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정신적 지주로 영원히 남게 된 최인훈 선생의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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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선생께서 세상을 뜨셨다.

한국문단의 큰 어른을 이제는 다시 뵈올 수 없게 되었다.

 

최인훈 선생은 1959년 단편소설 GREY 구락부 전말기(1959)로 등단했다. 이 작품은 스토리의 전개가 모호하고 작품의 전편을 통하여 작가 특유의 관념이 짙게 배어나고 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체로 자신의 내부세계에서 사물과 사상을 의식적으로 조작한다. 그들은 행동이 없고 관조만 있는 자기응시의 인간들이다. 철저한 무위를 행동강령으로 삼고 있는 회색의 집단을 통해 작가는 삶의 방향을 설정하지 못한 젊은이들의 우울과 방황을 형상화하고 있다. 그러므로 GREY 구락부 전말기는 관념소설의 영역을 새롭게 개척한 최인훈 문학의 원점에 해당한다. 이 작품에서 부조되고 있는 관념이 역사의식과 현실감각을 확보하면서 광장(1961), 구운몽(1962), 크리스마스 캐럴(1963), 회색인(1964), 총독의 소리(1967),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1969) 등으로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최인훈 선생의 소설에서 특징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은 작가 자신이 그의 소설을 통해 다양한 기법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정치적 상상력이다. 최인훈 선생의 소설은 허구적 자아의 형상과 경험적 자아로서의 작가가 특이하게 대치함으로써 아이러니의 국면을 연출하게 되고, 그러한 상황적 아이러니가 작가의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암시하게 된다. 특히 그의 소설적 공간이 분단 상황이라는 정치적 현실과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는 점은 이러한 특성을 암시해 주는 근거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는 분단 상황과 거기서 빚어진 정치 현실의 문제성을 특이한 알레고리와 패러디의 방식을 통해 소설적으로 구체화시켜 놓고 있다. 그의 정치적 상상력은 삶의 현실과 모든 국면이 정치적인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기초하고 있다. 특히 최인훈 선생은 민족 분단이라는 당대 현실의 상황과 그 상황 속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들이 정치적인 것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음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그는 분단 상황에서 야기된 이데올로기의 편향성과 반공 반일 노선의 이율배반적 속성을 치밀하게 분석하여 하나의 새로운 알레고리를 창안하고 있다.

 

2

 

최인훈 선생의 작품세계에서 가장 주목되고 있는 작품이 광장(1961)이다. 이 소설은 한국의 민족분단을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그 선택의 기로에서 방황하는 인간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젊은 철학도이다. 그가 해방 공간의 혼란 속에서 감행하게 되는 가치 선택을 위한 지적 모험이 이 소설의 참주제와 연결된다. 주인공은 서울에서 공부하며 이상을 키워나가지만, 아버지가 북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임이 판명되면서 경찰의 혹독한 취조를 받게 된다. 자신의 삶과는 무관하게 관념적 상태에서만 의식하고 있던 남북의 분단과 이념적 갈등이 현실적인 삶의 문제로 대두되어 주인공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가하게 된다. 그는 남한 사회가 자유당 정권의 부조리와 사회적 부패로 혼란에 빠져 있으며, 개인적으로 누리는 행복에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찾는 사회 풍조로 인하여 진정한 공동체의 삶을 이룰 수 없는 개인주의가 팽배해 있음을 냉엄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자신이 꿈꾸던 참다운 삶의 광장을 찾아 배편으로 북한으로 넘어간다. 그러나 주인공은 북한에서도 사회주의가 내세우는 공식적인 명령과 그에 대한 복종만이 있을 뿐임을 알게 된다. 그가 그리던 진정한 삶의 광장은 북에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작품의 주인공은 남과 북을 놓고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자신이 꿈꾸었던 이념을 선택하고자 하지만, 어느 곳에서도 인간의 삶의 참다운 의미를 발견하지 못한다. 이러한 허무주의적 사고로 인하여 주인공은 이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남과 북을 모두 버리고 제3국을 선택한다. 물론 이 같은 선택은 자기 주체에 의해 삶의 가치를 확립할 수없는 시대적인 강요로 이루어진 선택이라는 점에서 비극적인 의미를 가진다. 그가 꿈꾸는 진정한 삶의 광장이 소설 속에서 바다갈매기의 심상을 통하여 상징적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시대의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북쪽의 사회구조가 갖고 있는 폐쇄성과 집단의식의 강제성을 고발하면서 동시에 남쪽의 사회적 불균형과 방일한 개인주의를 비판한다. 제삼자적인 입장에서 볼 때 남과 북 어느 쪽도 진정한 인간의 삶을 충족시키기 어렵다는 판단이 이에서 비롯된다. 이 소설은 결말에서 주인공의 자살을 암시함으로써 이념선택의 기로에서 개인의 정신적 지향의 한계를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비극적 구도를 통해 완강하게 고정되고 있는 분단 상황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장편소설광장의 연장선상에서 대비적으로 그려낸 소설적 개성은 회색인(1964)을 통해 구체화되고 있다. 이 소설은 광장과는 달리 행위와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의 구성보다는 주인공 내적 독백과 관념적 사유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작품의 배경은 4·19혁명 직전의 한국사회이며, 자유당 정권의 몰락을 기점으로 새롭게 변화하기 시작하는 한국 정치사의 분기점을 시간의 축으로 삼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한국전쟁 당시 고향을 북한에 두고 월남한 독고 준이라는 지식인 청년이다. 자기 존재의 의미와 그 정체성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독고 준은 남한 사회를 뒤덮고 있는 분단 상황의 고통과 편향된 이데올로기의 틀 안에서 현실의 삶에 제대로 뿌리 내리지 못한 채 방황한다. 회색인의 주인공은 모든 일에 의욕을 잃고 소극적이며 회의적이다. 특히 월남해서 살던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그는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전혀 가늠하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이와 같은 인물의 설정은 남과 북의 현실을 모두 거부한 채 제3국으로의 도피를 택했던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의 경우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때때로 떠오르는 북한 땅 고향에서의 유년시절을 뿌리치지 못한다. 월남한 아버지로 인해 어린 나이에도 주변으로부터 감시의 대상이 되었던 그는 자신이 서 있는 남한의 현실 속에서도 언제나 소외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을 뿌리 뽑힌 존재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 소설에서 독고 준이 보여주는 현실에 대한 태도는 자신의 운명적인 삶에 대한 끝없는 질문과 사색을 통해 어느 정도 방향성을 드러낸다. 행동과 실천보다 깊은 고뇌와 지적인 사색을 통해 문제의 궁극을 찾아가고자 하는 이런 태도는 작가 최인훈 선생이 창안해낸 하나의 관념적 인간형의 존재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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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훈 선생이 자신의 소설쓰기에서 관념소설로서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 발전시키면서 새롭게 발견한 형태가 연작소설 총독의 소리(1967)이다. 총독의 소리는 여러 편의 편의 작품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연작의 형식에서 중시하고 있는 연작성의 요건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서사의 기본요소가 되는 행위구조가 결여되어 있어서 일관된 흐름이나 발전을 보여주는 잘 짜인 하나의 이야기 형태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가상적인 인물로서 총독의 존재만이 설정되어 있고, 그의 모습은 일련의 연설 형태가 되어 버린 담화의 내용 속에 감춰져 있을 뿐이다. 주동적인 인물이 벌이는 행위가 없으므로 사건도 없고, 사건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뒷받침해 주는 배경도 상정할 수 없다. 오직 담화의 상황 자체만이 작품 내적인 구조를 지탱하도록 되어 있으므로, 상황성의 반복만이 연작으로서의 성격을 규정해 주고 있다.

