버려져서 더욱 찌들어가는 땅이 될 것이 뻔하다. 언제까지 마음속으로만 낙향을 꿈꾸어야 할 것인지- (권영민)

박사(博士)가 된 제자

내 연구실에서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받은 C군이 전화를 해왔다. 연말이 되기 전에 나를 한번 찾아오겠다는 것이다.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채 대학 연구소에서 계약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는 제자의 전화에 나는 그저 민망할 뿐이다. 그러나 저녁이라도 사주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약속 날짜를 잡았다.

나는 C군의 대학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다. 내가 담당했던 강의에서 첫번째 리포트에 A+를 받은 유일한 학생이었다. C군은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면서 전공 문제를 내게 상의하였다. 그리고 석사과정을 시작하였다. 제 발로 고생길에 접어든 것이다. 대학 시절부터 부지런하게 공부를 해서 교수들의 칭찬을 자주 들었던 C군은 대학원에서도 착실하게 자기 연구에 몰두했다. 석사과정에 적을 두고는 군대를 끝냈고, 석사 논문도 꽤 무게 있는 주제를 다루어서 주변 사람들이 모두 주목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면서 결혼도 했다. 내가 주례를 맡았다. 변변한 직장도 없이 색시를 들이게 된 C군의 형편을 생각하여, 나는 좀 과하다싶게 주례사에서 신랑 자랑을 늘어놓았다. 곧 박사가 될 것이고 대학에 자리를 잡게 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라고 했던가? C군은 대학을 졸업한 후 10년이 훨씬 넘은 삼십대 후반에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벌써 결혼 생활도 5년이 지났고, 아들을 둘이나 낳았다. 그러나 박사학위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었다.

내가 가끔 찾아가는 한정식 집에서 C군을 만났다. C군은 큰 가방을 들고 넥타이까지 맸다. 일주일에 한 차례 지방 대학에 출강을 하고 있는데, 성적 처리 때문에 내려갔다 오는 길이라고 했다. 힘들지? 내가 묻는 말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내게는 여간 죄스럽다는 표정이다. 지난 한해도 교수님께 걱정만 드렸어요. 제대로 취직을 못하고… C군은 내가 묻지도 않은 말을 계속 잇는다.

박사학위를 받고는 바로 취직이 될 것으로 모두들 기대를 했지요. 계약제 연구원으로 2년을 보냈는데 그나마 연구프로젝트가 모두 끝나는 바람에 재계약은 없다고 하네요. 내년에는 강사 자리를 두어 군데 더 알아보아야 할 것 같아요. 요즘은 강사료가 박하지는 않아서 그럭저럭 작은 살림을 살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활이 언제쯤 끝나느냐 하는 것이지요. 그동안 박사학위 논문을 단행본으로 출간했고, 해마다 두세 편씩 논문도 발표하였지요. 제 깐에는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지난 일 년 동안은 지원서조차 낼 곳이 없었어요. 계약제 강의교수는 강사 노릇 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전임 자리는 전혀 보이지 않네요.

C군의 말에 힘이 없다. 나는 C군의 손을 잡는다. 교수님 댁과 마찬가지로 저도 부양가족이 셋이나 되는 가장이 되었어요. 이제는 처가 식구들에게도 면목이 서지 않아서 아내에게 늘 미안하지요. 나는 C군에게 맥주 한잔을 권한다. 이럴 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제자에게 나도 그저 미안할 뿐이다.

내년 일 년이 지나면 좀 나아지지 않겠는가? 나는 다시 C군의 맥주잔을 채운다. 공부한다는 것. 언제나 그랬어. 사실은 언제나 전망이 밝았던 것은 아니야. 내가 대학원을 다녔던 70년대를 생각해 보면 똑똑하고 재바른 친구들은 모두 사회로 빠져 나갔지. 좀 우둔하고 느린 자들이 연구실 주변에 남아 있었어. 그래도 한 가지 자존심은 있었는데 그게 뭔지 알겠는가? 학문이란 것- 나 자신이 그것을 좋아서 택했다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일생동안 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네. 자네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하네. 공부… 자네가 좋아서 하는 일이지? 누가 무어래도 당당히 할 수 있지? 일본이나 미국 같은 나라에서 대학교수는 그렇게 상위의 직종은 아니야. 박사학위를 받은 후 계약제 조교수로 여기저기 떠돌다가 종신제 교수직을 얻지 못하면 그걸로 끝나지. 그래도 그 길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지. 그 이유가 뭔지 알겠나?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거야. 자기가 좋아 하는 일을 평생 동안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나?

나는 이렇게 두서없는 말을 늘어놓으면서도 마음이 걸린다. 사십 줄에 가까이 들어선 박사 제자에게 환갑이 지난 선생이 할 말을 잇지 못한다. 그리고 속으로 그저 미안하구나 미안하구나 하고 되뇌일 뿐이다. (권영민)

<청록집(靑鹿集)> 그 후 60년

1946년 해방 1주년을 맞는 우리 문단에서 광복의 열정을 실감 있게 보여주는 한 권의 시집이 출간된다.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의 공동시집 <청록집>이 바로 그것이다. 문단의 좌우 대립과 이데올로기의 요구가 결렬했던 해방 공간에 등장한 <청록집>이라는 작은 시집은 경이로움 그 자체에 해당한다. 문학의 정치시대라고 말 할 수 있는 해방 공간에서 우파 문단을 주도했던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이 시집을 해방 1주년을 맞는 기념출판물로 내세운 바 있다.

 

<청록집>은 각기 다른 시적 개성을 보여주었던 박두진 박목월 조지훈이라는 세 시인의 초기 시들을 묶은 것이지만, 한국 현대시에서 ‘자연의 발견’이라는 명제가 가장 적절하게 시적 형상성을 획득하고 있는 경우로 그 의미가 규정된다. 그리고 1930년대 말기의 시와 해방 이후의 시를 잇는 서정시의 맥락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그 문학사의 위치가 평가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 시집에 수록된 시들은 해방 직후의 혼란 속에서 순수시의 전형으로 자리잡고 있다. 물론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서정적 자아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이들이 발견한 <자연>이라는 것에서 내면적 역동성을 찾아보기는 어렵다는 비판도 제기된 적도 있지만, 박목월의 언어 감각과 토속성, 박두진의 시적 의지와 이데아 지향, 그리고 조지훈의 고전적 정신 등은 우리 시단에 폭넓은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 사실이다.

