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워싱턴의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은 연간 800만 명 이상이 찾을 정도로 인기가 높다. 이곳에 한국관이 개관된 것은 2007년 6월의 일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개별 국가 전시실로는 처음으로 한국관이 개설되었으니, 당시 한국 문화계에 커다란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의 중요 언론에서는 한국관이 영구 전시실로 운영될 것이라면서 크게 보도하기도 했다.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아시아 문화연구 프로그램 중 하나로 ‘한국 문화유산 프로젝트(Korean Heritage Project)’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의 미국 방문 때 부인 권양숙 여사가 박물관 측에 이 사업을 지원하기로 약속하면서 한국관 개관에 대한 계획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한국국제교류재단이 125만 달러를 지원했고, 3년 동안의 준비 기간을 거쳐 한국관을 개관하게 되었다.

한국관에는 한국의 역사와 생활을 주제로 ‘한국의 아름다운 자연’ ‘한국의 전통 도예’ ‘조상 숭배’ ‘한국의 전통 혼례’ ‘한글은 한국 문화의 자랑’ ‘국경을 넘은 저편의 한국’ ‘한국의 현대 미술’ 등 총 7개의 주제로 전시 공간이 마련됐다. 한국 전통 옹기장인 정윤석 씨의 옹기, 도예가 방철주 씨가 만든 청자 항아리,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씨의 한국 전통 혼례복, 변시지 화백의 그림 등도 이곳에 전시되었다.

한국관 개관 행사에 권 여사는 세계인이 좋아하는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에 개별 국가로는 처음으로 한국이 독립적인 전시공간을 갖게 돼 매우 뜻깊게 생각한다는 축하 메시지도 보냈다. 한국관은 그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지난 10년 동안 수많은 미국인과 세계인들에게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알리는 작은 창구의 역할을 해왔다.

그런데 이 한국관이 올해 하반기에 폐관된다는 소식이다. 개관 당시 10년간의 전시 기간을 약정했기 때문에 올해로 그 계약이 만료된다는 것이다. 스미스소니언 측에서는 이미 2년 전부터 한국관의 폐관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지만 국내에서는 여기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것 같다. 그 사이에 한국관의 폐관을 기정사실화하는 박물관 측의 발표가 있었다. 더구나 한국관의 지속적 운영을 위한 재계약을 논의하는 것조차 이미 늦어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의 교민 사회에서는 한국 문화를 제대로 홍보할 수 있는 좋은 공간이 사라지게 된 것을 모두 아쉬워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한국관의 상설 운영을 제대로 뒷받침하지 못한 한국의 정책 당국을 비판하는 여론도 잇따라 터져 나오고 있다.

우리는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내세울 때마다 민족 문화의 찬란한 역사와 빛나는 전통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 역사와 문화를 제대로 알리는 데에는 우리 모두가 소견도 좁고 역량도 부족하다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다. 요즘은 ‘한류’라는 것을 내세우면서 ‘케이팝’을 이야기하고 한국의 드라마를 띄우는 데에 열중이다. 한국의 생활문화 가운데 음식이라든지 패션에 대한 감각은 이미 지역적 한계를 벗어나 보편화되고 있다. 매체의 확장과 멀티미디어의 발전에 힘입어 대중적 취향을 강조하는 한국 문화의 지구적 확산도 빠르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지만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의 한국관 폐관을 놓고 보면 한국 문화의 세계화를 위한 정책의 틀이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한국 문화의 세계화는 문화 상품의 소비와는 다른 새로운 차원의 문제와 직결된다. 이것은 문화 산업의 상업적 논리만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일이다. 한국 문화는 이질적인 외국 문화와 만나면서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조화롭게 균형을 이루면서 조금씩 그 위상을 높이고 영향력도 키워가게 된다. 여기에는 문화의 양식적 특성과 그 정신에 대한 고급한 취향과 선택의 문제가 크게 작용한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 문화가 세계 문화 속에서 조화롭게 그 위상을 정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문화 산업에 중점을 두었던 한류의 확산 정책을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특히 한국 문화가 세계 문화와 자연스럽게 접촉할 수 있는 여러 단계와 요소들을 어떻게 구성하고 조직해 연계하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스미스소니언 자연사박물관의 한국관이 이대로 폐관되고 만다면, 이제 겨우 그 가치를 알리기 시작한 한국 문화가 세계를 향한 중요한 창구 하나를 그대로 잃게 되는 셈이다.(<동아일보>, 2017.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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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箱)은 1937년 4월 17일 일본 도쿄(東京)제국대학 부속병원에서 죽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올해로 80년이 되었다. 김기림은 이 불행한 천재 시인의 죽음을 보고 ‘주피터 추방’이라며 슬퍼했다. 그리고 이상의 새로운 예술을 올림포스 최고의 신 주피터의 이름으로 다시 호명하고자 했다.

이상은 연작시 ‘오감도’를 쓰고 소설 ‘날개’를 발표한 후 도쿄로의 탈출을 꿈꾸었다. 당시 조선의 젊은이들에게는 현해탄(대한해협)의 높은 파도를 넘어 일본으로부터 밀려들어 오는 새로운 문명이 하나의 희망일 수밖에 없었다. 이광수가 문단의 ‘춘원(春園) 시대’를 열게 된 곳도 도쿄였고, 임화가 무산계급에게 국가가 없다는 신념을 키웠던 곳도 도쿄였다. 

