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학 대사전

책머리에

 

1_문학 작품

1.

국문 시 / 일본어 시

2. 소설

3. 산문

 

2_미술 작품

1. 자화상 및 초상

2. 도안 및 삽화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표지 /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주소록 /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사인판 / 박태원 결혼식 피로연 방명록 휘호 / 잡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 / 아동잡지 가톨릭소년표지 도안 / 김기림 시집 기상도표지 도안 / 단편소설 날개삽화 1 / 단편소설 날개삽화 2 / 단편소설 동해삽화 1, 2

3.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연재 삽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연재 삽화 1~연재 삽화 28

 

3_작품 속의 인명 및 작품명

 

4_이상의 삶과 문학

이상의 출생 / 이상의 성장 과정 /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 /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 다방 제비시절 / ‘구인회시절 /동경 시절

 

부록_이상의 사진 자료와 이상 연구 참고 문헌

 

[출판사 서평]

 

이상문학대사전李箱文學大事典은 올해 80주기를 맞는 이상이 남긴 모든 문학 예술적 자취를 사전식으로 망라하여 새롭게 정리한 책이다. , 한 권으로 만나는 이상의 문학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_문학 작품에서는 이상의 문학 작품(, 소설, 수필 및 산문)의 서지 사항과 그 내용에 대한 해설을 중심으로 꾸몄다. 이상은 희대의 천재 예술가로 평가된다. 어떤 사람은 그의 문학이 드러내고 있는 파격적인 기법으로 인해 그를 전위적 실험주의자로 지목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를 19세기를 거부한 반전통주의자였다고 지목한다. 한국문학의 모더니티의 문제성을 초극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문학이 보여주는 난해성에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상의 문학은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그 성격이 고정되는 것을 거부한다. 해마다 수많은 평문과 연구 논문이 이상 문학을 위해 발표되고 있지만, 그 관심과 새로운 접근에도 불구하고 이상 문학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상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자부하는 이 책이지만 이상 문학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2_미술 작품에서는 이상이 남긴 미술 작품에 대한 정리?소개로 꾸며졌다. 이상이 직접 그린 몇 편의 초상화, 이상이 도안한 잡지 표지화, 작품 속의 삽화 등을 복원하여 수록했다. 특히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신문 연재 당시 이상이 그린 삽화를 확대?복원하여, 연재 당시의 소설 원문의 내용을 통해 박태원이 소설 속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과 이상이 자신의 삽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내용이 어떤 관계였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화가를 꿈꾸었던 이상의 미술에 대한 열망과 함께 사물을 보는 이상의 독특한 시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3_작품 속의 인명 및 작품명에서는 이상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던 인명과 작품에 대한 조사 내용을 사전식으로 배열했다. 이상은 자신의 글 가운데에서 특이한 패러디의 방식으로 다른 문인의 이름이나 작품을 인유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기 문학의 세계와 대비하기 위해 다른 문인들의 작품들을 언급한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상 문학이 지니고 있는 특징적인 경향을 이해하는 데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서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4_이상의 삶과 문학에서는 이상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조사?공개하였다. 이 책에서 이상의 호적부 제적등본을 다시 공개했으며, 그 부친의 이름을 김영창’(김연창이라고 소개된 책이 많음)으로 바로잡았다. 이상의 경성고등공업학교 학적부를 통해 그가 건축학과 수석 졸업자였음을 공식 확인하였고, 1929년 일본인 중심의 조선건축회정회원으로 입회했던 사실도 자료를 통해 다시 밝혔다. 1936년 이상이 동경으로 떠난 날짜도 1024일로 새롭게 추정했으며, 그가 묵었던 동경 간다의 하숙집 주소도 동경 간다구 진보정 3정목 10-1번지 4로 확정해 놓았다.

부록_이상의 사진 자료와 이상 연구 참고 문헌에서는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추억의 가지가지를 공개한다. 이 사진첩은 1929년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국인 학생 17명을 위해 이상이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다. 이 사진첩의 구성과 편집을 보면 이상이 얼마나 조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상 연구에 참고해야 하는 중요 연구서와 자료를 목록화하여 추가했다.

 

이상의 모든 것-지은이 권영민의 책머리에중에서

이상의 짧은 생애는 삶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는 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의 개인적인 행적과 문단 활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기보다는 오히려 과장되거나 신비화되어 왔다. 특히 그의 문단 진출 과정, 특이한 행적과 여성 편력, 결핵과 동경에서의 죽음 등은 모두 일종의 일화처럼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상의 문학 텍스트 자체도 이러한 삶의 특징과 결부되어 잘못 해석되거나 왜곡 과장된 경우가 허다하다. 이상의 삶은 명확한 사실관계의 규명이 없이 어물쩍 넘어가거나 엉뚱하게 포장되면서 그가 살았던 삶 자체가 하나의 스캔들이 되고 말았다. 기왕의 연구자들이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자명해졌을 문학 텍스트마저도 엉뚱한 설명이 더해지고 해석이 과장되면서 애매모호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게 된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이상 문학은 그 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독해 작업도 없이 연구자나 평자의 자의적 해석에 이끌려 엉뚱한 의미로 과장되고 왜곡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모든 평가는 특이하게도 그의 천재성에 집중된다. 객관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이 천재성(?)으로 인하여 이상 문학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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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육필(肉筆) 원고

 

 

나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글을 쓴다. 글자판을 두드리면 컴퓨터 화면에 글자가 찍힌다. 내가 글자판을 잘못 눌러도 어지간한 낱말은 컴퓨터 자체 내에서 잘잘못을 가려내어 철자법에 맞춰준다. 간혹 잘못 쓴 부분이 생기거나 추가해야 할 내용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잘못된 부분을 지워버리고 다시 고쳐 쓰기가 아주 쉽다. 글의 분량도 금방 계산해주고 글자의 크기나 모양도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하니 그 편리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글쓰기가 모두 끝나면 원고를 파일 상태로 컴퓨터에 보관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컴퓨터를 켜고 그 파일을 열어볼 수 있다. 원고를 부탁해온 출판사 편집부에는 이메일로 파일을 전송하면 그만이다.

컴퓨터가 널리 이용되기 전에는 누구나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썼다. 원고지는 정방형의 칸을 일정하게 배열해 거기에 글자를 써넣도록 만든 용지이므로 글자 모양이나 글의 길이를 계산하기 쉽고 공백을 이용하여 글을 고쳐 쓰기도 편하다. 큰 신문사나 잡지사에서는 아예 자기네 전용으로 원고지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원고지에 글을 쓰는 방식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활판 인쇄가 널리 보급되면서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전부터 이미 원고지를 이용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출판 인쇄 작업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규격화된 원고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글쓰기에 알맞게 정해진 크기의 용지를 사용했다.

