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덧없음이 유달리도 마음을 허전하게 합니다. 시인 김영랑은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을 안쓰러운 마음결에 담아 제야라는 시로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제운 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 버린다 /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 어둑한 골목골목에 수심은 떴다 갈앉았다 / 제운 맘 이 한밤이 모질기도 하온가 // 희부연 종이등불 수줍은 걸음걸이 / 샘물 정히 떠붓는 안쓰러운 마음결 // 한 해라 기리운 정을 묻고 쌓아 흰 그릇에 /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 비사이다.’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면 기쁨보다 수심이 더 많습니다. 떨쳐버리기 어려운 그리운 정이 다시 마음속에 모이고 쌓입니다. 시인은 제야의 촛불을 밝힌 채 맑은 샘물을 떠놓고 그 맑음을 자신의 마음에 비춰봅니다. 이 마지막 날의 밤은 참으로 그냥 보내기 힘든 시간입니다. 지나간 1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하면서 시인은 마음속 깊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생각하니 어린 시절 시골 고향집의 섣달 그믐날 풍경이 떠오릅니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 동안의 묵은 먼지를 모두 쓸어내기 위해 집안 식구들이 나서서 하루 종일 수선스럽게 소제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 청소가 끝나면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데우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차례로 목욕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녁에 부엌에서 시루떡 찌는 냄새가 온 집안에 풍겼습니다. 커다란 접시에 수북하게 시루떡을 담아 집안 곳곳에 놓아두었습니다. 집안에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이날 밤만은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잠을 자는 사람은 눈썹이 희어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들기름 접시를 소반에 받쳐놓으시고는 목화솜을 말아 심지를 만들어 식구 수만큼 접시에 늘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각각 심지에 불을 댕기시면서 불꽃이 곧고 맑게 타올라야 내년 한 해 운수가 좋단다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모두가 할머니의 말씀에 숨을 죽인 채 접시 위로 타오르는 빨간 불꽃을 지켜보면서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맞던 섣달 그믐날의 풍경입니다만, 이런 단란한 제석(除夕)의 시간을 잊은 지가 오래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이 터지고 번졌습니다. 온 국민을 슬픔으로 몰아넣은 세월호 참사는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참담해 하면서도 부끄럽고 죄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서민들의 하루하루 살림살이는 팍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정부에서 온갖 방책을 내놓아도 한 번 움츠러든 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가진 자들은 남보다 더 가진 힘으로 유세를 떨고 있는데,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죄로 여길 수밖에 없는 허망의 현실을 탓할 뿐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하는 일 없이 사회로 내몰리고 있지만 누구도 묘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는 치정(癡情)처럼 얽혀서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면서도 자기네 권세 유지를 위해 서로 헐뜯으면서 파당 싸움에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아무도 마음 편하게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조용히 보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저 안쓰럽고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제야의 종소리를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즘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데, 수세(守歲)라는 말이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새도록 집안에 불을 밝혀두고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두고 수세라고 했습니다. 집안에 불을 밝히고 잠을 자지 않아야 잡귀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이 말에 따라붙어 있었습니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어버린다는 이야기로 어린 시절 가슴 조리게 만들었던 기억도 이 말과 연결돼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이니 쓸데없는 일을 삼가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보다는 지나간 일을 돌아보며 새해를 맞으라는 가르침을 하나의 금기(禁忌)처럼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섣달 그믐날 밤에는 불을 밝히고 정갈하게 몸을 가다듬은 채 한 해를 정리하고 다시 조신하게 새해를 맞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경건하게 새해를 맞아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야를 밝히는 촛불조차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은 각박하지만 모두가 사람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사람을 부축해야 하고 가진 자가 헐벗은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모두가 보살펴야 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해 새로운 삶의 길을 서로 안내해야 합니다. 편 가르고 다투기보다는 모두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 전체가 다시 활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가 끝나는 날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모두가 새해를 맞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세월의 자락에 매달리기보다는 새해를 맞는 기쁨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오늘 밤에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환하게 다시 켜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첫 눈뜸에 / 눈 내리는 청산을 보게 하소서 / 초록 소나무들의 / 청솔 바람소리를 듣게 하소서.’(김남조, 새해 아침의 기도)

 

권영민, 2014.12.30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올해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는다. 모두 힘을 합쳐 힘든 산업화의 과정을 통해 경제 성장을 얻어냈고, 숱한 희생을 바탕으로 민주화의 역정을 거쳐 사회 발전을 이룩했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성숙을 의미하는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    