이상은 1936년 늦가을 도쿄로 건너갔고 반년 정도 거기서 머물렀다. 그가 도쿄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다. 도쿄에서의 그의 죽음 또한 그 문학의 마지막 장면을 정리하기 위해 반드시 풀어야 할 의문점들을 안고 있다. 

이상은 도쿄에 도착하자마자 커다란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그는 김기림에게 자신의 도쿄 도착 소식을 전하는 편지에서 ‘기어코 동경(東京) 왔소. 와보니 실망이오. 실로 동경이라는 데는 치사스런 데로구려!’라고 적었다. 이상이 도쿄의 첫인상을 ‘치사스런 데’라는 한마디 말로 표현한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1930년대 동양 최고의 도시였던 도쿄를 돌아보면서 식민지 조선의 초라한 시인 이상은 ‘어디를 가도 구미가 당기는 것이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것은 도쿄의 거리에서 느낄 수 있는 ‘표피적인 서구의 악취(惡臭)’ 때문이었다. 서구 문명의 껍데기를 겨우 흉내 내면서 그것으로 진짜 행세를 하는 꼴이 구역질이 난다고 꼬집기도 했다. 도쿄라는 도시의 비속성(卑俗性)에 대한 이상의 비판적 태도를 본다면, 그의 도쿄 생활은 여기서 이미 끝이 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상은 제국의 수도 도쿄가 자신이 꿈꾸었던 현대정신의 중심지가 아님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는 서구 문명의 세계를 치사하게도 흉내 내고 있던 도쿄의 ‘모조(模造)된 현대’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도쿄의 모습을 추상적으로 재구성하거나 해체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도회의 산책자가 되어 도쿄의 번화가를 거닐면서, 화려한 긴자(銀座)의 거리를 두고 ‘한 개의 그냥 허영 독본(虛榮讀本)’이라고 적었고, ‘낮의 긴자’는 ‘밤의 긴자의 해골’이라서 너무 추하다고 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현대와 세기말의 허영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는 도쿄라는 대도시에 대해 비아냥대었다. 하나의 거울에 또 다른 하나의 거울을 비춰 보듯이 이상이 발견한 이 도쿄의 이미지는 문명의 화려한 꽃이 아니라 그 어슴푸레한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상은 새봄이 되면 다시 서울로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렇지만 그는 자신의 계획대로 귀국할 수 없었다. 그는 일본 고등계 형사의 취체(取締)에 걸려들었다. 그리고 곧바로 경찰서로 끌려갔다. ‘거동 수상자’라는 이유로 경찰에 검거된 그는 도쿄의 늦겨울 한 달을 차디찬 경찰서 유치장에서 견뎌야 했다. 이 불행한 영혼은 그 육신과 함께 거기서 무참하게도 허물어졌다. 그리고 결국은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상은 스물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주피터 승천하는 날 예의(禮儀) 없는 사막에는/마리아의 찬양대도 분향도 없었다./길 잃은 별들이 유목민(遊牧民)처럼/허망한 바람을 숨쉬며 떠 댕겼다./허나 노아의 홍수보다 더 진한 밤도/어둠을 뚫고 타는 두 눈동자를 끝내 감기지 못했다.’ 김기림은 이상의 죽음을 보면서 ‘주피터 너는 세기(世紀)의 아픈 상처였다’고 목을 놓아 울었다. 그는 이상의 짧은 생애를 시대고의 희생이라면서 안타까워했다. 

김기림이 이상에게 부여한 ‘주피터’라는 이 새로운 이름은 그 예술적 재능에 충분하게 값했다. ‘주피터’라는 이름 그대로 이상은 우리 문학사에서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이 되었다!

(<동아일보>, 2017.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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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騎士團長殺し)’가 문단의 화제다. 얼마 전에 보도된 대로 일본에서 초판 130만 부를 찍었다는 뉴스가 놀랍기만 하다. 책 판매가 시작된 첫날 서점마다 독자들이 기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장면도 아주 인상적이었다. 아직 본격적인 작품평이 나오지는 않았지만 일본인들이 저지른 난징 대학살에 대한 작품 속의 언급에 일본 우익분자들이 시비를 걸면서 엉뚱한 논란까지 연일 뉴스거리가 되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소설 ‘노르웨이의 숲’이 ‘상실의 시대’라는 이름으로 번역 소개되면서부터 한국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1987년에 출판된 이 작품은 미래에 대한 불안과 꿈의 상실 속에 방황하는 젊은이들의 애절한 사랑을 자유분방한 문체로 그려냈다. 당시 일본 평단에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등장을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한때 유행하는 대중적 통속소설 작가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무라카미 하루키는 평단의 무관심에도 자기 소설에만 집중했다. 그는 이른바 ‘일본 중심주의’에 빠져들었던 일본 사회의 흐름을 외면한 채 오히려 자신의 소설에서 일본적 특성이라든지 일본의 미학이라든지 하는 요소들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그는 스스로 글로벌 시대의 작가임을 자처했고, 일본을 넘어서서 세계의 모든 독자들과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새로운 무대를 꾸준히 탐색했다. 그리고 인간의 보편적 삶의 태도와 신화적 요소를 자기 서사의 모티프로 활용하면서 ‘해변의 카프카’ ‘태엽 감는 새’ ‘양을 쫓는 모험’ 등의 문제작을 통해 독자층을 넓혀 나갔다. 그의 작품은 모두 한국에 번역 소개되어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1990년대 후반을 지나면서 일본 문단의 중심에 자리 잡게 되었고, 자신이 추구해온 소설적 이념의 실천을 바탕으로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의 한 사람이 되었다. 