총독의 소리는 독특한 어조로 이어지는 담화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담화는 화자(話者)와 청자(聽者)가 있고, 담화의 내용을 이루는 메시지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메시지의 내적 상황과 외부적인 국면을 설정하기 마련이다. 연작소설 총독의 소리에서 각 작품 형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담화의 형식은 그 자체가 다분히 사회적인 성격을 띤다. 누구의 담화이며, 누구를 대상으로 하며,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독특한 담화 공간을 상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담화의 형식은 화자와 청자 사이의 일련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그 용법과 의미가 규정되는 것이다. 물론 모든 언어형식 자체가 가상된 현실공간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므로, 담화 공간으로서의 상황 설정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되는 화자의 존재는 담화의 목소리 속에 감춰져 있는 총독이다. 한국 내에 비밀조직인 조선총독부 지하부가 있고, 이 비밀단체가 비밀방송을 통해 총독의 담화 내용을 내보내는 것으로 상황이 설정되어 있다. 해방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조선총독부 지하부라는 조직의 존재를 내세운 것 자체가 다분히 풍자적인 것이지만, 총독의 담화내용이 역설적으로 한국의 현실 정치와 연관된 여러 문제를 거론하는 것도 의도적인 고안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에서 활용하고 있는 담호의 방식이 청자의 입장을 거의 무제한적인 불특정 다수의 청중으로 삼고 있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작품의 성패가 바로 그 청중들의 반응에 의해 결정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허구적 장치는 작가 자신이 현실 세계에 대해 갖고 있는 정치적 이념과 태도를 위장하기 위한 하나의 수사적 고안이다. 우선 작품 내적인 상황 설정에서 중시되는 조선총독부 지하부와 총독의 존재 설정에서부터 그 정치적 의도를 분명히 알 수 있다. 한국인들에게 있어서 일본은 한국 근대사의 왜곡된 전개를 획책한 제국주의의 부정적인 표상이다. 조선총독부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국 침략과 식민지 지배과정에서 한국인들의 증오의 대상이 되었고, 그 책임자인 총독도 마찬가지 존재였음은 물론이다. 작가는 바로 이러한 존재를 한일관계가 타결된 1960년대 후반 한국의 정치 현실 속에 가상적으로 설정하고 있다. 그리고 허구적인 장치를 통해 현실정치의 모순을 폭로하고 희화화하고 있으며, 현실의 문제성을 역설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1960년대 후반의 한국 정치 상황을 뒤집어보고 있다. 실제로 작품 속에서는 귀축 영미(鬼畜英美)’로 대변되고 있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 ‘러시아로 지칭되고 있는 국제공산주의의 야욕, 그리고 조선총독부의 존재를 다시 재현시킨 일본의 성장 등을 국제적인 역학관계로 설정한다. 이 가운데에서 논의의 중심에는 물론 분단 한국의 현실이 가로놓여 있다.

작품 내적인 구조로 볼 때, 총독의 소리는 한국인들에 대한 일본 총독의 담화로 꾸며져 있으므로, 표면적인 일본의 입장을 중심으로 그 내용이 채워진다. 물론 이러한 상황 설정 자체가 하나의 역설이지만, 한일회담 이후 한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의 확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설득력 있는 고안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의 입장이라는 가정된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경쟁관계에 놓여 있는 미국이나 소련에 대한 언급이 보다 자유로워질 수 있게 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결국 작가 최인훈 선생은 이같은 당대의 정치적 현실에 대해 신식민주의의 도래를 우려하고 있다. 분단의 현실 속에서 추진하고 있는 근대화 운동이 변질될 수밖에 없다는 비판적 인식 아래에서, 그는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영향력의 확대를 비판하는 총독의 소리를 다시쓰고 있는 것이다. 총독의 소리는 결국 그 문학적 성과를 작가 자신의 정치적 상상력과 연관지어 설명할 수밖에 없다. 이 작품의 텍스트가 지니고 있는 형식적 요건이나 미학적인 요건이 모두 정치적 효과를 위한 고안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작품의 속성은 비역사적 추상화의 방법을 뜻하는 관념이라는 용어만으로는 규정하기 힘들다. 오히려 당대 현실 속에서 이 작품에 제기하고 있는 문제의식의 지향이 갖는 정치적인 효과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지목해야 할 것은 총독의 소리가 빚어내는 새로운 정치 담론의 공간이 1960년대 후반기의 상황에서 요구되는 새로운 이념의 광장으로 든든하게 자리잡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지니고 있는 자유주의적 휴머니즘의 태도가 엄숙주의의 정치 이데올로기에 대응할 만한 유연성을 유지할 수 있는 공간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총독의 소리는 시대상황의 위기를 지적하는 다급한 목소리의 문학으로 기록되고 있을 뿐이다. 이 작품이 신식민주의의 도래에 대응할 만한 단단한 이념의 틀을 제대로 정치적 상상력 안에서 구체적으로 풀어내지 못한 것은 당대 정치의 이념적 고정성과 폐쇄성에서 기인하는 것임은 물론이다.

최인훈 선생이 1960년대를 넘어서면서 서사장르 대신에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옛날 옛적에 훠이훠이(1976), 달아 달아 밝은 달아(1978) 등의 극 양식을 새롭게 시험한 것은 관념의 늪에 빠져든 자신의 문학세계를 전환시켜 보고자 했던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최인훈 선생의 작가적 고뇌는 그 정치적 상상력의 폭과 깊이보다 더 아득하였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선생은 떠나셨지만 한국문학의 정신적 지주로 최인훈 문학은 영원할 것이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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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시조의 격조 혹은 파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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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남선이 1920년대 중반에 주창했던 시조부흥은 가람 이병기를 통해 비로소 현대시조의 새로운 탄생이라는 실질적 의미를 갖게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병기에 의해 시조의 시적 혁신과 그 창작이 가능해졌고 시조에 대한 이론적 탐구와 그 시학의 원리가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이병기는 시조란 무엇인가(1926), 시조와 그 연구(1928), 시조 원류론(1929) 등을 통해 시조문학의 본령을 깊이 있게 논의하였고, 시조는 혁신하자(1932)와 같은 글에서 시조를 하나의 시 형식으로 새롭게 인식하면서 이념적인 도그마에서 벗어나 시조 창작의 새로운 시야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그의 창작 시조집 󰡔가람시조집󰡕(1939)은 현대시조의 가장 주목되는 성과로 손꼽히고 있다.

이병기의 시조론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은 시조의 시적 형식 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시조의 시적 형식 문제는 오늘의 현대시조가 왜 시조로 존재하고 있는가를 이해하는 데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시조는 그것이 창곡으로 가창되었던 시대에도 3장의 음악적 형식에 묶여 있었고, 시로서 읽혀지면서도 시적 형식으로서의 3장 분장의 형식을 고수하고 있다. 시조가 지니고 있는 시적 특성은 이 불변의 3장 형식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시조에 대한 시학적 해명 또한 이러한 시적 형식에 대한 새로운 해석에 기초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조의 형식은 정형인 것과 고전적인 것이다. 하나 고전도 고전 나름이요 정형도 정형 나름이지 반듯이 정형이라고 하여 고전을 덮어놓고 다 버려야 할 것은 아니다. 시조는 정형이며 고전적이면서도 꼭 있어야 할 까닭은, 도리어 그 정형과 그 고전적에 있다. 한문이나 영어와 같은 외국의 문학을 맛보는 우리로서, 그래도 조선어문학의 맛을 보자면 무엇이 있나. 한시(漢詩)나 영시(英詩)처럼 발달은 못되었다 하드라도, 적어도 조선말로써 조선말답게 적은 것이며 조선말로서의 목숨과 넋이 있는 것 아닌가. 그리하여 조선말에 쓰인 전형과 궤범(軌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우리는 이것을 보고 일일이 그대로 모방을 하거나 인용을 하거나 할 건 아니라도 거기에서 무슨 전통이나 암시를 얻을 것 아닌가. 이것이 과연 우리들과는 남다른 깊은 관계가 있는 바이다.

-이병기, 시조는 혁신하자(1932)

 

앞의 글에서 이병기는 시조의 시적 형식을 정형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에서 찾고 있다. 시조라는 시 형식의 본질적인 특성은 3장의 구성 원리에서 찾아진다. 초장, 중장, 종장으로 구분되던 고시조의 형식은 엄격하게 음악적 형식의 지배를 받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시조는 이와 다르다. 현대시조는 음악적인 형식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시적 구성 원리로서의 3장을 고수하고 있다. 이미 고정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형식에 따라 3장이 만들어진 것이라기보다 시적 형식으로서 3장을 지향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조의 3장 분장 형식은 시인이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에 어떤 제약을 가하기 위한 외형적인 틀이 아니다. 그것이 만일 말하고자하는 것에 대해 한계를 정하고 제약을 가하는 일종의 형식적 규제 장치라면, 그것은 단조로운 행의 반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럴 경우 고도의 미의식을 구현하는 시적 형식이 될 수도 없을 것이다.