<청록집>의 시들이 보여주고 있는 시적인 정서가 삶의 현실의 여러 문제를 폭 넓게 수용하게 되는 과정은 <청록집> 이후 세 시인의 시 세계의 확대과정을 통해 확인된다.

박두진은 <오도(午禱)>(1953)에서부터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수석열전(水石列傳)>(1973) 등 수많은 시집을 내놓으면서 반복적인 율조와 절창의 언어를 통해 자기 의지를 표출하고 있다. 그는 자연의 생명력을 노래하기도 하고, 자연을 통하여 인간의 의지를 노래하기도 한다. <산아. 우뚝 솟은 산아.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아. 숱한 나무들, 무성히 무성히 우거진 산마루에, 금빛 기름진 햇살은 내려오고, 둥둥 산을 넘어, 흰구름 건넌 자리 씻기는 하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불고, 넘엇 골 골짜기서 울어 오는 뻐꾸기……>(청산도 靑山道)에서 처럼, 자연을 대상으로 읊어지는 박두진의 시들은 존재의 심연을 헤매는 기도로 나타나기도 하고, 생명에의 경외감으로 채워지기도 한다. 그리고 정서적 갈등의 내면화에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박두진이 노래하고 있는 자연은 자아와의 일치를 보이기 때문에, 시적 긴장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자연의 친화력에 의해 대상과 주체가 하나가 되고 있으며, 거기서 오는 영원한 생명력이 시적으로 구현되고 있다.

박목월은 <산도화>(1954)를 비롯하여 <난(蘭)․기타>(1959)에서 <경상도 가랑잎>(1968)에 이르기까지 고유의 정서와 리리시즘을 섬세한 감각으로 재현하면서, 일상의 현실과 삶의 체험을 자신의 시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다. 시인 박목월이 순수한 자연의 세계에서 인간의 삶의 현실로 그의 시선을 돌리면서 새롭게 발견하고 있는 것은 가난하지만 소박한 삶과 거기에 깃들인 인정미이다. 예컨대 「오늘 나의 밥상에는 / 냉이국 한그릇. / 풋나물무침에 / 新苔. / 미나리김치. / 투박한 보시기에 끓는 장찌개. // 실보다 가는 목숨이 타고난 祝祿을. / 黙禱를 드리고 / 젓가락을 잡으니 / 혀에 그득한 / 자연의 쓰고도 향깃한 것이여. / 경건한 봄의 말씀의 맛이여.」(「소찬(素饌)」)와 같은 싯구에서 그는 애환이 담긴 삶이지만 소탈한 일상에 만족한다. 특히 그는 초기 시에서와 같이 자연이라는 시적 대상을 관조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현실에 자리 잡고 그 생활 속에서 작은 기쁨을 누리는 인간의 위치에 서 있는 것이다. 박목월은 시적 대상으로서의 자연을 감각적으로 재현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일상생활의 체험영역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초기시의 감각적 단순성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변모를 놓고 박목월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리리시즘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박목월은 일상의 체험을 서정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지만, 현실에서의 갈등이나 대립을 초극하기 위한 의지를 노래하지 않는다. 자기 정서의 자연스러운 반응을 드러내고 있을 뿐이다. 그는 삶의 애환을 포괄하면서도 그 현실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내세우는 법이 없이, 천품의 가락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일상의 한가운데에 서게 된다.

조지훈은 <풀잎 단장>(1952) 이후 <조지훈시선>(1956), <역사 앞에서>(1959) 등의 시집으로 시적 세계를 정립하고 있다.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 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한다.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기도 하지만, 조지훈은 변화의 시인은 아니다. 그는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그리고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킬 뿐이다. 조지훈이 지니고 있는 하나의 목소리, 그것은 그의 시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면서 동시에 그의 시를 고정시켜 놓고 있는 징표임이 분명하다.

<청록집>은 해방 시단에서 가장 커다란 주제로 부각되었던 정치시의 가능성을 시적 실천을 통해 거부했던 역사적 성과로 자리한다. 되찾은 모국어의 감각과 기법을 실험하면서 한국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했던 <청록집>의 시인들의 노력은 혼란의 해방 공간을 벗어난 후 지금까지도 이들을 따르는 수많은 시인들에 의해 다양한 상상력으로 발전한다. 시가 민족의 삶 가운데 끊임없이 생성되는 영혼의 노래이며, 그 자체의 언어와 형식도 시의 정신에 따라 스스로 갱신해 나아가게 된다는 사실은 <청록집> 이후 60년의 한국 시단을 돌아보는 모든 문학인들에게는 새삼스런 감회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 혹은 지성의 의미

인간이 의지할 위대한 힘은 지성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의 모든 크고 작은 파괴와 그 비극의 원인은 감정적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며, 위대한 창조와 평화는 지성으로써 이루어진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의 말이다. 인간의 휴머니티는 지성에 의해서만 그 성장이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이도 있다. 그만큼 지성의 의미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일본 지성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ㆍ63)가 최근 한국과 일본,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빚어진 영토 갈등이 극한적인 대립의 국면으로 치닫자 자신의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했다. 일본과 중국을 둘러싼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문제, 한국과 일본의 독도 문제로 빚어진 분쟁이 그 핵심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우리 독자들과 아주 친숙하다. 문학사상사는 일찍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적 역량과 그 폭넓은 관점을 중시하면서 그의 대표작 <상실의 시대(원제:노르웨이의 숲)> <해변의 카프가> <태엽 감는 새> <댄스 댄스 댄스> 등을 발간하였고 글로벌 시대를 대표하는 이 작가의 문학세계에 특별한 관심을 표시해 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지난 10월 28일 아사히신문에 보냈던 시평을 보면, 동아시아 지역 특히 한국과 일본, 중국과 일본 사이의 영토 갈등이 이 지역에 형성되고 있는 문화적 상호 교류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크게 우려하고 있다. 이 글에서 하루키는 ‘영토갈등을 둘러싼 갈등과 그 광적인 반응이 마치 술 취한 사람의 행동을 닮았다.’ 라고 꼬집으면서 지성의 부재를 논박했다.