나도 당연히 글을 쓰면서 원고지 뭉치를 끼고 살았다. 학생시절에 썼던 리포트는 모두 원고지에 작성했다. 잉크와 펜으로 쓰던 원고가 만년필 글씨로 바뀌었고 편리한 볼펜이 동원되기도 했다. 내 대학 졸업논문은 펜글씨로 원고지에 썼고, 1980년대 초반에 제출했던 박사학위 논문도 모두 2백자 원고지 천 매 가까운 분량을 만년필로 원고지에 작성했다.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인쇄소에 부탁하여 나만을 위한 원고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다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원고지에 급한 글을 썼던 적도 있고, 밤늦도록 원고지를 책상 위에 펼쳐두고 마감날짜에 맞추기 위해 머리를 짜내기도 했다. 문단 초년생 시절 원고지에 글을 써내려가던 내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컴퓨터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원고지와 멀어졌다. 컴퓨터에 내 손 글씨를 모두 빼앗겨버린 셈이다. 나는 문학 연구 자료들을 쉽게 정리하고 보관하면서 컴퓨터의 편리함에 깊이 빠져들었다. 컴퓨터로 쓰는 글은 그 자체가 완성본처럼 그대로 남는다. 원고지에 글을 쓰던 때의 초고(草稿)가 컴퓨터에서는 사실상 사라진다. 글을 원고지에 쓰게 되면 당연히 초벌 원고가 남는다. 물론 초고 상태의 글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서 얼마든지 그 내용을 고치거나 바꿀 수가 있다. 글의 전체 흐름을 헤아리면서 초고를 손질하면 어느 정도 글이 정리된다. 나는 버릇처럼 이 초벌 원고를 다시 원고지에 깨끗이 베껴 쓰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리고 글을 완성 한 후에 남는 초벌 원고가 아까워서 한동안 그걸 책장 속에 보관했다. 초고는 글쓰기의 첫 단계에서 이루어졌던 생각의 발단을 그대로 간직하여 보여준다. 원고지 위에 어지럽게 고쳐 쓰거나 덧붙인 글귀를 보면 생각의 흐름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면서 보관했던 초벌 원고들을 모두 버려야 했고, 컴퓨터 사용의 편리함에 빠져들면서 초고의 소중함 자체마저 잊고 말았다. 컴퓨터 글쓰기는 생각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작업이다. 새로운 생각이나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전의 생각을 그대로 없애버리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글쓰기가 이루어지니 초고라는 것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내가 자료 조사를 하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우리 문인들의 원고지 글씨 가운데에는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 원고와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원고에 담긴 사연도 사연이지만 원고지의 칸을 메워나간 글씨 자체가 시인의 기품과 그 시 정신에 그대로 어울려서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료들이 다행히도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고 전란을 겪으면서도 온전히 보존된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소설가 채만식의 육필 원고와 시인 김수영의 육필 원고도 이미 영인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지금도 손으로 직접 원고를 쓰는 원로 문인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비평가 김윤식 선생은 그동안 백 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 엄청난 글들을 모두 원고지에 직접 쓰신 것으로 유명하다. 볼펜 글씨로 꾹꾹 눌러쓴 김 교수의 글은 잡지사 편집부에서는 늘 화제거리였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도 손 글씨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모두 썼고 지금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벌교에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의 전시실에 어린애 키만큼이나 높게 쌓여 있는 소설의 육필 원고를 보고는 모두가 입을 벌린다. 소설가 김 훈 선생은 연필 글씨가 유명하다. 그 독특하고도 품격이 느껴지는 글씨를 일반인들이 컴퓨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서체를 개방한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원로 시인 김남조 선생은 아예 컴퓨터를 모르고 살아오셨는데, 지금도 굵은 싸인펜을 잡고 원고를 쓰신다. 그 글씨에서 순정한 시 정신을 지켜 오신 영혼의 힘 같은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은 수천을 헤아린다. 이분들 가운데 손 글씨로 원고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아마도 대부분 컴퓨터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원고지 위에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를 만나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가끔 우리 문인들이 직접 손으로 써내려간 육필 원고를 모두 한자리에 모아둘 수는 없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일본이 자랑하는 여러 곳의 문학관에 가보면 가장 중요한 볼거리가 문인의 육필 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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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의 귀촉도그리고 소쩍새

 

  

초저녁부터 멀리 뒷산에서 소쩍새가 울어댄다. 소쩍다 소쩍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쩍 소쩍하기도 한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풍년이 들까를 헤아렸던 할머니 생각도 난다. 밤늦도록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가 한없이 처량하다. 나는 소쩍새 울음소리를 잘 알아들으면서도 소쩍새를 직접 본 적은 없다.

 

시인 서정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귀촉도라는 시가 있다. 시집 󰡔귀촉도(歸蜀途)󰡕(1948)의 표제작이다. 시의 제목인 귀촉도라는 한자어는 글자 그대로 풀이할 경우 ()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뜻이 될지 모르겠다. 시인 자신은 이 작품 말미에 두견이라고도 하고 소쩍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자규(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귀촉도그런 발음으로써 우는 것을 말한다라고 부기해 두고 있다.‘귀촉도라는 말을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것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쩍새를 두고 두견, 접동새, 자규 등의 별칭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소쩍새와 두견새는 그 종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 권오길이 찾은 발칙한 생물들>이라는 책을 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두견새는 뻐꾸기의 일종이라 녹음에 헹군 울음을 명랑하고 경쾌하게, 싱그럽고 구성지게 주로 낮에 노래하는데, 소쩍새는 올빼미를 닮은 놈으로 가슴에 사무치고 에는 가엽고 애처로운 울음을 야밤에 울어댄다는 것이다. 사전에서마저 두견이와 소쩍새를 뒤죽박죽 혼동하여 둘 다 두견이, 접동새, 귀촉도, 자규, 불여귀, 소쩍새로 섞어 적어 놓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책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두견이는 4월경에 동남아시아에서 우리나라로 날아와 번식하고 9월경에 남하하는 여름철새이다. 몸길이 약 28센티미터로 얼핏 보면 뻐꾸기를 빼닮았으나 몸집이 훨씬 작아 영어로 ‘little cuckoo’라 부른다. 맑고 경쾌한 뻐꾸기 울음에 비해서 두견이 소리는 매끄럽지 못하고 좀 둔탁한 편이지만, 수컷은 나뭇가지에서 날면서 "쿗쿗 쿄끼쿄쿄, 쿗쿗 쿄끼쿄쿄, 삐삐삐삐" 하고 재빠르고 멋들어지게 울어 댄다. 두견이 노랫소리는 결코 가엽고 슬프거나 가련하고 애잔하지 않으며 되레 경쾌하고 상쾌한 기분까지 든다. 소쩍새도 여름철새이다. 몸길이 20센티미터 정도로 올빼밋과에 속한다. 우리나라에는 4월쯤에 날아와 10월까지 머물러 번식한다. 회갈색 바탕에 검정과 흰색의 얼룩무늬가 나 있어 침엽수의 수피(樹皮)와 비슷하게 위장하고, 사람 낌새를 채면 기겁하여 숨기에 역시나 관찰하기 어렵다. 깜깜한 야밤에 "춋쵸, 촛쵸, 소쩍", "촛촛쵸, 촛촛쵸, 소쩍다, 소쩍다" 하고 운다. 우는 새의 입속이 핏빛처럼 붉어서 옛사람들은 피를 토하면서 죽을 때까지 운다고 믿었다 

시인 서정주가 귀촉도를 처음 발표한 것은 1943년 잡지춘추(春秋)2호에서였다. 이 작품은 서정주의 시적 변모과정의 한 단계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三萬里).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三萬里).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목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귀촉도는 사랑하는 임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각 연마다 시적 정황을 바꾸어 그 깊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1연에서는 시적 화자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된 임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된 임과 이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피리 불고가는 길에 진달래 꽃비라고 묘사한 대목은 호사스런 상여(喪輿)의 행렬을 떠올리게 한다. 슬픔을 억제하기 위한 시적 장치에 불과하다.‘서역 삼만리라든지 파촉 삼만리라는 거리는 시적 화자가 심정적으로 느끼는 죽은 임과의 아득한 거리를 강조하기 위해 동원한 말이다. 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난 것이다. 2연은 임을 떠나보내면서 시적 화자가 느끼게 된 회한(悔恨)의 정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이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은 누구에게도 아름답게 보일 필요가 없다. 그 머리를 은장도 베어내어 그것으로 메투리를 만들어 임이 신고 가도록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임에게 모든 것을 다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사무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연은 밤이 늦도록 울어내는 소쩍새의 울음을 그려낸다. 밤하늘에는 굽이굽이 은하수가 흐르는데 소쩍새는 목이 터지도록 울어댄다. 그런데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라는 마지막 행에서 소쩍새의 실체가 드러난다. 바로 하늘 끝으로 홀로 가신 임과 소쩍새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쩍새는 시인 서정주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전설로 태어난 셈이다. 죽은 임은 소쩍새가 되어 그 이별을 슬퍼하며 밤새도록 울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서정주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시인 오장환의 시 귀촉도(歸蜀途)와 특이한 상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장환은 1941귀촉도라는 시를 잡지춘추(1941. 4)에 발표한 바 있는데, 여기에는 정주(廷柱)에 주는 시라는 부제를 달았다. 오장환이 일제 말기에 친구인 서정주를 생각하며 쓴 이 시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방황하던 청춘과 그 망향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의 텍스트에 파촉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막막한 거리감은 앞서 소개한 서정주의 귀촉도에서 이승과 저승의 거리로 바뀌어 그려진 바 있다.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

뜸부기 울음 우는 논두렁의 어둔 밤에서

길라래비 날려 보는 외방 젊은이,

가슴에 깃든 꿈은 나래 접고 기다리는가.