문화의 개념은 그 폭이 아주 넓다. 삶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문화와 통한다. 문화는 삶의 과정에서 이루어내는 물질적 정신적 소산을 모두 포괄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간의 삶 자체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적 능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모든 산물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등의 정신활동이 그 중심을 이룬다. 결국 문화는 인간이 역사적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낸 삶의 방식 전체에 해당한다. 여기서 삶의 방식 전체를 문화라고 규정할 경우 그것은 어김없이 가치문제에 대한 판단과 부딪치게 되어 있다. 삶의 방식이 어떠한 원리와 어떠한 방법을 취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화에 대한 관심은 문화의 의미와 본질을 밝히고자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문화 발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고 그 가치의 형성은 어떠한가를 사람의 삶의 과정 속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인식은 문화 현상 자체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비롯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 개념의 중심을 어디에다 둘 것이며, 비판의 의미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당연하게 제기되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성찰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그 산물로서 문화의 구성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밝히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언제나 문화적 현상과 그 구성 자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지향한다. 이것은 문학이나 역사 또는 철학 등을 통틀어 문화적 가치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문학의 내재적 힘을 말한다. 문화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인간의 삶이라면, 삶의 인간다움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며, 인간의 정신과 인간 존재의 방식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문화의 기반을 이룬다. 하지만 인문학이 인간 삶의 가치를 구현해내는 학문이라고 해서 인간의 현실과 개개인의 삶을 그대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정신은 어떤 조건으로 제약되는 것이 아니며 무한의 가능성과 힘을 가진 채 열려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인문학의 존립 근거인 이른바 인문정신이 가로놓여 있다. 인문정신은 인간의 자기반성의 근원이며 또한 자기성찰의 중심에 해당한다. 인문정신은 인간이 자기 존재와 그 가치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인간다움의 현실을 되찾고 인간의 삶의 풍요로움을 살릴 수 있는 힘이다.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인문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개인의 문화적 권리가 사회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한 사회가 스스로 문화를 창조해 가는 과정에는 문화적 주체의 확립이 필수적이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문화적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개인의 정치적 권리, 경제적 권리 등의 신장에 주력해 왔다. 하지만 경제 발전과 사회적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문화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문화는 인간의 삶의 요체이기 때문에, 모든 문화적 주체는 공동체의 문화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이를 향수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로서 문화적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문화의 융성이란 문화적 민주화의 실현과도 상통한다. 한국사회는 정치 사회적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을 거쳐 경제 민주화의 단계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는 발전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그것이 사회 갈등의 핵심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문정신에 기초한 문화적 민주화의 실현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문화적 민주화는 사회발전의 개념에 사회 구성원들이 지닌 잠재력을 통합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주체의 확립, 문화적 다양성의 보장, 문화의 개방성과 창의성의 촉진 등을 확립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가 희망하는 문화 융성의 시대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면서 각자가 문화적 주체로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균형있게 발전하고 모든 계층이 자유롭게 공동체의 문화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곧바로 문화 융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광복 70년, 이제부터 우리는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권영민, 2015.1.9)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한글박물관이 곧 문을 연다. 한글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 정리 보존하기 위한 박물관이 생긴다는 것은 문화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색 있는 박물관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도 기대가 크다.

'한글'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의 명칭이다. 그러나 이 명칭은 세종대왕 때부터 사용된 것이 아니다. 세종대왕은 새로 만든 문자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말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이 말을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조선 시대 말기까지 언문이라고 통칭된다.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이 '언문, 언서, 반절' 등으로 지칭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많은 중국 문헌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이 번역본 책들은 <두시언해> <소학언해> <화엄경언해> 등과 같이 모두 '언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한문으로 된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였다는 뜻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조선 시대에는 훈민정음이라는 명칭보다 언무이라는 명칭이 더 널리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계몽 시대에 이르러 언문이라는 명칭 대신에 국문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다. '나라의 말'이라는 뜻으로 국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지식인들이 국문 글쓰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독립신문>(1896)과 같은 순국문 신문도 나오고 많은 도서들이 국문으로 출간된다. 대한제국 시절에 학부 내에 '국문연구소'(1907)를 설치하고 국어와 국문에 대한 연구를 전담하도록 한 것을 보면, 공식적으로 국문이라는 말이 우리글의 명칭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언문'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한다. 일본 총독부에서 우리말의 철자법을 정리하면서 '조선어 언문 철자법'이라는 공식 용어를 식민지 통치 기간 내내 사용하였다. 그리고 국어라든지 국문이라는 명칭은 일본어와 일본 글을 지칭할 경우에만 쓰도록 하였다.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은 조선어이고, 글은 언문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등장한 것이 '한글'이라는 말이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우리글의 문화적 지위를 새롭게 주장하기 위해 고안된다. 이 말은 한글운동의 선구자였던 주시경 선생이 1910년 무렵부터 사용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주시경 선생이 1914년 조선어강습원의 명칭을 '한글배곧'으로 바꾸면서부터이다. 이 강습원에서 1915년부터 줄곧 '한글배곧'의 졸업증서 등이 발부되자 한글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일본인들이 다시 사용한 '언문'이라는 말에 맞서 당당하게 자기 위상을 갖추게 된다. 일본의 억압 속에서도 국어연구자들이 모여 1926년부터 한글 창제를 기념하기 위해 '가갸날'을 정하기도 하였지만 곧 '한글날'로 그 명칭을 바꿔쓰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일보> 등의 언론기관이 나서서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에 해방이 되면서 우리말과 글의 문화적 지위를 다시 찾게 되자, 여러 학자들에 의해 하나밖에 없는 글, 위대하고 큰 글, 바른 글이라는 뜻이 부연되어 덧붙여지면서 한글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한글은 세계 인류가 자랑하는 기록 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문자를 연구하는 세계의 모든 학자들도 한글의 특이한 구조와 기능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글이지만 세계 각국의 대학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이것은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이다. 한글박물관의 개관을 앞두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시민의 의식도 한 단계 높아지기를 기대한다.(권영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서슬이 퍼런 판사, 검사라는 말에는 일 ()’ 자가 붙어 있는데, 잘 나가는 변호사에게는 선비 ()’ 자를 붙인다. 의사, 기사에는 스승 ()’가 붙어 있다. 소설가, 화가는 집 ()’를 쓰는데 목수나 가수는 손 ()’자를 붙인다. 광부, 청소부 등에는 지아비 ()’ 자가 붙어 있다. 특이하게도 시를 쓰는 사람만은 시인(詩人)’이다. 의사처럼 시사(詩師)도 아니고 변호사처럼 시사(詩士)도 아니다. 소설가와 같이 시가(詩家)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 그럴까?

