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꾼 아버지 / 최명길
밤 이슥토록 밭도랑을 파내면서
앞드로 논물 대던 날 밤 그 기억의 파편을
한 삽 퍼내 올렸다.
가물 타 논바닥이 물을 달라고 쩍
벌어지고야 말던 날
나는 괭이를 들러 메고 윗논 물꼬를 땄다.
그 윗논 물꼬를 따고
그 윗논 물꼬도 따고
또 그 윗논 물꼬를 따고
남의 물꼬를 따고 따
두어 시간이나 따고 올라가 마침내
물 한 줄기가 겨우 우리 논 물꼬에 닿으며
멍석 한 닢만큼 물자리를 폈을 때
논바닥이 물 먹는 소리를 꼬르륵 꼬르륵
냈을 때
아버지는 마른 부시를 그었다.
부싯돌과 부시가 부딪쳐 튀는 불꽃이
섬들 버덩 어둠을 건너뛰며 번쩍여
마치 별을 데리고 노는 듯
도깨비를 데리고 노는 듯 했다.
평생 지게 등짐 무게에 짓눌려
다리뼈가 바깥으로 휘어 튕겨져 나갔던
농사꾼 아버지
강릉 노파 생각
야야 네 몰골이 매련읎다.
패래서 빼깡챙이가 됐다이
우연히 고향 마실에 들렸다가
어른을 만나 이런 말을 듣노라면
나 참 달부 어여워서 꼭 가랑낭그뗑이 같은
벌거지를 씹는 듯하다.
뙛에서 시집 와 구매 비얄에 살던 그 새댁은
얼굴이 곱사라했으나 꼬불아져
몸을 오부뎅이로 질목쟁이 돌방구에 기댄 채
걱정이 죄련찮다.
올해는 날쌔가 노박 사무루워서
논다랑이에 복새가 들고 피가 개락이라
입쌀 구경 하기는 다 틀렸다.
사랑모텡이 그 참꽃낭근 별탈 없던가
하지만 몇 년 전 그 어른 가시고 나자
마실에는 이제 나를 알아보는 이 아무도 없다.
천지 사이가 텅 비었다.
그래 어픈 가. 어여 살페가우야
자가 왜 저닷타게 패랬지
*가랑낭그뗑이: 마른 갈참나뭇가지
약력 : 1940년 강릉 출생. 1975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화접사』『풀피리 하나만으로』『반만 울리는 피리』『은자, 물을 건너다』『콧구멍 없는 소』『하늘 불탱』등이 있고 명상시집『바람 속의 작은 집』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