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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세계의 독자와 만나다.

이 짤막한 메시지는 곧바로 한국문학, 세계의 독자와 만나다.’ 라고 고쳐 써도 좋다. 신경숙이라는 작가 한 사람과 한국문학을 등치로 놓아도 된다는 말이다. 물론 여기에 반발할 독자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신경숙 신드롬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는 지금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읽힌다. 그리고 한국문학이 담아내는 특이한 목소리에 모두가 환호한다. 이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엄마를 부탁해는 현재 40여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어 수많은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한국문학이 아직도 세계문학의 변방에 놓여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놓고 본다면 이것은 단순한 기록의 의미를 넘어선다. 영역본이 나온 지 일년만에 세계 각국에 다시 번역 소개되고 있다는 것은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신경숙, 세계의 독자와 만나다.’ 라는 메시지는 과장이 아니다.

한국에서 만든 자동차가 지구의 모든 땅 위를 줄지어 달린다. 한국에서 만든 휴대전화를 세계 각국의 소비자들이 그들의 손 안에 들고 다닌다. 한국에서 만든 텔레비전이 세계 각국의 많은 가정에 골고루 놓여 있다. 세계 각국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한국의 노래와 드라마와 영화에 환호한다. 세계 각국의 유명 대학이 한국어 교육에 열을 올린다. 이러한 뉴스에 우리는 모두가 우쭐한다. 하지만 한국문인 가운데 누구도 세계 각국의 독자들이 그 이름을 기억할 만한 인물은 아직 없다. 세계의 독자들은 한국문학에 대해 얼음처럼 냉담하다. 이들은 구태여 한국문학 작품을 그들의 언어로 번역을 통해 읽어야 할 필요를 별로 느끼지 않는다. 이들이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고 그 관심과 취향과 문화적 수준도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 낯선 독자들을 한국문학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법은 무얼까?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과제는 여전히 한국문단의 가장 큰 이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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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권영민의 문학콘서트는 작가 신경숙과 함께 그 막을 올린다.

신경숙은 글로벌시대의 한국문학의 위상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는 말로 대담의 화제를 내놓았다. 신경숙은 자신이 이제 막 세계라는 무대에 올라선 신인 배우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 문학에 언제나 당당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준다.

권 선생님께서도 제 의견에 동의해 주실지 모르겠지만 저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말에는 처음부터 짚어봐야 할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문학은 그냥 문학일 뿐이지 않을까, 한국문학, 일본문학, 프랑스문학, 남미문학... 이런 식으로 지역과 언어의 장벽을 처음부터 쌓아두는 것이 옳은 일일까 싶은 게 평소의 제 생각입니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말 속에는 한국에서 한국어로 쓴 작품 자체를 한국문학으로만 한정하는 마음이 깔려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요. 저는 작가가 자기 언어로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가 세계문학의 범주에 든다고 생각해요. 다만 소통을 위해 번역과 출판이라는 문제가 과제로 남아있는 거지요.”

나는 신경숙의 이 말에 그만 깜짝 놀랐다. 작가는 자기 언어로 글을 쓰지만 그것을 민족어의 틀 속에 가두어두고 보는 태도가 문제라는 지적이다. 작가와 작품은 언제나 세계문학의 영역에 속한다! 이것은 작가 신경숙의 당돌한 구상(?)처럼 보이지만 거역할 수 없는 사실이다. 누구도 어떤 분야에서도 이 명제는 글로벌시대인 오늘날에는 이다. 시골의 농부가 소 몇 마리를 키우면서도 수입 쇠고기를 걱정하고, 비닐하우스 안에서 딸기를 따면서 땀 흘리는 농부도 필리핀산 바나나 가격을 따진다. 어촌의 굴 양식장 주인도 일본 동경의 굴 가격을 계산하지 않는가? 시대가 이미 그렇게 변한 것이다! 그러니 작가라고 자기 언어의 감옥 안에 틀어박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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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로부터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했다. 2011년 미국에서 영역판 PLEASE LOOK AFTER MOM이 출간된 직후 나온 여러 언론의 반응들 가운데 나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소개되었던 피코 아이어(PICO IYER)라는 컬럼니스트의 글 <뿌리 뽑힌 세계에서 길을 잃다>를 떠올렸다. 이 글에서 피코 아이어는 이렇게 적었다. ‘어쩌면 어떤 미국인 독자들은 신경숙의 소설을 펼쳐들고는 부모로부터 멀어지는 것이 일종의 고뇌의 원인이며 이단 행위처럼 그려지고 있는 데 놀랄지도 모른다. 어떤 다른 이들은 이 책을 읽고 난 후 우리가 과거를 떠나 우리 자신의 삶을 세워나가는 것에 얼마나 많은 성패가 달려있는지를 깨닫게 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지구 전체를 가로질러 가장 거대하게 나타나고 있는 분열은 이슬람과 서양 간의, 혹은 중국과 미합중국 사이의 대립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한 나라 내부의, 심지어 한 가족 내부의, 과거와 미래의 서로 다른 문화 사이에서 나타나는 분열이다. 자수성가를 자랑삼는 미국인들과 효를 중시하는 전통주의자들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과거를 돌아다보고 있는 형국이다. 엄마를 부탁해는 이러한 현실을 통렬한 주제의식으로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날카로운 도전으로 제시했다. (미국/WSJ/110328)’ 물론 이와 다른 견해도 많았지만 나는 이 소설의 각별한 소재 가운데 그 주제의식의 보편성을 잘 지적한 리뷰라고 생각한다. 나는 월스트리트 저널의 기사 내용을 예로 들면서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작가 신경숙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물었다.