강은교 시인은 시인이여. 어서 떠나라. 아직도 거기 머물고 있는가. 옛집은 틀이며 진부함이며 상투성이라고 가르치며 아무도 가 본 적이 없는 먼 여행을 재촉한다. 그런데 사십년을 시를 써온 장석주 시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시를 아는 것은 우주를 아는 것이다. 나는 우주를 모른다. 다만 그 모름 속에서 먹고, 자고, 걷고, 웃는다. 나는 사십여 년을 시를 써왔지만 시를 잘 모른다. 그 모름 속에서 모름을 견디고 있을 따름이다.’ 그 곁에서 참으로 희한하게 잠언(箴言) 같은 이 말을 따라 정호승 시인도 아직 시가 무엇인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한때는 시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시를 쓴다는 절망감에 빠지기도 하고, 시가 무엇인지 좀 알고 쓰면 좋겠다는 열망감에 사로잡힌 적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모른다는 것은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는 지금 모르기 때문에 시를 쓸 수 있다.’ 이기인 시인은 시는 생각하는 대로 다 쓸 수 없어서 천만다행이라고 응수한다. ‘시는 다 쓸 수 없어서 다행이다. 시의 욕심을 조금씩 놓아본다. 시는 잘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박정대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자의식이 그를 유일하게 시인으로 만들었단다. ‘이 척박하고 천박한 지구에서 자신이 시인이라는 자의식을 갖지 못하면 그 사람은 그저 평범한 지구인일 뿐이라는 것이 박정대의 생각이다. 김언은 나는 죽음이 두려워서 시를 쓰고, 내 삶이 언제 어떻게 끝장날지도 모른다는 공포 때문에 이미지를 본다.’ 라고 고백한다. 여태천 시인은 언제나 불안하다고 한다. ‘언어가, 세계가 사라질 것 같아 두렵다. 그런데, 언어는 나의 생각으로부터 멀어지지 않고 나의 몸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다. 언어는 나의 몸을 은신처 삼아서 이 세계에 간신히 붙어 있다.’ 라고 엄살이다. 정끝별 시인은 시는 안 보이는 것을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기도 하고, 안 보이는 것을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도 할 것이다.’ 라며 애써 태연스럽다.

박형준 시인은 순간의 사랑에 매달린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볼 수 없다면 미래의 성공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라고 반문한다. 행복은 진정 이 순간을 사랑함에서 온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신현림 시인은 뭐든 쉽게 잊히는 세상에서 쉽게 잊히지 않는 아름다운 시간을 쌓아가고 싶다. 그 아름다운 시간들을 통해 얻은 삶의 진실들로 내 생의 의복을 만들어가고 싶다.’ 라고 자기 속마음을 드러낸다. 권혁웅 시인이 사랑하는 이를 사랑한다는 것이 동어반복이야말로 모든 시에 내재한 동력일 것이다.’ 라고 덧붙인다.

박주택 시인이 깨어나리라. 열망에 힘입어 낮이 스스로의 운명에 미소를 지어 보이고, 비애에 잠긴 밤이 생의 바닥으로부터 숨을 뿜어 올리듯이라고 외친다. 그런데 손택수 시인은 빈 곳이 있어야 소리가 울리듯 침묵은 음악과 시가 탄생하는 장소라고 입을 막는다. ‘우리는 어린 날의 고적한 뒤란으로 돌아가듯 침묵으로 귀환함으로써 세계의 실감나는 반응체로 거듭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이승희 시인은 답장이 없어도 쓴다. ‘이제 답장 같은 거 나도 기대하지 않는다. 그냥 쓴다. 나는 어떤 방향이어야 하는가. 그건 분명하다. 너에게. 세상의 수많은 너라는 사람들이면 된다.’ 라고 혼자 다짐한다. 허연 시인은 모든 시는 불온하고 모든 시는 제멋대로 쓰여져야 한다. 모든 시는 그즈음의 외마디 비명이다.’ 라고 하면서도 세상이 그것들을 꼭 받아줘야 할 책무는 없단다.

유홍준 시인은 규격화된 제품만을 요구하는 공장에서 내 시는 잘못 생산된 불량품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그 규격화된 것들은 다 이제 잊히고 없는데 어쩌자고 내가 만든 이 불량품들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존재하고 있을까?’ 라고 자문한다. 이재무 시인이 그 곁에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무언가에 쫓겨 늘 바지런히 앞만 보고 걷다가 무심코 뒤돌아보면 거기 시가 땀에 젖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날들이 많았다. 그런 시가 안쓰러워 떨쳐내지 못하고 조강지처인 양 여직 품어다니고 있다.’ 이민하 시인은 시를 두고 뒤를 향해 걸어도 앞으로 가는 길이며, 멈추어 있어도 끝나가는 삶이라고 푸념한다. 이영주 시인은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순간이라는 결정체가 남기고 간 흔적의 물질을 쫓는 일이라고 가르쳐준다. 그러면서 그는 남들이 말하는 잘사는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쓸데없는 일이라며 웃는다. 정병근 시인은 내 인생은 시로 망쳤다. 기꺼이 자초한 일이므로 후회하지 않는다. 무엇으로든 망치지 않은 인생이 있으랴.’ 라고 하늘을 쳐다본다.

시는 인간의 심성 그 자체를 내용과 형식으로 하여 만들어지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나는 아는 체를 많이 한다. 시는 그것을 애써 찾아 읽는 사람에게만 충만한 기쁨을 주며, 자기 자신의 삶을 보다 높은 존재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자 하는 사람에게만 초월의 힘을 발휘한다. 내가 시를 강조하는 이유는 시가 인간의 아름다운 심성으로부터 빚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시의 기본적인 원리가 아닌가? 시는 마음을 말한 것(詩言志)이라는 평범한 진리가 거기서 비롯된다. 공자의 말씀에도 시 삼백 편에 생각의 간특함이 없다.” 고 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사뭇 다르다. 삶은 각박하고 사람들은 매우 거칠다. 여기서 시를 운위한다는 것 자체가 한가로운 일처럼 보인다. 시는 오로지 시인들만의 몫이고, 일상의 인간들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처럼 되어버렸으니! 이러한 현상을 놓고 사람들은 흔히 시의 위기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시의 위기를 뜻하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삶 자체가 정서적 파탄의 위기에 처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잃어버린 시 정신을 회복하는 일- 그것이야말로 시인으로 사는 길만큼 아득하다. 하지만 시인은 시를 찾는 사람의 곁에만 자리한다. 그리고 천상(天上)의 언어를 인간의 말로 노래한다. 그래서 시인이다. (권영민)