이병기가 시조의 시적 속성을 규정해 주는 요소로서 그 정형적인 것과 고전적인 것에서 찾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시조는 고정적 형식의 균제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리고 이 형식적 특징은 가람 시조가 추구하고 있는 시정신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시조가 추구하고 있는 시적 기품과 격조가 거기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조가 하나의 문학적 형식으로 다시 창조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지녀온 외형의 균제라는 형식적 특성만을 고집하면서 시인의 개인적인 시 의식이라든지 새로운 시대감각을 외면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시조가 지녀왔던 특유의 기품이나 형태적 전아성을 포기한다면 시조는 결국 파괴되고 만다. 시조는 이러한 두 가지의 조건이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곳에서 그 시적 가능성을 확고히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병기가 주목하고 있는 점도 바로 여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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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의 시조는 연작형식의 시적 정착이라는 양식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이병기의 연작시조는 단형의 평시조를 중첩시켜 시적 의미를 확대시켜 놓고자 하는 형식적 실험의 소산이다. 이것은 시조의 단형적 형태가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시도와 상통한다. 이미 연시조의 형태는 조선시대 이퇴계의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나 윤선도의 오우가(五友歌)와 같은 작품을 통해 그 시적 가능성을 입증받았던 형식이다. 최남선이 개화 계몽 시대에 새로운 시작의 실험을 행하면서 연시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시적 형식에 대한 배려보다는 그 형식에 담아내고자 하는 내용의 풍부성을 감당할 수 있는 시적 형식의 추구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때문으로 이해된다.

 

다시 옮겨심어 분에 두고 보는 파초(芭蕉)

설레는 눈보라는 창문을 치건마는

제먼저 봄인 양하고 새움 돋아 나온다

 

청동(靑銅) 화로 하나 앞에다 놓아 두고

파초(芭蕉)를 돌아보다 가만히 누웠더니

꿈에도 따듯한 내 고향을 헤매이고 말았다

 

-파초(芭蕉)

 

이병기의 연시조 파초는 파초 가꾸기의 일상을 소재로 삼고 있는데 특이하게도 이 작품에서는 파초의 널따란 잎을 볼 수 없다. 겨울나기를 위해 잎과 줄기를 잘라내고 대궁만 남겨 뿌리를 화분에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파초는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잎이 타원형으로 크게 자란다. 그 잎의 싱그러움을 사랑하여 예전부터 관상용으로 많이 가꾼다. 옛 그림에도 파초도(芭蕉圖)’가 많다. 원래 중국 남방 지역 온난한 땅에서 자라는 다년초로 우리나라로 옮겨진 귀화식물(歸化植物)’이다. 겨울 추위를 지낼 수 없기 때문에 밖에 그대로 두면 뿌리가 얼어 죽는다. 그러므로 늦가을에 이를 캐내어 화분에 심어 실내로 옮겨 놓아야 한다. 파초 1연에서 초장인 다시 옮겨 심어 분에 두고 보는 파초는 파초의 겨울나기를 요약적으로 제시한다. 늦가을까지 넓고 푸른 잎을 자랑하던 파초가 아니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줄기와 잎이 모든 잘린 채 화분에 옮겨 심은 상태로 실내에 놓여 있다. 중장에서는 바깥의 눈보라를 보여준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찬 겨울의 험한 날씨를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마지막 종장에서 시적 분위기가 전환된다. ‘제 먼저 봄인 양하고 새움 돋아나온다.’ 시조의 격식(3.5.4.3)을 지키면서 표현의 변화를 살린다. 놀랍게도 실내에 들여다 놓은 파초의 대궁에서 새 움이 돋아나고 있는 것이다. 파초의 넓은 잎이 자랑하는 기품과는 어울리지 않지만 이 작은 새싹을 통해 생명이 움트고 있는 순간을 보여주는 것이다. 소재를 발견하고 거기에 새로운 감각을 부여하는 솜씨가 놀랍다. 2연으로 이어지는 시상의 흐름도 흥미롭다. 바깥의 추운 날씨를 다시 강조하는 뜻으로 청동화로가 등장한다. 시적 화자는 파초 화분을 살피다가 화로 옆에 누워 잠이 든다. 그리고 마지막 종장에서 파초와 시적 화자가 그대로 하나가 되어 따뜻한 고향을 헤매게 된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셈이다.

이병기의 파초는 연작시조라는 시조의 형태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긴장과 이완, 통합과 균형의 미를 자랑한다. 작품의 전체적인 짜임새를 연작의 기법이라는 차원에서 좀더 세밀하게 분석해 보면, 시적 주제의 형상화 과정이 예사롭지 않은 긴장을 내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기서 연작의 형식은 시조의 특성으로 자리잡은 형태적인 요소로서 단형시조의 시적 확대를 의미한다. 시조가 담아야 하는 시적 의미 내용이 그만큼 다양하고 포괄적인 것이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 작품은 외형적으로 각각 독립된 두 편의 평시조를 병렬적으로 연결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텍스트의 구조 자체가 통합된 하나의 작품을 위해 견고하게 짜여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 시조에서 연작을 통한 형식적인 확장에 전체적인 균형을 부여하며 시적 긴장을 이끌어 가는 것은 형식적 고안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시적 주제의 응축과 그 확산의 과정을 전체적으로 통제하고 있는 내적인 질서에 의해 가능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형식적인 실험을 통해 개방적이면서도 유기적인 연시조 형식의 창조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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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의 시조에서 발견하게 되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시조의 형태적 고정성을 벗어나기 위해 파격을 추구했던 사설시조에 대한 실험이다. 시조의 장르 변화 과정에서 볼 때, 평시조의 극복 양식으로 이해되고 있는 사설시조의 형태적 특성이 이병기의 시조에 와서도 발전적으로 계승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되는 현상이다. 모든 예술의 형태는 그 독자적인 생명력을 아무리 강조한다 하더라도 언제나 그것이 존재할 수 있는 시대적 위상에 조응하기 마련이다. 사설시조의 등장은 조선 후기 서민의식의 성장과 새로운 미의식을 기반으로 한다. 사설시조에서 볼 수 있는 고정적인 율격 파괴와 산문화 경향은 조선 후기 사회 서민층의 미의식을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되고 있는 게 보통이다. 사설시조는 비교적 고정적인 율격을 지켜 나가려고 하는 부분(초장, 그리고 종장의 첫머리)과 고정적인 율격을 파괴하고자 하는 부분(중장, 그리고 종장의 첫머리를 제외한 부분)이 서로 결합되면서 형식상의 긴장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설시조의 특성에 이병기는 어떤 방식으로 현대적 성격을 부여하고 있는지 다음의 두 작품을 살펴보기로 한다.

 

(1)

 

해만 설핏하면 우는 풀벌레 그 밤을 다하도록 울고 운다

가까이 멀리 예서제서 쌍져 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뚝 그쳤다 다시 운다 그 소리 단조하고 같은 양 해도 자세 들으면 이놈의 소리 저놈의 소리 다 다르구나

남몰래 겨우는 시름 누워도 잠 아니 올 때 이런 소리도 없었은들 내 또한 어이하리

-풀벌레

 

(2)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

사람들이 쏟아져 나온다 이 골목 저 골목으로 갓쓴 이 벙거지쓴 이 쪽진 이 깎은 이 어중이 떠중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엉기정기 흥성스럽게 오락가락한다 높드란 간판 달은 납작한 기와집 퀘퀘히 쌓인 먼지 속에 묵은 갓망건 족두리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 썩은 비웃 쩌른 굴비 무른 굴비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붙이 십전 이십전 싸구려 싸구려 부르나니 밤이 깊도록 목이 메이도록 저 남산 골목에 우뚝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해 전 조고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

- 야시(夜市)

 