우리 출판계에서도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소설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몇몇 출판사가 국내 판권을 얻으려고 벌써부터 경쟁이 치열하다는 소식이다. 이른바 ‘선인세’라는 개념의 판권 계약금이 무려 20억 원에 이를 것이라는 추측도 나오고 있다. 여러 해 전에 출간되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에서부터 출판사들의 판권 경쟁으로 선인세가 10억 원을 넘었다는 소문이 나기도 했었다. 작년 송인서적의 부도 이후 움츠러든 출판계 상황을 놓고 본다면, 한국을 대표하는 큰 출판사들이 벌이는 ‘돈 놓고 돈 먹기’ 식의 경쟁에 왠지 기분이 씁쓸하고 착잡하다. 

그런데도 이런 출판사의 지나친 상업주의적 행태를 시비하기조차 힘든 것은 우리 소설 문단이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단 권력이라는 기형적인 울타리가 작가들을 옥죄고 있다고 서로 헐뜯더니, 문단 내부에서 끊이지 않는 표절 시비가 독자들을 식상하게 했다. 게다가 문인들의 성폭력에 대한 논란에까지 빠져들면서 문단의 활력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렇지만 지금 우리 문학이 기대야 하는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가 아니다. 우리 출판시장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다. 돈 자랑처럼 보이는 판권 경쟁에 거는 그 엄청난 금액의 일부라도 우리 소설을 위해 투자하는 출판계의 용기가 필요하다. 젊은 작가들이 자기 세계를 지키면서 꾸준히 글을 쓰도록 적극 지지해줘야만 우리 문단과 출판계가 모두 풍요로워질 수 있다. 우리 소설이 지닌 상상력의 힘에 기대를 걸고 있는 세계의 독자들이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에도 주목해야 한다. 이제는 우리 독자와 출판계가 모두 무라카미 하루키 ‘신드롬’에서 과감하게 벗어날 필요가 있다. 언제까지 일본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부러워하며 따라가야 하겠는가.(<동아일보>, 2017.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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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의 정치

문학칼럼 2017.02.15 04:47 |

‘사내는 우비와 거짓말을 갖고 다녀야 한다’는 말이 있다. 어렸을 때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속담이다. 갑작스러운 곤란에 부닥쳤을 때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방편이 남자에게 필요하다는 뜻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거짓말도 때로는 필요하다고 가르치는 이런 속담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알 수 없다. 거짓말은 남을 속이려고 일부러 지어낸 것이니 당연히 잘못된 일이다. 그런데도 남자한테 거짓말 하나쯤 있어도 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아무리 처세가 중요해도 거짓까지 용납해서야 될 일인가.

기독교 십계명에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계율이 있다. 진리이신 하나님은 거짓이 없다. 거짓말은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거짓말을 하는 것 자체가 마귀의 속성으로 간주된다. 부처님의 도리에도 거짓은 용납하지 않으며, 공자의 말씀에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남을 속이는 말은 모두 허언이며, 그것이 곧 인간이 저지르는 죄악의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윤리학에서도 거짓말에 대한 판단은 대개 엄격하다. 남에게 큰 피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거짓말은 사실과 다른 허위 진술이라는 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죄로 취급한다. 말을 바르게 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인간으로서의 자기 책무다. 거짓말을 하려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상대방을 속이기 위해 꾸며서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자기 말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남을 속이기 위해 먼저 자신을 속여야 하는 것이 거짓말이다. 

어린 시절에는 어른들의 꾸중을 피하기 위해 거짓말도 하고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도 거짓말을 꾸민다. 어른이 되어서도 거짓말을 자주 한다. 남녀 간의 연애에서 사랑을 구걸할 경우 쉽게 거짓말을 동원한다. 친구들 사이에 실없는 거짓말로 농을 걸 때도 많다. 경쟁이 치열한 입사시험을 보면서 면접관 앞에서 누구보다 잘 보이기 위해 자기 능력을 과장하여 말하기도 한다. 이런 거짓말은 남을 직접적으로 해치는 것은 아니므로 그 진위를 따질 필요가 없이 대개 그대로 넘어간다. 그렇지만 자신의 이득을 위해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고 해악을 저지르는 거짓말은 절대 용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 사회에서 거짓말이 가장 크게 판을 치는 곳이 정치다. 정치라는 한자의 ‘정(政)’은 ‘바르게 다스리다’라는 뜻을 갖는다. 그러나 정치인들은 권력을 잡으면 자기 마음대로 ‘다스리는’ 데에만 골몰하지 ‘바르게’ 하려 들지 않는다. 거짓말로 시작한 정치는 권력의 힘에 맛들이면서 더욱 교만해지기 마련이다. 자기 허물은 모두 거짓으로 감추고, 자신이 저질러 놓은 비리와 부정을 일절 모르는 일이라고 잡아떼는 것은 정치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뻔뻔스러운 거짓말이다. 스스로 불리해지면 정계 은퇴를 선언하기도 하는데, 요란하게 은퇴했던 정치인치고 다시 정치판에 나타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 틈에 머리를 내밀고는 국민과 국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겠다면서 나댄다.

