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풍속에 떠밀려 균형을 잃어가는 삶의 기로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와 방향을 찾기 위해 ‘문학’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해방 전후의 격변 속에서 한국사회의 지표가 되어주었던 작품들과, 보편적 삶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 비화들이 지금의 독자들에게 강건하고 올곧은 외침으로 다가선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탐방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과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권영민의 문학 콘서트> 강연 중에서 대중들과 함께 깊이 나누고 싶은 주제들을 선별하여 2부 12장으로 구성한 책이다.
윤동주의 원고 노트를 소중히 간직한 후배 덕분에 윤동주가 차가운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눈감은 후에나마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일본의 한국어 말살 정책으로 발표하지 못한 시들을 『청록집』으로 펴내면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출발을 알렸던 박목월과 조지훈의 첫 만남, 친우의 천재적 예술성과 고뇌를 이해하고 이를 시와 그림으로 탄생시킨 이상과 구본웅의 우정, 최소한의 삶을 꾸려가되 최대한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예술의 역할을 강조했던 한용운의 기개 등, 그동안 자세히 알지 못했던 작품 속 뒷이야기들을 통해 삶과 문학의 긴밀한 연결고리들을 풀어냈다.
가을비 내리던 날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정지용의 『백록담』 초판본을 구한 이야기, 이상의 소설 「실화」 속 카페 NOVA를 찾아 신주쿠를 헤맨 이야기 등 작가의 생생한 체험이 읽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상상을 선물한다.
“오직 인간의 본질적인 표현이며, 그 새로운 창조”인 문학 안에서 공감을 이룸으로써 문학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그 가치를 깨닫고 나면, 인생의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한 저마다의 새로운 좌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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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한국학센터에서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의 하나로 2015320일 버클리대학 구내 데이빗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서 <무산 조오현 그리고 영혼의 울림>이라는 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의 특별 초대손님은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다.

조오현 큰스님은 대한 불교 조계종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으로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머물고 있다. 1930년경에 태어나 절간에서 80여년을 살아오신 선승으로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이다. 일찍이 시조에 관심을 두어 1960년대 후반부터 시조 창작을 해 오면서 () 시조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였다. 큰스님의 시조집 <아득한 성자>는 한국에서 많은 독자층의 사랑을 받았다. 큰스님의 시조 작품들은 권영민 교수에 의해 모두 <조오현 시전집 적멸을 위하여>(문학사상사)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이 행사에서 하버드대학 데이빗 맥캔 교수의 <시조한 무엇인가>라는 강연과 뉴욕 주립대학 뉴 팔츠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의 <무산 조오현의 () 시조>라는 주제 강연을 했으며, 초대손님 조오현 스님과 버클리대학 권영민 교수가 <영혼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그리고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시조시인 홍성란 씨, 박영희 씨, 강병천 씨와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낭송했다. 이 행사의 마무리는 한국에서 초청되어 온 한국 전통 가곡 무형문화재 전수자 이유경 명창의 가곡창과 시조창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대금 연주가 고진호씨와 가야금 연주가 홍세린 씨가 함께 공연했다.

이날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는 180석의 자리에 청중이 빈틈없이 몰렸다. 청중석에서 대담을 지켜본 미국의 계관 시인 로버트 하스(Robert Hass) 교수는 오늘 큰스님은 물에 비친 달을 퍼 올릴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큰스님의 말씀 속에서 삶의 지혜와 큰 가르침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많은 교민들이 긴 세월의 이민생활에서 처음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버클리대학 학생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며 취업난 등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

  다음에서 조오현 큰스님과 권영민 교수가 나눈 대담 전문을 소개한다.

 

권영민 교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버클리대학 동아시아어문화과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권영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설악무산 조오현 영혼의 울림>이라는 제목의 아주 특별한 행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행사는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가 세계의 무대에서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기획한 프로그램 중의 하나입니다.

설악무산(雪嶽霧山) 조오현 큰스님은 80년 동안 산중 절간에서 생활해 오신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조계종 종립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입니다. 설악무산 큰스님은 1960년대부터 시조 창작을 해왔고, 몇 권의 시조집을 내기도 하였지요. 최근 뉴욕주립대학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World Literature Today> <Buddhist Poetry> 등의 여러 잡지를 통해 큰스님의 시조를 번역 소개하여 살아있는 선시(禪詩)’로 주목받으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오늘 설악무산 조오현 큰스님과의 대담을 가지기 전에 제가 무산 큰스님을 처음 만났던 일을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벌써 15년 전의 일입니다.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이 열렸던 해였으니까요. 저는 제1회 만해축전이 열리는 백담사를 찾았습니다.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저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지요. 백담사는 한용운이 3.1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두 해 넘게 투옥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다시 찾은 곳인데, 여기서 시집 <님의 침묵>(1926)의 시들을 쓴 곳으로 유명합니다. 시집 <님의 침묵>의 시들은 지금까지도 그 창작 배경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 깊은 계곡의 작은 산사가 한국문학 최고의 문제작을 만들어낸 문학적 성소(聖所)가 되었습니다.

백담사 경내를 들어서면서 저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노스님을 한 분을 처음 뵙게 되었지요. 허름한 승려복의 그 노스님은 마치 만해 한용운의 형상처럼 그윽했습니다. 그 노스님은 일행과 함께 있던 저에게 합장하며 무얼하는 분이신가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문학평론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답하면서 머리를 숙였지요. 그런데 이 스님은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 계신 분이구먼. 문학평론이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뵙는 스님인데 이런 식의 대화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답니다.

평론이라는 것은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그물질이지요. 바탕 자체가 없는 글이 되기 쉬우니까요.”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비평활동을 그래도 수십년간 해오면서 이런저런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노스님은 그것을 허망한 그물질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글이란 자기 혼이 담겨야 제 글이지요. 그런데 요즘 평론이라는 것은 대개 남이 만들어 놓은 방법론을 빌어다가 다른 사람이 쓴 작품 가지고 왈가왈부 시시비비만 하지요. 그러니 허망할 밖에요.”

노스님의 이어지는 말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제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그 노스님은 손가락으로 백담 계곡을 가리키면서 내게 다시 한 마디를 더 하셨어요.

옛날이야기가 있어요. 저 계곡의 깊은 못에 커다란 물고기가 간밤 폭포를 타고 오르면서 용이 되어 승천했지요. 그런데 거기 무어가 남아 있을 거라면서 사람들은 그 물속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는 이미 용이 되어 등천했는데 그물에 무어가 걸리겠습니까?”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면서 그냥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고는 내 손을 한번 잡아주시고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절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노스님의 말씀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저 자신이 해 오고 있는 문학공부의 허점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 같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만 기가 죽었습니다.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만 산중에 가득했지요. 저는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설악의 높은 봉우리에 안개구름이 띠를 둘렀습니다. 설악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 노스님이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일행 가운데 한분이 가만히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설악산 신흥사의 회주이신 무산 조오현 스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또한번 화들짝 놀랐습니다.

큰스님과의 이 첫 만남이 큰 인연이 되어 저는 가끔 백담사를 찾습니다. 지금은 인제에서 내설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속도로처럼 정비되어 있지만 백담 계곡은 여전히 깊지요. 거기에 만해 한용운을 닮은 큰스님이 지켜 계시고 만해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서 백담 계곡을 흘러넘칩니다. 여러분, 오늘 이곳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 제가 백담사에서 처음 만나 뵈었던 바로 그 노스님,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 앉아 계십니다. 무산 큰스님을 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큰스님을 박수로 환영하여 주십시오.

 

무산 큰스님.