앞에 인용한 이병기의 풀벌레 야시전형적인 사설시조의 형태를 보여준다. 풀벌레의 경우를 먼저 살펴보면 시적 텍스트에서 이미 초장, 중장, 종장을 명확하게 구분해 놓고 있다. 초장은 날이 저물고 울기 시작하는 풀벌레 소리를 시상의 발단으로 제시한다. ‘해만 설핏하면이라는 말은 해가 저물녘에 사방이 어둑해지는 상황을 말한다. 풀벌레 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밤이 다하도록 그치지 않는다. 사방이 소란스럽다면 풀벌레 우는 소리가 들렸을 리 없다. 고요하고 적막한 밤이 이어지는 가운데 시상의 흐름을 도와주는 시간적 배경과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는 셈이다. 중장은 가까이 멀리에서부터 다 다르구나까지에 해당한다. 중장에서 사설시조의 서술성의 묘미를 최대한 살려낸다. 시적 진술에는 대조, 열거, 반복, 지속, 영탄의 방법이 모두 동원된다. 풀벌레 소리를 때로는 설명하고 때로는 묘사하면서 의 그 특징적 인상을 잡아내어 다채롭게 들려준다. 풀벌레 소리의 거리감과 그것이 들려오는 장소(가까이 멀리 예서제서)를 먼저 헤아리고 그 소리의 특징(쌍져 울다 외로 울다 연달아 울다 뚝 그쳤다 다시 운다)을 가늠한다. 저절로 음악적 가락이 살아난다. 이 과정에서 밤의 고요와 적막이 깨진다. 풀벌레들이 들려주는 합창의 한가운데에 시적 화자가 들어서 있다. 이 작품의 시적 주제가 암시되는 부분은 종장이다. ‘남몰래 / 겨우는 시름에서 3음절과 5음절의 음수를 지킴으로써 시상의 전환이 이 부분에서부터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시적 화자는 밤에 홀로 자리에 누워있다. 자세히 밝히지 않았지만 고달픈 세상살이에 혼자서 시름이 없지 않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에 들지 못한다. 밤의 적막 속에서 들려오는 것이 바로 풀벌레 소리다. 화자의 마음속의 시름도 그 소리만큼 많을 것인데 바깥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가 화자의 시름에 더해지고 어지러운 머리에 가득해진다. 세상의 온갖 잡사(雜事)의 시름이 풀벌레 소리로 바뀌는 것이다. 그리고 이 풀벌레 소리를 시조의 시적 형식에 담아 사설조로 풀어낸다. 이 파격의 사설이 하나의 시적 풍경을 만들어내고 실감의 정서를 자아낸다. 이병기가 아니고서는 흉내내기 어려운 시적 실험을 여기서 확인할 수 있다.

야시는 일상적 생활 감정을 시적으로 표현하면서도 전통적인 사설시조가 보여주었던 풍자와 야유와 해학의 장면과 그 느낌까지도 그대로 살려내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서울 장안의 명물이 된 야시장의 풍물 속에 일제 강점기의 삶의 현실과 그 모순에 대한 풍자와 조소까지 곁들여 놓고 있기 때문이다. 초장은 날마다 날마다 해만 어슬어슬 지면 종로 판에서 싸구려 싸구려 소리 나누나가 된다. 평시조의 초장에 요구되는 3.4.3.4라는 음수율의 고정된 격식에 약간의 파격을 가하고 있다. 야시장의 시공간적 배경을 그려내면서 싸구려라는 장사치들의 목청을 그대로 옮겨놓고 있다. 중장은 시장에 구경 나온 사람들과 장사꾼들의 행색, 그리고 가게에 늘려 잇는 물건들을 흥미롭게 묘사한다. 사설시조에서 사설을 개방적으로 확장할 수 있는 부분이 중장이다. 여기서 사설시조의 열거와 반복, 대조와 비교, 해학과 비판이 살아나야 한다. 먼저 시장거리의 사람들의 행색이다. 갓 쓴 사람과 벙거지를 쓴 사람, 머리에 쪽을 진 아녀자와 머리를 단발한 사람, 이런 저런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오고간다. 앞뒤 구절을 서로 짝 짓고 맞세워 자연스럽게 리듬이 생기도 가락이 살아난다. 야시장에서 물건을 가게는 궁색하기 그지없다. 납작한 기와집에 간판만 높다랗게 달았다. 진열해 놓은 물건이라고는 먼지 쌓인 묵은 갓망건 족두리처럼 이제 한 시절 지나버린 것들이거나 청홍실붙이 어릿가게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처럼 싸구려 잡화들이다. ‘청홍실붙이 어릿가게는 여성들이 바느질이나 수놓기에 필요한 색실이나 바느질 도구들을 파는 가게이다. ‘여중가리 양화 왜화붙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잡동사니들인데, 물 건너온 양화(洋貨), 서양 물건들과 일본에서 들어온 자잘한 왜화(倭貨)붙이가 대부분이다. 식료품들도 진열되어 있다. ‘썩은 비웃 쩌른 굴비 무른 굴비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붙이가 대부분이다. 생선이라고는 다 상해가는 청어와 절인 굴비뿐이고 과일과 풍성귀는 이미 무르고 시들었다. 그래도 장사꾼들은 싸구려를 외친다. 이 작품의 종장은 저 남산 골목에 우뚝 우뚝 솟은 새 집들을 보라 몇 해 전 조고마한 가게들 아니더냐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 그나마 찬바람만 나면 군밤 장사로 옮기려 하느냐라는 시적 화자의 말로 끝맺는다. 종장의 첫 구절 저 남산 / 골목에 우뚝‘3.5’의 음수를 고정하는 사설시조의 형식적 틀을 그대로 지켜내고 있는 부분이다. 이 첫 구절에서 시상의 전환이 가능해지고 시적 주제의 결말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지적하고 있는 저 남산 골목 우뚝우뚝 솟은 집1920년대 서울의 주거지역과 상권의 형성을 알아보면 더욱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일제 강점 후 서울의 남산 기슭은 모두 일본인들이 차지한다. 남산에 신사(神社)를 짓고 후암동 일대에는 일본 군대의 주둔지(지금의 미군기지)로 삼았으며, 남산 북쪽 기슭은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단장했다. 일본 총독이 사는 관저도 거기에 세웠으며 현재의 명동 충무로 일대를 일본인 상업지역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이 골짜기에 우뚝 우뚝 솟은 집이 꼴사납게 보였을 것은 분명하다. ‘어찌하여 밤마다 싸구려 소리만 외치느냐라는 시적 화자의 말 속에는 같은 서울 장안이면서 번창하는 일본인들 구역과 여전히 가난에 찌들어 있는 우리네의 모습을 대조하면서 이 모순의 현실을 비아냥대는 조소의 목소리를 담고 있다. 그런데 이제 찬바람이 나면 이 초라하고도 궁색스런 야시장도 문을 닫는다. 당시 신문 보도를 보면 4월부터 10월까지만 야시장을 허가했기 때문이다. 가난한 장사꾼들이 일터를 잃게 된다. 그러니 찬바람만 나면 군밤장사로 옮기려느냐라고 물을 수밖에 없다. 찬바람 부는 길거리로 내몰려 군밤장사로 살아야 하는 궁핍한 삶의 현실을 확인하는 셈이다.

야시는 일제 강점기 서울 종로에 개설된 야시장의 풍물을 소재로 삼고 있지만 결코 시장거리의 흥성스런 장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시적 화자가 야시장의 초라한 행인들과 보잘 것 없고 궁색스런 가게의 물건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화자는 이것을 장사꾼의 목이 메도록 외치는 소리 그대로 싸구려라고 옮겨 놓는다. 실제로 이 작품 속에 그려진 야시장에는 생동감이 없고 삶의 활력이 보이지는 않는다. 값나가는 물건이라는 것이 있을 턱이 없는 허름한 가게에는 보잘 것 없는 잡화들만 늘어놓고 있다. 썩은 청어, 무른 굴비는 전혀 신선할 리가 없고, 무른 과일, 시든 푸성귀는 초라한 삶의 모습과 그대로 일치한다. 이 초라한 야시장의 풍경을 더욱 초라하게 하는 것이 남산 골짝의 높이 솟은 새 집들이다. 서울 장안에서 남산골과 종로통이 부자와 빈자의 공간으로 구획되는 것은 우리네가 선택한 것은 아니다. 식민지 현실이 만들어낸 삶의 모순구조가 서울 장안을 그런 식으로 편 갈랐던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노리고 있는 것은 그런 현실의 음울(陰鬱)이 아닐까 생각된다.

