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매년 봄이 되면 매화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 일대. 남해와 맞닿은 이 아름다운 어촌 마을엔 시인 윤동주(1917∼1945)와 국문학자 정병욱(1922∼1982)의 인연이 깃든 정병욱의 생가가 남아 있다. 윤동주의 처음이자 마지막 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비밀을 품은 집이다. 시간을 일제강점기 경성(서울)으로 돌려본다. 》

1940년 봄. 열여덟의 정병욱이 연희전문(현 연세대) 문과에 입학한 뒤 가장 먼저 친해진 선배가 윤동주였다. 신문 학생란에 실린 정병욱의 글을 보고 윤동주가 먼저 정병욱을 찾았다. 윤동주는 정병욱의 학교 2년 선배였다. 멀리 북간도 용정 땅에서 온 윤동주와 전남 광양에서 온 정병욱, 두 문청(文靑)은 글을 통해 가까워졌다. 정병욱은 연희전문 기숙사 생활부터 학교 공부까지 윤동주의 도움을 받아 낯선 서울 생활에 적응했다.

이듬해 봄 둘은 기숙사를 나와 종로 누상동에 하숙을 정했다. 광복 직후 활동했던 소설가 김송(金松)의 집이었다. 두 사람은 방을 함께 썼다. 윤동주는 늘 자신이 쓴 시의 원고를 정병욱에게 보여주었다. ‘또 다른 고향’ ‘별 헤는 밤’ ‘참회록’ ‘간(肝)’ 같은 시들이 하숙방에서 탄생했다.

 

연희전문 시절 윤동주(왼쪽)와 정병욱. 윤동주가 2년 선배였지만 둘은 하숙방을 함께 쓰며 문학에 대해 고민하던 절친한 문우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문학과 예술이 중심을 이루었지만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윤동주를 따라 정병욱도 일요일이면 교회당을 찾았다. 충무로 책방거리도 함께 거닐었고, 음악다방에 들렀다가 영화관을 찾기도 했다.

당시 윤동주는 일본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연희전문 졸업 기념으로 자신이 평소에 써두었던 시들을 정리해 시집을 펴낼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제강점기 상황에서의 시국이 허락하지 않았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했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국어 말살정책으로 우리말로 된 책자 발간이 금지됐다. 윤동주는 1941년 모두 열아홉 편의 시를 자필로 정리해 놓고,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을 붙였다. 원고를 손수 제본해 총 세 권을 만든다. 이 시집의 서문을 시로 적은 것이 우리에게 익숙한 서시(序詩)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점 부끄럼이 없기를,/입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안테 주어진 길을/거러가야겠다.//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는 그중 한 권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이라고 썼다. 육필로 만든 단 세 권의 시집 가운데 하나를 아끼는 동생에게 준 것. 다른 한 권은 연희전문 문과 교수였던 이양하 선생께 드리면서 시집 출간을 상의했지만 무산됐다. 결국 윤동주는 남은 한 권을 지닌 채 1942년 일본으로 떠났다.

윤동주가 일본 유학길에 오른 뒤 정병욱도 모교를 떠나야 했다.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학병에 징발되었기 때문이다. 정병욱은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자신의 책과 노트, 그리고 윤동주의 자필 시집 원고를 어머니에게 맡겼다. “소중한 것이니 잘 간수하셔야 한다”는 간곡한 당부도 곁들였다. 정병욱은 전선에 투입되었다가 부상으로 후송돼 목숨을 건졌다.

일본이 패망하고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았다. 정병욱은 경성대학(현 서울대) 국어국문과에 편입해 학업을 계속하던 중에 끊겼던 윤동주의 소식을 들었다. 북간도 용정에서 광복과 함께 귀국한 윤동주의 가족을 통해서였다. 충격적이고 가슴 아린 소식이었다. 윤동주가 1943년 7월 교토의 도시샤대에서 고종사촌 송몽규 등과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가 결국 1945년 2월 후쿠오카 감옥에서 악형(惡刑)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 정병욱은 윤동주가 생전에 건네주었던 시집 원고를 떠올렸다.

정병욱은 고향 집을 찾았다. 광복 후 어수선한 서울을 떠나 오랜만에 찾은 귀향길이었다. 고향집은 섬진강 하구 망덕포구에 있는 점포형 주택. 그의 부친은 양조장을 운영하면서 향리의 청년 교육에 앞장섰던 인물이었다.

정병욱은 집에 들어서자 바로 어머니에게 전에 맡겼던 책과 노트를 어디에 두었느냐고 물었다. “잘 간수했으니 걱정 마라”고 말한 어머니는 명주 보자기로 정성스럽게 싸 놓은 책과 노트를 꺼내왔다. 보자기를 푼 정병욱은 자신의 책과 노트 사이에 있는 윤동주의 시 원고를 보자 가슴이 뭉클했다. 어머니는 혹 남들 눈에 띌까, 이들 자료를 양조장 큰 독 안에 감추었다가 지금껏 장롱 깊숙한 곳에 보관해 왔다고 전했다.

정병욱은 서울로 올라오자 곧바로 시집 원고를 윤동주의 가족에게 보였고, 이 원고와 함께 윤동주의 시 작품들을 조사하여 시집 발간 작업을 서둘렀다. 1948년 1월 윤동주의 3주기를 앞두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가 마침내 나오게 된다.

도시샤대 영문과 선배였던 시인 정지용은 이 시집에 이런 글을 붙였다. ‘청년 윤동주는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 적도 없이! 무명(無名)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지난달 말 망덕포구에 있는 정병욱의 생가(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23)를 찾았다. 1925년 건축된 일본식 목조건물인 이 집은 윤동주와 정병욱의 우정을 기려 2007년 등록문화재로 지정됐다. 집은 원래 건평만 264m²(약 80평)였지만 지금은 반파돼 105m²(약 32평·방 5칸)의 한 건물만 남았다. 생가 옆에서 횟집을 하는 정병욱의 외조카 박춘식 씨(57)가 현재 소유주다. 어디서 소식을 들었을까. 날 좋은 주말이면 이곳을 찾는 관광객이 적지 않단다. 다만 이들을 맞을 안내자도, 변변한 공중화장실조차 없다는 게 아쉽다고 박 씨는 전했다.

윤동주가 정병욱에게 준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육필 원고. 표지에 ‘정병욱 형 앞에’ ‘윤동주 정(呈·드림)’이라고 적었다.

정병욱은 윤동주의 시 정신과 그 맑은 영혼을 가슴 깊이 간직하기 위해, 윤동주의 시 ‘흰 그림자’를 한자로 바꾼 ‘백영(白影)’을 아호로 삼았다. 두 사람의 우정이 아니었다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아들의 말을 듣고 원고를 고이고이 간직했던 노모(老母)의 자상함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한다. 눈을 돌려 바라본 섬진강의 물결은 이날도 말없이 평안하고 푸르렀다. (2012.11.26 / 정리=황인찬 기자 hic@donga.com)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