큰스님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개인적으로 아주 큰 영광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산중 절간에서 생활하시는 분이신데, 먼 여행길에 오르시어 우리 버클리대학을 찾아 주셨으니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스님이라고 제가 선전을 좀 했습니다. 큰스님의 법어를 듣기 위해 우리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많이 오셨고, 이 지역에 사시는 교민들께서도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의 주관자로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조오현 스님

권영민 교수님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산중 늙은 중을 세계적인 명문 버클리대학에 초청해 주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이 자리에 나와주신 버클리대학 교수님들, 여러 학생들 그리고 함께 참여해주신 교민 여러분들께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의 관계자 여러분들이 따뜻하게 환대하여 주신 점에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권영민 교수

무산 큰스님.

저는 큰스님을 백담사에서 가끔 뵙고 덕담도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여쭙기는 처음입니다. 여러 가지 여쭙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 먼저 큰스님의 절간 생활은 어떠하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절간에서 큰스님은 하루의 일과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아마도 여기 오신 분들이 모두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어디 가서 입을 열지 않으면 본전은 하는데, 입을 열면 그만 손해를 봅니다. 선승의 법어라고 하니깐 잔뜩 기대를 갖고 오는데, 한참 들어보면 아무 내용 없는 말만 하니깐 실망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손해를 보더라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중의 절간 생활이라고 하지만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남의 비위 맞출 일 있으면 비위 맞춰주고, 아첨할 일 있으면 아첨하고, 야단칠 일이 있으면 야단치고, 뭐 이러다 보면 하루해가 다 갑니다. 이것이 나의 하루 일과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러시군요. 절간의 생활이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본선원의 조실스님이시니까, 큰스님의 가르침 아래 많은 선승들이 스님의 문정(門庭)에 모여 참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도 자주 큰스님을 찾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신다면, 큰스님께서 참선은 언제 어떻게 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방금 교수님이 내 절간 생활과 하루 일과를 물었고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하루 일과가 바로 나의 참선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세계적인 명문대학에 와서 강의하실 자격이 없어요. 교수님과 내가 이렇게 마주 앉아 서로 한 번 쳐다보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한 것이고, 교수님은 듣고 싶은 말 다 들은 것입니다. 이 외에 따로 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영민 교수

아무래도 스님 말씀을 알아듣기 어려운데요. 처음부터........

 

조오현 스님

나는 어렵게 말하지 않았어요. 교수님이 어렵게 듣고 있습니다.

선은 말과 글이 아닙니다. 선 학자들이 선을 말과 글로 만들어 놓았지요. 그 말과 글을 따라가면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결박입니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은 털이 없는데 토끼 뿔 거북이 털 이야기를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한 번 바라보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이 다 마음입니다. 이쯤에서 그만 합시다.

 

권영민 교수

, 알겠습니다.

방금 큰스님께서 일체유심조라 하시니 큰스님의 시조 마음 하나가 생각납니다. 제가 한번 읊어 보겠습니다.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다 놓아도

 

빛깔도 모양도

향기도 없는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더라

 

큰스님,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맘이 무엇이길래 천하장수도 들지도 놓지도 못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일이 꼬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때가 많습니다.

 

조오현 스님

교수님, 그것을 내가 알면 미국 말도 못하는 늙은이가 왜 여기 앉아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겠습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경에 보면, 마음의 근원은 원래 고요적적 아주 담적하다고 합니다. 빛깔도 향기도 모양도 없이 이름 지을 수도 그림 그릴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늘이 덮지 못하고 땅이 싣지 못한다 합니다. 실로 만법을 구비하여 갖추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옛 사람들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거울은 맑고 비어서 능히 만상을 비춰 보입니다. 거울에 티끌이 끼인다 하여 그 밝음이 근본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를 벗기면 다시 맑아집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 했습니다. 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영민 교수

오늘 큰스님께서 우리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제 큰스님의 시조에 대한 말씀을 여쭙겠습니다. 한국의 전통시가인 시조를 선()의 세계와 연결시킨 것이 스님의 선시조라고 앞서 하인즈 펜클 교수가 말씀을 했습니다. 큰스님은 선과 시를 어떻게 구분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선과 시는 시선일미(詩禪一味)’라 하여 시와 선이 한 가지 맛이라고 합니다. 시와 선은 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 맛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禪而無禪便是詩),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詩而無詩禪儼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금나라 때의 시인이자 사가(史家)였던 원호문(元好問)은 시는 선객에게 비단을 깔아준 것(詩爲禪客添花錦)이요, 선은 시인에게 절옥도(禪詩詩家切玉刀)라 했습니다. 다 좋은 말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은 나무의 곧은 결이고 시는 나무의 옹이 점박이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은 내가 나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고 시는 인생에 대한 물음에 답이라고 할까요. 설혹 시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언어를 만나는 그 순간 언어의 때가 묻어 버렸기 때문에 시는 마음을 조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첨언하면 마음에 옹이가 박혀 점박이 결로 나타나는 것이 시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무런 작의가 없다고 불가사의한 무작묘용(無作妙用)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선시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비유하면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으면 맑은 호수에도 똑같은 하늘의 달그림자가 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달그림자를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대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건져내는 그 순간 달그림자는 부서지고 맙니다. 결국 시는 언어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무작묘용도 다만 말일 뿐입니다.

권교수님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이시며 40년 넘게 비평활동을 하셨습니다. 내 논리에 공감을 하십니까?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물론 큰스님의 논리에 공감합니다.

 

조오현 스님

중국의 시성 두보(杜甫)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나는 누굴 놀라게 하기 위해 시조를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시조를 하인즈 교수는 선시조라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나는 내 작품을 굳이 선시조니 그냥 시조니 그런 구분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교수님도 내 시조를 선시조라고 봅니까. 평론가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하신다면 말입니다.

 

 

권영민 교수

저는 하인즈 교수님 견해를 지지합니다. 옛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시언지(詩言志)’라고 했듯이 스님도 시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시는 시를 쓴 그 시인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이 말씀은 시를 인간 정서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정의한 서양의 시인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큰스님은 평생을 참선수행 해오신 선사이시니 큰스님의 시()는 자연스럽게 선심(禪心)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외면하다시피 하는 시조에 큰스님께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나더러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시조를 고집하느냐고 하셨는데 교수님은 한국 시조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제 내가 질문을 좀 하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에 답만 하다 보니 오늘 내가 미국에 와서 청문회에 출석한 것 같아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십니다. 귀찮은 질문이라도 답변을 해 주셔야 합니다.

큰스님께서 제게 물으시니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시조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노래해온 시가 형식입니다. 한국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한국인의 말로서 그 형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노래해온 소넷이라는 단구의 시 형식이 있고, 중국 사람들은 단형의 절구(絶句)’를 즐겨 노래해 왔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하이쿠라는 짧은 시가 형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 형식과 더불어 한국에는 시조라는 3장 형식의 시가 있었던 것이지요. 한국인들은 시조를 널리 사랑했습니다.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촌부(村夫)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시조를 한 수 정도는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람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주는 것이 시조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한국 시조의 전래과정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서양의 소넷’, 중국의 절구’, 일본의 하이쿠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잘 모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민족인들 원()과 한()이 없는 민족이 있었을까마는 우리 조상만큼 원과 한이 많은 민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 모르지만 하늘에는 잔별이 많고 우리네 가슴에는 수심도 많다는 노래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들으면 잊지 않고 곧잘 흥얼거린다는 그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시조도 언제 누가 그 형식을 만들었는지 나는 모릅니다만 시조에는 인간살이의 희비애락이랄까 우비고뇌라 할까 그런 애달픈 가락이 사람을 사무치게 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국 시의 근원은 시조이고 시조는 한국인들의 영혼의 모음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는 시조 한 수 음미해 보는 것이 시조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시조를 한국 시의 근원이고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라고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조선 왕조의 위업을 쌓은 이방원 즉 태종이 고려의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쓴 시조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구절로 시작되지요. 이 시조를 들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자신의 변함없는 지조를 드러내기 위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시조를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시조를 가지고 서로 묻고 답한 것인데 두 편의 시조가 시조를 쓴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좋아하는 옛시조 한두 편 읊어주세요.