 

4

이병기는 현대시조의 시적 형식에 감각성이라는 고도의 미의식을 부여함으로써 현대시조가 추구하는 시적 모더니티를 온전하게 구현하고 있다. 이병기의 시조는 전아한 기품을 자랑하고 있지만, 기실은 단조로움에 빠져들기 쉬운 시적 진술에 특유의 감각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병기는 시조를 통해 우리말의 음절량과 그 이음새에서 나타나는 말의 마디를 자연스럽게 변형시키면서 율격을 지켜나간다. 이것은 시조의 시적 형식이 어떤 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요건이 된다. 난초와 같은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절제된 감정과 언어의 감각을 이병기 시조의 미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1

 

한 손에 책을 들고 조오다 선뜻 깨니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

난초는 두어 봉오리 바야흐로 벌어라

 

2

 

새로 난 난초 잎을 바람이 휘젓는다.

깊이 잠이나 들어 모르면 모르려니와

눈뜨고 꺾이는 양을 차마 어찌 보리아

 

산듯한 아침볕이 발 틈에 비쳐들고

난초 향기는 물밀 듯 밀어오다

잠신들 이 곁에 두고 차마 어찌 뜨리아.

 

3

 

오늘은 온종일 두고 비는 줄줄 나린다.

꽃이 지던 난초 다시 한 대 피어나며

고적한 나의 마음을 적이 위로하여라.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

외로 돌아 앉아 책을 앞에 놓아두고

장장(張張)이 넘길 때마다 향을 또한 일어라.

 

4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본디 그 마음은 깨끗함을 즐겨하여,

정한 모래 틈에 뿌리를 서려두고,

미진(微塵)도 가까이 않고 우로(雨露)받아 사느니라.

 

- 난초 1. 2. 3. 4

난초는 흔히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일컫는다. 그 고결한 자태와 향취가 빼어난 학식과 인품을 갖추고 있는 군자에 비유된다는 뜻이다. 정지용이나 김영랑도 난초를 노래했고, 신석정의 시에도 난초가 등장하는 것이 많다. 하지만 난초의 시인이라면 누구나 이병기를 손꼽는다. 평생을 시조 사랑으로 살았던 이병기는 그 곁에 늘 난초를 두고 아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했다는 고서 몇 권과 술 한 병, 그리고 난초 두서너 분이면 삼공(三公)이 부럽지 않다.’는 말에서 그가 얼마나 난초를 좋아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병기는 난초의 고절한 기품에만 만족한 것이 아니다. 그는 난초에 섬세한 감각을 불어넣는다. 그가 그리는 난초는 군자니 고절이니 하여 관념화되어 버린 난초가 아니다. 이병기는 자연 속에서 호흡하고 꽃을 피우고 바람에 꺾이고 꽃이 떨어지는 살아 있는 난초를 찾아낸다. 그의 시조 속에서 난초는 살아 움직인다.

앞에 인용한 난초 1부터 난초 4를 보면 난초의 새로 꽃이 피어나고 새 잎이 자라다가 바람에 꺾이기도 하고 그윽한 향기를 흩어내는 모습 난초를 곁에 두고 아끼는 시적 화자의 심경을 함께 감각적으로 그려낸다. 난초 1은 평시조의 형태로 난초의 개화를 간략하게 그려낸다. ‘드는 볕 비껴가고 서늘바람 일어오고라는 짤막한 구절에서 난초가 자라나 꽃을 피우는 과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적당한 그늘과 바람이 난초를 키우는 것이다. 난초 2는 전체 2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1연에서는 난초의 새 잎이 바람에 꺾이는 모습을 그려낸다. 차마 눈을 뜨고는 그 모습을 보기 힘들 정도로 난초의 모습이 애잔하다. 여기서 난초는 고결함이라든지 지조라든지 하는 관념과는 아무 상관없는 하나의 힘없는 풀꽃에 불과하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난초에 깃들인 작은 생명의 움직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바람이 그 연한 새 잎을 그대로 두지 않는다. 시적 화자는 바람에 연한 새 잎이 꺾이는 모양에서 인생을 발견하다. 모진 바람과 힘없는 난초는 세파(世波)와 인생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그 모습이 한없이 안쓰럽다. 눈을 뜨고 볼 수 없다고 말할 정도로 마음이 아프다. 2연에서는 난초의 향기를 그려낸다. 난초는 새 잎이 꺾인 채 꽃을 피우고 향기를 뿜는다. 그 향기에 취하여 잠시도 그 곁을 떠나기 어렵다. 난초 3는 비가 오는 날 다시 한 대 꽃이 피어나면서 향기를 전하여 우울한 시적 화자의 마음을 달래준다. 난초와 친화하는 자세를 그대로 보여준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난초를 향하는 시적 화자의 태도이다. ‘나도 저를 못 잊거니 저도 나를 따르는지라는 구절은 이미 시적 화자와 난초가 서로 하나로 동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난초 41연에서 빼어난 가는 잎새 굳은 듯 보드랍고 / 자짓빛 굵은 대공 하얀 꽃이 벌고 / 이슬은 구슬이 되어 마디마디 달렸다.’ 라는 표현은 섬세한 언어 감각이 이루어낸 절묘한 묘사가 두드러진다. 초장에서는 시각적 요소와 촉각적 요소를 결합했고, 중장은 자짓빛 대공하얀 꽃의 색채 감각이 선명하게 대조된다. 종장에서 이슬구슬의 비유는 더욱 정교하게 이미지를 배치하고 있다. 이와 같은 감각적 묘사를 통해 난초는 그 섬세하게 피어나는 꽃임에도 전통적으로 덧씌워져 있던 가치와 이념의 외피를 완전히 벗어난다. 난초는 이렇게 연약하고 부드럽고 아름답고 향기롭고 기품 있는 꽃으로 다시 태어난다. 2연에서는 바로 이러한 난초의 아름다움에 더하여 그 정결한 모습을 그려놓고 있다. 이처럼 이병기는 시조의 시적 형식에 감각성이라는 고도의 미의식을 부여하고 있는데, 연시조 난초가 바로 그 구체적인 예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현대시조는 그 형식적 특성 때문에 전통적으로 지켜온 전아한 기품만 가지고서는 시적 모더니티를 온전하게 구현하기 어렵다. 이병기는 고정된 시조의 시적 형식과 그 진술 방법에 특유의 감각성을 부여한다. 그리고 우리말의 음절량과 그 이음새에서 나타나는 말의 마디를 자연스럽게 변형시키면서 율격을 살려낸다. 이것은 시조의 시적 형식이 어떤 틀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주는 요건이 된다. 난초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절제된 감정과 언어의 감각을 이병기 시조의 미학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5

이병기는 현대시조가 연작성에만 안주함으로써 시적 형식의 압축미를 얻지 못한 채 기교와 수사에 얽매인 산문으로 기울고 있는 점을 문제삼아 시조의 격조를 강조한 바 있다. 이병기가 내세운 격조문제는 현대시조가 도달해야 하는 궁극의 지점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조에서의 격조는 그 작자 자기의 감정으로 흘러나오는 리듬에서 생기며, 동시에 그 작품의 내용 의미와 조화되는 것이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딴 것이 되어버린다. 공교롭다 하여도 죽은 기교일 뿐이다. 그러므로 격조는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시적 상상력의 감각성을 의미한다. ‘격조는 시조라는 단형의 시 형식에 동원되는 모든 단어에 생기를 넣어주며 사고와 감정의 기저에까지 침투하는 감각을 말한다. 이러한 상상력은 물론 언어와 그 의미를 통해서 작용하지만 시조의 경우 전통적 의식과 가장 현대화된 정신을 결합하는 것이다. 이병기는 격조를 내세움으로서 현대시조의 문학적 성격을 미학적 차원에서 새롭게 정립하고자 했던 것이다. 이병기의 현대시조가 시조로서의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현대적인 시적 감각을 살려내고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이병기의 현대시조는 시조의 부흥이 아니라 새로운 시적 형식과 감각의 발견에 해당한다. 이것은 시조라는 형식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하나의 주제를 발견하고 그 주제에 적합한 새로운 시적 형식과 언어와 감각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발견이라는 말이 이 모든 과정 또는 수사적 방법을 지칭하는 데에 가장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한다. 발견으로서의 형식과 감각은 고정된 틀의 확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적 형식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시적 대상을 새로운 언어로 사고하는 방법이며 과정이다. 이병기의 시조에서 확인되는 시적 형식과 그 감각은 일상어의 시적 활용이라는 점에서 현대시조의 새로운 탄생과 직결된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체의 관념어를 배제하고 감각적인 일상어만으로 이루어진 이병기의 시조는 시적 언어의 감각적 구현에 있어서 현대시조가 도달할 수 있는 어떤 궁극의 지점에 도달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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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 대사전

책머리에

 

1_문학 작품

1.