 

흙먼지 자욱히 이는 장거리에

허리끈 끄르고, 대님 끄르고, 끝끝내 옷고름 떼고,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혼자 앉아서

창 넘에 뜨는 달, 상현달 바라다보면 물결은 이랑이랑

먼 바다의 향기를 품고,

파촉의 인주(印朱)빛 노을은, 차차로, 더워지는 눈시울 안에

 

풀섶마다 소해자(小孩子)의 관들이 널려 있는 뙤의 땅에는

너를 기두리는 일금 칠십원야(一金七十圓也)의 쌀러리와 죄그만 STOOL이 하나

집을 떠나고 권속마저 뿌리이치고,

장안 술 하룻밤에 마시려 해도

그거사 안 되지라요, 그거사 안 되지라요.

 

파촉으로 가는 길은

서역 하늘 밑.

둘러보는 네 웃음은 용천 병()의 꽃피는 울음

굳이 서서 웃는 검은 하늘에

상기도, 날지 않는 너의 꿈은 새벽별모양,

아 새벽별모양 빤작일 수 있는 것일까.

 

오장환의 귀촉도에 대해 서정주는 어떻게 화답하고 싶었을까? 오장환이 느끼고 있던 현실적 고뇌를 서정주는 어떻게 해석하고 싶었을까? 이런 질문은 두 시인의 오랜 우정과 문학적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장환의 귀촉도를 두고 시인 서정주가 다시 귀촉도로 화답했다는 것은 주목해 볼 만하다.

서정주의 귀촉도는 전통적 정서의 세계를 매개로 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 이 시에서 은하에 맞닿는 시적 공간의 폭은 한의 정서의 폭과 깊이에 서로 조응한다. 시인은 한이 서려 있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한의 의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특히 원형적 심상이라고 명명할 만한 요소들이 시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이별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도 소쩍새 울음소리가 멀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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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

 

내가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을 준비하던 중에 하인즈 교수가 연락을 해 왔다. 미국 뉴욕주립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하인즈 펜클(Heinz Insu Fenkl) 교수는 무산 조오현의 시조에 빠져 있었다. <절간 이야기>의 번역 작업이 마무리 되고 있는데 원저자인 조오현 스님의 서문을 꼭 실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하인즈 교수는 불교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으며 동양 사상이나 철학에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고 있다. 그가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읽고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우선 전 세계 시인들 가운데 선시(禪詩)를 직접 쓰고 있는 현역 시인으로 무산 스님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스님의 선시는 그 의미가 아주 깊은데도 쉽게 이해된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는 스님의 단시조 가운데 선정(禪定)의 세계를 그려낸 단시조 108편을 골라 번역하여 <For Nirvana (적멸을 위하여)>(컬럼비아대학 출판부)를 발간했다. 그리고 다시 두 권의 번역 작품집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 하나가 <절간 이야기>의 영역본이고 다른 하나는 스님의 <연시조집>이다.

하인즈 교수는 내가 방학에 한국에 나가게 되면 한번 스님께 부탁을 올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미국 출발 전 날 백담사 무금선원에 연락을 취했다. 지난해 식도암 수술을 받은 후 스님은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그대로 절간에 머물러 계셨다. 나는 한국에 도착하면 선원으로 큰스님을 찾아뵙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내가 백담사를 찾은 것은 지난 524일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난 뒤였다. 시자(侍者)가 나를 스님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스님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많이 야위신 모습이었지만 그 카랑카랑하신 음성은 여전하였다. 큰스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박사님은 언제까지 버클리 대학에서 가르치실 것인가요?’

당초에 약속이 2020년까지입니다. 그런데 내년까지만 하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나는 일년이라도 빨리 돌아와 큰스님 호쾌하신 선문답을 곁에서 자주 듣고 싶다고 했다. 스님은 그렇게 약속을 바꾸어도 되는 일인가를 내게 물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박사님 돌아오실 때까지는 살아 있을 겁니다. 의사도 한 3년은 문제없다고 하였으니.’

나는 큰스님의 음성으로는 앞으로 10년도 걱정이 없어 보이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인즈 교수가 부탁한 영역 <절간 이야기>의 서문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큰스님은 손을 내저었다.

그 책에 무슨 서문이 필요가 있나요? 그냥 엮어내라고 하세요.’

나는 그 말씀에 더는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뜨려하자 큰스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꼭 내 서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반갑게 하고 대답을 드리니 큰스님은 <절간 이야기> 가운데 일곱 번째 것을 서문으로 쓰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일곱 번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부분대로 하겠다고 인사를 드린 후 방을 나왔다.

내가 거처를 나오니 시자가 나를 따라오면서 큰스님이 오늘 아주 즐거우신 모습이라고 귀띔을 했다. 그리고는 걱정스럽게 내게 말했다.

벌써 석달 가까이 조석공양을 거의 못하시지요. 겨우 미음 조금 넘기시는데 요즘은 그것도 힘들어 하십니다.’

그러면서 큰스님 암 수술하신 부위의 식도가 거의 막혀서 음식을 삼키실 수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곡차(막걸리)로 입을 추기실 뿐이라면서 한숨을 쉬었다. 외부에서 식도로 관을 삽입해야 한다는데 큰스님은 그런 의사의 처치를 듣지 않으신다고 했다. 아무래도 큰스님이 걱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하룻밤 백담사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저녁 공양 끝나신 후에 잠깐 다시 큰스님을 뵈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자가 정해주는 방에 들어와 가방을 풀고 노트북을 꺼냈다. 컴퓨터에 보관되어 있는 파일 가운데 내가 엮었던 큰스님의 시전집 <적멸을 위하여>(문학사상사)를 열었다. 거기서 <절간 이야기>의 일곱 번째 이야기를 찾았다. 그것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임제스님의 법제자 관계(灌溪)스님은 임종하던 날 시자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앉아서 죽는 것도(좌탈坐脫) 진기할 것이 없고, 서서 죽는 것도(입망立亡) 신통치 않고, 거꾸로 서서 죽는 것도(도화到化) 그리 썩 감심(感心)이 안되니. 옳지! 나는 이렇게 가야겠다.”

하고 일어나 마당에 가서 잠시 서 있다가 한 발짝, 두 발짝, , , 다섯, 여섯, 일곱 발짝까지 걸음을 떼어놓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걸어가던 모양 그대로 죽었답니다.

이 일화를 우리 절 늙은 부목처사에게 했더니 부목처사는 뻐드렁니를 다 내어놓고

살아보니 이 세상에서 제일로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은 아무래도 죽는 날이 될 것 같니더.”

하고 빙시레 웃는 것이었습니다. - 절간 이야기7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읽고 나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 시자를 찾았다. 큰스님을 뵈어야겠다고 했더니 내일 아침에 뵐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 밤잠을 설치면서 설악 백담의 계곡 물소리를 들었다. 큰스님은 스스로 떠나실 날짜를 가늠하셨던 것일까? 다음날 아침 큰스님은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나에게 서울로 올라가라고만 하셨다. 밖에 병원의 응급차가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국 현대문단에서 선시조의 개척자가 되었던 무산 조오현 대종사는 2018526일 열반에 드셨다. 큰스님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을 그렇게 스스로 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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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풍속에 떠밀려 균형을 잃어가는 삶의 기로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와 방향을 찾기 위해 ‘문학’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해방 전후의 격변 속에서 한국사회의 지표가 되어주었던 작품들과, 보편적 삶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 비화들이 지금의 독자들에게 강건하고 올곧은 외침으로 다가선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탐방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과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권영민의 문학 콘서트> 강연 중에서 대중들과 함께 깊이 나누고 싶은 주제들을 선별하여 2부 12장으로 구성한 책이다.
윤동주의 원고 노트를 소중히 간직한 후배 덕분에 윤동주가 차가운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눈감은 후에나마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일본의 한국어 말살 정책으로 발표하지 못한 시들을 『청록집』으로 펴내면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출발을 알렸던 박목월과 조지훈의 첫 만남, 친우의 천재적 예술성과 고뇌를 이해하고 이를 시와 그림으로 탄생시킨 이상과 구본웅의 우정, 최소한의 삶을 꾸려가되 최대한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예술의 역할을 강조했던 한용운의 기개 등, 그동안 자세히 알지 못했던 작품 속 뒷이야기들을 통해 삶과 문학의 긴밀한 연결고리들을 풀어냈다.
가을비 내리던 날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정지용의 『백록담』 초판본을 구한 이야기, 이상의 소설 「실화」 속 카페 NOVA를 찾아 신주쿠를 헤맨 이야기 등 작가의 생생한 체험이 읽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상상을 선물한다.
“오직 인간의 본질적인 표현이며, 그 새로운 창조”인 문학 안에서 공감을 이룸으로써 문학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그 가치를 깨닫고 나면, 인생의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한 저마다의 새로운 좌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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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한국학센터에서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의 하나로 2015320일 버클리대학 구내 데이빗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서 <무산 조오현 그리고 영혼의 울림>이라는 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의 특별 초대손님은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다.

