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언의 시학 혹은 사투리로 시 쓰기

오늘 나는 이곳 공주에서 열게 된 여섯 번째의 문학콘서트를 ‘사투리로 시 쓰기’라는 특이한 제목을 내세웠습니다. 이러한 주제를 택하게 된 것은 평생을 자신이 태어난 고장에서 시를 쓰며 살아온 나태주 시인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서입니다. 나태주 시인은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대숲 아래서」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문단활동을 해오셨습니다. 나 시인은 훌륭한 시는 ‘시인의 영혼이 스며들어 있는 시’라고 늘 강조해 왔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언어와 합치하여 이들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 참된 시인의 작업이라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시적 태도를 통해 전통적 서정성을 바탕으로 일상적인 삶의 정경이라든지 인정과 사랑의 깊은 의미를 자신의 언어로 노래하였습니다. 시적 대상에 대한 치밀한 관찰력과 깊은 사색은 모두 그 질박한 언어를 통해 풍부한 시적 형상성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주선해 주신 나태주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나태주 시인과 함께 어울릴 수 있는 시인 다섯 분을 이곳 공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분들께 자기 지역의 사투리를 시어로 활용한 시를 한번 써 주십사는 당부를 드렸지요. 여기 자료집에 다섯 분의 시가 나란히 실렸습니다. 이 시들을 함께 즐기면서 오늘의 주제인 ‘사투리로 시쓰기’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여기서 먼저 박목월의 시 「이별가」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이 시에서 경상도 사투리 ‘뭐락카노, 뭐락카노’의 반복을 통해 거두고 있는 정서의 깊이와 그 확대는 특기할 만합니다.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뭐락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락카노 뭐락카노

썩어서 동아밧줄은 삭아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 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경상도 사투리의 묘미를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뭐락카노’라는 이 한마디 말은 매우 복잡한 내면적 정서의 표출을 가능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당위적인 것에 대한 반문을 표시하기도 하지만 선행하는 진술 자체에 대한 일종의 자기 확인법으로도 쓰입니다. 박목월은 이 한 마디의 말을 통해 토착어의 시적 기능을 절묘하게도 살려내고 있습니다. 자기 지역의 특징적인 방언 한 마디를 골라 이토록 가슴 저미는 시어로 만든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토속어의 시적 활용이라는 점을 놓고 본다면, 1930년대의 시인 백석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백석의 시에 그려지는 시적 정황과 그것을 묘사하고 있는 언어는 매우 특이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마을에서는 세 벌 김을 다 매고 들에서

개장취념을 서너 번 하고 나면

백중 좋은 날이 슬그머니 오는데

백중날에는 새악시들이

생모시치마 천진푀치마의 물팩치기 껑추렁한 치마에

쇠주푀적삼 항라적삼의 자지고름이 기드렁한 적삼에

한끝나게 상나들이옷을 있는 대로 다 내입고

머리는 다리를 서너 켜레씩 들어서

시뻘건 꼬둘채댕기를 삐뚜룩하니 해 꽂고

네 날백이 따배기신을 맨발에 바꿔 신고

고개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가는데

무썩무썩 더운 날에도 벌 길에는

건들건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고

허리에 찬 남갑사 주머니에는 오랜만에 돈푼이 들어 즈벅이고

광지보에서 나온 은장도에 바늘집에 원앙에 바둑에

번들번들하는 노리개는 스르럭스르럭 소리가 나고

고개를 몇이라도 넘어서 약물터로 오면

약물터엔 사람들이 백재일치듯 하였는데

붕가집에서 온 사람들도 만나 반가워하고

깨죽이며 문주며 섶가락 앞에 송구떡을 사서 권하거니 먹거니 하고

그러다는 백중 물을 내는 소내기를 함뿍 맞고

호주를 하니 젖어서 달아나는데

이번에는 꿈에도 못 잊는 붕가집에 가는 것이다

붕가집을 가면서도 칠월 그믐 초가을을 할 때까지

평안하니 집살이를 할 것을 생각하고

애끼는 옷을 다 적시어도 비는 시원만 하다고 생각한다

 

백석의 시 가운데 민중들의 소박하면서도 생명력이 넘쳐흐르는 삶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작품으로 「칠월 백중」을 손꼽을 수 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시적 대상에 대한 묘사의 사실성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각각의 시행들이 하나의 이야기를 말하는 듯한 서술적 효과를 드러내도록 연결되어 있습니다. 백중날 약물터에 놀이를 나가는 새악시들의 모습을 그 옷치레부터 수선스럽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고개를 넘고 넘어 약물터에 모여든 사람들의 흥겨운 모습이 함께 어우러집니다. 작품 속에 묘사되는 대상들이 백중날 약물터라는 하나의 구체적인 시적 공간 속으로 집약되면서 시적 감흥도 고조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정서적 고양 상태에서 ‘백중 물을 내는 소내기를 함뿍 맞고’ 모두가 후줄근하게 젖지만, 오히려 마음은 차분하게 다가올 살림살이를 생각하면서 ‘붕가집’으로 향합니다. 이러한 시적 진술을 통해 시인은 감각적인 시적 심상들을 공간적으로 병치시키면서 동시에 그 공간 자체를 한 폭의 풍경으로 꾸며내고 있습니다. 백석의 시는 이야기조의 서술적 특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지배적 인상을 포착해내는 언어의 감각성을 이처럼 잘 살려내고 있습니다.