* 이 글은 <시인으로 산다는 것>(문학사상, 강은교 외)의 머리말임.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미국에서 영어로 발간되고 있는 여러 문학지에 시조시인 조오현의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번역 소개되면서 화제를 낳고 있다. 미국 오클라호마 대학에서 발간되고 있는 전통 있는 문예지 <WORLD LITERATURE TODAY>는 지난해 9월호에 조오현의 시조 오늘, 달마, 고목의 소리등을 번역 소개하였다. 이 잡지는 1927년 창간된 문예지로서 전 세계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는 종합지 <NEW YORKER>와 함께 미국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잡지의 하나로 손꼽힌다. 월간지 형태로 간행되고 있는 이 잡지는 영어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유명 문학인들의 신작을 소개하면서 다양한 문학적 이슈를 다루고 있다. 비영어권 문학인의 작품도 특집형식으로 번역소개하고 있다. 온라인 계간 문예지인 < THE ADIRONDACK REVIEW>2013년 가을호에 조오현의 산문시 갈매기와 바다-절간이야기 2」 「다람쥐 두 마리- 절간 이갸기 3, 청개구리-절간 이야기 29등을 집중 소개하였다. 이 잡지는 2000년에 설립된 온라인 계간지로서 시와 소설 그리고 사진 예술 등을 다루는 고급 문예지이다.

조오현의 시조와 시 작품들을 이들 잡지에 번역 소개한 것은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는 하인즈 펜클(Heinz Insu Fenkl) 교수이다. 펜클 교수는 미국 뉴욕주립대학(New Paltz) 영문학과 부교수로서 이 대학에서 신화학과 문예창작론 등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1997년 자전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첫 소설 <Memories of My Ghost Brother>를 내면서 대단한 신인 작가로 미국 언론의 주목을 받은 바 있으며, 최근 두 번째 소설 <Shadows Bend>를 발표하면서 문학적 위상을 굳건히 하고 있다.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모친이 지어준 한국식 이름 인수를 자기 이름에 꼭 붙여 쓰기도 하면서 한국의 전통문화에도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Davis)에서 공부한 그는 풀브라이트 연구기금으로 한국에 나와 연구 활동을 하기도 했고 지금은 대학 강의 이외에도 여러 잡지에 자신의 이름으로 고정 칼럼을 쓰면서 한국 문화를 미국에 소개하는 일에 앞장서고 있다.

펜클 교수는 불교적인 선()의 세계를 시조와 산문시를 통해 새롭게 해석하고 있는 조오현의 작품들을 주목하면서 2012년 봄부터 아시아 문학의 세계적인 창구 역할을 하고 있는 <ASIA LITERARY REVIEW>바위 소리등의 시조를 번역 소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계 불교시 전문지인 <BUDDHIST POETRY REVIEW>201212월호에 시조 춤 그리고 법뢰(法雷), 떡느릅나무의 달등을 번역 수록했다. 생태주의 시전문지인 <WRITTEN RIVER>2012년 겨울호에도 허수아비등의 시조를 집중 소개했다. 그는 최근 문학사상에서 발간한 <적멸을 위하여 조오현문학전집>의 영어 번역본 출간작업을 준비하고 있다. 펜클 교수가 특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조오현의 시조가 불교적인 선의 세계에서 중심개념이 되고 있는 ()’이나 ()’과 같은 추상적인 요소를 짧은 시적 형식에 담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점이다. 펜클 교수는 조오현의 시조에서 볼 수 있는 시조의 시 형식과 불교 정신의 교묘한 결합을 높이 평가한다. 그리고 조오현의 시조가 세계적인 불교시로서 최고의 시적 성취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널리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시조시인 조오현은 설악산 신흥사의 조실 스님으로 불교계의 큰어른 중 한 분이다. 해마다 백담사 만해마을에서 열리는 만해축전을 주관하면서 만해 한용운의 평화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노력해 왔다. 특히 1960년대 말부터 시조 창작에 관심을 보이면서 한국문학에서 시조의 의미와 그 정신을 새롭게 창조해야 한다는 점을 앞장서서 강조해 온 것으로 유명하다.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개최된 하버드 시조 축제에도 특별 초대되었던 적이 있다. 펜클 교수의 번역 작업을 통해 <적멸을 위하여 조오현문학전집>의 영역본이 출간되면 세계의 독자들이 불교의 정신과 시조 형식의 조화를 이룩해낸 조오현의 문학세계를 쉽게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조오현의 시조 허수아비를 다시 읽어보면 펜클 교수를 매료시킨 그 문학의 정신적 높이를 짐작할 수 있다.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 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 주고

남의 논일을 하면서 웃고 있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맘 다 비우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적멸을 위하여 조오현문학전집, 문학사상, 148)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베스트셀러는 글자 그대로 잘 팔리는 책을 말한다. 미국의 뉴욕타임즈가 매주 발표하는 베스트셀러 목록이 유명하다. 일반 서점이나 인터넷 서점에서 판매된 책의 부수를 조사하여 통계를 내고 소설비소설부문을 나누어 발표한다. 우리나라에서도 대형 서점들이 자기네 서점에서 많이 팔려나간 책을 조사하여 베스트셀러 목록을 만든다. 이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독자들이 일정 기간 동안 어떤 종류의 책을 사서 읽고 있는지 그 경향을 알 수가 있고, 출판사가 발행하고 있는 신간들 가운데 어떤 책이 독자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대부분의 책들을 초판의 경우 양장본으로 제작한다. 이 양장본 책은 정가가 비싸지만 대개 도서관에서 먼저 구입한다. 이런 방식이 제도화되어 있으니 출판사가 책의 제작에 드는 초기 비용을 어느 정도 보전할 수 있다. 물론 일반 독자들도 이 양장본을 사서 보는 경우가 많다. 일정한 기준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출판된 지 일주일 안에 2만부 이상 팔리는 책이라면 대개 베스트셀러로 인정된다. 그러면 출판사에서는 반양장으로 보급판을 만들어 가격을 낮추어 일반 독자에게 공급하는 것이다.