일본과 한국 사이의 독도 문제는 해묵은 논제이다. 그러나 이 문제의 역사적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면 그것은 일본이 자행해온 제국주의적 침략 행위와 직결되어 있음이 자명하다. 일본의 극우 세력들은 여전히 그 역사적 과오를 외면한 채 독도 문제를 마치 양국 사이에 영토 분쟁이라도 있는 것처럼 떠벌인다. 독도가 엄연히 한국의 영토라는 사실은 일본의 지성인들도 인정한다. 한국의 영토에 속하는 독도를 자기들 마음대로 지도에 그려넣고 문제가 있는 것처럼 떠드는 것은 일본의 극우 세력뿐이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 대두되고 있는 센카쿠 열도(댜오위다오) 문제는 그 자세한 내막을 따질 필요도 없이 최근 양국의 갈등이 그대로 넘기기 어려운 상황에 이르렀다. 일본 정부의 센카쿠 열도 국유화로 중일관계는 크게 악화되었고, 이 작은 섬에 중국인들과 일본인들이 서로 상륙을 시도하면서 무력 충돌 직전의 상황까지 만들어냈다. 특히 최근에는 중국 베이징시 당국의 일본 관계 도서에 대한 규제 소식까지 전해지면서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신문을 통해 자신의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현한 것은 이같은 일련의 사태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반지성적 행태를 비판 경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평은 센카쿠 열도를 둘러싼 분쟁이 과열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의 많은 서점에서 일본인 저자의 책이 사라질지 모른다는 보도를 보고 일본인 저자의 한 사람으로서 느꼈던 충격’을 고백하는 형식으로 시작된다. 하루키는 중국 내의 출판 시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일본 서적에 대한 배척 운동이 중국 정부가 주도하고 있는 조직적인 조치인지 일부 서점 측의 자발적 행동인지 그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한다고 단서를 달면서도 한 사람의 지식인 작가로서 이러한 반지성적 사태에 대한 비판과 함께 자성의 목소리를 동시에 담아 놓고 있다. 특히 그는 동아시아의 주축을 이루고 있는 한국 중국 일본이 근래 그 문화적 공동체 의식을 회복하기 위해 활발한 교류를 이어온 점에 주목하면서 최근의 영토 갈등으로 인해 그간 일궈온 문화교류와 상호 신뢰를 무너뜨리게 될지 모른다는 깊은 우려를 표시하였다.

하루키는 동아시아에서 이루어진 세 나라 사이의 문화교류가 ‘문화적 등가교환’임을 천명하면서 이러한 문화 교류야말로 ‘국경을 넘어 영혼이 오가는 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새천년에 접어든 최근 20년 동안 동아시아 문화권은 매우 활발한 문화 교류를 이루게 되었고 이는 과연 놀라운 성과로 기록될 만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같은 성과를 위해 수많은 문화인들이 앞장서서 힘써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실제로 하루키의 주장 그대로 중국의 영화, 일본의 애니메이션, 한국의 가요와 드라마 등이 이 문화 교류의 중심을 이루었고 이에 따른 인적 교류가 크게 증대했다는 점을 부인할 수가 없다. 특히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일어나게 된 한류열풍 등을 보면 동아시아가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을 형성하면서 풍부하고 안정된 시장으로 성숙하게 되었다는 하루키의 견해는 크게 수긍할 만하다.

하루키가 우려하고 있는 것은 그동안의 문화적 공동체 의식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센카쿠 열도, 독도 문제가 빚어낸 갈등이 이러한 성취를 파괴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일본인 작가일 뿐 아니라 동아시아 작가의 한 사람으로서 최근 사태를 좌시할 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그는 국가와 국가 사이에 국경선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이상 불행히도 영토 문제는 피할 수 없는 이슈가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러나 이런 문제는 ‘실무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이슈’라는 것이 하루키의 생각이다. 그는 영토 문제가 ‘국민 감정’의 영역으로 확대될 때 그것이 ‘출구 없는 위험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하루키는 최근의 사태를 놓고 이 파괴적 행동이 마치 ‘값싼 술을 마신 뒤의 취기어린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유적 설명도 덧붙이고 있다. 특히 술에 취하면 사고가 흐려지고 난폭해져 잔인한 행동을 하게 되고, 논리는 단순하고 자기 반복적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그는 술기운이라는 것은 하루가 지나면 사라지지만 ‘두통’만을 남길 뿐이라면서 영토 문제에 집착하고 있는 일본 정치인들의 단견을 호되게 비판한다. 그리고 역사의 자취를 더듬으면서 히틀러의 시대에도 영토 회복을 내세우며 정권을 강화했지만 그것이 초래했던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상기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정치인과 일부 논객들이 잘못된 행태가 국민감정을 부추기고 있지만 결국은 그로 인해 상처를 입는 것은 하나하나의 인간이라고 그는 결론짓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중국 서점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본 관계 서적에 대한 배척에 대해서도 한 사람의 작가로서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는 이러한 사태를 매우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음을 밝히면서 이 반지성적 ‘보복의 결과’는 자기 자신들에게 돌아올 뿐임을 역설한다. 그는 서로 다른 국가와 민족의 문화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거기 합당한 경의를 잃어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영혼이 오가는 길’ 어떤 정치적 목적이나 이념에 의해 폭력적으로 막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만이 아니라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오에 겐자부로를 비롯하여 일본의 대표적인 지식인들도 10월 28일 일본이 한국, 중국 침략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이들은 ‘일본은 한국과 중국이 가장 약하고 외교적 주장을 펼 수 없는 상황에 독도와 센카쿠를 편입했다. 일본인은 독도가 한국 국민에게 있어 침략과 식민지 지배의 시작이고 상징이라는 점을 이해해야 한다.’ 라고 강조했다. 이들은 ‘일본에게 한국과 중국은 중요한 우방이자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만들어가야 할 파트너’ 라고 주장하면서 일본 정부가 지난 식민지배의 잘못을 시인하고 사죄한 ‘무라야마 담화’ 등을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영토갈등을 완화할 수 있는 방안으로, 첫째 동아시아 영토갈등을 억제할 수 있는 행동규범의 제정, 둘째 주변 자원의 공동개발을 위한 대화·협의의 장 마련, 셋째 한-중-일-대만-오키나와를 잇는 민간 차원의 대화 틀 마련 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우리는 인간의 역사가 전쟁을 통해 크게 바뀌기도 하지만 언제나 지성의 힘으로 그 발전을 이룬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절감한다. 인간의 문화는 바로 그 인간 지성의 표현이다. 한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은 지정학적으로만이 아니라 문화적으로도 끊어내기 어려운 관계를 맺고 있다. 전통적으로는 한자문화권의 중심을 이루었고, 유교와 불교문화의 꽃을 여기서 피웠다. 지나간 역사 속에서는 한때 침략과 굴종, 지배와 예속의 불행한 시대를 경험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세계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있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동아시아의 세 나라가 갈등하고 대립한다면 세계의 중심으로 다시 부각되고 있는 이 지역이 분쟁 지역이 되어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게 될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므로 작금의 갈등을 서로 극복하는 길이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일본의 지식인들이 동아시아 지역의 갈등의 중심에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의 역사가 가로놓여 있음을 인식하고 있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한국과 중국의 지식인들도 일본 지식인들이 보여주고 있는 과거사에 대한 각성된 태도를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서로 그 공간의 영역을 넓힐 수 있도록 소통하는 일이 필요하다. (권영민, 2012.11)

