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정부는 지난 5일 위암(韋庵) 장지연의 친일 행적을 이유로 서훈(敍勳) 취소를 확정했다. 1962년 대한민국 정부는 장지연을 대표적 항일 언론인으로 인정하여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었다. 훈장 추서 후 50년이 지났는데 정부가 서훈 취소를 확정하였으니 훈장을 다시 반납해야 하는 일이 생겼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게 되었을 때, ‘4천년 강토와 5백년 종사를 타인에게 봉헌하고 2천만 생령으로 타인의 노예가 되게 하였음을 통탄한 논설이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발표되었다. 是日也放聲大哭(시일야방성대곡, 이날에 목을 놓아 통곡하노라)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이 논설의 주인공이 바로 장지연이었다는 사실은 너무나 유명하다. 장지연은 당시 42세의 나이로 언론을 통해 민족 계몽에 앞장서고 있었는데, 이 논설을 발표한 직후에 체포되었고 신문도 정간 당했다.

장지연은 1864년에 경북 상주에서 태어났다. 영남 유림의 본고장에서 자란 그는 어려서부터 한학을 익혔고 31세에 진사 병과(進士丙科)에 급제하였으며, 사례소(史禮所) 직원(直員)을 거쳐 내부주사(內部主事) 등도 역임하였다. 갑오개혁이 있던 해에 이루어진 그의 진사 급제는 사환(仕宦)의 생활을 결코 순탄하게 만들지는 않았다. 격변의 시대가 이어지면서 국운은 점차 기울어지고 민심은 혼란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이 36세에 달하던 18991월 장지연은 시사총보(時事叢報)사의 주필이 되면서 삶의 새로운 전환을 꾀하였다. 그는 스스로 익혔던 전통 유학의 사상을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개혁시켜 나아가기 위해 힘을 기울였고 새로운 문물과 지식에 관심을 쏟았다. 그리고 황성신문의 주필(1899. 9)을 맡으면서 언론을 통한 문명개화와 민족 계몽 운동에 앞장섰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이러한 애국적인 언론활동의 정점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906년 황성신문에서 물러난 장지연은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 1906)를 발기하고 본격적인 애국계몽운동에 나섰으며 많은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1908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망국의 비운을 통분해 했던 그는 다시 귀국한 후 1909년 경남 진주에서 창간된 경남일보(慶南日報)의 주필로 취임하였다. 1910년 일본의 강점에 의한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자 경남일보 1011일자에 황현(黃玹)의 절명시(絶命詩)를 게재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경남일보는 일본 경찰에 의해 10일간 발행정지가 되었다.

한말의 지식인으로서 장지연이 보여주고 있는 행적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논의될 수 있다. 그는 전통적인 유학자로서 자신이 익혀 온 유교의 이념을 끝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새로운 서구의 문물이 수용되기 시작하자 시대적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방편을 자신의 학문 속에서 찾고자 하였다. 장지연은 유교의 본질을 중시하면서도 시대적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의 도리를 강조하였다. 그는 공자의 대동(大同)사상을 중시하였으며 우리나라가 1천여 년 전부터 숭배하고 신앙한 것이 오직 공부자(孔夫子)의 교리였으니 이제 그 숭배했던 바에 나아가서 이를 혁신하고 시의에 알맞게 해야 할 것임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개화·진보하는 시세를 맞으면서 진부한 옛 문물의 개신의 필요성을 일찍 깨달았기 때문에, 모든 사물이 오래되면 낡아지고, 낡아지면 썩으며, 썩으면 패하는 것이 이치임을 강조하면서 동양문화의 새로운 개혁이 필연적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신학문을 배척하는 것은 나라에 좀벌레가 되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진정한 유풍(儒風)을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오직 유가(儒家)의 자력 여하에 있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신·구 학문의 변용은 장지연에게 있어서 언론기관에서의 활동이 더욱 중요한 촉발점이 되었다.