올해는 큰 선거를 치러야 한다. 대권에 도전하겠다고 나서는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 거짓말을 꾸며내고 거짓 선동을 하게 될지 지켜볼 일이다. 불과 4년 전 선거 때 정치인들이 내세웠던 거짓말을 착한 국민은 어느새 대부분 잊어버렸다. 대학생들을 향해 모두가 ‘반값 등록금’을 외쳤는데 정치인들의 그 허언을 누구도 다시 따지는 사람이 없다. 선거 때마다 생색을 냈던 ‘반값 아파트’는 또 얼마나 서민들에게 황당한 거짓말이었는가. 일자리 몇십만 개를 만들겠다고 듣기 좋게 주장하지만 저들이 국민 앞에서 무슨 거짓을 다시 꾸밀지 알 수가 없다. 

거짓말은 진실을 말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도 국민과 국가를 위한다는 정치판에 거짓말이 난무하는 것은 우리 사회가 정치인의 거짓말에 둔감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선거에서의 거짓 선동과 거짓 공약을 철저하게 검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치인의 거짓말에 너그러운 국민의 의식도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동아일보>, 17.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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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앞으로 한 달 후에 백악관을 떠난다. 지난 8년간 그는 지구촌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온 세계의 대통령이었다. 많은 언론들이 퇴임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취재하기 위해 경쟁 중이다.  

최근 미국의 대중잡지가 성공적으로 임기를 마치게 되는 대통령 부부를 인터뷰한 내용을 표지 기사로 크게 내놓았다. 이 자리에서 오바마는 “그동안 정치적 부침은 있었지만 우리가 시작했던 때에 비해 지금 미국이 훨씬 더 나아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대통령 임기가 끝나게 된 것은 사실이지만 자기 할 일이 모두 끝난 것은 아니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아내인 미셸 여사와 함께 평범한 시민으로 돌아가 미국 어린이들이 보다 더 좋은 교육을 받고 더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도록 돕는 일을 계속하고자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러한 일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갈 긴 새로운 여정의 의미 있는 첫걸음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참으로 멋진 대답이다. 우리의 대통령은 아니지만 퇴임하는 모습이 이렇게 당당하고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 못내 부럽다.  

오바마 대통령의 퇴임이 가까워지면서 화제가 된 것이 ‘마이티 덕(mighty duck)’이라는 말이다. 미국의 뉴스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 이 말은 ‘강한 오리’라는 뜻을 지니지만, 사실은 ‘레임 덕’이라는 말과 반대되는 새로운 용어다. 퇴임을 앞두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의 인기를 빗대어 만들어낸 것이다.  

대개의 경우 임기 말이 되면 대통령은 힘을 잃는다. 정책의 집행도 제대로 되지 않고 언론에서도 곧 물러날 대통령의 주장에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오바마 대통령의 인기는 여전하고 지지율도 60%에 가깝다. 이러한 국민적 지지에 힘입어 임기 막바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국 정치를 옭아매고 있던 쿠바와의 단절을 청산하고 국교를 정상화하여 또 한 번 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인들을 열광시켰다.  

오바마는 대통령 후보 시절 미국의 새로운 ‘변화(change)’를 정치적 슬로건으로 내세웠고, ‘우리는 할 수 있다(Yes, We can)’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들고 침체에 빠져 있던 미국 사회를 흔들었다. 그의 열정적인 연설과 신념에 찬 정책들은 흑인뿐 아니라 백인들에게서도 폭넓은 지지를 얻어냈으며, 48세의 젊은 나이에 미국 역사상 첫 흑인(혼혈) 대통령이 되었다.  

오바마는 대통령이 된 후 자신이 내세우고 있는 정책을 위해 언제나 스스로 앞장서서 의회를 설득하고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예리한 판단력의 소유자였고 노련한 연설가였지만 자기주장만을 고집하지는 않았다. 그는 미국 대외정책의 큰 방향을 바꾼 이라크 전쟁을 종식시킨 후 미국의 교육 개혁, 총기 규제, 오바마 케어로 지칭되는 건강보험 개혁 등 굵직한 국가 과제를 추진하면서 이를 반대하는 야당 지도자들과 끊임없이 대화했다.  