 

조오현 스님

사실 나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 조선 중종 임금 시절(1488~1544)에 살다간 시인 황진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권영민 교수

시간 많이 있습니다. 시조하면 황진이를 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조오현 스님

황진이는 조선 시대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이웃 총각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혼자 짝사랑하다가 죽었답니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그만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황진이가 자기의 속적삼과 꽃신을 얹어주니 상여가 비로소 움직였답니다. 그 후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여인의 아름다움은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일 수 있다고 했지요. 황진이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황진이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수많은 문인 석학들과 교유했는데 호협한 기개도 있어서 스스로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황진이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이름만큼 황진이의 생애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황진이 시조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권영민 교수

. 조금 알고 있습니다.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사모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진이는 화담이 사는 초당을 찾아 거문고를 타고 노래도 부르고 당시(唐詩)도 배우며 고담준론을 즐기곤 했었다지요?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시조가 유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황진이의 시조를 좋아하신다니 한 수 소개하여 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나는 황진이가 쓴 시조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황진이가 30년이나 면벽 수도했던 승려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나서 지은 시조입니다. 지족선사를 찾아간 황진이가 그 앞에서 유혹하자 부처가 돌아앉아 버렸다는 겁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덩어리가 되어 뒹굴었지요. 나중에 정신을 차린 지족선사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는 황진이 곁을 떠납니다. 그때 황진이가 떠나가는 지족선사를 향해 노래부른 시조 한 수를 읊어 보겠습니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여기서 청산은 황진이이고 녹수는 지족선사입니다. 황진이의 마음은 청산처럼 변치 않았는데 지족선사의 마음은 녹수처럼 흘러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두고 떠났다고 가슴 아파하는 그녀의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들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지족선사도 그냥 청산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버립니다. 내가 만약 그때 지족선사였다면 내가 청산이 되고 황진이가 녹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 시조에 그런 사연이 얽혀 있었군요.

 

조오현 스님 

모두 전해오는 이야기이지요.

황진이가 당시 최고의 명창 이사종과 함께 살다가 헤어진 후에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도 아주 유명합니다. 그 시조를 음미해 보면 부처되는 것보다 그녀와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조를 읊어 보겠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오늘까지 여인의 속마음을 이렇게 절절하게 보여준 사랑시가 없다고들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절창의 시조입니다.

이왕 황진이 시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황진이가 죽은 뒤에 태어난 백호 임제(林悌, 1549~1587)가 황진이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를 하나 더 소개해 보겠습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 임제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던 길에 송도를 지나게 되었지요. 임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명기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한잔 술을 따라놓고 통곡하면서 이 시조를 노래했답니다. 그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어요. 임제가 평양에 도착해보니 파면장이 날라왔어요. 사대부의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그를 파직시켰다는 겁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도 전에 한국에는 이미 이런 문학과 풍류가 있었습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옛시조의 의미를 좀더 깊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큰스님께서 발표하신 시조에 대해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는 스님의 모든 시조를 한데 모은 <적멸을 위하여>를 한 권씩 나누어 드리려고 저희가 한국의 문학사상사에 특별 주문하여 밖에 쌓아놓았습니다.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번역한 작품집도 함께 있습니다.

 

조오현 스님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졸작 허수아비를 읽어 보겠습니다.

 

허수아비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섰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허수아비>라는 시조를 들어보니 무욕청정하게 사시는 스님의 자화상이 무슨 영상처럼 선명합니다. 정말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곳 버클리 대학에는 세계적인 학자들과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허수아비의 그 텅 빈 하늘까지도 끌어안는 지혜로운 말씀을 한 가지 더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교수님 말씀과 같이 세계적인 학자님들 우수한 학생들이 죽을 일만 남은 산중 늙은이의 말을 들어 무엇 하겠습니까? 이분들은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들입니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사서삼경이나 팔만대장경도 다 압니다. 요즘은 인터넷인가 뭔가 하는 시대라 잠시 검색하면 알게 되어 있습니다.

교수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진리가 소음(騷音)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숲에서 우는 새 울음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 저 바다의 파도와 물빛 해조음 소리에 귀를 기울일지언정 옛 성현들의 말씀에 특히 종교인의 설교를 귀담아 듣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시끄럽다 이겁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새울음, 개울물 흐르는 소리, 파도소리 이 모든 소리가 진리의 원음이니까요. 내가 말을 안 하면 본전이라도 하지만 입을 열면 손해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 까닭도 거기 있습니다.

중국의 어떤 고서에 말을 안 하기가 제일 어렵다 했습니다. 요즘 나는 그 말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권영민 교수

수년 전에 큰스님께서는 절간에 부처 없다고 신도들 앞에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 법문이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간에 부처가 없다면 큰스님께서 평생을 믿고 의지해 오신 절대존자인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요?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내가 절간에 부처 없다고 한 것은 한국 불교가 아직도 기복(祈福) 불교 중심이라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기복 불교를 버리자고 한 소립니다.

교수님은 지금 절대존자는 어디 계시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인류에는 절대존자가 없습니다. 소위 부처님이라는 이름의 석가모니도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한 인간으로 팔십년 살다가 한 인간으로 죽었습니다. 그를 받드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의 가르침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의 가르침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등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존자는 아닙니다.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권영민 교수님 자신이고 맥켄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맥켄 교수님 자기 자신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모르고 있는 데 있습니다. 하루속히 자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내가 있음으로 존재합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절대존자임을 자각하면 모든 사람들 한 분 한 분이 다 절대존자임을 알고 받들게 됩니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49년간 설명하고 갔습니다. 이 깨달음이 그의 가르침 중에 핵심입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모두가 귀담아 듣고 감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여론 조사한 것을 어느 신문에서 보았는데 한국 국민의 70%가 미국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미국에 대한 인상은 어떠신지요?

 

조오현 스님

미국에 대한 인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말만 합니다. 미국이 오랫동안 우방국으로 한국을 도와 한국인의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선교사를 통해 먹을 것을 주고 경제개발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해 항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그 지긋지긋한 빈곤에서 벗어나 세계 10대 무역국이 된 것은 미국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도 깊이 고민해 볼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좀 냉정하게 비판하면, 어느 나라나 국익을 위해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미국은 미국중심주의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핵과 같은 살상무기를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라 합니다. 총기사고가 자주 일어나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는 살상무기를 만드는 그 막대한 돈으로 기독교의 복음사업에 사용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혼자 해 봅니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1231년 몽골족이 한국의 옛 이름인 고려에 쳐들어와 양민을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는 전쟁을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그때 고려는 적을 막을 총칼 등 무기를 만들지 않고 불경을 경판에 새겼습니다. 부처님의 생명존중사상으로 전쟁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경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팔만대장경입니다.