정지용 시 126편 다시 읽기

 

정지용 시 전편에 대한 상세한 주석과 해설을 통해, 정지용 문학을 새롭게 읽고 분석한 해설서. 지은이는 텍스트 개작 과정을 면밀하게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본다. 그는 정지용 시의 정본화를 위해 3가지 텍스트를 제시한다. 먼저 시집(<정지용 시집>, <백록담>)으로 묶였을 때의 원문과 책으로 묶이기 전 잡지 게재 때의 원문을 소개하고, 여기에 한자 표기를 없애고 현대 국어의표기법에 따라 텍스트를 수정한 한글 정본을 뎟붙인다.

지은이가 정본화를 시도하면서 새롭게 주목한 것은 시의 언어이다. 정지용의 모든 작품을 정리하면서 시어의 의미와 용법을 정확히 규명하고자 애썼고 시적 정황을 제대로 이해하고자 했다. 기존 연구자들과 풀이가 다른 경우에는 주석과 작품해설을 통해 따로 밝혀놓았다.

(민음사, 2004, 초판발행)

권영민의 그때 그곳<9> : 시인 공초 오상순과 서울 명동의 청동다방

지난달 13일 권영민 교수(왼쪽)와 이근배 시인이 서울 명동의 청동다방 자리(두 사람 뒤편)를 방문했다. 지금은 옷가게로 변한 이곳은 1950년대 공초 오상순을 필두로 한 문인들의 아지트였다.

《 서울 명동은 항시 세일 중이다. 호화스러운 간판과 외국인 관광객을 불러 모으는 호객 소리가 요란하다. 1950년대 꿈과 낭만, 사랑과 열정의 공간이었던 명동은 가장 화려한 패션의 거리로 변했다. 명동예술극장 건너편으로 유네스코 회관을 지나 골목 모퉁이에 있었던 ‘청동(靑銅)다방’. 이제는 그 자리조차 가늠하기 힘들다. 청동다방의 주인공이라면 단연코 시인 오상순(1894∼1963)이다. 오상순의 ‘청동다방 시대’라고 해도 좋다. 아니 청동다방의 ‘오상순 시대’라야 더 어울릴 듯하다. 공초는 매일같이 다방 ‘청동’에 들렀고, 구석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문인 예술가들을 반겼고, 낯선 손님들과도 흔쾌히 어울렸다. 청동다방은 연극인 이해랑이 운영하던 곳이었지만, 사람들은 터줏대감처럼 머물렀던 오상순을 더 많이 추억한다. 》

공초 오상순은 애연가였다. 그래서 그의 오른손에 담배가 쥐어져 있지 않은 경우가 드물었다. 건국대박물관 제공

오상순이 언제부터 청동다방의 주인공이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는 1954년 무렵부터 전후(戰後)의 불안과 혼란 속에서 문학과 예술의 심장이 되었던 명동을 지켰다. 불교의 인연을 따라 조계사(曹溪寺)에 몸을 기탁했던 그는 다방에 머물며 여러 문인들과 어울렸다.

오상순은 공초(空超)라는 그의 호를 붙여 불러야 더 어울린다. 그는 서울에서 태어나 경신학교를 다녔다. 일찍이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에서 종교 철학을 공부했으며, 1920년 황석우 남궁벽 변영로 염상섭과 문학 동인 ‘폐허’에 참여했다. 한국 문단사의 첫머리에 오르는 ‘폐허’에 시를 발표하면서 문학가로서 명패를 달았지만 그는 문단의 자리에 연연하지 않았다.

한때 불교중앙학림에서 가르쳤고 보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는데, 1926년 부산 동래 범어사(梵魚寺)에 입산해 선불교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는 그때 이미 속세의 삶을 등졌고 방랑의 객이 되어 전국의 사찰을 떠돌았다. 생전에 혼인하지 않았으니 그 자신에게 딸린 가족이 없었고, 방랑객으로 전국을 떠돌았으니 거처할 집도 없었다. 공초라는 호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공초는 떠돌이가 되어 일제강점기의 가혹한 시련을 피했다.

해방 공간의 문단이 좌우 이념의 대립과 갈등에 휩싸였을 때 공초는 변영로 박종화 양주동 이헌구와 민족 계열의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고 문학의 중심에 섰다. 하지만 그는 결코 문단 모임에 앞장서지는 않았다. 6·25전쟁을 겪으며 모든 것이 다 불타고 무너지고 부서졌을 때 그는 다시 선인(仙人)의 모습으로 서울 명동에 나타났다.

당시 명동은 국립극장을 중심으로 연극인들이 모여들었고 동방싸롱, 갈채, 청동 같은 다방은 가난한 문학예술인들의 근거지가 됐다. 한국 문학예술의 ‘살롱시대’가 바로 명동에서 펼쳐졌다. 소설가 이봉구의 ‘명동 엘레지’에서부터 명동은 예술의 혼을 낳았고, 사랑과 인생과 예술과 열정과 낭만으로 채워졌다.

공초는 다방을 찾는 사람들에게 종이를 내밀어 그림을 그리거나 글을 쓰게 했다. 그가 이렇게 취미 삼아 모은 청동다방의 ‘낙서첩(落書帖)’은 그대로 한 시대의 귀중한 기록이 됐다. 살아생전에 시집 한 권도 내지 않고 초연했던 그가 청동다방의 낙서첩에 그렇게 열을 올렸던 이유는 알 수 없다. 당시 명동의 청동다방을 드나들던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청동산맥(靑銅山脈)’이라는 이름의 이 낙서첩에 한두 개의 글 구절을 남겼고, 그림을 그려 넣기도 했다.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시인 공초의 이 새로운 사업은 십년의 세월 동안 무려 195권의 청동산맥을 이루었다.