조오현 큰스님은 대한 불교 조계종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으로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머물고 있다. 1930년경에 태어나 절간에서 80여년을 살아오신 선승으로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이다. 일찍이 시조에 관심을 두어 1960년대 후반부터 시조 창작을 해 오면서 () 시조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였다. 큰스님의 시조집 <아득한 성자>는 한국에서 많은 독자층의 사랑을 받았다. 큰스님의 시조 작품들은 권영민 교수에 의해 모두 <조오현 시전집 적멸을 위하여>(문학사상사)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이 행사에서 하버드대학 데이빗 맥캔 교수의 <시조한 무엇인가>라는 강연과 뉴욕 주립대학 뉴 팔츠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의 <무산 조오현의 () 시조>라는 주제 강연을 했으며, 초대손님 조오현 스님과 버클리대학 권영민 교수가 <영혼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그리고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시조시인 홍성란 씨, 박영희 씨, 강병천 씨와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낭송했다. 이 행사의 마무리는 한국에서 초청되어 온 한국 전통 가곡 무형문화재 전수자 이유경 명창의 가곡창과 시조창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대금 연주가 고진호씨와 가야금 연주가 홍세린 씨가 함께 공연했다.

이날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는 180석의 자리에 청중이 빈틈없이 몰렸다. 청중석에서 대담을 지켜본 미국의 계관 시인 로버트 하스(Robert Hass) 교수는 오늘 큰스님은 물에 비친 달을 퍼 올릴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큰스님의 말씀 속에서 삶의 지혜와 큰 가르침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많은 교민들이 긴 세월의 이민생활에서 처음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버클리대학 학생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며 취업난 등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

  다음에서 조오현 큰스님과 권영민 교수가 나눈 대담 전문을 소개한다.

 

권영민 교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버클리대학 동아시아어문화과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권영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설악무산 조오현 영혼의 울림>이라는 제목의 아주 특별한 행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행사는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가 세계의 무대에서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기획한 프로그램 중의 하나입니다.

설악무산(雪嶽霧山) 조오현 큰스님은 80년 동안 산중 절간에서 생활해 오신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조계종 종립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입니다. 설악무산 큰스님은 1960년대부터 시조 창작을 해왔고, 몇 권의 시조집을 내기도 하였지요. 최근 뉴욕주립대학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World Literature Today> <Buddhist Poetry> 등의 여러 잡지를 통해 큰스님의 시조를 번역 소개하여 살아있는 선시(禪詩)’로 주목받으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오늘 설악무산 조오현 큰스님과의 대담을 가지기 전에 제가 무산 큰스님을 처음 만났던 일을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벌써 15년 전의 일입니다.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이 열렸던 해였으니까요. 저는 제1회 만해축전이 열리는 백담사를 찾았습니다.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저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지요. 백담사는 한용운이 3.1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두 해 넘게 투옥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다시 찾은 곳인데, 여기서 시집 <님의 침묵>(1926)의 시들을 쓴 곳으로 유명합니다. 시집 <님의 침묵>의 시들은 지금까지도 그 창작 배경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 깊은 계곡의 작은 산사가 한국문학 최고의 문제작을 만들어낸 문학적 성소(聖所)가 되었습니다.

백담사 경내를 들어서면서 저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노스님을 한 분을 처음 뵙게 되었지요. 허름한 승려복의 그 노스님은 마치 만해 한용운의 형상처럼 그윽했습니다. 그 노스님은 일행과 함께 있던 저에게 합장하며 무얼하는 분이신가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문학평론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답하면서 머리를 숙였지요. 그런데 이 스님은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 계신 분이구먼. 문학평론이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뵙는 스님인데 이런 식의 대화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답니다.

평론이라는 것은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그물질이지요. 바탕 자체가 없는 글이 되기 쉬우니까요.”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비평활동을 그래도 수십년간 해오면서 이런저런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노스님은 그것을 허망한 그물질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글이란 자기 혼이 담겨야 제 글이지요. 그런데 요즘 평론이라는 것은 대개 남이 만들어 놓은 방법론을 빌어다가 다른 사람이 쓴 작품 가지고 왈가왈부 시시비비만 하지요. 그러니 허망할 밖에요.”

노스님의 이어지는 말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제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그 노스님은 손가락으로 백담 계곡을 가리키면서 내게 다시 한 마디를 더 하셨어요.

옛날이야기가 있어요. 저 계곡의 깊은 못에 커다란 물고기가 간밤 폭포를 타고 오르면서 용이 되어 승천했지요. 그런데 거기 무어가 남아 있을 거라면서 사람들은 그 물속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는 이미 용이 되어 등천했는데 그물에 무어가 걸리겠습니까?”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면서 그냥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고는 내 손을 한번 잡아주시고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절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노스님의 말씀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저 자신이 해 오고 있는 문학공부의 허점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 같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만 기가 죽었습니다.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만 산중에 가득했지요. 저는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설악의 높은 봉우리에 안개구름이 띠를 둘렀습니다. 설악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 노스님이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일행 가운데 한분이 가만히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설악산 신흥사의 회주이신 무산 조오현 스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또한번 화들짝 놀랐습니다.

큰스님과의 이 첫 만남이 큰 인연이 되어 저는 가끔 백담사를 찾습니다. 지금은 인제에서 내설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속도로처럼 정비되어 있지만 백담 계곡은 여전히 깊지요. 거기에 만해 한용운을 닮은 큰스님이 지켜 계시고 만해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서 백담 계곡을 흘러넘칩니다. 여러분, 오늘 이곳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 제가 백담사에서 처음 만나 뵈었던 바로 그 노스님,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 앉아 계십니다. 무산 큰스님을 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큰스님을 박수로 환영하여 주십시오.

 

무산 큰스님.

큰스님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개인적으로 아주 큰 영광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산중 절간에서 생활하시는 분이신데, 먼 여행길에 오르시어 우리 버클리대학을 찾아 주셨으니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스님이라고 제가 선전을 좀 했습니다. 큰스님의 법어를 듣기 위해 우리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많이 오셨고, 이 지역에 사시는 교민들께서도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의 주관자로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조오현 스님

권영민 교수님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산중 늙은 중을 세계적인 명문 버클리대학에 초청해 주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이 자리에 나와주신 버클리대학 교수님들, 여러 학생들 그리고 함께 참여해주신 교민 여러분들께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의 관계자 여러분들이 따뜻하게 환대하여 주신 점에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권영민 교수

무산 큰스님.

저는 큰스님을 백담사에서 가끔 뵙고 덕담도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여쭙기는 처음입니다. 여러 가지 여쭙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 먼저 큰스님의 절간 생활은 어떠하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절간에서 큰스님은 하루의 일과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아마도 여기 오신 분들이 모두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어디 가서 입을 열지 않으면 본전은 하는데, 입을 열면 그만 손해를 봅니다. 선승의 법어라고 하니깐 잔뜩 기대를 갖고 오는데, 한참 들어보면 아무 내용 없는 말만 하니깐 실망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손해를 보더라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중의 절간 생활이라고 하지만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남의 비위 맞출 일 있으면 비위 맞춰주고, 아첨할 일 있으면 아첨하고, 야단칠 일이 있으면 야단치고, 뭐 이러다 보면 하루해가 다 갑니다. 이것이 나의 하루 일과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러시군요. 절간의 생활이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본선원의 조실스님이시니까, 큰스님의 가르침 아래 많은 선승들이 스님의 문정(門庭)에 모여 참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도 자주 큰스님을 찾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신다면, 큰스님께서 참선은 언제 어떻게 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방금 교수님이 내 절간 생활과 하루 일과를 물었고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하루 일과가 바로 나의 참선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세계적인 명문대학에 와서 강의하실 자격이 없어요. 교수님과 내가 이렇게 마주 앉아 서로 한 번 쳐다보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한 것이고, 교수님은 듣고 싶은 말 다 들은 것입니다. 이 외에 따로 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영민 교수

아무래도 스님 말씀을 알아듣기 어려운데요. 처음부터........