미국은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이니까 기독교의 정신을 생활화한다면 살상무기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미국이 인류평화와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핵을 폐기처분한다면 한반도를 위협하는 북한도 핵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핵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 등 다른 나라들도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사실상 핵은 인류의 재앙의 근원입니다. 지금 핵을 폐기하지 않으면 백 년 못 가서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핵 폐기야 말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며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대역사라 할 것입니다. 미국은 그런 능력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정신적 기반도 갖추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핵을 폐기하면 영원한 진리의 몸을 얻을 것입니다. 인류를 구한 구세주가 될 것입니다. 크게 버리면 크게 얻습니다. 미국이 세계 제일 강국답게 크게 한 번 버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뜻에서 평화의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에서 가지고 오신 죽비竹篦를 크게 세 번 치시고 합장하셨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아마 이 자리를 설악산 선방(禪房)으로 아시고 허공이 찢어지는 죽비(竹篦)를 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학생들과 교민들에게는 죽비 대신 마지막으로 축원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하지만 축원 같은 것 대신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미국에 와서 자기네 전통시가인 하이쿠라는 것을 널리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의 교과서에도 하이쿠가 수록되어 있다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민들은 시조를 흘러간 유행가로 사대부의 음풍영월로 생각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하버드대학 맥켄 교수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영어시조운동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습니다. 시조는 흘러간 유행가가 아닙니다.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조상 대대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모든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이 소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이 소리가 있는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시조는 한국인의 맥박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순신 장군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라는 시조 한 수로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6. 25 전란 중에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나온다.’라고 새로운 희망을 시조로 읊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맹서코 통일과 번영 이루고야 말리라.’ 라면서 자신의 포부를 시조로 풀어내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기 전에 19821223일 청주감옥에서 나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라고 읊은 시조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그 어른은 그 시조대로 자유의 종을 쳤습니다.

제가 이곳 여행을 결정하면서 한국에서 시조를 잘 짓는 홍성란 시인과 박영희·강병천 두 분 시인을 말동무 삼아 모시고 왔습니다. 백담사 무금선원 영진 스님도 함께 와 있습니다. 모두 시조를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주 부르는 이은상의 가고파」 「성불사의 밤와 같은 가곡은 모두 시조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동안은 바쁜 삶에 여유가 없어서였다고 하겠지만, 저는 이제부터 우리 시조를 사랑하고 노래하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이민 생활에 고생하는 교민들에게 축원을 드리지 못하니 죄송합니다.

 

권영민 교수

이제 말씀을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걸어 다니는 허깨비라 했다 합니다. 나도 허깨비가 되고 싶었으나 허깨비는 못되고 제자리걸음만 걷는 허수아비입니다.

감사합니다.

 

권영민 교수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신 무산 조오현 큰스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201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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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4일에 개최되었던 광복70주년 세계한국학대회 기조강연 내용 전문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현황과 그 전망

 

 

안녕하십니까?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주최하고 외교부와 광복70년 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2015년 세계한국학대회의 기조강연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행사는 세계 각 지역의 한국학 연구 현황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이에 근거하여 한국학의 새로운 방향과 그 전망을 모색하고자 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이 뜻깊은 기회를 만들어주신 한국국제교류단에 고마움을 표하며 이 자리에 함께 참여해 주신 세계 각국의 여러 교수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국학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 연구의 영역에서 한국에 대한 연구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번 세계한국학대회는 언어 문학과 역사 철학 등의 인문학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학의 연구 방향 자체가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여 문학과 역사 등으로 확대되어 왔고, 근래에는 정치 경제 등을 비롯한 여러 분야로 그 관심 영역이 넓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변화와 발전

한국학은 동양학 또는 동아시아 연구에서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비해 그 역사가 아주 짧습니다. 역사가 오래지 않은 만큼 그 제도적 기반도 허약하고 연구 인력도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한국이 서구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당시 한국에 관심을 가졌던 서양인들은 대개가 종교활동을 위해 한국을 찾아온 선교사들이거나 정치 외교 분야의 관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입국하여 교회를 세우고 학교와 병원도 건립하여 한국 사회에 서구의 문물제도를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 거기서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를 쓰고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서구인들에게 심어주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한국학 연구의 출발은 이들의 저술 활동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서구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식민지 조선을 경영했고, ‘조선 연구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조사 연구를 시행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 방식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본적 식민주의의 담론 공간 속에서 일정한 성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은 전문 연구자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대로 식민지 조선을 그려냈고 조선인들에 대해 기록했으며, 그 자신들의 조사 연구 결과를 실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합리화하고자 했습니다. 일본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반식민주의 운동과 투쟁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이 이른바 문화적 민족주의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주의적 접근방법에 저항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대응 담론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동서 열강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남북한 분단 상황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유엔을 중심으로 서구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의 역사 문화와 한국인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역별로 그 경로가 복잡합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한국학은 한국전쟁 이후 등장한 한국 전문가들과 미국에 유학했던 한국의 전문 지식인들에 의해 그 기초가 만들어졌고, 1960년대 중반 이후 평화봉사단의 활동을 통해 그 기반이 확대되면서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평화봉사단출신 학자의 대거 등장은 한국학이 미국에서 지역연구의 한 분야로서 그 독자성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이들이 주도해온 폭넓은 교육과 연구,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한 학문적 계승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 지역에서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경우처럼 한국 연구의 독자적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구소련시대에 동구권에서 이루어진 한국 연구를 기반으로 그 방향이 새롭게 전환된 지역도 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 가운데 중국의 경우는 개방화 이후 한국과의 적극적인 학술교류를 통해 한국학의 영역이 크게 확대 발전하였습니다.

세계 각국의 여러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학 연구와 교육은 1991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설립 이후 해외 한국학 분야에 대한 지원 사업을 확대하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해 한국학 분야의 교수직 설치 기금을 지원하였고, 학문 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장학 지원도 지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학술교류 사업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러한 꾸준한 지원 정책에 따라 세계 각국의 중요 대학들도 한국학연구소를 설치하고 한국학 강좌를 개설하면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적극 표명하였습니다. 오늘날 해외 한국학의 확대와 그 발전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추진해온 지원 사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학의 연구의 과제와 전망

한국학 연구는 그동안 꾸준히 확대 발전되어 왔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학 연구를 위한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전문가를 제대로 키우지 않고서는 한국학의 발전과 그 세계적 확대를 말할 수 없습니다. 전문 인력이 부족하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어렵고 제대로 된 성과를 얻기도 힘듭니다. 더구나 한국학 연구에 뜻을 두고 있는 학문 후속 세대의 양성도 여전히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한국학 연구에서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 각국의 주요 대학에서 한국학 강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확대해야만 합니다. 대학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고정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연구와 교육에 전념할 수 있어야만 한국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세계 각국의 여러 중요 대학에 한국학 강좌의 개설을 위해 재정을 지원했습니다. 앞으로 이 같은 사업에 한국의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연구를 위한 가칭 <해외 한국학 연구 기금> 같은 것을 제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한국학 연구를 더욱 활성화하고 그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학술교류를 촉진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은 국내 학계의 다양한 연구 성과를 곧바로 접하기 어렵고 그 연구 내용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내외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학술 정보를 교환하고 연구 내용에 대해 활발하게 토의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고 이를 네트워크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연구의 주축이 되고 있는 중국학이나 일본학 분야와의 학문적인 접촉과 교류도 더욱 활성화해야 합니다. 한국학 연구의 성과가 일본학과 중국학의 경우와 서로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만, 동아시아 연구에서 각 지역 연구의 상호 관련성이 더욱 강조되고 상대적으로 한국학 연구의 위상도 제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속의 한국은 그 국가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한국의 언어와 역사, 사회와 문화 전반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과거의 인식에서 벗어나 한국과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파급되기 시작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기가 커지고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관심이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학의 연구 기반을 더욱 확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학의 학문적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국학이 동아시아 연구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오늘 세계 한국학대회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교육활동과 폭넓은 연구 성과가 앞으로는 한국학 연구라는 이름으로 더욱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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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 교수의 신작 <오감도의 탄생>(태학사)이 발간되었습니다.