국문 시 / 일본어 시

2. 소설

3. 산문

 

2_미술 작품

1. 자화상 및 초상

2. 도안 및 삽화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표지 /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주소록 /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사인판 / 박태원 결혼식 피로연 방명록 휘호 / 잡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 / 아동잡지 가톨릭소년표지 도안 / 김기림 시집 기상도표지 도안 / 단편소설 날개삽화 1 / 단편소설 날개삽화 2 / 단편소설 동해삽화 1, 2

3.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연재 삽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연재 삽화 1~연재 삽화 28

 

3_작품 속의 인명 및 작품명

 

4_이상의 삶과 문학

이상의 출생 / 이상의 성장 과정 /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 /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 다방 제비시절 / ‘구인회시절 /동경 시절

 

부록_이상의 사진 자료와 이상 연구 참고 문헌

 

[출판사 서평]

 

이상문학대사전李箱文學大事典은 올해 80주기를 맞는 이상이 남긴 모든 문학 예술적 자취를 사전식으로 망라하여 새롭게 정리한 책이다. , 한 권으로 만나는 이상의 문학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_문학 작품에서는 이상의 문학 작품(, 소설, 수필 및 산문)의 서지 사항과 그 내용에 대한 해설을 중심으로 꾸몄다. 이상은 희대의 천재 예술가로 평가된다. 어떤 사람은 그의 문학이 드러내고 있는 파격적인 기법으로 인해 그를 전위적 실험주의자로 지목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를 19세기를 거부한 반전통주의자였다고 지목한다. 한국문학의 모더니티의 문제성을 초극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문학이 보여주는 난해성에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상의 문학은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그 성격이 고정되는 것을 거부한다. 해마다 수많은 평문과 연구 논문이 이상 문학을 위해 발표되고 있지만, 그 관심과 새로운 접근에도 불구하고 이상 문학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상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자부하는 이 책이지만 이상 문학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2_미술 작품에서는 이상이 남긴 미술 작품에 대한 정리?소개로 꾸며졌다. 이상이 직접 그린 몇 편의 초상화, 이상이 도안한 잡지 표지화, 작품 속의 삽화 등을 복원하여 수록했다. 특히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신문 연재 당시 이상이 그린 삽화를 확대?복원하여, 연재 당시의 소설 원문의 내용을 통해 박태원이 소설 속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과 이상이 자신의 삽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내용이 어떤 관계였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화가를 꿈꾸었던 이상의 미술에 대한 열망과 함께 사물을 보는 이상의 독특한 시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3_작품 속의 인명 및 작품명에서는 이상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던 인명과 작품에 대한 조사 내용을 사전식으로 배열했다. 이상은 자신의 글 가운데에서 특이한 패러디의 방식으로 다른 문인의 이름이나 작품을 인유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기 문학의 세계와 대비하기 위해 다른 문인들의 작품들을 언급한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상 문학이 지니고 있는 특징적인 경향을 이해하는 데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서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4_이상의 삶과 문학에서는 이상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조사?공개하였다. 이 책에서 이상의 호적부 제적등본을 다시 공개했으며, 그 부친의 이름을 김영창’(김연창이라고 소개된 책이 많음)으로 바로잡았다. 이상의 경성고등공업학교 학적부를 통해 그가 건축학과 수석 졸업자였음을 공식 확인하였고, 1929년 일본인 중심의 조선건축회정회원으로 입회했던 사실도 자료를 통해 다시 밝혔다. 1936년 이상이 동경으로 떠난 날짜도 1024일로 새롭게 추정했으며, 그가 묵었던 동경 간다의 하숙집 주소도 동경 간다구 진보정 3정목 10-1번지 4로 확정해 놓았다.

부록_이상의 사진 자료와 이상 연구 참고 문헌에서는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추억의 가지가지를 공개한다. 이 사진첩은 1929년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국인 학생 17명을 위해 이상이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다. 이 사진첩의 구성과 편집을 보면 이상이 얼마나 조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상 연구에 참고해야 하는 중요 연구서와 자료를 목록화하여 추가했다.

 

이상의 모든 것-지은이 권영민의 책머리에중에서

이상의 짧은 생애는 삶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는 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의 개인적인 행적과 문단 활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기보다는 오히려 과장되거나 신비화되어 왔다. 특히 그의 문단 진출 과정, 특이한 행적과 여성 편력, 결핵과 동경에서의 죽음 등은 모두 일종의 일화처럼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상의 문학 텍스트 자체도 이러한 삶의 특징과 결부되어 잘못 해석되거나 왜곡 과장된 경우가 허다하다. 이상의 삶은 명확한 사실관계의 규명이 없이 어물쩍 넘어가거나 엉뚱하게 포장되면서 그가 살았던 삶 자체가 하나의 스캔들이 되고 말았다. 기왕의 연구자들이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자명해졌을 문학 텍스트마저도 엉뚱한 설명이 더해지고 해석이 과장되면서 애매모호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게 된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이상 문학은 그 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독해 작업도 없이 연구자나 평자의 자의적 해석에 이끌려 엉뚱한 의미로 과장되고 왜곡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모든 평가는 특이하게도 그의 천재성에 집중된다. 객관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이 천재성(?)으로 인하여 이상 문학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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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육필(肉筆) 원고

 

 

나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글을 쓴다. 글자판을 두드리면 컴퓨터 화면에 글자가 찍힌다. 내가 글자판을 잘못 눌러도 어지간한 낱말은 컴퓨터 자체 내에서 잘잘못을 가려내어 철자법에 맞춰준다. 간혹 잘못 쓴 부분이 생기거나 추가해야 할 내용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잘못된 부분을 지워버리고 다시 고쳐 쓰기가 아주 쉽다. 글의 분량도 금방 계산해주고 글자의 크기나 모양도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하니 그 편리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글쓰기가 모두 끝나면 원고를 파일 상태로 컴퓨터에 보관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컴퓨터를 켜고 그 파일을 열어볼 수 있다. 원고를 부탁해온 출판사 편집부에는 이메일로 파일을 전송하면 그만이다.

컴퓨터가 널리 이용되기 전에는 누구나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썼다. 원고지는 정방형의 칸을 일정하게 배열해 거기에 글자를 써넣도록 만든 용지이므로 글자 모양이나 글의 길이를 계산하기 쉽고 공백을 이용하여 글을 고쳐 쓰기도 편하다. 큰 신문사나 잡지사에서는 아예 자기네 전용으로 원고지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원고지에 글을 쓰는 방식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활판 인쇄가 널리 보급되면서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전부터 이미 원고지를 이용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출판 인쇄 작업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규격화된 원고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글쓰기에 알맞게 정해진 크기의 용지를 사용했다.