작품에 어떤 운명이 있다면 이 작품은 운을 아주 좋게 가지고 태어났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 작품이 출간되자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았고, 한국과 미국 에이전시가 작품을 영어로 알리고 싶어 했지요. 제가 에이전시의 요구를 받아들이자, 영어 번역과 영어권 출판사와의 계약이 걸림돌 없이 바로바로 이어졌습니다. 이 책을 영어로 출판한 영어권 에디터가 이 소설 자체를 매우 좋아했던 것도 행운이었다고 생각해요. 이들이 왜 이 작품에 관심을 가졌던 것일까 하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마도 엄마라는 존재의 보편성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우리가 집을 떠나 노마드적인 삶을 살아가는 지금의 현대인이 되는 동안 우리도 모르게 상실한 것들을 이 소설 속에서 만난 것은 아닐까 생각하기도 하고, 항상 곁에 있을 줄 알았던 엄마라는 사람을 갑자기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이야기 속의 가족들 모습에서 각자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 라고 생각도 합니다.”

신경숙이 엄마를 부탁해의 성공을 작품 자체의 행운으로 돌린 것은 작가로서의 겸손이다. 이 작품은 작가로서의 글쓰기를 시작한 이래 오랫동안 마음속에 묻어두고 있었던 주제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작품을 쓰는 동안에도 오직 작품의 완성 그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처음 연재를 시작하면서 이 작품을 무사히 끝까지 이끌고 나갈 수 있을까 싶은 두려움에 벅차서 다른 생각을 할 틈이라는 게 없었지요. 책을 출간할 준비를 하면서야 한숨을 돌렸으니까요. 기대라든가 예상보다는 힘겹게 묵은 숙제를 끝낸 기분이었어요. 그런데 책이 나오자 예상을 뛰어넘는 일들이 이어이어 발생했어요. 어느 순간부터는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버렸어요. 책이 이끄는 대로 따라다닌 느낌입니다. 무엇보다도 한국어에 갇혀있던 작품이 경계를 허물고 모국어라는 울타리로부터 자유로워졌으니까요. 영역본이 미국에서 출판된 뒤로 뜻밖의 여행을 많이 하면서 세계 각국의 독자들을 만나고 다양한 삶의 모습들과 대면하게 된 것이 제게는 큰 의미를 던져주었어요. 하지만 저는 사실 해외에선 신진작가에 불과해서 늘 긴장감을 떨치지 못하고 있지요.”

내가 알고 있는 미국 뉴욕의 아시아 소사이어티책임자인 마이클 로버트 씨는 1년 동안 미국에서 출판되는 문학 작품이 12천여 종에 이른다고 말했다. 그 가운데 3%에 해당하는 350여 종이 번역서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3% 중에서 15%에 지나지 않는 50여 종 정도만이 아시아권 언어에서 영어로 번역된 저서라고 했다. 미국 독자들은 이처럼 매우 작은 열쇠구멍을 통해서 세계의 나머지 지역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셈이다. 50여 종의 책 가운데 엄마를 부탁해가 포함되어 있다면 이것은 그냥 넘길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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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지난 3월 맨아시아문학상(Man Asian Literary Prize)의 수상작으로 지명되었다. 영국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맨부커상(The Man Booker Prize)을 후원하는 투자회사 맨 그룹이 아시아 작가들을 대상으로 2007년에 제정한 이 상은 첫 번째 수상작으로 중국인 쟝롱의 소설 <Wolf Totem>을 지명한 바 있다. 한국 작가 가운데 신경숙이 처음으로 이 상을 받은 것은 아시아적 가치와 세계의 대화를 의도하는 이 상의 취지에도 잘 부합된다. 영국의 일간지 가디안(가디언 / 120316)엄마를 부탁해가 무라카미(Murakami)와 고시(Ghosh)를 제치고 수상작으로 선정되었다.’고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미 한국 내에도 엄청난 독자층이 생겨나 있고, 인도 소설가 아미타브 고시의 경우는 인도를 대표하는 현역 작가이다. 이같은 쟁쟁한 경쟁자들 속에 신경숙은 엄마를 부탁해를 들고 우뚝 섰다. 심사위원회에서는 이 소설을 두고 한국에서 엄마로 살아가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족의 전통과 근대성에 대한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인 초상이라고 평했다.