신문에 연재되다 중단되었던 연작시 <오감도>의 나머지 미발표작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이 저서는, 사라진 나머지 시들의 행방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설명과 더불어 이상과 <오감도>에 대한 오랜 연구의 결과가 흥미롭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권영민 교수는 이상의 시 <오감도> 연작에 대해, "한국 문단에 늘 숙제처럼 남아 있던 미완의 『오감도』는 더 이상 한 편의 시가 아니라, 인습과 제도와 가치에 대항하는 시인 이상의 저항이자 창조적 도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난해한 시로 꼽히는 『오감도』. 『오감도』는 기존의 시적 정서나 진술 방식을 뒤엎고 사물에 대한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접근법을 택했다. 그 결과 끊임없이 발전해가는 기술 문명의 정체를 포착하며 기괴하고도 거대한 하나의 상상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물리학과 기하학과 같은 현대 과학과 맞물려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창조했다. 이상의 삶과 세계가 『오감도』에 모두 담겨 있다.
『오감도』의 연재 중단 후 나머지 미발표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누구도 물은 적이 없다. 이상 자신도 이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이 『오감도』를 미완의 상태로 방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는 1936년 연작시 『역단』 다섯 편과 『위독』 열두 편을 발표함으로써 『오감도』에서 시작한 새로운 시적 실험의 완성에 도달한다. 이상이 당초에 계획했던 『오감도』의 양식적 특성은 『역단』과 『위독』을 함께 포함시켜야만 연작시로서의 규모와 성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저자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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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최종 심사에 오른 작품들은 모두 15편이었다. 그 가운데서 내가 주목하여 읽었던 작품은 손홍규 씨의 <기억의 잃은 자들의 도시>, 윤이형 씨의 <쿤의 여행>, 조해진 씨의 <빛의 호위>, 천명관 씨의 <파충류의 밤>, 편혜영 씨의 <몬순> 등이었다. 최종 심사를 담당한 심사위원들이 서로 가장 많은 의견을 주고받은 것도 이들 5편에 대한 것이었다. 각 심사위원들이 최종 후보작 두 편을 선택하는 최종 단계에서 나는 <쿤의 여행><몬순>을 지목했다. <파충류의 밤><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는 그 주제에 비해 이야기 자체의 중량감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빛의 호위>는 서사의 중층 구조를 매우 짜임새 있게 설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의 묘사가 풍부하지 않다는 아쉬움이 컸다. 단편소설이 아니라 중편소설로 이야기를 더 확장했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윤이형 씨의 <쿤의 여행>은 환상적 기법을 통한 삶의 해석이 이채롭다. 사람들은 몇 개의 얼굴로 살아간다. 크거나 작게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고 그 위장된 모습에 가려져 평생 동안 본래의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작가는 이러한 가면의 생()’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므로 일상의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위장한 으로 살아간다. 이 단순하지만 분명한 명제를 놓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쿤의 여행>이다. 쉽게 만들어진 이야기 같지만 그 문제의식이 주목된다. ‘을 제거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본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편혜영 씨의 <몬순>은 불안사회의 어떤 징후에 대한 소설적 탐구에 해당한다. 일상적인 삶을 감싸고 있는 불안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어디로 퍼져나가는지 방향을 알 수가 없다. 불안은 사방으로 떠다닌다. 특정한 대상이 없으므로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기 쉽다. 불안은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경험되지만 그 연유를 제대로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소설 <몬순>은 아파트의 단전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전기불이 들어올 때까지 모든 것들은 어둠 속에 숨겨진다. 그러므로 개인의 일상적인 삶을 감싸고 있는 불안의 실체를 정확하게 발견하고 그 원인을 해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삶에 내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고통과 그 비밀은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불안의 상황과 절묘하게 접합되어 있다. 독자들을 까닭모를 불안감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비밀이란 그것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긴장을 수반한다는 평범한 원리를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삶 자체가 겪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론적 불안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소설적 특징은 삶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태도를 암시해 주는 동시에 자신이 즐겨 다루어온 주제와 기법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인정할 만하다.

이상문학상 대상의 영예를 안게 된 편혜영 씨에게 축하드린다.(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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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형!

형의 부음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미국의 번역가 부르스 풀턴 교수와 함께 만나 저녁을 하자고 약속하고서도 부자연스런 말투를 걱정하던 형을 생각하여 날짜를 뒤로 미루었습니다. 최근의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출간된 뒤에도 한번 만나자고 하고는 그냥 시간을 보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약속이 부질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훌훌 털고 가시니 그저 가슴이 먹먹할 뿐입니다.

형과 처음 대면했던 때가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지난 1970년대 중반의 한국문학은 가파른 산업화과정 속에 커다란 변동을 겪으면서 현실에 대한 폭 넓은 인식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소시민의 삶과 그 내면의식의 추구에 집착했던 1960년대 소설의 감성이 이 시기에 더욱 사회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으며, 현실에 대응하는 작가정신이 경험주의적 상상력으로 충일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외형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경제적 성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계층적 분화를 함께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의 근대적 성장을 가져왔지만 삶의 근본적 요건마저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빈부의 격차, 지역의 대립, 농촌의 궁핍화 등이 갈등을 부추겼고, 환경의 파괴와 공해 문제 등이 그 부산물로 대두되었습니다. 더구나 유신체제 이후 정치적 폭압이 자행되면서 사회적 혼란을 더욱 조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인들의 삶과 그 존재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으며, 공동체적인 유대감의 파괴와 그에 따른 인간관계의 왜곡을 노정하였던 것입니다.

 

최인호 형,

형의 소설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였습니다. 형은 소설을 통해 인간관계의 불합리한 조건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인간적인 삶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의 소설은 단순한 문학 양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현실 전반을 포괄하는 생명력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1970년대 소설을 대표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를 두고 한국문학의 최인호적 경향이라고 설명한 적도 있습니다. 형은 1970년대 벽두에 서서 산업화 과정의 혼란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던 개인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에 발표한 단편소설 술꾼, 타인의 방, 돌의 초상, 깊고 푸른 밤등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우리 소설문단에 기법과 정신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였습니다.

형은 특정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 또는 개별화된 주체로서의 인간의 문제를 소설적 주제로 내세웠습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등장한 인간의 소외 문제라든지 문화 자체의 대중화 경향과 그 소비주의적 성향 등이 어떻게 개인적인 삶을 황폐하게 하는가를 주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의 소설은 현실 사회의 변화 과정에 절망하면서 타락하는 인간의 운명에 집요한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같은 경향 때문에 형의 문학은 이성이라든지 역사의식과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인적 도피 성향을 보여준다고 비판한 평론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의 소설은 인간의 내적 불안을 예리하게 투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사회관계를 인간적인 유대를 통해 복원하고자 하는 소망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인호 형,

형의 소설은 현실의 상황 자체가 진정한 삶의 의미와 인간적 조건을 파괴시키는 거대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산업화과정에서 문제시되었던 물신주의의 팽배, 사회적 매커니즘의 횡포, 인간의 자기소외 등을 파악하는 방식과 그 접근 태도에서 형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보다 우선하여 개인의 자기 정체성의 혼란과 그 극복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자신이 삶의 주체로 떳떳이 서지 못하고, 자신이 세우고자 노력했던 사회구조에서 밀려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참담한 소외감은 산업화 사회 속에서 야기되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970년대 소설은 이 같은 최인호적 경향의 분화를 통해 그 시대적 특성을 규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형의 소설적 지향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최인호 형,

형은 단편소설에서 보여주었던 문제의식을 서사적으로 확대시키면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적도의 꽃, 고래사냥, 겨울 나그네등으로 대표되는 장편소설들을 내놓았습니다. 신문 연재를 통해 대중 독자와 만나게 된 별들의 고향을 발표하면서부터 형은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되었지만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마다 그 비판적 표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형은 도시적 감수성, 섬세한 심리묘사, 극적인 사건 설정 등의 서사적 특성을 갖춘 이 작품들을 통해 한국 소설문학의 대중적 독자기반을 확대시켜 놓았습니다. 그 뒤로 이어진 역사소설 잃어버린 왕국, 해신, 상도, 유림등은 새로운 역사적 상상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들은 사담(史談)’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 역사소설의 영역에 서사 공간의 확장이라는 극적요소를 더해줌으로써 일정한 소설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형이 투병 생활 중에 발표한 최근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도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일상의 공간을 따라 시간을 분절시키면서 이 분절된 시간에 따라 공간의 시간화가 가능해지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시간은 개인에 의해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범주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적 시간은 기억 또는 의식 속에서 시간적 순서개념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은 서로 뒤섞이고 왜곡되면서 그 순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시간과 자아의 관계가 특별히 중요한 것은 바로 이같은 성질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는 문학적 기표가 바로 환상입니다. 이것은 객관적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귀납적이거나 인과적 추리와는 아무 상관없지만,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그 서사적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최인호 형!