출판 시장이 큰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가 사회 문화적으로도 상당한 파장을 일으킨다. 그러나 베스트셀러는 그 책의 학술적 가치나 예술적 수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책이 많이 팔린다는 것이 책의 내용이나 질에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베스트셀러 가운데에는 오랜 세월동안 독자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꾸준히 팔려나가는 고전적인 양서가 된 것도 많이 있다. 그렇지만 엄청난 판매부수를 자랑하던 베스트셀러가 일정 시기가 지난 후 그대로 사라져버린 경우를 얼마든지 확인해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베스트셀러 목록은 그 자체가 하나의 허상에 불과하다. 베스트셀러 목록에는 책의 제목과 함께 저자와 출판사만 표시된다. 그 책을 사서 읽는 독자층이 어떤 부류에 속하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다. 왜 그 책을 사는지도 알 수 없으며, 어느 지역에서 그 책이 많이 팔렸는지도 확인이 불가능하다. 베스트셀러는 오직 목록으로만 존재할 뿐 그 책의 실체를 말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른 책은 일반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구매 욕구를 자극한다. 독자들 가운데 이 목록을 보고 호기심에 끌려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상업적 출판사들이 많은 돈을 쓰면서 자기네 출판사의 책을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리려고 노력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출판사는 베스트셀러를 만들기 위해 책의 제본 방식이라든지 표지 디자인도 색다르게 고안하기도 한다. 심지어는 책의 판매 가격을 책정하는 데에까지 신경을 쓴다.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책을 광고하고 책의 저자를 언론에 노출시켜 대중적 관심을 모으려고 노력한다.

최근 상당한 재력을 가진 중견 출판사가 유명 문인들의 소설을 출간한 후 그 책을 사재기하여 베스트셀러로 조작했다는 사실이 언론에 폭로되기도 하였다. 자기네가 출판한 책을 서점에 내놓은 후 이를 비밀리에 대량 구매하여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게 했다는 것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참으로 씁쓸한 이야기다. 근래 도서시장이 얼어붙어 있는 현실과도 연관되는 문제이지만 돈으로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잘못된 생각이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를 낳았다는 생각이 든다.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얼마나 좋은 책을 만들어내느냐가 중요하다. 좋은 책은 그것을 찾는 독자가 늘 존재하기 마련이다. (권영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문학의 주변 > 권영민의 문단시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인으로 산다는 것  (0) 2014.04.19
세계로 소개되고 있는 시조시인 조오현  (0) 2014.02.25
베스트셀러의 허상  (0) 2013.12.18
신춘문예의 계절  (0) 2013.12.10
캐나다 단편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0) 2013.11.07
가갸날  (0) 2013.10.24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해마다 연말이 되면 중요 신문들이 큰 상금을 내걸고 문학작품을 공모한다.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시행되고 있는 이 문단 행사는 문학을 꿈꾸는 이들에게는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늘 아득하다. 수많은 문학 지망생들이 신춘문예를 기다리며 작품을 가다듬고 여기저기 신문에 투고한다. 그리고는 얼마나 가슴조리면서 신년 첫날의 발표를 기다리는지 이 열병을 치루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도 전 세계에서 문학의 길을 향한 통과의례를 이렇게 유별나게 치루는 나라는 달리 없을 듯하다.

우리나라에서 상금을 내걸고 문학 작품을 공모한 것은 최남선(崔南善)이 주재했던 잡지 청춘(靑春)이 처음이다. 이 잡지는 일본의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1914년에 종합 월간 문예지로 출발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발흥하려는 신문단에 의미 있는 파란을 기대한다는 목표 아래 현상문예란을 만들어 독자의 작품을 모집한 적이 있다. 그런데 1920년대 중반부터 민간 신문들이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문예작품을 현상 공모하고 그 결과를 연초에 발표하면서 하나의 문단적 제도로 정착했다.

요즘도 중요 신문사들은 신춘문예 제도를 대부분 운영한다. 전에는 일부 잡지사에서도 신춘문예라는 이름으로 문학작품을 공모했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신문사에서 운영하고 있는 신춘문예를 보면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각 분야별로 작품을 공모하여 이를 권위 있는 심사위원들에게 심사하도록 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매년 신년호에 각 부문별 당선작을 발표한다. 당선작에게는 상당한 상금이 돌아가지만 상금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당선작을 낸 사람을 곧바로 문필가로 대우한다는 점이다. 신문사가 신춘문예라는 제도를 공정하게 운영하면서 역량 있는 신인 발굴의 등용문을 만들어주고 있는 셈이다.

우리 문학계의 거장들 가운데에는 신춘문예를 통과한 사람들이 많다. 소설가 김동리는 1934년 시 백로(白鷺)가 신춘문예에 입선된 후 1935년 단편소설 화랑(花郎)의 후예(後裔)가 신춘문예에 당선되었고, 단편소설 산화(山火)1936년 다시 신춘문예에 당선된 특이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소설가 김유정의 경우는 1935년 소설 소낙비노다지가 각각 다른 두 군데 신문사의 신춘문예를 석권함으로써 문단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시인 서정주도 1936년 시 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였다. 최근에 세상을 떠난 작가 최인호도 신춘문예를 통해 문단에 나왔고, 그 후 화려한 명성을 이어갔다. 소설가 황석영, 이문열, 오정희 등도 모두 신춘문예를 통과한 후 유명한 작가로 성장했다.

