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던 친구가 왔다. 딸아이의 결혼식을 서울에서 올렸다. 다시 미국으로 들어가기 전에 점심 때 만나 냉면이라도 한 그릇 같이 하잔다. 아마도 시집보낸 딸 때문에 그 친구 마음이 좀 허전해졌는지 모르겠다.
둘은 점심시간이 거의 끝날 무렵에 만났다. 냉면 이야기를 했던 친구는 빈대떡이 먹고 싶단다. 나는 친구를 끌고 음식점들이 늘어선 골목으로 접어든다.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사람들이 골목에 가득하다.
‘저게 뭐지?’
그 친구가 가리킨 집은 커다랗게 ‘XX 수산 센터’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푸른 색 바탕의 간판에 파도까지 넘실대고 고기가 튀어 오르는 모양까지 그려져 있다. 내가 머뭇거리자 그 친구가 다시 묻는다.
‘생선 가게?’
나는 생선을 팔기는 하지만 가게가 아니라고 대답한다. 생선으로 요리를 해서 파는 음식점이라고 설명한다. 그 친구가 그제사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다는 듯이 웃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한다.
‘참 이상도 하다. 음식점에 왜 저런 간판을 달지? 수산 센터라니. 생선가게라면 몰라도. 서울의 거리에 간판이 너무 크고 많아. 레스토랑의 간판을 꼭 저렇게 크게 써붙여야 하나?’
나는 이 친구의 시비에 대해 할 말이 없다. 그저 웃으면서 들어줄 수밖에.
둘이는 ‘원조 빈대떡’ 집으로 들어선다. 허름한 탁자와 의자가 원조라는 이름에 어울린다. 빈대떡에 보쌈 한 접시를 더하고 소주도 한 병을 시킨다. 그리고 창 너머 골목길 풍경을 내다본다.
길 건너편 집에는 ‘제주 흑돼지’라고 빨간 바탕에 노란 글씨의 커다란 간판이 붙어 있다. ‘제주 흑돼지’ 옆에는 그보다 더 크고 뻘겋게 간판을 그려놓은 ‘강원도 멧돼지’ 집이다. 기왕 이런 식으로 시작된 돼지들의 싸움터니까 ‘원조 족발’이 나오고, ‘왕족발’이 옆에서 또 트집을 걸어야 한다. ‘멧돼지 통구이’ 옆에는 ‘흑돼지 삼겹살’이 나와야 제격이다. 그리고 ‘돼지갈비 고추장구이’도 거기 끼어든다. 참으로 웃기는 간판들의 행렬이다.
‘간판들이 도무지 너무 커. 아무 실속도 없는 싸움터야.’
친구는 음식점 간판들에 여전히 시비를 건다. 그러면서도 ‘원조’를 내세운 빈대떡의 맛에는 만족이다.
친구의 말대로 서울 거리는 간판들의 전쟁터다. 이 싸움에는 양보의 미덕도 없고 작전의 규칙도 없다. 그저 크기로만 승부한다. 남보다 더 커야만 살아남는다. 그러니까 옆집 가게의 간판이 조금 커 보인다 싶으면 어떻게든 그보다 더 크게 간판을 내달아야 한다. 도시 거리의 미관이니 뭐니 하는 것은 상관이 없다. 내 집 간판만 잘 보이면 그만이다.
이 무지막지한 간판의 싸움에서 크기로 승부가 나지 않을 듯싶으면, 잽싸게 갯수를 늘인다. 하나만으로 부족해 보이면 둘을 달고, 둘로도 성미에 차지 않으니까 기다랗게 입간판을 또 내세운다. 이렇게 되니 건물의 외벽은 모두 간판으로 가려진다. 창문까지도 온갖 글씨로 도배질을 한다. 그러나 이 허망하기 그지없는 물량주의의 싸움에 실속을 챙기는 것은 간판장이들뿐이다. 더 크게 더 많이! 를 외치며.
서울의 어느 구역인가 아름다운 거리 만들기를 추진하면서 작고 이쁜 이름의 간판 달기 운동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관청에서 돈까지 대준단다. 그러나 얼마나 새롭게 이 험난한 싸움터를 평정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그리고 언제쯤 서울의 거리 전체가 요란스런 간판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예측할 수가 없다. 아직은 큰 것이 더 잘 보이고 많은 것이 더 나아 보이지 않는가? 자기 얼굴보다 더 크고 많은 명함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많듯이, 간판이 날로 더 커지고 더 많아지지 않겠는가?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