형의 영전에 고개 숙이고 소설쓰기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 새삼스런 질문은 형의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는 동안 수없이 되뇌었던 것입니다. 이 소설의 서두에 덧붙여놓은 <작가의 말>이 내 의식의 덜미를 잡고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형은 이 소설을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두 달 동안에 완성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 소설의 쓰는 동안 자신이 느꼈던 창작욕과 열정을 두고 고통의 축제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통의 축제라는 말이 지금도 나의 명치끝을 시리게 합니다.

 

최인호 형!

인간의 삶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듬어 주던 형의 그 넉넉한 가슴이 아쉽습니다. 언제나 반겨주던 형의 따스한 미소가 그립습니다. 형의 소설에 남아 있는 그 지극한 사랑의 언어들은 형의 뒤를 잇는 젊은 작가들의 손에 의해 새롭게 꾸며질 것입니다. 이제 형은 고통의 축제를 떠나 고이 잠드시길 빕니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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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싸이의 노래와 춤이 세계 각지에서 열풍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보면서 다시 되짚어 보고자 하는 것이 한국문화의 위상이다. 한국문화의 세계화를 내세운 지가 20년이 넘었다. 한국문화의 세계화는 일차적으로는 문화의 공간적 확대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문화에 대한 세계적인 수용 공간의 확대라는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은 한국 문화를 민족적 특수성의 개념으로부터 인류적인 보편성의 개념으로 해방시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한국 문화의 세계화는 한국 문화가 이질적인 외국 문화 속에 들어가 서로 충돌하기도 하고 화해로운 만남을 이루기도 하는 과정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문화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한국문화의 자기 정체성과 그 위상의 확립이 필수적이다.

 

문화는 인간 생활양식의 총체라고 한다. 인간이 자신의 삶에 근거하여 현실을 바라보고 삶을 영위하며, 우주 만물에 대응하는 일체의 행위가 문화를 형성한다. 문화의 다양성이라는 것이 여기서 비롯되며, 문화의 자율성이라는 것도 바로 여기서 연유된다. 문화의 개념이 이처럼 넓어지고 보다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문화의 생산 양식과 그 향유의 폭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문화라는 것이 특수한 계층의 전유물처럼 생각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문화의 통합적인 힘을 의식하게 되었고, 각자가 그것을 이용하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향유하는 것을 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모든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어떤 고정적인 목표를 내세우기 어렵다. 그것은 하나의 발전 가능한 모형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며, 사회 발전의 한 단계로서 계속 논의되어야 할 과제인 것이다.

문화는 사실적인 과정과 인간의 평가가 겹쳐 나타나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분열된 의식을 바탕으로 하여 조작된 문화의 분열도 체험한 바 있고, 이념의 양극화 현상에 의해 빚어진 문화의 갈등도 경험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요건들은 모두 진정한 문화의 실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문화의 지향은 그 주체가 요구하고 있는 삶의 가치와도 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다양성과 그 균형을 통해서 자기 정체의 회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문화의 실천 가운데 가장 중요한 힘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를 두고 문화의 시대라고 말한다. 문화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 자아실현에 대한 욕망과 문화적 욕구가 늘어나면서 문화는 삶의 부차적인 영역이 아니라 중심 영역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문화가 삶의 질을 결정하는 핵심 요소가 되고 있으며, 사회 발전의 모든 과정에서 문화와의 상호 연관성이 깊어지고 있다.

문화 현상은 특정 이념이나 가치에 얽매여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규정된 방향대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문화는 변화하는 시대와 변화하는 인간의 삶에 따라 함께 변화한다. 그것은 하나의 전략일 수도 있고 실천일 수도 있지만, 사회적 현상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한국 사회가 개방적인 국제 질서를 선택하고 다원화된 고도 산업 사회의 발전의 조화롭게 추구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사회 발전과 균형을 이룰 수 있는 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각성이 필요하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과정 속에서 겪어야 했던 모순과 갈등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삶의 가치의 질적 향상을 꾀할 수 있는 문화의 확대를 기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량적인 사회 발전의 단계를 넘어서 성숙된 시민사회의 확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문화의 풍요로움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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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많은 책들을 나중에 어떻게 해요?

아내는 가끔 책방 청소를 하면서 내게 묻곤 한다. 나는 대답 대신에 그저 빙그시 웃는다. 학교 연구실에 쌓아둔 책과 고향집으로 옮겨 둔 책들까지 모두 어떻게 처리할 것이지 궁리해 본 적이 없다. 공부하는 사람이니 책이 재산이지 하셨던 어머니의 말씀을 생각할 뿐이다.

내가 책을 사 모으기 시작한 것은 가난한 대학원 시절부터다. 지금은 대학 근처에 둘러볼 만한 헌책방이 별로 없지만, 그 시절에는 대학천에서부터 청계천으로 이르는 골목이 모두 책방으로 이어져 있었다. 대개 헌책을 사고팔았다. 우리 같은 가난한 학생들이 학기가 끝난 후 강의 교재를 내다 팔기도 했고, 새 학기 강의를 위해 남이 내다판 책을 구하러 다니기도 했던 곳이다. 나는 곧잘 청계천 헌책방 순례를 하곤 했다. 몇 군데 서점은 주인도 나를 알아볼 정도로 친했다. 그때 구했던 책 가운데에는 임화 평론집 문학의 논리,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 박태원의 장편소설 천변풍경, 최남선의 시조집 백팔번뇌, 김억의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의 초판본 등 백여 권의 문학 서적이 있다.

내가 지금도 자랑하고 싶은 책은 정지용의 시집 백록담초판본이다. 이 책을 얻은 것이 30년전 일인데 그것이 바로 엊그제같다. 비가 축축히 내리던 초가을 토요일 오후. 날이 궂어서 책방을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경문서점이었는지 그 이름이 지금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그 집에는 가끔 괜찮은 책들이 주인이 앉아 있는 책상 뒤켠의 캐비넷 속에 숨겨져 있었다. 내가 서점 문을 열고 들어서니 마침 이웃 서점의 주인들까지 한데 모여 내기 화투판이 벌어졌다. 주인은 손님이 오는 것도 별로 반가워하지 않고 화투판에 열중이다. 나는 문학 서적들이 꽂혀 있는 서가를 훑어보고 있었다. 주인이 소변이 급한지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다시 가게로 들어서는 주인에게 눈인사를 하면서, 따로 보관하고 있는 볼 만한 책이 없느냐고 물었다. 옆 자리에서 화투장을 펴던 다른 서점 주인이 말참견을 했다. ‘지난번 내게서 가져간 그 시집 있잖아. 그거 넘겼나? 책장사가 책 욕심을 내어서 뭘해.’ 주인은 마지못한 듯이 캐비넷을 열고 신문지로 잘 싸놓은 작은 책 한권을 내게 보였다. 정지용 시집 백록담이다. 노란 바탕 위에 나무 사이로 사슴 한 마리가 고개를 쳐들고 있다. 그 옆에 환상처럼 날고 있는 나비 한 마리-. ‘시집(詩集) 백록담(白鹿潭)’이라는 제자(題字)는 출판사에서 갓나온 책처럼 선명하다. 내 가슴이 뛰었다. 수십년 동안을 이렇게 곱게 간직한 책이 있었구나 하고 나는 놀랐다.