매주 일요일 열리는 주례 연설을 통해 국민에게 당면 과제를 설명하면서 이해를 구했고 기자회견을 통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런 장면들이 그대로 미국 전역에 생중계되면서 미국의 국민은 자연스럽게 대통령의 정책에 새로운 관심을 갖고 이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위기에 몰릴 때마다 국민과 직접 소통하면서 자신의 정책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이끌어냈다. 언제 어디서나 필요한 경우 자신이 직접 나설 정도로 모든 일에 적극적이었으며 자기 자신에 대해 솔직했던 것이다.  오바마 대통령의 성공적인 리더십이 대화와 소통에서 비롯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인정한다. 언제나 약자의 편에 서서 대화와 소통으로 모두와 함께하고자 노력했던 열정적인 지도자가 복잡한 세계 정치의 무대에서 물러난다. 그의 소탈한 인품과 분명한 행보와 품격 있는 연설을 세계인들은 모두 그리워할 것이다. 오바마와 같은 젊고 활기찬 지도자를 우리는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동아일보>, 201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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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게이트’라는 희대의 국정 농단 사건을 담당한 변호인들이 검찰의 조사 내용을 ‘소설 같은 이야기’라면서 부정하고 있다. 검찰 조사 내용이 모두 근거 없이 꾸며낸 이야기에 불과하며, 법리에도 맞지 않는다면서 혐의 내용을 부인하고 있다. 소설 연구에 일생을 걸어온 나 같은 연구가가 듣기에 어이가 없다. 꽤나 높은 학식과 교양을 지닌 것처럼 행세했을 사람들이 아무 데나 소설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이는 것이 불만이다. 소설에 대한 인식이 겨우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소설은 어떤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다. 작가는 일련의 사건들을 배열하여 하나의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만든다. 그래서 소설을 꾸며낸 이야기라고 한다. 소설 속 이야기에는 반드시 등장하는 인물이 있고 그 인물은 어떤 행동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물의 행동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장소와 시간을 실제처럼 그려내는 일이 필요하다. 소설의 이야기는 실제로 있었던 일에 근거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을 있는 그대로만 그려내지는 않는다. 소설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새롭게 삶의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소설의 세계를 흔히 허구라고 하는데, 그것은 상상력에 의해 창조된 가공의 현실을 지적하는 말이다. 물론 허구라는 것도 실재성을 토대로 성립된다. 

‘최순실 게이트’야말로 거짓된 정치의 극치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권력과 사욕이 치정(癡情)처럼 뒤엉켜 있다. 정치는 민주적 제도와 법적 질서를 통해서만 그 정당성을 인정받는다. 우리 국민이 험난했던 민주화 과정을 통해 확립해 놓은 법적 제도와 질서를 권력이 자기 욕심대로 다시 짓밟아 버린다는 것은 국민에 대한 멸시다. 국가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거창한 정책이 권력 뒤에 숨겨진 개인의 욕심을 채우는 데 동원되었다는 것은 국가에 대한 모독이다.

지금 우리 국민은 모두 ‘최순실 게이트’가 너무나 부끄럽고 그 내막에 대해 치욕감마저 느낀다. 하지만 거짓된 정권을 혐오하면서도 바로잡아야 할 정치를 위해 촛불을 들고 있다. 권력이 멋대로 국가 질서를 무너뜨렸는데 그것을 비호하는 사람들은 그 권력을 위해 구차한 법리를 따지고 옹색하게 법치를 내세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헛소리다.

거짓말은 진실을 말하기보다 훨씬 어려운 법이다. 거짓말은 거짓으로 꾸며진 것이므로 그 거짓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반복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거짓말도 그 긴 꼬리에 단서가 잡힌다. 거짓말은 진실을 통해 거짓의 실체가 드러나기 마련이며 그 위선(僞善)의 가면으로 인해 오래 버틸 수가 없다.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이지만 결코 허황된 거짓말이 아니다. ‘소설처럼 재미있다’든지, ‘소설 같은 일’이라든지, ‘소설에서나 가능하다’든지 하는 말은 소설이라는 양식 자체가 그만큼 인간의 삶에 밀착돼 있음을 의미한다. 소설은 꾸며낸 이야기 속에 삶을 바라보는 진지한 자세와 그 진실을 담아낸다. 소설이 허구이면서도 깊은 감동을 주는 이유가 여기 있다.  

소설은 전혀 터무니없이 이야기를 꾸며내는 것이 아니라 서사 기법에 따르는 일정한 짜임새를 갖는다. 비슷한 소재의 이야기라도 그 이야기가 전개되는 배경, 등장인물의 성격과 행동 등을 얼마나 짜임새 있게 꾸며내느냐에 따라 느낌이 달라지는 것이다.

소설은 인간의 삶을 이야기 형식으로 바꿔 놓는다. 소설 속 이야기는 개인의 삶과 사회적 가치 사이의 조화로운 통합을 지향한다. 작가는 소설 속에서 자기 운명의 궁극적인 지점까지 살아가야 하는 인물을 창조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은 현실 속에서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 삶에 대한 지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소설의 인물이 평범한 개인이면서도 문제적 성격이 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소설 같은 이야기는 바로 그런 것을 뜻한다. 소설이라는 말을 함부로 폄하하지 말라. 소설은 거짓말이 아니다. (<동아일보>, 2016.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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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뉴스 전문 채널 CNN이 한국에서 한창 유행하는 ‘먹방(mukbang)’이라는 방송 형태에 대한 흥미로운 기사 하나를 내보냈다. ‘먹방’은 음식을 먹으면서 방송을 하거나 먹는 모습을 그대로 방송하는 것을 말한다. 2010년을 전후하여 한국에서 시작된 이 특이한 방송 형태가 세계 각국으로 널리 퍼져 유행하고 있다. 처음에는 음식을 맛있게 많이 먹는 것이 흥미의 초점이었는데, 지금은 일종의 사회적 소통 방식이 되어 세계인의 폭넓은 관심을 끌고 있다는 것이 CNN의 진단이다.