신경숙은 세계의 무대에서 숱한 독자들과 만나면서 자신의 작품을 다시 돌아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설명했다.

국내의 독자들은 작품의 배경이 문화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익숙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부분들을 외국의 독자들이 오히려 신선하게 발견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작품을 읽는 접근법이 나라마다 달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이 소설을 두고 전통과 현대의 대립으로 보는 외국의 독자들이 있었고, ‘엄마라는 상징을 잃고 방황하는 가족들을 통해 인간적인 삶이란 무엇인가를 찾아보는 외국 평론가도 있었어요.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은 서술 기법과 관련되는 문제였어요. 실종된 엄마만 제외하고는 모두 2인칭 3인칭을 사용했는데, 왜 그런 선택을 했나 하는 질문을 어느 나라에서나 들었으니까요. 그런 질문을 받고 저는 실종된 엄마만 일인칭으로 함으로써 진실로 실종된 사람이 누구인가를 물으려고 했다고 대답했지요. ‘엄마에게만 라는 일인칭을 사용하게 된 의도는 분명해요. 나는 이 작품을 쓰면서 이미 엄마로서 일생을 살아낸 사람, 지금 엄마로 살고 있는 사람, 혹은 앞으로 엄마가 될 사람들에게 바치는 하나의 헌사가 되길 바랐으니까요.”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는 지금도 지구상의 어떤 미지의 언어로 옮겨지는 중이다. 이 소설의 서두에 배치된 엄마의 실종은 부재의 공간에서 그 존재의 당위를 인정해야 하는 하나의 아이러니로 독자들을 끌어간다. 작가 신경숙은 지하철역에서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실종된 엄마의 흔적을 추적한다. 엄마에 대한 기억을 복원하는 과정은 기억의 주체들이 각자 자신의 목소리에 의존하지만, 엄마는 부재의 공간에 던져져 현실 속에서 어디론가 사라짐으로써 드디어 가족 속에서 그 존재 가치를 부각시킨다. 엄마의 부재와 존재의 역설적 공간에서 벌어지는 이 허망한 아이러니를 작가 신경숙은 이야기하는 자보는 자의 목소리와 시각을 교묘하게 중첩시켜 긴장감 있게 형상화한다. 이 소설의 독자들은 그 속에서 자신의 맥빠진 목소리를 발견하기도 하고 자신의 이기적인 시선에 그만 흠찔 놀라기도 한다. 엄마는 언제나 있지만 늘 없고, 늘 없지만 언제나 있다. 아니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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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숙, 세계의 독자와 만나다.

나는 신경숙이라는 한 사람의 작가를 통해 한국문학의 세계화라는 명제의 핵심에 어떤 식으로든지 다가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는 한국문학이 폭넓게 해외에 소개되어야 한다는 점에 있다. 이 문제는 한국문학의 수용 공간의 확대라는 차원에서만 논의할 성질은 아니다. 한국적 특수성의 개념으로부터 한국문학을 인류적 보편성의 개념으로 해방시키는 본질적인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한국문학 작품의 해외 소개는 한국 상품의 소비시장의 해외 확대와도 같은 경제 논리로 해결할 수 없다. 문학은 상품의 소비와는 달리 문화의 전파와 수용이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이것은 가격과 품질과 패션에 의해 좌우되는 상품 소비시장의 원리와는 전혀 다른 요건들에 의해 지배된다. 한국문학의 세계화는 한국문학이 이질적인 외국문학 속에 들어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화해로운 만남을 이루기도 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진다. 이것은 문학적인 기법과 주제에 대한 독자들의 고급한 취향의 문제에 의해 그 성패가 좌우된다. 바로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가 이를 반증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권영민, 2013.7.4)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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