내가 책값을 묻자, 주인은 벌써 다른 사람이 주문해둔 것이라서 팔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시집에 욕심이 나서 내게 팔라고 매달렸다. 그러나 주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책을 캐비넷에 집어넣고 화투판으로 끼어 앉았다. 내가 아저씨하며 주인을 부르자, 이번에도 다른 서점 주인이 말을 거들었다. ‘이렇게 비가 오시는 날에도 헌책방 찾아다니는 손님인데, 어지간 하면 넘겨드려.’ 나는 주인의 눈치만 살피며 화투 한 판이 끝날 때까지 거기 서 있었다. 화투판이 끝나자 주인이 일어나더니 캐비넷 속의 시집을 다시 꺼내들며 말했다. ‘오늘 비 내리시는 덕인 줄 알아요.’ 나는 그 시집을 받아들고 몇번이고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비가 내리는 초가을 날 헌책방에 들렀던 것이 그만 내게는 큰 횡재가 되었다. 정지용의 백록담초판본을 그것도 그렇게 멀쩡하게 깨끗한 책으로 구했으니. 나는 너무도 기뻐서 가방 속에 책을 챙겨 넣은 후 빗속을 달렸다.

나는 지금도 시집 백록담을 펼쳐들면 그때가 눈에 선하다. 이 시집을 얻었던 때와 같은 그런 기쁨을 이제는 다시 책을 통해 맛보기는 어렵겠다. 그러나 나는 이 시집 속의 시들에서 느낄 수 있는 시인 정지용 특유의 언어적 조형성에 늘 탄복한다. 그리고 천편일률적으로 찍어내는 똑같은 표지의 요즘 시집들에 대해 불만이다. 똑같은 표지의 시집들처럼 시의 목소리까지 서로 닮아버리면 어쩌나?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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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은정 2013.12.06 14:30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동의합니다
    표지에서느끼는 감흥도 귀한데~~

  2. 2013.12.06 14:32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주소 비밀번호 안쓰면 안되나요
    오픈하는게^^ 저 건망증심해서

 

비평가 김윤식 선생은 자신의 비평이 손끝으로 쓰는 것이 아니라 발로 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은 아주 간단한 비유적인 진술이긴 하지만, 비평의 본질과 기능을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이 말의 뜻은 아마도 여러 가지 방향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비평의 본질에 대한 해석을 생각할 수 있다. 비평이라는 말 속에는 가려내고 따진다.’ 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대상에 대한 언어적 인식 행위로서의 비평은, 그렇기 때문에 논리성을 근간으로 한다. 물론 위대한 비평이란 어떤 형식을 취하든 간에 언제나 창조적인 것을 지향한다는 사실이 전제되어야 한다. 선생이 지적하고 있는 손끝으로 쓰는 것이란 언어적 기술 그 자체를 의미함이 아닐까 한다. 비평의 행위를 언어의 기술과 그 논리로만 이해하고자 할 때, 비평은 손끝에서 논다. 비평을 위한 비평의 존재라는 것도 생각할 수 있으나, 비평 자체의 논리에 대한 집착을 더욱 중시할 경우 비평은 손끝을 벗어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러나 발로 쓰는 것으로서의 비평은 이와 다르다. 그것은 언어적 기술이나 논리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삶의 현실 한복판에서 이루어진다. 비평 자체의 논리에 의해서 성립되는 비평이 아니라, 삶의 현실의 논리를 따라서 성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발로 쓰는 비평은 언어적인 인식 형태를 넘어서서 생의 형식을 포착하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진다. ‘발로 쓰는 비평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 논리적 형식보다는 실증적인 내용에 더욱 관심을 둔다. 사변적인 것보다는 실제적인 것에, 추상적인 관념보다는 구체적인 사실을 앞세운다. ‘발로 쓰는 비평은 현실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작업이기 때문에, 비평의 대상이 되는 문학과 함께 존재한다기보다 오히려 그 문학을 보는 수많은 독자와 함께한다. 독자와 더불어 문학을 보고, 삶을 생각하며 현실에 골몰한다. 문학을 통해 역사를 돌이켜보고 다시 오는 앞날을 가늠하기도 한다. ‘발로 쓰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에, 선생의 비평에는 언제나 살아있는 문제들이 살아난다.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미화되기 십상인 작가 시인들이 선생의 비평 속에서는 평범한 일상적 존재로 변한다. 작가 시인들이 고뇌했던 문학적 테마들도 선생의 비평 속에서는 인간의 삶의 문제로 부각된다. 인간의 삶의 문제에 대한 관심, 이것이야말로 선생의 발로 쓰는 비평의 핵심에 해당된다.

 

김윤식 선생은 평단의 누구도 따르기 힘든 엄청난 독서로부터 비평작업을 시작한다. 선생의 연구실에서 나는 한번도 책을 펴들고 있지 않은 모습을 뵌 적이 없다. 언제나 책상 위에 책을 펼쳐놓고 원고지에 무언가를 쓴다. 뒷사람들이 읽을 것도 좀 남겨두시라고 농담반 진담반의 말씀을 드린 적도 있지만, 그저 소리없는 웃음으로 받아넘긴다. 선생은 국내에서 발간되는 문예지들의 소설들을 매달 거의 빼놓지 않고 챙겨 읽는 것으로 유명하다. 읽지 않고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 선생의 비평 작업의 첫 번째의 전제이다. 많은 작품을 고루 읽게 되니, 소설 문단의 흐름에 훤하다. 그리고 읽은 뒤의 비평적인 소감을 그대로 묵혀두지 않기 위해, 모든 비평가들이 귀찮게 여기는 소설 월평에 적극 참여한다. 문단의 현장 감각을 잃지 않고 관심의 끈을 지탱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이 이런 방식으로도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김윤식 선생의 소설 읽기는 작가라는 인간과 선생 자신이 삶의 한가운데에서 서로 맞서기에 다름 아니다. 이 맞서기 작업의 첫 대상이 춘원 이광수였음은 이광수와 그의 시대라는 방대한 저술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 맞서기 작업은 승부를 결정짓는 싸움은 아니다. 서투른 독자들은 선생에 의한 이광수 극복을 운위할지도 모르지만, 선생은 오히려 이광수를 오늘의 현실 속에 다시 세우고 그와 함께 산다. 이런 식의 맞서기는 그 뒤에도 계속되어, 성생의 주변에 많은 작가들이 서 있음을 보게 된다. 소설을 예술이라고 믿었던 김동인의 오만한 모습도 그 어깨 너머에 보이고, 관점의 중립을 소설적 미덕으로 자랑했던 염상섭도 선생의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천재 이상도 선생의 오른쪽에서 귀엣말을 주고받는다. 선생과 동시대를 살아온 최인훈도, 이청준도, 최일남도 보인다. 박완서나 김원일이나 전상국도 눈짓을 준다. 최수철이나 채영주같은 작가들도 함께 끼어있다. 이 모든 작가들이 일제히 함께 일어나서 자신들이 고심했던 문제들을 선생은 다시 묻고 대답한다. 이 쉼없는 대화와 맞서기를 통해 선생은 백발의 머리칼로 평단의 후배들을 조급하게 한다.