 

조오현 스님

나는 어렵게 말하지 않았어요. 교수님이 어렵게 듣고 있습니다.

선은 말과 글이 아닙니다. 선 학자들이 선을 말과 글로 만들어 놓았지요. 그 말과 글을 따라가면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결박입니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은 털이 없는데 토끼 뿔 거북이 털 이야기를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한 번 바라보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이 다 마음입니다. 이쯤에서 그만 합시다.

 

권영민 교수

, 알겠습니다.

방금 큰스님께서 일체유심조라 하시니 큰스님의 시조 마음 하나가 생각납니다. 제가 한번 읊어 보겠습니다.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다 놓아도

 

빛깔도 모양도

향기도 없는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더라

 

큰스님,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맘이 무엇이길래 천하장수도 들지도 놓지도 못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일이 꼬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때가 많습니다.

 

조오현 스님

교수님, 그것을 내가 알면 미국 말도 못하는 늙은이가 왜 여기 앉아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겠습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경에 보면, 마음의 근원은 원래 고요적적 아주 담적하다고 합니다. 빛깔도 향기도 모양도 없이 이름 지을 수도 그림 그릴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늘이 덮지 못하고 땅이 싣지 못한다 합니다. 실로 만법을 구비하여 갖추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옛 사람들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거울은 맑고 비어서 능히 만상을 비춰 보입니다. 거울에 티끌이 끼인다 하여 그 밝음이 근본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를 벗기면 다시 맑아집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 했습니다. 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영민 교수

오늘 큰스님께서 우리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제 큰스님의 시조에 대한 말씀을 여쭙겠습니다. 한국의 전통시가인 시조를 선()의 세계와 연결시킨 것이 스님의 선시조라고 앞서 하인즈 펜클 교수가 말씀을 했습니다. 큰스님은 선과 시를 어떻게 구분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선과 시는 시선일미(詩禪一味)’라 하여 시와 선이 한 가지 맛이라고 합니다. 시와 선은 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 맛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禪而無禪便是詩),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詩而無詩禪儼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금나라 때의 시인이자 사가(史家)였던 원호문(元好問)은 시는 선객에게 비단을 깔아준 것(詩爲禪客添花錦)이요, 선은 시인에게 절옥도(禪詩詩家切玉刀)라 했습니다. 다 좋은 말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은 나무의 곧은 결이고 시는 나무의 옹이 점박이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은 내가 나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고 시는 인생에 대한 물음에 답이라고 할까요. 설혹 시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언어를 만나는 그 순간 언어의 때가 묻어 버렸기 때문에 시는 마음을 조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첨언하면 마음에 옹이가 박혀 점박이 결로 나타나는 것이 시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무런 작의가 없다고 불가사의한 무작묘용(無作妙用)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선시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비유하면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으면 맑은 호수에도 똑같은 하늘의 달그림자가 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달그림자를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대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건져내는 그 순간 달그림자는 부서지고 맙니다. 결국 시는 언어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무작묘용도 다만 말일 뿐입니다.

권교수님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이시며 40년 넘게 비평활동을 하셨습니다. 내 논리에 공감을 하십니까?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물론 큰스님의 논리에 공감합니다.

 

조오현 스님

중국의 시성 두보(杜甫)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나는 누굴 놀라게 하기 위해 시조를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시조를 하인즈 교수는 선시조라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나는 내 작품을 굳이 선시조니 그냥 시조니 그런 구분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교수님도 내 시조를 선시조라고 봅니까. 평론가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하신다면 말입니다.

 

 

권영민 교수

저는 하인즈 교수님 견해를 지지합니다. 옛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시언지(詩言志)’라고 했듯이 스님도 시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시는 시를 쓴 그 시인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이 말씀은 시를 인간 정서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정의한 서양의 시인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큰스님은 평생을 참선수행 해오신 선사이시니 큰스님의 시()는 자연스럽게 선심(禪心)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외면하다시피 하는 시조에 큰스님께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나더러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시조를 고집하느냐고 하셨는데 교수님은 한국 시조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제 내가 질문을 좀 하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에 답만 하다 보니 오늘 내가 미국에 와서 청문회에 출석한 것 같아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십니다. 귀찮은 질문이라도 답변을 해 주셔야 합니다.

큰스님께서 제게 물으시니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시조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노래해온 시가 형식입니다. 한국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한국인의 말로서 그 형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노래해온 소넷이라는 단구의 시 형식이 있고, 중국 사람들은 단형의 절구(絶句)’를 즐겨 노래해 왔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하이쿠라는 짧은 시가 형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 형식과 더불어 한국에는 시조라는 3장 형식의 시가 있었던 것이지요. 한국인들은 시조를 널리 사랑했습니다.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촌부(村夫)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시조를 한 수 정도는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람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주는 것이 시조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한국 시조의 전래과정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서양의 소넷’, 중국의 절구’, 일본의 하이쿠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잘 모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민족인들 원()과 한()이 없는 민족이 있었을까마는 우리 조상만큼 원과 한이 많은 민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 모르지만 하늘에는 잔별이 많고 우리네 가슴에는 수심도 많다는 노래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들으면 잊지 않고 곧잘 흥얼거린다는 그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시조도 언제 누가 그 형식을 만들었는지 나는 모릅니다만 시조에는 인간살이의 희비애락이랄까 우비고뇌라 할까 그런 애달픈 가락이 사람을 사무치게 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국 시의 근원은 시조이고 시조는 한국인들의 영혼의 모음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는 시조 한 수 음미해 보는 것이 시조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시조를 한국 시의 근원이고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라고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조선 왕조의 위업을 쌓은 이방원 즉 태종이 고려의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쓴 시조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구절로 시작되지요. 이 시조를 들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자신의 변함없는 지조를 드러내기 위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시조를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시조를 가지고 서로 묻고 답한 것인데 두 편의 시조가 시조를 쓴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좋아하는 옛시조 한두 편 읊어주세요.

 

조오현 스님

사실 나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 조선 중종 임금 시절(1488~1544)에 살다간 시인 황진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권영민 교수

시간 많이 있습니다. 시조하면 황진이를 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조오현 스님

황진이는 조선 시대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이웃 총각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혼자 짝사랑하다가 죽었답니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그만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황진이가 자기의 속적삼과 꽃신을 얹어주니 상여가 비로소 움직였답니다. 그 후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여인의 아름다움은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일 수 있다고 했지요. 황진이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황진이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수많은 문인 석학들과 교유했는데 호협한 기개도 있어서 스스로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황진이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이름만큼 황진이의 생애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황진이 시조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권영민 교수

. 조금 알고 있습니다.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사모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진이는 화담이 사는 초당을 찾아 거문고를 타고 노래도 부르고 당시(唐詩)도 배우며 고담준론을 즐기곤 했었다지요?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시조가 유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황진이의 시조를 좋아하신다니 한 수 소개하여 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나는 황진이가 쓴 시조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황진이가 30년이나 면벽 수도했던 승려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나서 지은 시조입니다. 지족선사를 찾아간 황진이가 그 앞에서 유혹하자 부처가 돌아앉아 버렸다는 겁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덩어리가 되어 뒹굴었지요. 나중에 정신을 차린 지족선사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는 황진이 곁을 떠납니다. 그때 황진이가 떠나가는 지족선사를 향해 노래부른 시조 한 수를 읊어 보겠습니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여기서 청산은 황진이이고 녹수는 지족선사입니다. 황진이의 마음은 청산처럼 변치 않았는데 지족선사의 마음은 녹수처럼 흘러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두고 떠났다고 가슴 아파하는 그녀의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들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지족선사도 그냥 청산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버립니다. 내가 만약 그때 지족선사였다면 내가 청산이 되고 황진이가 녹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 시조에 그런 사연이 얽혀 있었군요.

