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박남수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스무 해가 되었다. 말년을 미국에서 보내시던 선생께 내가 쓴 한국현대문학사를 부쳐드렸더니, 미국으로 떠나오신 후로 생각에서 떠났던 한국문학을 그 책을 펼쳐놓고 다시 공부하고 있다는 엽서를 보내주셨다. 나는 한평생을 시인으로 사셨던 그 어른의 고절한 삶의 자세를 무어라고 달리 말하기조차 어렵다.

 

 

 

박남수 선생은 1918년 평양에서 태어나 너무도 많은 아쉬움의 세월을 살아오셨다. 일제 말엽에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하였던 선생의 문학적 역정은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1939년 잡지 <문장> 지의 추천을 거쳐 시인이 되었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국문을 쓸 수 없게 되었고, 해방 후에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선생은 고향 평양을 떠나 서울로 내려와야만 했다.

선생은 월남 이후부터 시작 활동에 전력하였다. 일제 말기 비슷한 시기에 함께 문단에 나온 청록파시인들이 자연을 대상으로 서정의 세계에서 각기 자기 방향의 조정을 꾀하는 동안, 선생은 오히려 일상의 현실에 눈을 돌렸다. 전쟁의 고통과 현실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과 그 조건을 날카로운 감각으로 표출시켜 놓고 있는 선생의 노력은 시집 <갈매기 소묘>(1959)속에 집약되고 있다. ‘하늘이 낮게 / 드리고 / 물 면이 / 보푸는 / 그 눌리워 / 팽창한 공간에 / 가쁜 갈매기 하나 / 있었다.’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선생의 유명한 시 갈매기 소묘에는 고향을 버린 선생의 경험적 자아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시행의 대담한 압축과 언어의 절제를 통해 정서의 긴장을 추구하고 있는 이 시에서 시적 자아의 형상은 가쁜 갈매기 하나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그 갈매기의 비상이 이미지의 역동성과 시각적 감각성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포착되고 있다. 전쟁의 피해와 고된 피난민 생활이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되고 자아의 새로운 인식이 거기서 싹트고 있다.

 

 

선생의 시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미지 자체의 역동성이 새롭게 정서적인 균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시집 <새의 암장>(1970)으로 묶여진 1960년대의 시적 작업들이다. 이 무렵부터 선생은 1950년대 전후의 시작활동에서 보여주던 피해의식을 벗어나고 있다. 자의식의 그림자가 없어진 선생의 시에 새롭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추구, 그리고 물질문명에 대한 역사적 비판의식이다. 물론 갈매기 소묘에서부터 그의 시에 중요한 심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의 이미지가 시적 긴장을 더하고 있다.

 

침묵을 터트리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새들은 떼를 지어

순금의 깃을 치며 멀어져갔다.

 

물낯에 그려진 무수한 동그라미가

하나씩 허무로 꺼져갔다.

- 새의 암장(暗葬) 2에서

 

앞의 시에서처럼 는 그 존재의 실체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무한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움직임이기도 하고 정지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이 되기도 하고, 땅이 되기도 한다. 시공을 넘나드는 를 통해 시인은 우주의 질서를 보기도 하고, 인간의 역사를 대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는 어떤 하나의 관념으로 묶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관념을 배제한 순수한 감각과 이미지가 를 중심으로 연결되고 있다. 존재 그 자체를 문제삼을 경우, ‘는 인식을 초월하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실향의 시인이 이러한 거대한 시적 주제를 감당하기에는 1970년대의 한국 사회와 현실이 너무나 각박한 것이었다. 시적 인식의 대상이었던 를 암장해 버리고, 선생은 스스로 한 마리의 새가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조국과 언어를 떠난 시인의 미국 생활은 하나의 고독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해 나는 불을 끈다.

메마른 껍질로 둘러진 현실의 울타리 안에는

한 포기 풀도 자라지 못하는 가뭄의 뜰이 있고,

 

불모의 뜰에서는 뿌리도 타는 목마름과

비틀어진 가지에 마른 나뭇잎들이 보스라지고 있다.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해 불을 끈다.

 

박남수 선생의 시 소등(消燈)은 미국 체류 생활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명편이다. 이제 선생은 스스로 당신의 삶의 등불을 꺼버리신 셈이다. 선생께서는 자유로이 그토록 바라셨던 북녘의 고향 나들이를 하시게 된 것일까? 우리는 어디서 한 마리의 새가 되신 선생을 다시 뵐 수 있을까? (권영민)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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