김윤식 선생의 소설 읽기 작업은 누워있는 작가를 일떠세우고 딴전부리는 작가를 채근하며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다. 이 작업을 위해서 선생은 소설에 매달리고, 소설의 형식에 미학적 요건을 부여해온 많은 이론가들을 극복해내고 있다. 정말이다. 소설가들과 맞서기 위해서 선생은 루카치를 극복해야 했고 골드만을 이겨야 했던 것이다. 바흐찐과도 싸우더니 요즈음은 푸코를 이기는 중이다. 참으로 고달픈 투쟁을 소설을 위해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김윤식 선생은 소설에 신들린 건지도 모른다. 소설이라는 것을 인간이 걸린 병이라고 규정한 사람도 있지 않았던가? 또다른 하나의 삶을 살아보고자 하는 욕망의 병이 소설이라면, 그것이 바로 인간의 삶의 본질과도 통하는 것이라면, 나는 오히려 선생의 비평 작업 뒤에 숨겨진 진정한 소설의 모습에 호기심을 갖게 된다. 

 

김윤식 선생의 비평은 그 엄청난 저술로 인하여 평판을 압도한다. 선생이 내놓은 저서가 백 권을 훨씬 넘고, 이 모두가 우리 문학의 해석과 평가를 위해 바쳐진 것임은 물론이다. 이 많은 저술들에서 선생이 가장 커다란 문제로 다루어온 것은, 우리 문학에서 근대적인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선생이 맞서기의 상대로 살았던 모든 작가들에게 던졌던 것이며, 우리 문단과 학계에 내놓은 명제이기도 하다. 이 명제는 우리 현대문학사의 본질에도 해당되는 것일 터인데, 아직도 해답이 명쾌한 것은 아니다.

선생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로 쓰는 비평으로 실증적 기반을 확보하였고, 그 위에서 정신적인 것의 규명에 나서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정신적인 것이란 구체적인 실증적인 것과는 달리 내적인 욕구와 연관된다. 선생은 이 작업이 궁극적으로 삶의 통합 또는 전체성을 목표로 삼는 것임을 자주 암시하고 있다. 문학을 전체로 이해하고자 하는 선생의 태도 속에서 우리는 딜타이의 입장을 보게 되는 경우도 있고 헤겔의 숨결을 느낄 수도 있으나, 무엇보다도 선생 자신이 지니고 있는 비평적 열정을 놓칠 수가 없다.

김윤식 선생과 자리를 함께 하여 차 한잔이라도 나누어 본 사람이라면, 좀처럼 입을 열지 않는 선생의 첫 표정에 그만 질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문학에 대한 일이라면 선생은 무슨 문제이든지 자신의 일로 생각하고 진지하게 입을 연다. 문학이 왜, 무엇 때문에, 어떻게 존재하는 것인지 따위의 문학개론식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게 있어서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되묻게 만드는 힘 있는 말들이 계속된다. 선생의 모든 문학적 담화들은 지금’ ‘여기의 문제들이 중심을 이룬다. 선생의 비평적 감각이 언제나 살아있는 정신으로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윤식 선생의 비평작업은 후학들에게 엄청난 짐이다. 우리 현대문학사 전체의 무게만큼이나 벅찬 것이다. 그러나 이 벅찬 짐을 감당해야 할 후학들은 사실 행복하다. 아무런 짐의 무게도 가늠할 수 없던 진공지대에서 비평의 균형을 잡아야 했던 선생의 힘든 노력에 비하면, 감당해야 할 몫을 그 무게만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사실 그 짐을 감당할만한 능력을 갖고 있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는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하나는 독자 여러분과 함께 좀 더 가까이 선생의 비평활동을 돌아보기 위함이요, 다른 하나는 김윤식 선생 이전에 선생과 같은 비평가가 없었다는 점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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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수영 성문

오천은 충청남도 보령시의 작은 어촌이다. 이곳에 충청 수영(水營)이 들어서게 된 역사는 약 6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본래 백제 시대 신촌현(新村縣)에 속했고, 통일 신라 시대에는 결성군에 속했던 작은 어촌이었는데, 고려 시대부터 지금의 주포에 보령현(保寧縣)을 열고 감무(監務)를 시작하자 이에 속하게 되었다.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대왕이 1396년 태조 5년에 고만(古巒. 지금의 주포면 고정리)에 첨절제사(僉節制使)를 두고 이 일대의 육지와 해상을 관할하게 한 것이 수영(水營)의 시초이다.

조선 4대 세종대왕은 이곳의 군사적인 중요성을 생각하여 첨절제사를 도안무처치사(都按撫處置使)로 격을 높여 배치했다. 세종 30(1448)에 이곳 도안무처치사로 부임한 박배(朴培)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수영의 본부 건물을 현재의 오천면 소성리에 세우게 되었다. 이후 이곳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가 부임하여 일대를 모두 관할하였다. 1504년 수군절도사로 부임한 이량(李良)이 수영 내에서 바다를 내려볼 수 있는 기암 절벽인 강선암(降仙巖) 윗쪽에 영보정(永保亭)을 지었다. 영보정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그 아름다운 풍광을 노래한 많은 시문들이 옛 모습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수영을 둘러싼 산 능선을 따라 축성(築城)이 시작된 것은 1509년 중종(中宗) 4년부터이다. 축성이 끝난 뒤에는 수군절도사가 보령부사(保寧府使)를 겸하게 되었던 적도 있으며, 한때는 그 지위가 낮아져서 태안반도의 안흥(安興) 첨절제사가 수군절도사를 겸하여 수영을 다스리고 성내를 지켰던 적도 있다. 조선 말인 1871년 고종 8년 보령현(保寧縣)에 수영을 합속시켜서 보령부사(保寧府使)가 이를 관할하게 하였다.

조선 시대의 기록에 따르면, 수영은 사방 3274 (1Km의 길이)으로 이루어진 석성과 토성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성곽의 다섯 곳에 옹성을 쌓았고, 동문, 남문, 북문, 서문, 소서문 등 5개 대문 위에 층루를 지어 위용을 자랑하게 하였으며, 소서문 내에는 길이가 100() 너비가 50장이 되는 호지(濠池)를 파서 큰 연못을 이루게 하였다. 바다를 면하여 있는 높은 절벽에 자리한 영보정(永保亭)의 절묘한 아름다움은 천애(天涯)의 벼랑에 서 있는 고소대(姑蘇臺)와 그 밑에 선녀가 내려온다는 강선암(降仙巖)이 서로 어우러져 그 풍광이 더욱 이채로웠다. 이곳 수영에 전함 2, 구선(龜船. 거북선) 1, 방선(防船) 1, 병선(兵船) 2, 사후선(伺候船) 7척 등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시대 그 규모가 어떠했던가를 짐작할 만하다.

그러나 고종 말년에 수영이 폐쇄되고 행정 구역이 개편되어 보령군 오천면으로 바뀌면서 수영은 급속하게 퇴락하게 되었다. 성곽 5대문의 층루가 모두 붕괴되어 오직 북문의 아취형 문루 일부만 남아 있게 되었으며, 수영 영사(營舍)로 사용되었던 건물들도 대부분 허물어졌다. 1950년대말까지 오천면사무소와 오천초등학교 교사로 일부 사용하였던 건물도 차례로 허물었고 현재 한두 채만이 보존되어 동문 쪽 성곽 안에 이전 복원해 놓았다. 성내의 호지(濠池)도 모두 메워져 현재 그 터전 위에 새로 지은 우체국과 농협 건물이 자리하고 있으며, 토성(土城)으로 이루어진 동편 성곽과 서편 성곽이 그대로 남아 있는데, 석성(石城)으로 이루어진 북부 성곽은 형태가 보존되어 있던 아취형의 북문에 잇달아 최근에 일부를 복원하였다.

지금은 자취가 사라진 영보정 대신에 우거진 소나무 아래 고소대(姑蘇臺)와 강선암(降仙巖)의 아름다운 절경이 멀리 상사봉과 마주하고 있어서 올라서 보는 이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고소대 위에서 다시 고쳐 쌓은 산성을 둘러보고 옛 수영의 위용을 더듬으며 감회에 젖는 것은 오천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마음이다. (권영민)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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