‘먹방’이라는 말은 ‘먹는 방송’을 줄여 만든 신조어(新造語)다. 한국에서 ‘먹방’이라는 형태가 대중의 관심을 끈 것은 ‘아프리카TV’를 비롯한 몇몇 인터넷 방송에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방송 출연자가 직접 음식을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모습을 그대로 방송으로 내보내게 된 것이 그 시초다. 음식을 먹으면서 시청자와 직접 소통하는 방식이 인기를 끌게 되면서 방송계에 널리 확산되었다. 지금은 인터넷 방송만이 아니라 여러 방송사의 중요 TV 프로그램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이른바 ‘먹방 스타’가 등장할 정도로 이 방송 프로그램의 대중적 인기와 그 위력을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먹방’에 대한 외국 언론의 관심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이미 ‘이코노미스트’라든지 ‘월스트리트저널’ 등이 2014년에 한국에서 유행하는 ‘먹방’의 실태를 취재한 적이 있다. 이들 언론은 한국에서 ‘먹는 방송’이 인기를 끄는 현상은 경기 침체에 따른 한국 사회의 불안 심리와 젊은 세대의 욕구 불만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CNN의 보도는 이와는 사뭇 다르다. CNN은 한국에서 왜 ‘먹방’이 유행하는가를 취재한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먹방’의 형태가 왜 전 세계로 확산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자기가 혼자 음식을 먹는 모습을 영상을 통해 타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CNN은 ‘먹방’의 형태를 일종의 새로운 ‘사회적 식사법(social eating)’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먹방’이 단순한 흥밋거리가 아니라 특이한 소통 방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새로운 사회적 유대 관계도 성립될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 보도에서 흥미로운 것은 음식을 먹는 장면을 보여주는 각종 미디어의 동영상을 모두 ‘먹방’이라는 한국말로 직접 지시하면서 범주화하고 있는 점이다. 이제 갓 만들어진 ‘먹방’이라는 한국말을 세계인의 일상적인 삶의 트렌드를 설명하는 최신 유행어로 격상시켜 놓고 있는 것이다. 

지금 세계 각국 사람들이 즐기고 있는 ‘먹방’은 그것을 즐기는 대중과 영상물의 내용 사이의 거리를 없애면서 더욱 가깝게 개인적 체험의 영역으로 파고든다. 어떤 영상물에서는 한 여성이 푸짐하게 식탁에 음식을 차려놓고 혼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먹는 모습을 보여준다. 또 다른 영상물은 두 사람이 함께 마주 보고 앉아 준비한 음식을 나누면서 하루 일과를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 사적(私的)인 순간을 놓고 일반 대중은 구경꾼이 되어 그 장면을 보고 즐긴다. 바쁜 일상에 쫓겨 누군가와 함께 식당을 찾아 즐겁게 식사하기가 어려워진 현대인이 이런 유형의 영상물을 서로 공유하면서 소통하고 있는 것이다.

지구상의 모든 인간이 가장 오랫동안 누려온 것이 음식에 관한 다양한 문화와 풍습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과정에서 절대로 떼어낼 수 없는 것이 먹거리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음식에 대한 관심이 일차적인 것은 당연하다. 그러므로 ‘먹방’의 시대는 다양한 먹거리와 식습관 등으로 관심이 확대되면서 당분간 지속될 걸로 보인다. 특정 음식에 대한 편견도 모두 없애고 서로 다른 음식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도 넓혀줄 수 있을 것이다. 기왕이면 ‘먹방’이라는 한국말이 맛있는 우리네 먹거리를 세계인들에게 흥미롭게 보여줄 수 있는 ‘먹방’과 함께 널리 전파되기를 기대한다. (<동아일보>, 2016.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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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수도 한복판에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문화박물관(National Museum of African American History and Culture)’이 지난달에 문을 열었다. 이 박물관은 국립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열아홉 번째 박물관으로 국립자연사박물관, 국립항공우주박물관 등이 자리 잡고 있는 워싱턴 내셔널 몰 안에 위치해 있다.

이 박물관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이 노예 상태로 미국에 강제 이주당한 뒤 남북전쟁과 노예해방을 거쳐 미국 시민으로서 당당한 지위를 누리게 되기까지의 역사를 기록 보존하고 전시 교육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고 있다. 흑인이 미국 사회에서 어떻게 억압당했는지, 어떻게 인종 차별의 고통을 극복해 왔는지 연구하고 이와 관련된 기록과 유물을 정리 전시하면서 흑인 문화가 미국 사회의 역사와 문화에 끼친 영향을 함께 보여주게 된다.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의 건립 문제는 1980년대 흑인 인권운동가 출신 존 루이스 하원의원이 관련 법안을 의회에 상정하면서 구체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 법안은 무려 15년 동안 의회 안에서 발이 묶여 있다가 2003년에야 비로소 의회를 통과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서명에 의해 박물관 설립의 단계적 실행이 가능해지자 오프라 윈프리, 마이클 조던 등 유명 흑인 인사들과 수많은 기업, 사회단체들이 거액을 기부하면서 사업에 속도가 붙었고, 준비팀에서는 전국 15개 도시를 순회하면서 개최한 ‘앤티크 로드쇼’를 통해 전시 자료를 폭넓게 수집했다. 