공초의 청동산맥은 해외 문단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다. 분량도 방대하고 그 내용도 다채롭다. 시인 이은상은 ‘오고 싶지 않은 곳으로 온 공초여, 가고 싶은 곳도 없는 공초여’라며 헛기침을 했고, 서정주는 ‘안녕하시었는가. 백팔의 번뇌 내 고향의 그리운 벗들’이라고 적었다. 박목월은 ‘우연히 다방에 들러 선생님을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라고 소박한 인사말을 써넣었다. 당시 문단의 신참에 해당했던 김관식은 ‘슬픔은 차라리 안으로 굳고, 겉으로 피는 자조(自嘲)의 웃음’이라고 시 한 구절을 적었다.

소설가 박경리는 ‘자학(自虐)의 합리화가 종교이며, 자학을 벗어난 경지에서 신이 존재한다’라는 에피그램(경구)을 남겼고, 비평가 이어령도 ‘여기에는 시초(始初)도 종말(終末)도 없다’고 적었다. 고은은 담배를 물고 살아서 ‘꽁초’로도 불렸던 공초를 향해 ‘담배의 공복(空腹)이란 건 더 야릇할 거예요’라고 낙서했다.

청동다방의 낙서첩 ‘청동산맥’. 건국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건국대박물관 제공

공초를 문학의 스승으로 생각한다는 시인 이근배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지만, 공초는 모든 것을 품어 안을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넓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면서 공초는 누구든지 청동다방의 구석자리에 앉히고는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고 말하며 말동무가 됐다고 들려주었다. 공초야말로 모든 것을 비우고 살았던 공인(空人)이며 모든 것을 초탈해버린 초인(超人)이었다고 했다. 공초가 남긴 이 희대의 낙서첩인 청동산맥은 지금 그대로 한국 문단의 가장 아름다운 ‘잠언집’이 되었다.

지난달 13일 이근배 시인과 함께 번잡한 명동 거리를 걸으며 청동다방의 흔적을 찾았다. 다방이 있던 자리는 형형색색의 여성복이 전시된 옷가게로 바뀌었다. 이곳을 지나가는 수많은 한국인도, 외국 관광객들도 여기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학적 성소라는 걸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봄은 동방에서 꽃수레를 타고 온다는데 가을은 지금 머언 사방에서 내 파이프의 연기를 타고 온다’라고 썼던 공초는 1963년 세상을 떠났다. 벌써 50년이 흘렀다. 하지만 명동 어디선가 예의 그 뿌연 담배 연기를 뿜으며 공초가 환하게 웃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2013.3.4 /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문인들의 학력

 

일본 식민지시대 활동했던 우리 문인들 가운데 일본에 건너가 수학한 경력을 지닌 사람은 적지 않다. 신소설 작가 안국선과 이인직은 각각 구한말 관비유학생으로 파견되어 일본 동경에서 신학문을 수학한 바 있다. 한국 근대문학의 개척자로 손꼽히는 이광수의 경우는 일진회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에서 중학 과정을 마친다. 그리고 다시 와세다 대학에서 수학하게 되지만 2.8독립선언을 주도한 협의로 지명 수배되자 상해로 피신함으로써 학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된다. 한국을 대표하는 시인 김소월은 배재고보를 졸업하고 일본 동경상과대학으로 유학을 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해 관동대지진으로 대학이 큰 피해를 입게 되고 사회가 혼란하게 되자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하게 된다. 김소월의 대학 수학에 관한 기록은 지금껏 제대로 확인된 적이 없다. 소설가 염상섭은 일본 게이오대학 재학 중에 오사카에서 재일 노동자 중심의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다. 그는 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다시 학업을 지속할 수 없게 된다. 한국 모더니즘 시 운동의 주역이었던 시인 정지용과 김기림은 모두 정규 대학의 영문학과를 졸업한다. 비평가 김환태도 영문학과 졸업생이다. 그러나 소설가 채만식, 김남천, 박태원 모두 대학 과정을 제대로 수료하지 못한다. 시인 윤동주의 경우는 대학 재학 중에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다.

이런 방법으로 식민지시대의 문인들을 한 사람씩 손꼽아 보면 100여명이나 되는 문인들이 일본 유학을 거친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이들 문인 가운데 대학의 정규 과정을 제대로 졸업한 경우는 많지 않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 이런 저런 일로 학업을 지속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유학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문인도 대학의 수학 경력을 확인해 보면 정규과정의 학생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 대학 과정을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청강생(聽講生)이나 과외생(課外生)이라는 비정규 과정에서 한두 해 수학한 적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문인 학력이 시비 거리가 된 적은 한번도 없다. 시인이나 소설가가 자신의 학력을 과장할 아무런 필요가 없었고, 어떤 소설가가 일본의 유명 대학 출신인지, 어떤 시인이 일본 대학에서 무슨 공부를 했는지 하는 것은 하등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들이 쓰는 소설과 그들이 발표하는 시가 문제일 뿐이었다. 도대체 자기 혼자서 글 쓰는 사람에게 학력이라는 것이 무슨 큰 일이 될 수 있겠는가?

우리 문화예술계는 요즘 유명 예술인들의 학력 위조 시비로 시끄럽다. 이런 말썽이 다른 나라에서도 일어난 적이 있는지 모르겠다. 한편으로는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안타깝다. 공적인 문서를 허위로 기재하고 허위 사실을 마치 진실인 것처럼 떠벌인 행태를 비판하고 단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가 이른바 학력이라고 하는 것에 너무 고식적으로 얽매어 있다는 점이다. 대학이 유명 배우에게 강의를 의뢰하고 교수직을 부여한다면 그것은 그 배우의 학벌을 기준 삼을 일은 아니다. 오랜 연기 생활의 경험과 배우의 연기력 자체가 중요하고 그것이 학생들의 교육에도 필요한 것이라면 왜 그런 학력 요건을 따져야 하는가? 고등학교를 졸업했건 대학을 중퇴했건 그런 것 자체를 처음부터 문제삼을 필요도 없는 일이 아닌가?

우리 문단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시인 고은 선생은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였다. 그러니 내세울 만한 학벌이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유명한 미국의 버클리대학에서는 고은 선생을 초빙교수로 받아들여 학생들과 한국문학을 논할 수 있도록 배려한 적이 있다. 그리고 고은 선생은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에서 한국 현대시에 대한 특강을 담당하는 특별교수로 재직했다. 이것은 고은 선생의 학벌과는 아무 상관없이 이루어진 일이다. 고은 선생의 시 쓰기 자체가 이미 최고의 경지를 이루고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학 자체에서도 그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이다.