나도 당연히 글을 쓰면서 원고지 뭉치를 끼고 살았다. 학생시절에 썼던 리포트는 모두 원고지에 작성했다. 잉크와 펜으로 쓰던 원고가 만년필 글씨로 바뀌었고 편리한 볼펜이 동원되기도 했다. 내 대학 졸업논문은 펜글씨로 원고지에 썼고, 1980년대 초반에 제출했던 박사학위 논문도 모두 2백자 원고지 천 매 가까운 분량을 만년필로 원고지에 작성했다.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인쇄소에 부탁하여 나만을 위한 원고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다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원고지에 급한 글을 썼던 적도 있고, 밤늦도록 원고지를 책상 위에 펼쳐두고 마감날짜에 맞추기 위해 머리를 짜내기도 했다. 문단 초년생 시절 원고지에 글을 써내려가던 내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컴퓨터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원고지와 멀어졌다. 컴퓨터에 내 손 글씨를 모두 빼앗겨버린 셈이다. 나는 문학 연구 자료들을 쉽게 정리하고 보관하면서 컴퓨터의 편리함에 깊이 빠져들었다. 컴퓨터로 쓰는 글은 그 자체가 완성본처럼 그대로 남는다. 원고지에 글을 쓰던 때의 초고(草稿)가 컴퓨터에서는 사실상 사라진다. 글을 원고지에 쓰게 되면 당연히 초벌 원고가 남는다. 물론 초고 상태의 글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서 얼마든지 그 내용을 고치거나 바꿀 수가 있다. 글의 전체 흐름을 헤아리면서 초고를 손질하면 어느 정도 글이 정리된다. 나는 버릇처럼 이 초벌 원고를 다시 원고지에 깨끗이 베껴 쓰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리고 글을 완성 한 후에 남는 초벌 원고가 아까워서 한동안 그걸 책장 속에 보관했다. 초고는 글쓰기의 첫 단계에서 이루어졌던 생각의 발단을 그대로 간직하여 보여준다. 원고지 위에 어지럽게 고쳐 쓰거나 덧붙인 글귀를 보면 생각의 흐름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면서 보관했던 초벌 원고들을 모두 버려야 했고, 컴퓨터 사용의 편리함에 빠져들면서 초고의 소중함 자체마저 잊고 말았다. 컴퓨터 글쓰기는 생각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작업이다. 새로운 생각이나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전의 생각을 그대로 없애버리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글쓰기가 이루어지니 초고라는 것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내가 자료 조사를 하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우리 문인들의 원고지 글씨 가운데에는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 원고와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원고에 담긴 사연도 사연이지만 원고지의 칸을 메워나간 글씨 자체가 시인의 기품과 그 시 정신에 그대로 어울려서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료들이 다행히도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고 전란을 겪으면서도 온전히 보존된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소설가 채만식의 육필 원고와 시인 김수영의 육필 원고도 이미 영인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지금도 손으로 직접 원고를 쓰는 원로 문인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비평가 김윤식 선생은 그동안 백 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 엄청난 글들을 모두 원고지에 직접 쓰신 것으로 유명하다. 볼펜 글씨로 꾹꾹 눌러쓴 김 교수의 글은 잡지사 편집부에서는 늘 화제거리였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도 손 글씨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모두 썼고 지금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벌교에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의 전시실에 어린애 키만큼이나 높게 쌓여 있는 소설의 육필 원고를 보고는 모두가 입을 벌린다. 소설가 김 훈 선생은 연필 글씨가 유명하다. 그 독특하고도 품격이 느껴지는 글씨를 일반인들이 컴퓨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서체를 개방한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원로 시인 김남조 선생은 아예 컴퓨터를 모르고 살아오셨는데, 지금도 굵은 싸인펜을 잡고 원고를 쓰신다. 그 글씨에서 순정한 시 정신을 지켜 오신 영혼의 힘 같은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은 수천을 헤아린다. 이분들 가운데 손 글씨로 원고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아마도 대부분 컴퓨터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원고지 위에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를 만나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가끔 우리 문인들이 직접 손으로 써내려간 육필 원고를 모두 한자리에 모아둘 수는 없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일본이 자랑하는 여러 곳의 문학관에 가보면 가장 중요한 볼거리가 문인의 육필 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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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의 귀촉도그리고 소쩍새

 

  

초저녁부터 멀리 뒷산에서 소쩍새가 울어댄다. 소쩍다 소쩍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쩍 소쩍하기도 한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풍년이 들까를 헤아렸던 할머니 생각도 난다. 밤늦도록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가 한없이 처량하다. 나는 소쩍새 울음소리를 잘 알아들으면서도 소쩍새를 직접 본 적은 없다.

 

시인 서정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귀촉도라는 시가 있다. 시집 󰡔귀촉도(歸蜀途)󰡕(1948)의 표제작이다. 시의 제목인 귀촉도라는 한자어는 글자 그대로 풀이할 경우 ()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뜻이 될지 모르겠다. 시인 자신은 이 작품 말미에 두견이라고도 하고 소쩍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자규(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귀촉도그런 발음으로써 우는 것을 말한다라고 부기해 두고 있다.‘귀촉도라는 말을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것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쩍새를 두고 두견, 접동새, 자규 등의 별칭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소쩍새와 두견새는 그 종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 권오길이 찾은 발칙한 생물들>이라는 책을 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두견새는 뻐꾸기의 일종이라 녹음에 헹군 울음을 명랑하고 경쾌하게, 싱그럽고 구성지게 주로 낮에 노래하는데, 소쩍새는 올빼미를 닮은 놈으로 가슴에 사무치고 에는 가엽고 애처로운 울음을 야밤에 울어댄다는 것이다. 사전에서마저 두견이와 소쩍새를 뒤죽박죽 혼동하여 둘 다 두견이, 접동새, 귀촉도, 자규, 불여귀, 소쩍새로 섞어 적어 놓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책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두견이는 4월경에 동남아시아에서 우리나라로 날아와 번식하고 9월경에 남하하는 여름철새이다. 몸길이 약 28센티미터로 얼핏 보면 뻐꾸기를 빼닮았으나 몸집이 훨씬 작아 영어로 ‘little cuckoo’라 부른다. 맑고 경쾌한 뻐꾸기 울음에 비해서 두견이 소리는 매끄럽지 못하고 좀 둔탁한 편이지만, 수컷은 나뭇가지에서 날면서 "쿗쿗 쿄끼쿄쿄, 쿗쿗 쿄끼쿄쿄, 삐삐삐삐" 하고 재빠르고 멋들어지게 울어 댄다. 두견이 노랫소리는 결코 가엽고 슬프거나 가련하고 애잔하지 않으며 되레 경쾌하고 상쾌한 기분까지 든다. 소쩍새도 여름철새이다. 몸길이 20센티미터 정도로 올빼밋과에 속한다. 우리나라에는 4월쯤에 날아와 10월까지 머물러 번식한다. 회갈색 바탕에 검정과 흰색의 얼룩무늬가 나 있어 침엽수의 수피(樹皮)와 비슷하게 위장하고, 사람 낌새를 채면 기겁하여 숨기에 역시나 관찰하기 어렵다. 깜깜한 야밤에 "춋쵸, 촛쵸, 소쩍", "촛촛쵸, 촛촛쵸, 소쩍다, 소쩍다" 하고 운다. 우는 새의 입속이 핏빛처럼 붉어서 옛사람들은 피를 토하면서 죽을 때까지 운다고 믿었다 

시인 서정주가 귀촉도를 처음 발표한 것은 1943년 잡지춘추(春秋)2호에서였다. 이 작품은 서정주의 시적 변모과정의 한 단계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三萬里).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三萬里).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목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귀촉도는 사랑하는 임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각 연마다 시적 정황을 바꾸어 그 깊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1연에서는 시적 화자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된 임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된 임과 이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피리 불고가는 길에 진달래 꽃비라고 묘사한 대목은 호사스런 상여(喪輿)의 행렬을 떠올리게 한다. 슬픔을 억제하기 위한 시적 장치에 불과하다.‘서역 삼만리라든지 파촉 삼만리라는 거리는 시적 화자가 심정적으로 느끼는 죽은 임과의 아득한 거리를 강조하기 위해 동원한 말이다. 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난 것이다. 2연은 임을 떠나보내면서 시적 화자가 느끼게 된 회한(悔恨)의 정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이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은 누구에게도 아름답게 보일 필요가 없다. 그 머리를 은장도 베어내어 그것으로 메투리를 만들어 임이 신고 가도록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임에게 모든 것을 다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사무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연은 밤이 늦도록 울어내는 소쩍새의 울음을 그려낸다. 밤하늘에는 굽이굽이 은하수가 흐르는데 소쩍새는 목이 터지도록 울어댄다. 그런데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라는 마지막 행에서 소쩍새의 실체가 드러난다. 바로 하늘 끝으로 홀로 가신 임과 소쩍새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쩍새는 시인 서정주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전설로 태어난 셈이다. 죽은 임은 소쩍새가 되어 그 이별을 슬퍼하며 밤새도록 울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서정주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시인 오장환의 시 귀촉도(歸蜀途)와 특이한 상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장환은 1941귀촉도라는 시를 잡지춘추(1941. 4)에 발표한 바 있는데, 여기에는 정주(廷柱)에 주는 시라는 부제를 달았다. 오장환이 일제 말기에 친구인 서정주를 생각하며 쓴 이 시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방황하던 청춘과 그 망향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의 텍스트에 파촉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막막한 거리감은 앞서 소개한 서정주의 귀촉도에서 이승과 저승의 거리로 바뀌어 그려진 바 있다.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

뜸부기 울음 우는 논두렁의 어둔 밤에서

길라래비 날려 보는 외방 젊은이,

가슴에 깃든 꿈은 나래 접고 기다리는가.