이 박물관에서 수집 전시하고 있는 자료는 무려 4만여 점이나 된다. 초기 흑인 노예들의 생활용품들에서부터 흑인들의 사회 문화 예술 활동에 관련된 모든 자료들이 망라되어 있다. 여성 노예해방운동가로 현행 20달러짜리 지폐의 앞면 모델이 된 해리엇 터브먼이 걸쳤던 숄도 있고,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민권운동에 불을 붙인 로사 파크스의 드레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으며, 악명 높았던 백인우월주의 단체 ‘KKK’의 의상 등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무하마드 알리의 복싱 글러브, 육상 단거리 선수 칼 루이스가 신었던 운동화, 재즈 음악가 루이스 암스트롱이 불었던 트럼펫 등도 눈에 띈다. 테네시 주 내슈빌에서 흑인의 자리를 별도로 구분했던 버스의 좌석 표시라든지, 1905년 시카고에서 설립된 흑인신문 ‘시카고 디펜더’의 주필이 사용하던 책상도 있다. 버지니아에 있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2008년 대선 캠프 사무실도 그대로 옮겨졌고, 미국 각지에서 최근 일어나고 있는 ‘흑인의 생명도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는 흑인 인권운동 관련 자료까지도 전시되어 있다.

박물관의 개관 기념식에서 오바마 대통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역사는 전체 미국인의 역사와 별개의 것이 아니며 미국사의 핵심에 자리한다”고 주장했다. 흑인역사문화박물관의 건립은 미국이 지향하고 있는 다문화주의의 이념과 사회 통합을 위한 노력을 상징한다. 

이 국립박물관에서 미국 역사의 어둡고도 부끄러운 장면들을 숨김없이 가르치는 일이야말로 미국인 모두에게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흑인의 참혹한 역사와 그 차별의 어두운 장면들을 맨눈으로 보게 되는 것이 얼마나 불편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오바마 대통령은 이 불편이야말로 미국 사회를 구성하는 공동체의 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들어 주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기념 연설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 사회는 지금도 여전히 인종 갈등에 휩싸여 있다. 최근에는 오클라호마, 샬럿 등지에서 일어난 경찰의 흑인 총격 사건에 대한 많은 시민들의 항의 집회가 끊이지 않는다. 미국 사회의 다양한 인종이 각자의 권리를 존중하고 서로 협력하면서 건전한 사회 발전과 통합을 이루어내는 일이 얼마나 힘든 과제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동아일보>, 2016.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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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료

문학칼럼 2016.10.02 19:28 |

글 쓰는 사람에게 원고료는 아주 민감하다. 문사로서 글은 쓰되 고료는 받지 않겠다고 말했던 사람도 있었지만 요즘 세상에 그런 선비는 생각조차 하기 힘들다. 글을 쓴 대가로 고료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문인들에게는 원고료라는 것이 늘 마음에 차지 않는다.

우리나라에서 원고료가 처음 등장한 것은 신문학 초창기의 일이다.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가 신문에 연재하는 소설에 원고료를 처음 지불했다. 소설가 이광수가 1917년 장편소설 ‘무정’을 매일신보에 연재하면서 한 달에 10원 정도의 고료를 받았다고 술회한 내용을 읽었던 적이 있다. 그 정도의 액수가 요즘 화폐 가치로 어느 정도인지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단행본으로 출간된 ‘무정’ 초판본의 정가가 1원 20전이었던 사실로 미루어 본다면 대략 15만 원 안팎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1920년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도 창간호부터 자연스럽게 외부 청탁 원고의 경우 원고료를 지불했다. 동아일보는 초창기에 연재소설 회당 원고료를 1원으로 책정했다고 한다. 

1920년에 창간한 ‘개벽’은 종합 잡지로서는 처음으로 원고료 지급 제도를 채택했다. 천도교 중앙회에서 발간했던 이 잡지는 대중 독자를 상대로 하는 교양지를 표방하면서 상당한 발행 부수를 자랑했는데, 원고료를 지불하면서 당대 최고의 필진을 동원할 수 있었다. 순문예지의 경우 1924년 창간된 ‘조선문단’이 ‘개벽’ 못지않은 원고료를 지불한 것으로 유명하다. 소설가 방인근이 사재를 털어 시작한 이 문예지는 400자 원고지 한 장의 고료가 1원이라는 것을 자랑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그 운영 자본이 영세하여 잡지 간행을 오래 지속하지 못했다. 뒤에 방인근은 ‘조선문단’을 위해 시골의 땅을 모두 팔고 재산을 전부 털어 넣었지만 10년도 못 가서 결국 알거지가 되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광복 이후 한국 최고의 역사를 자랑하는 ‘현대문학’은 1955년 1월에 창간된 후 월간지 체제를 유지하면서 순문학 중심의 문예지로 성장해 왔다. 벌써 창간 60주년을 넘겼으니 사람으로 치면 회갑을 치른 셈이다. 순수 문예지가 이렇게 긴 세월을 살아온 것은 외국의 경우에도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더구나 ‘현대문학’은 창간 이후 잡지사 내부에서 정한 기준에 따라 필자에게 꼬박꼬박 원고료를 제때에 지급해온 잡지로 유명하다. 

문예지의 원고료가 어느 정도 수준이어야 하는지는 의견이 분분하다. 1980년대 초에 원로 작가들이 들려준 원고료의 기준이 흥미롭다. 소설가 정한숙 선생은 200자 원고지 한 장의 고료로 해당 잡지 한 권의 정가 정도라면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전광용 선생은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하여 좌중을 웃겼다. 적어도 비어홀에서 파는 맥주 한 병 값보다는 많아야 한다는 것이 그분의 주장이었다. 원고료라면 적은 액수라도 좋지만 많을수록 더 좋다는 것은 시인 정한모 선생의 의견이었다. 