이제는 이번 일과 같은 우스갯거리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 사회가 좀더 성숙되고 여유가 있었으면 한다. 학력이 아니라 자기 실력에 의해 인정받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가 다시 반성하고 다짐해야 할 과제다. (권영민)

김남조 시인의 첫 시집 『목숨』(1953) – 한국 전후시의 원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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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조 시인의 첫 시집 『목숨』이 간행된 지 60년이 되었다. 여기 60년이라는 시간에는 단순한 개인적 의미로 덮어둘 수 없는 역사가 담겨 있다. 이 시집은 전란 중에 시작 활동에 나선 시인의 초기 작품 26편이 수록되어 있지만, 그 시적 주제와 방법이 한국 전후시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든든하다. 표제작인 <목숨>에서 시인은 ‘돌멩이처럼 어느 산야에고 굴러 / 그래도 죽지만 않는 / 그러한 목숨이 갖고 싶었습니다.’ 라고 토로함으로써, 시인이 일관되게 추구해온 생명에의 기도를 일찍부터 형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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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목숨』은 해방 이후 등단한 여성 시인의 첫 시집이라는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전쟁을 겪던 당시 시단에는 식민지 시대에 등단한 노천명, 모윤숙이 활동하고 있었지만 그 문단적 존재를 인정할 만한 새로운 세대의 여성 시인을 찾아보기 어렵다. 그러므로 시인 김남조의 등장과 시집 『목숨』의 출간은 한국의 여성 시단에 해방 세대의 등장을 말해준다. 이 시집이 출간된 시기는 한국전쟁이 휴전이라는 이름으로 잠정적인 수습 단계로 접어들던 때였고, 한국 민족 전체의 생존 자체가 문제시되었던 시대였다. 전쟁의 참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과 절규가 들끓고 있는 동안, 문단에서도 전후 현실의 혼란을 두고 비탄의 한숨과 자조의 넋두리가 흘러넘치고 있었다. 충격적인 전쟁의 참상을 객관적으로 직시하거나, 그 비극성을 보편적인 인간 내면의 문제로 끌어올릴 만한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전후 시단의 경우에는 전후적 징후라고 말할 수 있는 미묘한 정서적 충동이 여러 가지 경향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한국 전후시의 문학적 성격과도 관련되는 것으로 새로운 시인들의 등장과 함께 더욱 폭넓은 시단의 형성을 보게 된 점이 주목된다. 전쟁이 끝난 후에 재편성된 시단에는 많은 시인들이 자신의 시적 지향을 새롭게 조정하기 시작한다. 이들은 모두 해방 직후의 이데올로기의 시련과 전쟁의 비극을 체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시의 순수성과 서정성에 복귀하고 있다. 이들이 시적 이념이나 사회의식을 외면한 것은 자기 내면에서의 갈등과 극복을 통해 가능해진 것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상황의 변화와 그 대세를 그대로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전후의 문단에 새로이 등장한 시인들은 사회적 혼란 속에서 자신의 시적 세계의 확대를 꾀하면서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는 데에 힘을 기울인다. 어떤 시인들은 전통적인 서정의 세계를 더욱 넓히고자 노력하며, 어떤 시인들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시 정신의 구현에 몰두하기도 한다. 폐허가 되어버린 전후의 현실 속에서 시를 쓴다는 것으로 고통의 삶을 안위할 수 있었던 이들 새로운 세대의 시인을 ‘전후파’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이들의 시에서 가장 특징적인 한 시대의 정신적 징후를 김남조의 시집 『목숨』을 통해 확인해 볼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전후파 시인들의 면모를 가장 포괄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는 것은 <한국전후문제시집>(1961)이다. 이 책에는 박인환, 고원, 고은, 구상, 구자운, 김관식, 김광림, 김남조, 김수영, 김윤성, 김종문, 김종삼, 김춘수, 민재식, 박봉우, 박성룡, 박양균, 박재삼, 박태진, 박희진, 성찬경, 신동문, 신동집, 유정, 이동주, 이원섭, 이형기, 전봉건, 전영경, 정한모, 조병화, 조향, 황금찬 등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이들 이외에도 구경서, 김규동, 김구용, 김요섭, 홍윤숙, 한성기 등이 모두 같은 시대에 자리 잡고 있는 시인들이다. 이들의 노력에 의해 1950년대는 시의 시대를 구가할 정도로 다양한 시적 경향을 포괄할 수 있게 된다. 특히 한국 현대시의 흐름에 있어서 시적 서정성과 그 실험 정신이 균형을 이루게 된 것이 ‘전후파’ 시인들의 시적 성과이지만 그 출발점에 김남조의 시집 『목숨』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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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목숨』은 시인 김남조의 시적 세계의 원점에 해당한다. 생명의 구원과 사랑을 위한 기도는 시인 김남조를 통해 한국 현대시의 주제로 자리잡는다. 전후파 시인들의 시 정신과 시적 방법은 인간 존재와 그 삶에 관한 본질적인 탐구에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시의 전반적인 경향은 시적 정서를 주축으로 하는 경우와 시적 인식을 주축으로 하는 경우로 대별된다. 전자의 경우는 흔히 ‘전통파’ 또는 ‘서정파’라는 말로 지칭되고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전자의 경우보다 훨씬 복잡한 양상을 나타내고 있는데, 시적 언어와 형태에 새로운 실험을 감행하면서 서정적 전통의 변혁에 주력해 온 시인들과, 사회적 인식과 현실 문제를 시 속에 포괄함으로써 적극적인 시 정신의 구현에 힘쓴 시인들로 다시 분류해 볼 수 있다. 이들은 각각 ‘언어파’ 또는 ‘실험파’와 ‘현실파’로 지칭된다. ‘언어파’의 시인들은 시적 인식을 중시함으로써 시어의 효과를 겨냥한다. 이들은 흔히 후기 모더니즘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시적 성과를 평가받고 있는데, 특히 한국어에 현대적 감각을 부여하고 시적 형태에 대한 모색을 가능케 하였다. ‘현실파’의 경우에는 사회적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과 풍자적 접근이 시를 통해 가능함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자조와 비판이 함께 드러나는 이들의 시에서 시적 의지의 문제성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이러한 전후 시단의 경향 속에서 시인 김남조는 시적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사회적 현실 문제를 개인적인 서정의 세계로 끌어들인다. 그리고 삶의 현실보다는 생명의 본질을, 역사적 조건보다는 존재의 가치를 더욱 깊이 있는 시적 주제로 해석해 낸다. 한국 현대시에서 정서의 영역과 관념의 영역을 동시에 포괄하여 형상화해낸 시인은 김남조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찾아보기 어렵다. 김남조 시의 정신적 거점에 해당하는 시집 『목숨』의 문학사적 의미가 다시 주목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권영민)

만해와 백담사 그리고 오현스님

설악의 백담 계곡은 언제나 아득하다. 여름 산사의 정취를 이곳처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곳은 다시없다. 골은 깊고 물이 빠르고 산은 높푸르다. 그러나 험준한 설악의 계곡임에도 골골이 사람을 품을 만큼 넉넉하다. 여름내 계곡의 물이 넘쳐흐르는 소리가 서늘한 바람을 일으킨다.