그런데 신춘문예는 그 당선의 화려함에도 불구하고 자기 이름을 제대로 문단에 알리지 못하고 사라진 사람들도 적지 않다. 신춘문예 당선보다 그 영예를 지키면서 좋은 글을 계속 써나간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운이 좋게 당선된다고 하더라도 문학을 한다면서 어떻게 운수에만 매달릴 수 있겠는가? 한 시대를 살아가는 문학인으로서 자기 존재를 지키기 위해서는 그만큼 피나는 노력이 뒤따라야 하는 것이다. 신춘문예 지망생들은 이 점을 꼭 마음속에 담아두어야 한다.

신춘문예의 열기가 문단 진출 방식이 다양해졌음에도 여전히 뜨겁다. 여기저기 문학창작교실을 두드리는 사람들도 많고, 인터넷에 신춘문예 준비생들의 모임까지 생겼단다. 모두가 살기 어렵다고 야단인데 문학을 향한 열정이 아직 한 구석에 남아 있음을 보게 되는 것이 기분 나쁘지만은 않다. 그러나 신춘문예 당선을 위한 묘책은 없다. 자기만의 개성적인 목소리를 살리는 일이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하다. 이번 신춘문예에서는 패기 있는 목소리의 새로운 얼굴들을 더 많이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권영민, 2013.11.11)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스웨덴 한림원은 2013년도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캐나다의 여성 작가 앨리스 먼로를 선정했다. 북아메리카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로 손꼽히고 있는 먼로를 수상자로 발표하면서 스웨덴 한림원은 우리 시대 단편소설의 거장이라고 소개하였다. 노벨 문학상의 역사상 여성 수상자로서는 열세 번째이며, 캐나다 문인 가운데 최초의 수상자이다. 영국의 BBC와 미국 뉴욕 타임즈 등을 비롯한 세계의 언론들은 먼로의 문학이 가장 비정치적이면서도 가장 비상업적임을 주목하면서 그녀의 수상을 일제히 환호하였다.

앨리스 먼로의 작품은 우리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다. 그녀의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 떠남, 미움, 우정, 구애, 사랑, 결혼등이 이미 국내에도 번역 출판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로는 1931년 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십 대의 소녀시절부터 단편을 쓰기 시작했다. 웨스턴오하이오 대학에 재학 중이던 때에 첫 단편 그림자의 세계를 발표하였고, 30대 후반에 펴낸 첫 소설집 행복한 그림자의 춤(1968)이 캐나다 <총독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먼로는 장편소설 소녀와 여성의 삶을 발표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고 이 작품이 미국에서 텔레비전 드라마로 각색되어 큰 성공을 거두면서 미국의 독자들에게도 친숙해졌다. 하지만 그녀는 단편소설 쓰기에 모든 열정을 바쳤으며 지금까지 내가 너에게 말하려 했던 것, 공공연한 비밀, 떠남등을 비롯한 열두 권의 단편집을 출판하였다.

외신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엘리스 먼로의 대표작들은 전 세계 13개국 언어로 번역 출간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상복도 많다. 캐나다 최고의 문학상으로 불리는 <총독문학상>을 세 차례나 수상한 그녀는 미국에서도 <전미도서비평가협회상>과 단편소설 부문의 최고상으로 손꼽히는 <오 헨리 상>을 받았다. 소설가로서 앨리스 먼로의 문학적 업적이 국제적으로 높이 평가를 받게 되자 2009<맨 부커상> 인터내셔널 부문 수상의 영예도 그녀가 차지하였다. 당시 맨 부커상 심사위원회는 한 작가가 평생에 걸쳐 이룩하는 작품의 깊이와 지혜, 그리고 정밀성을 그녀는 자신의 모든 작품마다에서 그대로 성취해 냈다.”라고 선정 경위를 밝히기도 하였다. 평생을 두고 단편 창작에 몰두해 온 앨리스 먼로는 하나하나의 짧은 이야기 속에 인간의 삶의 복잡한 무늬들을 섬세한 관찰력과 탁월한 구성으로 아름답게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앨리스 먼로의 노벨상 수상을 보면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그녀가 캐나다의 체홉이라고 칭송되는 대목이다. 이러한 평가는 우리 작가들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나라에도 미국의 오 헨리상처럼 단편소설만을 대상으로 하는 이상문학상이 있다. 한국 단편소설 문학의 전통을 살려나가기 위해 최고의 예술적 완성을 보이면서 기법적 도전에 성공한 작품을 엄격하게 선정한다. 역대 이상문학상의 수상작들이 한국문학 최고의 반열에 올라서 있는 이유가 여기 있다. 그런데 장편을 선호하는 출판시장의 요구로 인하여 최근 우리 단편소설은 그 상상력에 활기를 잃고 있다. 우리 작가들도 소재에 대한 호기심과 이야기의 재미를 위해 장편소설에만 매달리지 말고, 단편소설의 예술적 완결성에 더욱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한다. 소설이 기법적 완결과 예술성을 등한시한다면 그것은 한낱 이야깃거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권영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1926127일 동아일보 학예면에 흥미로운 투고 기사가 하나 실렸다. 글을 쓴 사람은 만해 한용운이며 투고문의 제목은 가갸날에 대()하야라고 되어 있다. ‘가갸날을 정하여 처음으로 기념식을 거행한지 한 달이 지난 후의 일이다. 투고 내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표기는 현행대로 고침)

 