앞의 시 「칠월 백중」에서 처럼, 백석은 자신이 설정하고 있는 시적 공간에 자신의 말과 시적 화자의 말을 동시에 서로 다른 관점과 방향으로 펼쳐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험적 자아로서의 시인의 입장을 감추고자 하는 의도에도 불구하고, 백석의 시는 시적 화자의 일관된 언어 체계와 미묘하게 경계를 이루는 시인 자신의 토속적 언어가 새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언어들은 규범적인 표준어와 지역적인 방언 사이의 대화 공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시인이 자신의 언어를 통해 자기와 다른 언어 체계를 지니고 있는 시적 화자와 대화적 공간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매우 치밀한 전략과 언어적 직관이 필요합니다. 시인 백석의 문학적 재질이 바로 여기서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시적 정서도 그 스스로를 소리로 드러내게끔 하지 못한다면, 그 시적 묘사라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정서의 세계는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지배적 인상으로 묘사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두 편의 시를 예롤 들어 보았습니다만, 시에서 토속어 또는 사투리라는 것이 가지는 시적 담론의 특성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지를 놓고 한번 같이 생각해 봅시다. 시 속에서 사투리가 시적 담론의 체계를 형성하는 데에 가장 기능적인 것은 일차적으로 어휘의 변별성에서 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휘론적 차원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히려 그 어휘의 다양한 활용 형태의 변화에서 특징이 드러납니다. 낱낱의 어휘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그 의미의 미묘한 변화를 통해 그 정서적인 요소를 최대한 확대하고 있는 것이 지역의 사투리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문체론적인 특징에 해당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특징을 간과해버림으로써 사투리의 지역적 특성과 개인적 언어의 감각을 무시해버리는 일도 생깁니다. 사투리와 표준어의 간격으로 인하여 시적 언어의 해석에 문제가 생기고 있는 대표적인 두 가지 사례를 더 들어보기로 하겠습니다.

먼저 이육사의 <광야(曠野)>를 읽어보기로 하겠습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이 시의 첫 연에서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라는 구절을 주목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사용된 ‘어데’라는 말은 경상도 사투리라고 생각합니다. 경상도 사투리에서 ‘어데’라는 말은 표준어의 ‘어디’와는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이 말은 뒤에 이어지는 시적 진술에 대한 강한 부정과 의문을 표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시의 구절은 ‘닭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태고의 적막’ 같은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해석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 시를 해석하고 있는 대부분의 평자들은 그러한 사투리의 특징을 외면하고 표준어 ‘어디’로 이 구절을 읽어버립니다. 그러므로 ‘어디에서 닭의 울음소리가 천지의 개벽을 알리듯 들려오는 것’으로 아주 엉뚱하게 해석해버리고 있습니다. ‘어데/어디’라는 사투리와 표준어의 간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에서 생겨난 일입니다.

김영랑의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을 수 있습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여흰 서름에잠길테요

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날

떠러져누은 꼿닙마저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쳐오르든 내보람 서운케 문허졌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잇슬테요 찰란한슬픔의 봄을

 

이 시의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라는 구절을 주목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여기 쓰인 ‘하냥’ 이라는 시어도 사투리입니다. 그런데 이 말은 한글학회의 <<우리말 큰사전>>에 ‘늘’이라는 뜻으로 풀이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용례로 들고 있는 것이 바로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이 구절입니다. 금성출판사 판 <<국어대사전>>에도 ‘한결같이 줄곧’이라는 의미로 풀이하고 있으며, 역시 그 용례로 이 싯구를 들고 있지요. 대부분의 교과서도 모두 이같은 풀이를 따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풀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냥’이라는 말이 일상적인 용법에서 ‘늘’과 같이 시간을 표시하는 말로 쓰이는 예는 찾을 수가 없습니다. 충청도 지방과 호남 지방에서 ‘ 하냥’이라는 말이 쓰이는 예로 ‘(1) 나하고 하냥 가자. (2) 온 식구들이 모두 하냥 사는 것이 소원이다.’ 등과 같은 말을 들 수 있지요. 이러한 예로 본다면 ‘하냥’은 ‘함께 더불어’ 또는 ‘ 같이 함께’와 같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삼백 여순날 함께 섭섭해 우옵내다’로 읽어야만 합니다. 시적 주체로서의 <나>는 떨어지는 모란을 보고 그 모란과 <하냥>(함께) 다시 모란이 피어날 때까지 울면서 봄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기다리는 정서>와 <잃어버린 설움>을 절묘하게 대응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문제처럼 보이지만, 사투리는 이렇게 일상적인 개인의 감각과 지역적 정서를 서로 밀착시켜 놓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징을 외면하면 시의 내적 공간이 협소해집니다.

저는 우리 시인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언어 감각과 지역적 정서를 절묘하게 결합시킬 수 있는 시어로서의 사투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사투리는 그동안 표준어 중심의 국어교육의 현장에서 모두 밀려났고, 이제는 매체 환경의 변화를 따라 언어의 지역적 편차가 사라지면서 모두 소멸할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문학의 영역에서만 사투리가 사투리로서의 특성을 살릴 수 있는 작은 자리를 남겨두고 있지요. 시를 통한 사투리의 부활이라는 것은 불가능할지 모르지만 시어로서의 사투리의 가능성을 얼마든지 열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이 자리에 나오시게 될 다섯 분의 시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