벌써 10년이 넘었다.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을 열던 해였다. 나는 백담사를 찾았다. 만해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나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다. 만해 한용은 1919년 3.1운동을 주도했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두 해 넘게 투옥되었다. 그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다시 찾은 곳이 바로 이 백담사다. 그는 여기서 시집 <님의 침묵>(1926)의 시들을 썼다. 시집 <님의 침묵>은 지금까지도 그 창작 배경이 베일에 싸여 있다. 정규 학교에서의 수학과정을 전혀 거치지 않았던 만해가 일상적인 한국어를 이용하여 써내려간 89편의 시들은 그 시적 형식과 주제에 있어서 누구도 상상하기 어려운 폭과 깊이를 가졌다. 이 깊은 계곡의 산사가 한국문학 최고의 문제작을 만들어내 문학적 성소(聖所)가 되었다는 것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백담사 경내를 들어서면서 나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데 나는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아주 소중한 노스님을 한분을 만나뵙게 되었다. 허름한 승려복의 그 노스님은 마치 만해의 형상처럼 그윽했다. 그 노스님은 일행과 함께 경내로 들어서면서 합장하는 내게 무얼하는 사람인가 물었다. 나는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답하였다. 그리고 문학평론을 한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 스님은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는다.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 계신 분이구먼. 문학평론이라…”

나는 깜짝 놀랐다. 처음 뵙는 분인데 이런 식의 대화에 내가 어떻게 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도 그저 웃고 말았다.

“평론이라는 것은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그물질이지요. 바탕 자체가 없는 글이니까요.”

나는 어이가 없다. 비평활동을 그래도 수십 년간 해오면서 이런저런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노스님은 그것을 허망한 그물질이라고 지적하신다. 내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셨는지 그 노스님이 내게 다시 한 마디를 더 하신다.

“글이란 자기 혼이 담겨야 제 글이지요. 그런데 평론이라는 것은 남이 만들어 놓은 방법이라는 것을 빌어다가 남의 작품 가지고 왈가왈부 시시비비만 하지요. 그러니 허망할 밖에요. 옛날이야기가 있어요. 계곡의 깊은 못에 커다란 물고기가 간밤 폭포를 타고 오르면서 용이 되어 승천했지요. 그런데 거기 무어가 남아 있을 거라면서 사람들은 그 물속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는 이미 승천했는데 그물에 무어가 걸리겠습니까?”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면서 ‘그냥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고는 내 손을 잡아주신다. 나는 노스님의 말씀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나 자신이 해 오고 있는 문학공부의 허점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 같기도 하였다. 나는 그만 기가 죽었다.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만 산중에 가득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렸다. 설악의 높은 봉우리에 안개구름이 띠를 둘렀다. 설악의 진면목이 드러났다. 나는 마치 크게 한번 ‘한방’이라도 당한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노스님이 궁금했다. 일행 가운데 한분이 가만히 내게 알려준다. 설악산 신흥사의 회주이신 무산 조오현 스님이란다. 나는 또한번 화들짝 놀랐다.

큰스님과의 이 첫 만남이 큰 인연이 되었다. 나는 매년 여름 백담사를 찾는다. 지금은 인제에서 내설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속도로처럼 정비되어 있지만 백담 계곡은 여전히 깊다. 거기 설악에 만해 한용운을 닮은 큰스님이 지켜 계시고 만해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서 백담 계곡을 흘러넘친다. (권영민)

한국문학, 세계화의 길 -국제교류진흥회의 30년을 돌아보며

세계화 시대의 한국문학

국제교류진흥회(ICF)가 출범한 지 30년이 되었다. 국제교류진흥회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새로운 과제를 위해 다양한 사업을 실천해 왔다.

지난 1990년대만 하더라도 ‘세계화’라는 개념은 한국문학의 경우 매우 낯선 과제였다. 한국문학은 지난 한 세기동안 근대적인 문학의 형태로 변모해 왔으며, 형식과 기법, 주제와 정신의 ‘근대성’에 매달려왔다. 한국사회에서 새로운 슬로건처럼 내세워진 ‘세계화’라는 말은 사회문화 발전을 공간적 보편개념으로 바꾸어 놓고 보는 새로운 개념이다. 이 경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에 대한 인식의 관점과 방법의 일대 전환이다. 한국적인 시대적 특수성에 대한 논의에서 벗어나 어떻게 공간적으로 확장된 세계적 보편성에 대한 논의로 관심을 전환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당연한 과제가 된다고 할 것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명제는 문학의 세계적 보편성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출발한다. 한국적인 것에서 세계적인 것으로의 변화, 특수성에서 보편성으로의 전환, 이것이 바로 세계화의 과제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논의하기 시작하면서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이다. 이것은 문학 수용의 공간적인 확대, 또는 한국문학에 대한 세계적인 수용 공간의 확대라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다.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는 한국 상품의 소비시장이 해외로 확대되고 있는 현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다. 문학 작품의 해외번역 출판과 그 소개는 문화의 전파와 수용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이것은 가격과 품질과 패션에 의해 좌우되는 상품 소비시장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요건들에 의해 지배된다. 그러므로 이 문제는 경제적 접근에 의해서가 아니라, 문화적 접근에 의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국제교류진흥회와 한국문학 해외 소개

국제교류진흥회는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를 재단의 가장 중요한 사업으로 내세우고 모든 힘을 여기에 집중해 왔다.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 작업은 한국정부가 주도해온 한국문화의 해외 홍보의 일환으로 시작되었지만, 국제교류진흥회는 민간 차원에서 이 문제를 새로운 각도로 접근했다. 국제교류진흥회가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해 영어권을 중심으로 실천해온 사업은 크게 네 가지 영역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새로운 번역자의 양성을 위한 장학 지원 사업이다.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시행한 번역자 양성을 위한 장학 지원 사업은 수많은 한국문학 전공자들을 전문 번역가로 키워냈다. 부르스 풀톤 교수(UBC), 자넷 풀 교수(토론토대학), 권 다니엘 교수(이화여대), 웨인 프레머리 교수(서강대) 등은 모두 국제교류진흥회의 번역가 양성 장학지원사업의 혜택을 받으면서 학위과정을 마치고 한국문학 교수로 활동하면서 번역자의 역할도 함께 하고 있는 전문 연구자들이다. 이 사업은 지금도 매년 시행하고 있으며, 영어권 한국문학 전공자들을 번역가로 양성해낸 가장 권위있는 장학 지원 사업으로 자리잡고 있다.