  나는 신문지를 통하여 가갸날에 대한 기사를 보게 되었는데 그 기사를 보고 무엇이라고 표현하기 어려울 만치 이상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가갸><>이라는 말을 따로 떼어 놓으면 누구든지 흔히 말하고 듣는 것이라 너무도 심상하여 아무 자극을 주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쉽고 흔한 말을 모아서 <가갸날>이라고 한 이름을 지어 놓은 것이 그리 새롭고 반가워서 이상한 인상을 주게 됩니다. 가갸날에 대한 인상을 구태여 말하자면 오래간만에 문득 만난 님처럼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기쁘면서도 슬프고자 하여 그 충동은 아름답고 그 감격은 곱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바야흐로 쟁여 놓은 포대처럼 무서운 힘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가감과 장식이 없는 나의 가갸날에 대한 솔직한 인상입니다. 이 인상은 무론 흔히 연상하기 쉬운 민족관념이니 조국관념이니 하는 것을 떠나서도 또는 무슨 까닭 많은 이론을 떠나서 직감적 거의 무의식적으로 받은 바 인상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단순한 직감적 인상 그것이 곧 인생의 모든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가갸날>이라는 이름도 매우 잘 지어진 듯합니다. 무론 <가갸날>이라고 아니하고도 얼마든지 달리 이름을 지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지어도 <가갸날>같이 짧고 쉽고 반갑고 힘있고 또한 여러 가지로 좋기가 어려우리라고 생각됩니다. 전에도 우리말을 연구하자느니 우리글을 많이 쓰자느니 하는 말이 많이 있어서 그러한 말들이 다소의 효과를 내었고 또 앞으로 그러한 일에 대하여 아무리 좋은 말과 아름다운 글을 많이 낸다 하여도 <가갸날>과 같이 쉽게 알고 길게 잊히지 아니할 수 가 없을 듯하외다.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가갸날의 기념을 창업한 이는 우리 무리 중의 큰일을 한사람의 하나이 될 것이외다. 가갸날에 대하여는 누구든지 스스로 힘쓸 일이지마는 특히 언론기관은 책임을 지고 선전하며 스스로 그 뜻을 체인하야 말과 글에 맞도록 힘써야만 할 줄로 압니다. 천애윤락 바다 언덕의 작은 절에서 스스로 게으름 속에 장사지낸 나라도 <가갸날>에 힘을 입어 먹을 갈고 붓을 드는 큰 용기를 내어 아래와 같은 시를 쓰게 되었사외다.

가갸날

아아 가갸날

참되고 어질고 아름다워요.

축일(祝日)」 「제일(祭日)

데이-」 「시즌이 위에

가갸날이 났어요, 가갸날.

끝없는 바다에 쑥 솟아오르는 해처럼

힘있고 빛나고 두렷한 가갸날.

 

데이-보다 읽기 좋고 시즌보다 알기 쉬워요.

입으로 젖꼭지를 물고 손으로 다른 젖꼭지를 만지는 어여쁜 아기도 일러줄 수 있어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계집 사내도 아르켜줄 수 있어요.

가갸로 말을 하고 글을 써서요.

혀끝에서 물결이 솟고 붓 아래에 꽃이 피어요.

 

그 속엔 우리의 향기로운 목숨이 살아 움직입니다.

그 속엔 낯익은 사랑의 실마리가 풀리면서 감겨 있어요.

굳세게 생각하고 아름답게 노래하여요.

검이어, 우리는 서슴지 않고 소리쳐 가갸날을 자랑하겠습니다.

검이여, 가갸날로 검의 가장 좋은 날을 삼아 주세요.

온 누리의 모든 사람으로 가갸날을 노래하게 하여 주세요.

가갸날, 오오, 가갸날이여.

 

 

 ‘가갸날이라는 말은 한글날을 처음 정했던 때의 이름이다. 1926년 음력 929일이며 양력으로는 114일이 바로 그날이다.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주동이 되어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반포한지 480주년이 된 해를 맞이하여 기념식을 갖고, 이날을 제1'가갸날'로 정하였다. 조선어연구회는 3.1운동 직후인 1921년 주시경 선생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민간단체이다. 창립 당시에는 권덕규, 신명균, 장지영, 김윤경, 최두선 등이 주도했고 뒤에 최현배, 이윤재, 이병기, 정인승 등이 참여하면서 일제 강점기 대표적인 민족운동 단체로 국어국문 연구의 중심이 되었다. 이들이 처음 가갸날을 음력 929일로 정했던 까닭은 세종실록(世宗實錄)1446(세종 28) 음력 9월 훈민정음을 반포했다고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어연구회에서는 이 기록을 따라서 음력 9월의 마지막 날인 29일을 '가갸날'로 정하여 기념하였다.

한용운은 가갸날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 동아일보에 투고 형식으로 자신의 감회를 적어 보냈다. 그리고 가갸날을 기념하는 축시까지 적었다. 그는 가갸날에 대한 인상을 오래간만에 문득 만난 님처럼 익숙하면서도 새롭고 기쁘면서도 슬프고자 하여 그 충동은 아름답고 그 감격은 곱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바야흐로 쟁여 놓은 포대처럼 무서운 힘이 있어 보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가감과 장식이 없는 나의 가갸날에 대한 솔직한 인상입니다.’ 라고 피력하고 있다. 이미 시집 <님의 침묵>(1926. 5)을 통해 국문 시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준 그는 가갸날에 대하여 이렇게 감격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가갸날이라는 이름은 그 이듬해인 1927년 조선어연구회 기관지 한글이 창간되면서 바로 바뀌었다. ‘가갸날'한글날'이라고 고쳐 부르기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날짜는 계속 음력으로 929일을 기념하였다. ‘가갸날이라는 이름은 결국 한 해 동안 사용된 후 폐기된 셈이다. 한글날의 날짜가 음력에서 양력으로 고쳐진 것은 1932년이다. 이해부터 한글날을 양력 날짜로 환산하여 1029일로 고정하기로 하고 기념행사도 가졌는데, 1934년부터는 정확한 양력 환산법을 적용하여 1028일로 정정하였다.