 

조오현 스님 

모두 전해오는 이야기이지요.

황진이가 당시 최고의 명창 이사종과 함께 살다가 헤어진 후에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도 아주 유명합니다. 그 시조를 음미해 보면 부처되는 것보다 그녀와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조를 읊어 보겠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오늘까지 여인의 속마음을 이렇게 절절하게 보여준 사랑시가 없다고들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절창의 시조입니다.

이왕 황진이 시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황진이가 죽은 뒤에 태어난 백호 임제(林悌, 1549~1587)가 황진이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를 하나 더 소개해 보겠습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 임제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던 길에 송도를 지나게 되었지요. 임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명기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한잔 술을 따라놓고 통곡하면서 이 시조를 노래했답니다. 그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어요. 임제가 평양에 도착해보니 파면장이 날라왔어요. 사대부의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그를 파직시켰다는 겁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도 전에 한국에는 이미 이런 문학과 풍류가 있었습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옛시조의 의미를 좀더 깊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큰스님께서 발표하신 시조에 대해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는 스님의 모든 시조를 한데 모은 <적멸을 위하여>를 한 권씩 나누어 드리려고 저희가 한국의 문학사상사에 특별 주문하여 밖에 쌓아놓았습니다.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번역한 작품집도 함께 있습니다.

 

조오현 스님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졸작 허수아비를 읽어 보겠습니다.

 

허수아비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섰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허수아비>라는 시조를 들어보니 무욕청정하게 사시는 스님의 자화상이 무슨 영상처럼 선명합니다. 정말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곳 버클리 대학에는 세계적인 학자들과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허수아비의 그 텅 빈 하늘까지도 끌어안는 지혜로운 말씀을 한 가지 더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교수님 말씀과 같이 세계적인 학자님들 우수한 학생들이 죽을 일만 남은 산중 늙은이의 말을 들어 무엇 하겠습니까? 이분들은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들입니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사서삼경이나 팔만대장경도 다 압니다. 요즘은 인터넷인가 뭔가 하는 시대라 잠시 검색하면 알게 되어 있습니다.

교수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진리가 소음(騷音)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숲에서 우는 새 울음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 저 바다의 파도와 물빛 해조음 소리에 귀를 기울일지언정 옛 성현들의 말씀에 특히 종교인의 설교를 귀담아 듣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시끄럽다 이겁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새울음, 개울물 흐르는 소리, 파도소리 이 모든 소리가 진리의 원음이니까요. 내가 말을 안 하면 본전이라도 하지만 입을 열면 손해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 까닭도 거기 있습니다.

중국의 어떤 고서에 말을 안 하기가 제일 어렵다 했습니다. 요즘 나는 그 말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권영민 교수

수년 전에 큰스님께서는 절간에 부처 없다고 신도들 앞에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 법문이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간에 부처가 없다면 큰스님께서 평생을 믿고 의지해 오신 절대존자인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요?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내가 절간에 부처 없다고 한 것은 한국 불교가 아직도 기복(祈福) 불교 중심이라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기복 불교를 버리자고 한 소립니다.

교수님은 지금 절대존자는 어디 계시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인류에는 절대존자가 없습니다. 소위 부처님이라는 이름의 석가모니도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한 인간으로 팔십년 살다가 한 인간으로 죽었습니다. 그를 받드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의 가르침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의 가르침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등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존자는 아닙니다.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권영민 교수님 자신이고 맥켄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맥켄 교수님 자기 자신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모르고 있는 데 있습니다. 하루속히 자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내가 있음으로 존재합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절대존자임을 자각하면 모든 사람들 한 분 한 분이 다 절대존자임을 알고 받들게 됩니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49년간 설명하고 갔습니다. 이 깨달음이 그의 가르침 중에 핵심입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모두가 귀담아 듣고 감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여론 조사한 것을 어느 신문에서 보았는데 한국 국민의 70%가 미국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미국에 대한 인상은 어떠신지요?

 

조오현 스님

미국에 대한 인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말만 합니다. 미국이 오랫동안 우방국으로 한국을 도와 한국인의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선교사를 통해 먹을 것을 주고 경제개발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해 항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그 지긋지긋한 빈곤에서 벗어나 세계 10대 무역국이 된 것은 미국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도 깊이 고민해 볼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좀 냉정하게 비판하면, 어느 나라나 국익을 위해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미국은 미국중심주의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핵과 같은 살상무기를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라 합니다. 총기사고가 자주 일어나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는 살상무기를 만드는 그 막대한 돈으로 기독교의 복음사업에 사용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혼자 해 봅니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1231년 몽골족이 한국의 옛 이름인 고려에 쳐들어와 양민을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는 전쟁을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그때 고려는 적을 막을 총칼 등 무기를 만들지 않고 불경을 경판에 새겼습니다. 부처님의 생명존중사상으로 전쟁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경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팔만대장경입니다.

미국은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이니까 기독교의 정신을 생활화한다면 살상무기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미국이 인류평화와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핵을 폐기처분한다면 한반도를 위협하는 북한도 핵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핵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 등 다른 나라들도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사실상 핵은 인류의 재앙의 근원입니다. 지금 핵을 폐기하지 않으면 백 년 못 가서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핵 폐기야 말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며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대역사라 할 것입니다. 미국은 그런 능력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정신적 기반도 갖추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핵을 폐기하면 영원한 진리의 몸을 얻을 것입니다. 인류를 구한 구세주가 될 것입니다. 크게 버리면 크게 얻습니다. 미국이 세계 제일 강국답게 크게 한 번 버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뜻에서 평화의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에서 가지고 오신 죽비竹篦를 크게 세 번 치시고 합장하셨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아마 이 자리를 설악산 선방(禪房)으로 아시고 허공이 찢어지는 죽비(竹篦)를 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학생들과 교민들에게는 죽비 대신 마지막으로 축원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하지만 축원 같은 것 대신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미국에 와서 자기네 전통시가인 하이쿠라는 것을 널리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의 교과서에도 하이쿠가 수록되어 있다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민들은 시조를 흘러간 유행가로 사대부의 음풍영월로 생각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하버드대학 맥켄 교수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영어시조운동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습니다. 시조는 흘러간 유행가가 아닙니다.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조상 대대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모든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이 소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이 소리가 있는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시조는 한국인의 맥박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순신 장군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라는 시조 한 수로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6. 25 전란 중에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나온다.’라고 새로운 희망을 시조로 읊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맹서코 통일과 번영 이루고야 말리라.’ 라면서 자신의 포부를 시조로 풀어내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기 전에 19821223일 청주감옥에서 나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라고 읊은 시조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그 어른은 그 시조대로 자유의 종을 쳤습니다.

제가 이곳 여행을 결정하면서 한국에서 시조를 잘 짓는 홍성란 시인과 박영희·강병천 두 분 시인을 말동무 삼아 모시고 왔습니다. 백담사 무금선원 영진 스님도 함께 와 있습니다. 모두 시조를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주 부르는 이은상의 가고파」 「성불사의 밤와 같은 가곡은 모두 시조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동안은 바쁜 삶에 여유가 없어서였다고 하겠지만, 저는 이제부터 우리 시조를 사랑하고 노래하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이민 생활에 고생하는 교민들에게 축원을 드리지 못하니 죄송합니다.

 

권영민 교수

이제 말씀을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걸어 다니는 허깨비라 했다 합니다. 나도 허깨비가 되고 싶었으나 허깨비는 못되고 제자리걸음만 걷는 허수아비입니다.

감사합니다.