둘째는 해외 대학의 한국문학 강좌 개설과 교수진에 대한 지원이다. 한국문학의 해외 소개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한국문학의 고급 독자들을 외국 대학에서 키우는 일이다. 전문적인 문학 교육을 통해 한국문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도록 해야만 자연스럽게 대중 독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가 있다. 그러나 영어권의 경우 한국문학 강의를 정규 강좌로 개설하고 있는 대학이 그리 많지 않다. 국제교류진흥회는 캐나다 서부 지역의 명문대학인 UBC에 한국문학 번역 석좌교수의 직책을 만들도록 기금을 지원하여 부르스 풀톤 교수가 그 직책을 담당하고 있다.

셋째는 한국문학을 직접 소개하기 위한 특화된 지원 사업이다. 국제교류진흥회는 영어권에 소개된 한국의 문학인을 그 작품 번역자와 함께 미국 유명 대학을 중심으로 순회하면서 강연과 작품 낭독을 하도록 지원한다. 지금까지 윤흥길, 오정희, 김영하, 신경숙, 은희경, 공지영, 김혜순 등의 문인이 부르스 풀톤 교수, 다푸나 교수 등 번역가와 함께 이 사업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미국 하버드대학 출판부에서 매년 발간하고 있는 한국문학 연간잡지 <Azalea, 편집인 하버드대학 데이빗 맥캔 교수>에 대해서도 국제교류진흥회가 모든 비용을 지원하고 있다. 이 새로운 형태의 한국문학 전문지는 전 세계의 중요 대학과 연구기관에 배포되어 한국문학의 현장을 소개하는 창구 역할을 하고 있다.

넷째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례화된 국제한국문학번역워크숍의 개최이다. 새로운 번역가의 양성과 한국문학 해외 번역에 대한 관심을 제고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고 있는 이 행사는 지난 2008년부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매년 개최하는 국제적인 행사로 정착되었다. 국제교류진흥회가 주관하는 이 행사는 그동안 부르스 풀톤 교수(UBC)와 권영민 교수(서울대)가 공동으로 조직하여 UBC와 서울대학교에서 번갈아 개최하였다. 15명 내외의 대학생 또는 대학원생들이 워크숍에 참가하고 5인 내외의 전문 번역가들을 멘토로 초청하여 실질적인 번역 작업을 지도받는다. 그리고 매년 1-2인의 한국문학 작가 또는 시인을 이야기 손님으로 초대하여 워크숍에서 함께 의견을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시간을 마련한다. 그동안 멘토로 참여한 전문가들은 브러더 앤소니 교수, 자넷 풀 교수, 이영준 교수, 다푸나 교수, 테레사 김 교수 등이며, 김영하, 공지영, 은희경, 김경욱, 송찬호, 정유정 등의 문인이 이 워크숍에 초대되었다.

 

앞으로의 과제

국제교류진흥회는 영어권에서 한국문학 번역가의 양성, 한국문학 작품의 폭넓은 소개, 영어권 전문 독자층의 확대 등을 가능하게 하는 여러 가지 사업을 전개해 오면서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하나의 촉진제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2000년대의 이른바 ‘한류’ 현상과 합쳐지면서 한국문화의 세계화라는 새로운 움직임을 낳기도 하였다. 더구나 세계 각국의 유명 대학들이 한국어 강좌를 공식적으로 개설하여 운영하게 되면서 한국어를 습득한 외국의 독자들이 자연스럽게 한국의 고급문화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새로운 21세기를 맞는 한국문학의 필수적인 과제이다. 이를 위해 국제교류진흥회가 전개해온 여러 방면의 지원 사업을 참조하여 한국문학번역원이나 다른 민간 재단 등에서도 이들 과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식을 확대할 필요가 있다.

첫째, 외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어 교육에 대한 지원 확대이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한국어의 세계적인 보급과 직결된다. 한국어 교육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인식이 가능해지며, 한국어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국문학에 대한 관심을 확대시킬 수 있다. 외국 대학에서의 한국어 교육과 그 프로그램의 내용에 대해서는 단순한 한국어 교육이 아니라 문화교류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강좌 교재를 다양화하고 교육 현장의 실정에 맞도록 체계화하기 위해서는 외국 대학의 한국어 강좌의 교육 프로그램을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국내외 전문가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더욱 확대하고 교육 연구를 지원해야 할 것이다.

둘째, 한국문학 해외 번역 출판에 대한 다양한 홍보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문학작품의 번역 출판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외국 독자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해외 홍보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매년 특정 작가의 특정 작품에 대한 집중적인 홍보 프로그램을 만들어 지속적으로 운영할 필요가 있다. 국제교류진흥회가 그동안 진행해온 문인과 번역자의 순회 낭독회를 보다 더 확대하고 체계화하여 해외 한국학 연구기관과 공동으로 한국문학 순회 낭독회 강연회 등을 운영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도 바람직하다. 이러한 홍보 프로그램은 외국의 한국학 관련기관만이 아니라 한국문화원이나 해외 공관 그리고 한국 교민사회와의 협력을 통해 효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한국문학 전문가를 제대로 육성하지 않고서는 한국의 진정한 세계화를 말할 수 없다. 한국문학을 널리 알리고 한국문학 연구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은 한국문학 전문가를 키우는 일이다. 이를 위해서는 해외 한국문학 교육과 연구를 대폭적으로 지원할 필요가 있다. 국제교류진흥회에서는 영어권을 중심으로 매년 한국문학 번역자 양성 프로그램을 통해 새로운 젊은 번역자를 한국문학 전문가로 양성하기 위해 지원하고 있다. 이러한 사업을 언어권별로 더욱 폭넓게 확대하기 위해서는 해외 한국문학 교육연구 지원 기금을 만들어서 세계 각 지역의 한국학 연구자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해외 대학의 한국문학 전공 대학원생에 대한 장학금 지원도 정부 차원에서 제도화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국내외 한국문학전문가들의 연구활동을 서로 연결할 수 있는 인적 네트워크를 조성하여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필요하다.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