요즘 문단에서 문예지의 원고료 문제가 심심치 않게 화제에 오른다. 한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문화예술의 창작 기반 확대라는 목표로 매년 중요 문예지를 선정하여 일정액의 원고료를 잡지사에 지원해 왔다. 그런데 이 제도가 안고 있는 문제점이 드러나고 이런저런 말썽이 끊이지 않자 제도 자체를 없애버렸다. 예술위원회 측에서는 더 직접적으로 문인들에게 혜택을 줄 수 있는 새로운 지원 제도를 만들고자 의견을 모으는 중이다. 하지만 원고료 지원 제도가 없어지면서 글을 쓰는 문인들에게 지급되던 원고료가 그만큼 줄어들게 되었다. 원고료 지원에 의존했던 잡지사들의 형편도 더 어려워진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새로 시행되는 이른바 ‘김영란법’에서 원고료가 규제 항목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는 점도 이래저래 이야깃거리다. 하지만 쥐꼬리만 한 원고료 수입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문인이 우리나라에서 몇이나 되겠는가.  

옛날부터 내려오던 ‘문(文)은 궁야(窮也)’라는 말이 새삼스럽게 느껴진다.

(<동아일보>, 2016.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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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부정 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이 세간의 화젯거리다. 이 법의 시행을 앞두고 법 제정의 취지와는 달리 자영업자들이 그 영업에 큰 지장을 받게 될 것이라는 논란이 일기도 했고, 과수 농가나 축산 농가들이 그 산물의 판매에 큰 피해를 입게 될 것이라고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부정한 ‘청탁문화’가 빚어내는 각종 비리에 우리가 얼마나 무감각해져 있는지를 그대로 말해주는 현상이기도 하다. ‘김영란법’은 우리 사회가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그러므로 이 법의 제도적 정착과 함께 그 법 정신을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지난 연초에 국제투명성기구에서 국가별 청렴도를 분석하여 부패인식지수(CPI)를 발표한 적이 있다. 2015년 전체 조사 대상 168개국 중에서 우리나라는 37위를 기록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는 최하위권에 속한다. 남미의 칠레가 23위이고 동유럽권의 폴란드가 30위에 올라 있는 것을 보면, 경제 발전과 그 국가적 위상에 비해 우리나라의 국가 청렴도가 얼마나 낮게 평가받고 있는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부패인식지수가 낮은 것은 부정한 청탁과 대가를 바라는 뒷거래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성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과거 권위주의 정부가 권력을 휘둘렀던 시대에는 권력자들이 앞장서서 온갖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다. 그러면서 국가와 민족을 들먹이면서 정의와 부정부패의 척결을 내세웠고 시민들을 향해 언제나 자기네를 믿고 따르라고 강요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모든 정보가 개방되기 시작했고, 금융실명제가 정착되면서 검은돈의 거래도 상당 부분 차단되었다. 관공서의 각종 업무에서 이른바 ‘급행료’라는 것도 많이 줄었고 길거리의 교통 위반 차량에서 돈을 뜯어내던 교통경찰의 횡포와 비리도 사라졌다. 무엇보다도 시민들은 더 이상 권력의 부정과 비리를 용서하지 않는다. 시민들이 자기 권리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물론 힘이 있는 자들 가운데에는 그 힘으로 교묘하게 부정한 일을 꾸미고 검은돈을 끌어들여 자기 뱃속을 채우려고 한다. 돈 많은 자들은 그 돈의 위력을 내세워 권력을 유혹하고 부정을 저지르면서 돈의 힘으로 그 거짓을 덮으려고 한다. 근래의 뉴스를 장식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 힘이 있는 자는 그 힘으로 돈을 주무르고 돈 가진 자는 그 돈으로 힘을 끌어들여 부정과 비리를 감추려는 일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도 여전히 거짓으로 뒷돈을 챙기고 검찰의 요직에 오른 자도 그 권세로 돈을 끌어 모으는 데에 혈안이다. 그리고 모두가 거짓말로 사실을 얼버무리려고 한다. 

 

하지만 권력은 그 돈 때문에 거짓의 꼬리가 잡히고 돈은 권력과의 끈이 잘리면 맥을 쓰지 못한다. 참으로 부끄럽게도 한국의 권력층과 돈을 가진 자들이 돈과 힘 때문에 부정하게 서로 엮이는 한심스러운 일들이 자꾸 생겨난다. 국가 청렴도가 꼴찌 수준이라는 것을 모든 시민이 수치스럽게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다. 

우리는 지금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를 목전에 두고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발전만으로 선진국으로의 진입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의 기반 위에서 국가 정책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 사회 각 부문의 투명성과 공정성을 확보해야 한다. 그래야만 국민의 행복지수도 올라간다. 

‘김영란법’이 제대로 시행된다면 우리 생활에서 관행적으로 이어져 온 부정한 뒷거래를 차단할 수 있을 것이다. 사회 각 부문의 활동도 경쟁을 통해 공정하고 투명하게 발전하면서, 국가 사회 전체의 청렴도가 그만큼 높아질 수 있을 것이다. 이 법 제도의 정착과 공정한 시행이야말로 우리 사회를 수준 높은 선진 윤리사회로 이끌 수 있는 출발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동아일보>, 2016.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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