 

권영민 교수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신 무산 조오현 큰스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2015.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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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4일에 개최되었던 광복70주년 세계한국학대회 기조강연 내용 전문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현황과 그 전망

 

 

안녕하십니까?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주최하고 외교부와 광복70년 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2015년 세계한국학대회의 기조강연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행사는 세계 각 지역의 한국학 연구 현황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이에 근거하여 한국학의 새로운 방향과 그 전망을 모색하고자 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이 뜻깊은 기회를 만들어주신 한국국제교류단에 고마움을 표하며 이 자리에 함께 참여해 주신 세계 각국의 여러 교수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국학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 연구의 영역에서 한국에 대한 연구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번 세계한국학대회는 언어 문학과 역사 철학 등의 인문학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학의 연구 방향 자체가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여 문학과 역사 등으로 확대되어 왔고, 근래에는 정치 경제 등을 비롯한 여러 분야로 그 관심 영역이 넓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변화와 발전

한국학은 동양학 또는 동아시아 연구에서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비해 그 역사가 아주 짧습니다. 역사가 오래지 않은 만큼 그 제도적 기반도 허약하고 연구 인력도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한국이 서구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당시 한국에 관심을 가졌던 서양인들은 대개가 종교활동을 위해 한국을 찾아온 선교사들이거나 정치 외교 분야의 관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입국하여 교회를 세우고 학교와 병원도 건립하여 한국 사회에 서구의 문물제도를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 거기서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를 쓰고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서구인들에게 심어주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한국학 연구의 출발은 이들의 저술 활동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서구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식민지 조선을 경영했고, ‘조선 연구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조사 연구를 시행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 방식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본적 식민주의의 담론 공간 속에서 일정한 성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은 전문 연구자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대로 식민지 조선을 그려냈고 조선인들에 대해 기록했으며, 그 자신들의 조사 연구 결과를 실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합리화하고자 했습니다. 일본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반식민주의 운동과 투쟁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이 이른바 문화적 민족주의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주의적 접근방법에 저항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대응 담론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동서 열강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남북한 분단 상황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유엔을 중심으로 서구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의 역사 문화와 한국인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역별로 그 경로가 복잡합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한국학은 한국전쟁 이후 등장한 한국 전문가들과 미국에 유학했던 한국의 전문 지식인들에 의해 그 기초가 만들어졌고, 1960년대 중반 이후 평화봉사단의 활동을 통해 그 기반이 확대되면서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평화봉사단출신 학자의 대거 등장은 한국학이 미국에서 지역연구의 한 분야로서 그 독자성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이들이 주도해온 폭넓은 교육과 연구,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한 학문적 계승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 지역에서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경우처럼 한국 연구의 독자적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구소련시대에 동구권에서 이루어진 한국 연구를 기반으로 그 방향이 새롭게 전환된 지역도 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 가운데 중국의 경우는 개방화 이후 한국과의 적극적인 학술교류를 통해 한국학의 영역이 크게 확대 발전하였습니다.

세계 각국의 여러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학 연구와 교육은 1991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설립 이후 해외 한국학 분야에 대한 지원 사업을 확대하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해 한국학 분야의 교수직 설치 기금을 지원하였고, 학문 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장학 지원도 지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학술교류 사업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러한 꾸준한 지원 정책에 따라 세계 각국의 중요 대학들도 한국학연구소를 설치하고 한국학 강좌를 개설하면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적극 표명하였습니다. 오늘날 해외 한국학의 확대와 그 발전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추진해온 지원 사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학의 연구의 과제와 전망

한국학 연구는 그동안 꾸준히 확대 발전되어 왔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학 연구를 위한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전문가를 제대로 키우지 않고서는 한국학의 발전과 그 세계적 확대를 말할 수 없습니다. 전문 인력이 부족하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어렵고 제대로 된 성과를 얻기도 힘듭니다. 더구나 한국학 연구에 뜻을 두고 있는 학문 후속 세대의 양성도 여전히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한국학 연구에서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 각국의 주요 대학에서 한국학 강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확대해야만 합니다. 대학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고정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연구와 교육에 전념할 수 있어야만 한국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세계 각국의 여러 중요 대학에 한국학 강좌의 개설을 위해 재정을 지원했습니다. 앞으로 이 같은 사업에 한국의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연구를 위한 가칭 <해외 한국학 연구 기금> 같은 것을 제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한국학 연구를 더욱 활성화하고 그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학술교류를 촉진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은 국내 학계의 다양한 연구 성과를 곧바로 접하기 어렵고 그 연구 내용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내외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학술 정보를 교환하고 연구 내용에 대해 활발하게 토의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고 이를 네트워크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연구의 주축이 되고 있는 중국학이나 일본학 분야와의 학문적인 접촉과 교류도 더욱 활성화해야 합니다. 한국학 연구의 성과가 일본학과 중국학의 경우와 서로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만, 동아시아 연구에서 각 지역 연구의 상호 관련성이 더욱 강조되고 상대적으로 한국학 연구의 위상도 제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속의 한국은 그 국가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한국의 언어와 역사, 사회와 문화 전반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과거의 인식에서 벗어나 한국과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파급되기 시작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기가 커지고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관심이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학의 연구 기반을 더욱 확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학의 학문적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국학이 동아시아 연구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오늘 세계 한국학대회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교육활동과 폭넓은 연구 성과가 앞으로는 한국학 연구라는 이름으로 더욱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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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영민 교수의 신작 <오감도의 탄생>(태학사)이 발간되었습니다.

신문에 연재되다 중단되었던 연작시 <오감도>의 나머지 미발표작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이 저서는, 사라진 나머지 시들의 행방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설명과 더불어 이상과 <오감도>에 대한 오랜 연구의 결과가 흥미롭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권영민 교수는 이상의 시 <오감도> 연작에 대해, "한국 문단에 늘 숙제처럼 남아 있던 미완의 『오감도』는 더 이상 한 편의 시가 아니라, 인습과 제도와 가치에 대항하는 시인 이상의 저항이자 창조적 도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난해한 시로 꼽히는 『오감도』. 『오감도』는 기존의 시적 정서나 진술 방식을 뒤엎고 사물에 대한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접근법을 택했다. 그 결과 끊임없이 발전해가는 기술 문명의 정체를 포착하며 기괴하고도 거대한 하나의 상상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물리학과 기하학과 같은 현대 과학과 맞물려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창조했다. 이상의 삶과 세계가 『오감도』에 모두 담겨 있다.
『오감도』의 연재 중단 후 나머지 미발표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누구도 물은 적이 없다. 이상 자신도 이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이 『오감도』를 미완의 상태로 방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는 1936년 연작시 『역단』 다섯 편과 『위독』 열두 편을 발표함으로써 『오감도』에서 시작한 새로운 시적 실험의 완성에 도달한다. 이상이 당초에 계획했던 『오감도』의 양식적 특성은 『역단』과 『위독』을 함께 포함시켜야만 연작시로서의 규모와 성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저자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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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제38회 이상문학상 최종 심사에 오른 작품들은 모두 15편이었다. 그 가운데서 내가 주목하여 읽었던 작품은 손홍규 씨의 <기억의 잃은 자들의 도시>, 윤이형 씨의 <쿤의 여행>, 조해진 씨의 <빛의 호위>, 천명관 씨의 <파충류의 밤>, 편혜영 씨의 <몬순> 등이었다. 최종 심사를 담당한 심사위원들이 서로 가장 많은 의견을 주고받은 것도 이들 5편에 대한 것이었다. 각 심사위원들이 최종 후보작 두 편을 선택하는 최종 단계에서 나는 <쿤의 여행><몬순>을 지목했다. <파충류의 밤><기억을 잃은 자들의 도시>는 그 주제에 비해 이야기 자체의 중량감이 다소 부족하다는 느낌을 떨칠 수가 없었다. <빛의 호위>는 서사의 중층 구조를 매우 짜임새 있게 설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의 묘사가 풍부하지 않다는 아쉬움이 컸다. 단편소설이 아니라 중편소설로 이야기를 더 확장했다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윤이형 씨의 <쿤의 여행>은 환상적 기법을 통한 삶의 해석이 이채롭다. 사람들은 몇 개의 얼굴로 살아간다. 크거나 작게 자신의 모습을 위장하고 그 위장된 모습에 가려져 평생 동안 본래의 얼굴을 드러내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 작가는 이러한 가면의 생()’이라고 명명한다. 그러므로 일상의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자기 모습이 아니라 자신을 위장한 으로 살아간다. 이 단순하지만 분명한 명제를 놓고 만들어낸 이야기가 <쿤의 여행>이다. 쉽게 만들어진 이야기 같지만 그 문제의식이 주목된다. ‘을 제거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 본연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편혜영 씨의 <몬순>은 불안사회의 어떤 징후에 대한 소설적 탐구에 해당한다. 일상적인 삶을 감싸고 있는 불안은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어디로 퍼져나가는지 방향을 알 수가 없다. 불안은 사방으로 떠다닌다. 특정한 대상이 없으므로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되기 쉽다. 불안은 어느 정도 의식적으로 경험되지만 그 연유를 제대로 밝혀내기는 쉽지 않다. 소설 <몬순>은 아파트의 단전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을 소설의 배경으로 삼고 있다. 전기불이 들어올 때까지 모든 것들은 어둠 속에 숨겨진다. 그러므로 개인의 일상적인 삶을 감싸고 있는 불안의 실체를 정확하게 발견하고 그 원인을 해명하기란 쉽지 않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의 삶에 내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고통과 그 비밀은 인간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고 있는 불안의 상황과 절묘하게 접합되어 있다. 독자들을 까닭모를 불안감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비밀이란 그것이 유지되는 동안에만 긴장을 수반한다는 평범한 원리를 강조하면서도 인간의 삶 자체가 겪지 않을 수 없는 존재론적 불안을 놓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소설적 특징은 삶에 대한 신뢰의 문제를 새롭게 해석하고자 하는 작가 자신의 태도를 암시해 주는 동시에 자신이 즐겨 다루어온 주제와 기법의 새로운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인정할 만하다.