한글날이 오늘날과 같이 양력 109일로 정해진 것은 1945년 해방 직후의 일이다. 일제 말기인 19407월 새롭게 발견한 <훈민정음> 원본 서문에 훈민정음 반포일이 9'상한(上澣)'으로 나타나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일제가 우리말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조선어말살정책을 강압적으로 펴고 있던 때여서 이를 널리 알릴 수가 없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 기록을 근거로 상순의 끝날인 9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9일을 한글날로 확정하였다. 한글날은 이러한 역사의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올해 한글날부터는 법정 공휴일로 정하여 기념한다. 한글의 위대한 가치와 그 의미를 다시 새겨볼 일이다. (권영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

시인 박남수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스무 해가 되었다. 말년을 미국에서 보내시던 선생께 내가 쓴 한국현대문학사를 부쳐드렸더니, 미국으로 떠나오신 후로 생각에서 떠났던 한국문학을 그 책을 펼쳐놓고 다시 공부하고 있다는 엽서를 보내주셨다. 나는 한평생을 시인으로 사셨던 그 어른의 고절한 삶의 자세를 무어라고 달리 말하기조차 어렵다.

 

 

 

박남수 선생은 1918년 평양에서 태어나 너무도 많은 아쉬움의 세월을 살아오셨다. 일제 말엽에 일본 중앙대학에 유학하였던 선생의 문학적 역정은 그리 순탄한 것은 아니었다. 1939년 잡지 <문장> 지의 추천을 거쳐 시인이 되었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국문을 쓸 수 없게 되었고, 해방 후에 북한에 공산정권이 들어서고 6.25 전쟁이 터졌을 때, 선생은 고향 평양을 떠나 서울로 내려와야만 했다.

선생은 월남 이후부터 시작 활동에 전력하였다. 일제 말기 비슷한 시기에 함께 문단에 나온 청록파시인들이 자연을 대상으로 서정의 세계에서 각기 자기 방향의 조정을 꾀하는 동안, 선생은 오히려 일상의 현실에 눈을 돌렸다. 전쟁의 고통과 현실의 체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과 그 조건을 날카로운 감각으로 표출시켜 놓고 있는 선생의 노력은 시집 <갈매기 소묘>(1959)속에 집약되고 있다. ‘하늘이 낮게 / 드리고 / 물 면이 / 보푸는 / 그 눌리워 / 팽창한 공간에 / 가쁜 갈매기 하나 / 있었다.’ 라는 구절로 시작되는 선생의 유명한 시 갈매기 소묘에는 고향을 버린 선생의 경험적 자아가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시행의 대담한 압축과 언어의 절제를 통해 정서의 긴장을 추구하고 있는 이 시에서 시적 자아의 형상은 가쁜 갈매기 하나로 변용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그 갈매기의 비상이 이미지의 역동성과 시각적 감각성에 의해 다양한 형태로 포착되고 있다. 전쟁의 피해와 고된 피난민 생활이 이미지를 통해 구체화되고 자아의 새로운 인식이 거기서 싹트고 있다.

 

 

선생의 시에서 대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이미지 자체의 역동성이 새롭게 정서적인 균형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시집 <새의 암장>(1970)으로 묶여진 1960년대의 시적 작업들이다. 이 무렵부터 선생은 1950년대 전후의 시작활동에서 보여주던 피해의식을 벗어나고 있다. 자의식의 그림자가 없어진 선생의 시에 새롭게 자리잡고 있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삶과 존재의 의미에 대한 추구, 그리고 물질문명에 대한 역사적 비판의식이다. 물론 갈매기 소묘에서부터 그의 시에 중요한 심상으로 자리잡기 시작한 의 이미지가 시적 긴장을 더하고 있다.

 

침묵을 터트리는 소리가

울려퍼지고, 새들은 떼를 지어

순금의 깃을 치며 멀어져갔다.

 

물낯에 그려진 무수한 동그라미가

하나씩 허무로 꺼져갔다.

- 새의 암장(暗葬) 2에서

 

앞의 시에서처럼 는 그 존재의 실체 어느 하나의 의미로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것은 무한의 시간이 되기도 하고 공간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움직임이기도 하고 정지된 것이기도 하다. 그것은 하늘이 되기도 하고, 땅이 되기도 한다. 시공을 넘나드는 를 통해 시인은 우주의 질서를 보기도 하고, 인간의 역사를 대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는 어떤 하나의 관념으로 묶여지지 않는다. 오히려 관념을 배제한 순수한 감각과 이미지가 를 중심으로 연결되고 있다. 존재 그 자체를 문제삼을 경우, ‘는 인식을 초월하는 대상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실향의 시인이 이러한 거대한 시적 주제를 감당하기에는 1970년대의 한국 사회와 현실이 너무나 각박한 것이었다. 시적 인식의 대상이었던 를 암장해 버리고, 선생은 스스로 한 마리의 새가 되고자 하였다. 그리고 1975년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조국과 언어를 떠난 시인의 미국 생활은 하나의 고독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해 나는 불을 끈다.

메마른 껍질로 둘러진 현실의 울타리 안에는

한 포기 풀도 자라지 못하는 가뭄의 뜰이 있고,

 

불모의 뜰에서는 뿌리도 타는 목마름과

비틀어진 가지에 마른 나뭇잎들이 보스라지고 있다.

나는 불을 끈다.

꿈꾸는 시간을 위해 불을 끈다.

 

박남수 선생의 시 소등(消燈)은 미국 체류 생활의 한 단면을 읽을 수 있게 해주는 명편이다. 이제 선생은 스스로 당신의 삶의 등불을 꺼버리신 셈이다. 선생께서는 자유로이 그토록 바라셨던 북녘의 고향 나들이를 하시게 된 것일까? 우리는 어디서 한 마리의 새가 되신 선생을 다시 뵐 수 있을까? (권영민)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Posted by 문학콘서트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