장지연이 자신의 유학사상을 스스로 개신하여 나간 것은 당시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자각과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문명과 지식을 적극 받아들이면서 사회의 모든 부문이 새로이 진보하는 기풍을 드러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외세의 침략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국력을 발전시키고 국권을 신장하는 방법으로서 그는 자강주의(自强主義)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가 뜻있는 지식인들과 함께 발기한 대한자강회는 자강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사회단체였으며, 국권 회복과 국력 배양을 목표로 교육과 산업을 추진하는 길을 도모하고자 했던 것이다. 장지연이 일찍부터 국문의 중요성에 대해 자각하고 있었다는 점은 특기할 만하다. 그는 전통적인 한문을 배우고 익히며 한문을 통해 유학 사상을 받아들였지만 민족 교육의 우선적인 과제로서 국문 교육의 시급한 확장을 강조하였다. 국문이 지니고 있는 실용적인 편의성뿐만 아니라 자국의 문화에 대한 주체적인 인식이 함께 작용했던 것이다. 그는 국문관계론이라는 논설에서 진실로 교육을 발달시키고 우리 독립을 만회하고자 한다면 오직 국문을 확장하는 데에 있나니 한문은 말할 것도 없이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는 스스로 국문 전용을 실천하여 애국부인전(1907)이라는 영웅 전기를 남겼다. 프랑스의 애국적인 여성 잔 다크의 생애를 그려낸 이 작품은 애국사상의 계발, 역사 지식의 보급, 민족의식의 자각 등 계몽적인 의도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장지연의 사회활동과 그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렇지만 그가 전통적인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학문과 사상을 스스로 개혁해 나간 계몽사상가였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는 유학사상을 새로이 개신하여 현실의 문제에 적용코자 하였으며, 서구의 신학문을 수용하여 민족의 살 길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언론인으로서 망국의 슬픔을 겪었고 구국의 일념으로 민족 자강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하지만 망국의 비운을 현실적으로 극복하기 어렵게 되자, 그 자신의 사회적 실천운동을 내면화하여 많은 저술을 남겼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지리에 관한 연구와 한문 시문의 정리 작업에 심혈을 기울이면서 유교연원(儒敎淵源)》《동국유사(東國類史)》 《대동시선(大東詩選)》 《농정전서(農政全書)》《일사유사(逸士遺事)》 《위암문고(韋庵文庫)》 《대한최근사(大韓最近史)》 《대동문수(大東文粹)》 《대동기년(大東紀年)》 《화원지(花園誌)등을 펴냈다.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은 만세운동 직후인 1921년이었고 그 때의 나이는 58세였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그의 부음을 슬퍼하는 한 신문의 기사 중에 선생은 생()하여 의()가 존()하며, ()가 일()하니 그 생()이 난()하였으며, ()가 성()치 못하고 지()가 전()치 못하니 그 사()가 또한 난()하도다.’ 라고 하였다. 옳고 바른 것에 일관한 뜻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삶이 더욱 고통스러웠음을 말하면서도 그 뜻이 제대로 펼쳐질 수 없는 상황이었음을 더욱 통탄하고 있는 내용이었다.

 

한국의 근대사에서 격동의 시대를 살아가며 자신의 뜻을 끝까지 지켜나간 지식인이 많지 않다. 장지연의 경우에도 1914년 조선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신보(每日申報)에 친일적인 성향의 글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고, 친일 불교단체 불교진흥회(佛敎振興會)의 간사로 활동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협력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런 연유로 <친일인명사전>에도 그의 이름이 올랐고, 결국은 서훈 취소 확정까지 이르게 되었다. 참으로 아타까운 일이다. 그가 친일적인 문필활동도 했다는 사실 자체가 확인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얼마나 적극적이었는가를 따지는 일은 무의미하다. 더구나 그가 보여준 애국적인 활동과 계몽운동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이 마당에 내세워 비교하고자 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가 모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장지연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여 건국훈장을 추서한 것도 대한민국 정부이고 그를 친일파로 규정하여 서훈을 취소한 것도 대한민국 정부라는 사실이다. 국가의 결정은 엄정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역사적 가치 기준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모든 국민들이 동의하고 수긍할 수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장지연에게 추서한 건국훈장 국민장에 대해 서훈 취소라는 엄청난 결정을 내리는 데에 어떤 역사적 가치 기준을 따랐는가 하는 점은 반드시 모든 절차와 함께 공개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국가의 결정이 엄정하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 (권영민)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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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지연 2013.05.07 12:25 Address Modify/Delete Reply

    내이름도 장지연인데 고인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