이상문학상 대상의 영예를 안게 된 편혜영 씨에게 축하드린다.(권영민)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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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형!

형의 부음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습니다. 미국의 번역가 부르스 풀턴 교수와 함께 만나 저녁을 하자고 약속하고서도 부자연스런 말투를 걱정하던 형을 생각하여 날짜를 뒤로 미루었습니다. 최근의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가 출간된 뒤에도 한번 만나자고 하고는 그냥 시간을 보내버렸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든 약속이 부질없는 일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훌훌 털고 가시니 그저 가슴이 먹먹할 뿐입니다.

형과 처음 대면했던 때가 벌써 40년이 지났습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지난 1970년대 중반의 한국문학은 가파른 산업화과정 속에 커다란 변동을 겪으면서 현실에 대한 폭 넓은 인식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소시민의 삶과 그 내면의식의 추구에 집착했던 1960년대 소설의 감성이 이 시기에 더욱 사회적으로 확대되고 있었으며, 현실에 대응하는 작가정신이 경험주의적 상상력으로 충일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사회는 외형적으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경제적 성장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 계층적 분화를 함께 드러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 사회의 근대적 성장을 가져왔지만 삶의 근본적 요건마저도 위협하는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였습니다. 현실적으로는 빈부의 격차, 지역의 대립, 농촌의 궁핍화 등이 갈등을 부추겼고, 환경의 파괴와 공해 문제 등이 그 부산물로 대두되었습니다. 더구나 유신체제 이후 정치적 폭압이 자행되면서 사회적 혼란을 더욱 조장하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한국인들의 삶과 그 존재의 기반을 흔들어 놓았으며, 공동체적인 유대감의 파괴와 그에 따른 인간관계의 왜곡을 노정하였던 것입니다.

 

최인호 형,

형의 소설은 바로 이와 같은 사회적 현실에 대한 인식에서 출발하였습니다. 형은 소설을 통해 인간관계의 불합리한 조건과 그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집요하게 추적하면서 인간적인 삶에 대한 욕망을 표현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의 소설은 단순한 문학 양식의 차원을 넘어서서 사회적 현실 전반을 포괄하는 생명력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1970년대 소설을 대표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이를 두고 한국문학의 최인호적 경향이라고 설명한 적도 있습니다. 형은 1970년대 벽두에 서서 산업화 과정의 혼란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잃어버린 채 정체성의 위기를 맞고 있던 개인의 모습에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당시에 발표한 단편소설 술꾼, 타인의 방, 돌의 초상, 깊고 푸른 밤등은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우리 소설문단에 기법과 정신의 새로운 좌표를 제시하였습니다.

형은 특정한 계층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자체 또는 개별화된 주체로서의 인간의 문제를 소설적 주제로 내세웠습니다. 산업화의 과정에서 등장한 인간의 소외 문제라든지 문화 자체의 대중화 경향과 그 소비주의적 성향 등이 어떻게 개인적인 삶을 황폐하게 하는가를 주목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형의 소설은 현실 사회의 변화 과정에 절망하면서 타락하는 인간의 운명에 집요한 관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같은 경향 때문에 형의 문학은 이성이라든지 역사의식과는 거리가 있는 일종의 개인적 도피 성향을 보여준다고 비판한 평론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형의 소설은 인간의 내적 불안을 예리하게 투사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인간과 인간의 진정한 사회관계를 인간적인 유대를 통해 복원하고자 하는 소망을 온전하게 드러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최인호 형,

형의 소설은 현실의 상황 자체가 진정한 삶의 의미와 인간적 조건을 파괴시키는 거대한 힘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산업화과정에서 문제시되었던 물신주의의 팽배, 사회적 매커니즘의 횡포, 인간의 자기소외 등을 파악하는 방식과 그 접근 태도에서 형은 사회구조적인 문제보다 우선하여 개인의 자기 정체성의 혼란과 그 극복의 방법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소설 속의 주인공은 자신이 삶의 주체로 떳떳이 서지 못하고, 자신이 세우고자 노력했던 사회구조에서 밀려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이 참담한 소외감은 산업화 사회 속에서 야기되는 가장 중요한 인간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1970년대 소설은 이 같은 최인호적 경향의 분화를 통해 그 시대적 특성을 규정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형의 소설적 지향이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최인호 형,

형은 단편소설에서 보여주었던 문제의식을 서사적으로 확대시키면서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적도의 꽃, 고래사냥, 겨울 나그네등으로 대표되는 장편소설들을 내놓았습니다. 신문 연재를 통해 대중 독자와 만나게 된 별들의 고향을 발표하면서부터 형은 최고의 인기 작가가 되었지만 문학의 상업성에 대한 논란이 있을 때마다 그 비판적 표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형은 도시적 감수성, 섬세한 심리묘사, 극적인 사건 설정 등의 서사적 특성을 갖춘 이 작품들을 통해 한국 소설문학의 대중적 독자기반을 확대시켜 놓았습니다. 그 뒤로 이어진 역사소설 잃어버린 왕국, 해신, 상도, 유림등은 새로운 역사적 상상력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들은 사담(史談)’의 성격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던 우리 역사소설의 영역에 서사 공간의 확장이라는 극적요소를 더해줌으로써 일정한 소설적 성과를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형이 투병 생활 중에 발표한 최근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도 꼼꼼하게 읽었습니다. 장편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일상의 공간을 따라 시간을 분절시키면서 이 분절된 시간에 따라 공간의 시간화가 가능해지도록 고안되어 있습니다. 본질적으로 시간은 개인에 의해 경험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은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범주를 형성합니다. 하지만 인간의 경험적 시간은 기억 또는 의식 속에서 시간적 순서개념을 지키지는 않습니다. 그것들은 서로 뒤섞이고 왜곡되면서 그 순서를 알 수가 없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시간과 자아의 관계가 특별히 중요한 것은 바로 이같은 성질 때문입니다. 이러한 현상을 나타내는 문학적 기표가 바로 환상입니다. 이것은 객관적 현실 속에서 볼 수 있는 귀납적이거나 인과적 추리와는 아무 상관없지만,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그 서사적 위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최인호 형!

형의 영전에 고개 숙이고 소설쓰기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싶습니다. 이 새삼스런 질문은 형의 소설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를 읽는 동안 수없이 되뇌었던 것입니다. 이 소설의 서두에 덧붙여놓은 <작가의 말>이 내 의식의 덜미를 잡고 머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형은 이 소설을 항암 치료를 받으면서 두 달 동안에 완성하였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이 소설의 쓰는 동안 자신이 느꼈던 창작욕과 열정을 두고 고통의 축제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고통의 축제라는 말이 지금도 나의 명치끝을 시리게 합니다.

 

최인호 형!

인간의 삶을 긍정적인 시선으로 보듬어 주던 형의 그 넉넉한 가슴이 아쉽습니다. 언제나 반겨주던 형의 따스한 미소가 그립습니다. 형의 소설에 남아 있는 그 지극한 사랑의 언어들은 형의 뒤를 잇는 젊은 작가들의 손에 의해 새롭게 꾸며질 것입니다. 이제 형은 고통의 축제를 떠나 고이 잠드시길 빕니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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