 

흙먼지 자욱히 이는 장거리에

허리끈 끄르고, 대님 끄르고, 끝끝내 옷고름 떼고,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혼자 앉아서

창 넘에 뜨는 달, 상현달 바라다보면 물결은 이랑이랑

먼 바다의 향기를 품고,

파촉의 인주(印朱)빛 노을은, 차차로, 더워지는 눈시울 안에

 

풀섶마다 소해자(小孩子)의 관들이 널려 있는 뙤의 땅에는

너를 기두리는 일금 칠십원야(一金七十圓也)의 쌀러리와 죄그만 STOOL이 하나

집을 떠나고 권속마저 뿌리이치고,

장안 술 하룻밤에 마시려 해도

그거사 안 되지라요, 그거사 안 되지라요.

 

파촉으로 가는 길은

서역 하늘 밑.

둘러보는 네 웃음은 용천 병()의 꽃피는 울음

굳이 서서 웃는 검은 하늘에

상기도, 날지 않는 너의 꿈은 새벽별모양,

아 새벽별모양 빤작일 수 있는 것일까.

 

오장환의 귀촉도에 대해 서정주는 어떻게 화답하고 싶었을까? 오장환이 느끼고 있던 현실적 고뇌를 서정주는 어떻게 해석하고 싶었을까? 이런 질문은 두 시인의 오랜 우정과 문학적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장환의 귀촉도를 두고 시인 서정주가 다시 귀촉도로 화답했다는 것은 주목해 볼 만하다.

서정주의 귀촉도는 전통적 정서의 세계를 매개로 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 이 시에서 은하에 맞닿는 시적 공간의 폭은 한의 정서의 폭과 깊이에 서로 조응한다. 시인은 한이 서려 있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한의 의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특히 원형적 심상이라고 명명할 만한 요소들이 시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이별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도 소쩍새 울음소리가 멀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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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

 

내가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을 준비하던 중에 하인즈 교수가 연락을 해 왔다. 미국 뉴욕주립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하인즈 펜클(Heinz Insu Fenkl) 교수는 무산 조오현의 시조에 빠져 있었다. <절간 이야기>의 번역 작업이 마무리 되고 있는데 원저자인 조오현 스님의 서문을 꼭 실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하인즈 교수는 불교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으며 동양 사상이나 철학에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고 있다. 그가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읽고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우선 전 세계 시인들 가운데 선시(禪詩)를 직접 쓰고 있는 현역 시인으로 무산 스님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스님의 선시는 그 의미가 아주 깊은데도 쉽게 이해된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는 스님의 단시조 가운데 선정(禪定)의 세계를 그려낸 단시조 108편을 골라 번역하여 <For Nirvana (적멸을 위하여)>(컬럼비아대학 출판부)를 발간했다. 그리고 다시 두 권의 번역 작품집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 하나가 <절간 이야기>의 영역본이고 다른 하나는 스님의 <연시조집>이다.

하인즈 교수는 내가 방학에 한국에 나가게 되면 한번 스님께 부탁을 올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미국 출발 전 날 백담사 무금선원에 연락을 취했다. 지난해 식도암 수술을 받은 후 스님은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그대로 절간에 머물러 계셨다. 나는 한국에 도착하면 선원으로 큰스님을 찾아뵙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내가 백담사를 찾은 것은 지난 524일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난 뒤였다. 시자(侍者)가 나를 스님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스님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많이 야위신 모습이었지만 그 카랑카랑하신 음성은 여전하였다. 큰스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박사님은 언제까지 버클리 대학에서 가르치실 것인가요?’

당초에 약속이 2020년까지입니다. 그런데 내년까지만 하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나는 일년이라도 빨리 돌아와 큰스님 호쾌하신 선문답을 곁에서 자주 듣고 싶다고 했다. 스님은 그렇게 약속을 바꾸어도 되는 일인가를 내게 물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박사님 돌아오실 때까지는 살아 있을 겁니다. 의사도 한 3년은 문제없다고 하였으니.’

나는 큰스님의 음성으로는 앞으로 10년도 걱정이 없어 보이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인즈 교수가 부탁한 영역 <절간 이야기>의 서문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큰스님은 손을 내저었다.

그 책에 무슨 서문이 필요가 있나요? 그냥 엮어내라고 하세요.’

나는 그 말씀에 더는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뜨려하자 큰스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꼭 내 서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반갑게 하고 대답을 드리니 큰스님은 <절간 이야기> 가운데 일곱 번째 것을 서문으로 쓰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일곱 번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부분대로 하겠다고 인사를 드린 후 방을 나왔다.

내가 거처를 나오니 시자가 나를 따라오면서 큰스님이 오늘 아주 즐거우신 모습이라고 귀띔을 했다. 그리고는 걱정스럽게 내게 말했다.

벌써 석달 가까이 조석공양을 거의 못하시지요. 겨우 미음 조금 넘기시는데 요즘은 그것도 힘들어 하십니다.’

그러면서 큰스님 암 수술하신 부위의 식도가 거의 막혀서 음식을 삼키실 수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곡차(막걸리)로 입을 추기실 뿐이라면서 한숨을 쉬었다. 외부에서 식도로 관을 삽입해야 한다는데 큰스님은 그런 의사의 처치를 듣지 않으신다고 했다. 아무래도 큰스님이 걱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하룻밤 백담사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저녁 공양 끝나신 후에 잠깐 다시 큰스님을 뵈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자가 정해주는 방에 들어와 가방을 풀고 노트북을 꺼냈다. 컴퓨터에 보관되어 있는 파일 가운데 내가 엮었던 큰스님의 시전집 <적멸을 위하여>(문학사상사)를 열었다. 거기서 <절간 이야기>의 일곱 번째 이야기를 찾았다. 그것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임제스님의 법제자 관계(灌溪)스님은 임종하던 날 시자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앉아서 죽는 것도(좌탈坐脫) 진기할 것이 없고, 서서 죽는 것도(입망立亡) 신통치 않고, 거꾸로 서서 죽는 것도(도화到化) 그리 썩 감심(感心)이 안되니. 옳지! 나는 이렇게 가야겠다.”

하고 일어나 마당에 가서 잠시 서 있다가 한 발짝, 두 발짝, , , 다섯, 여섯, 일곱 발짝까지 걸음을 떼어놓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걸어가던 모양 그대로 죽었답니다.

이 일화를 우리 절 늙은 부목처사에게 했더니 부목처사는 뻐드렁니를 다 내어놓고

살아보니 이 세상에서 제일로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은 아무래도 죽는 날이 될 것 같니더.”

하고 빙시레 웃는 것이었습니다. - 절간 이야기7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읽고 나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 시자를 찾았다. 큰스님을 뵈어야겠다고 했더니 내일 아침에 뵐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 밤잠을 설치면서 설악 백담의 계곡 물소리를 들었다. 큰스님은 스스로 떠나실 날짜를 가늠하셨던 것일까? 다음날 아침 큰스님은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나에게 서울로 올라가라고만 하셨다. 밖에 병원의 응급차가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국 현대문단에서 선시조의 개척자가 되었던 무산 조오현 대종사는 2018526일 열반에 드셨다. 큰스님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을 그렇게 스스로 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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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풍속에 떠밀려 균형을 잃어가는 삶의 기로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와 방향을 찾기 위해 ‘문학’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해방 전후의 격변 속에서 한국사회의 지표가 되어주었던 작품들과, 보편적 삶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 비화들이 지금의 독자들에게 강건하고 올곧은 외침으로 다가선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탐방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과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권영민의 문학 콘서트> 강연 중에서 대중들과 함께 깊이 나누고 싶은 주제들을 선별하여 2부 12장으로 구성한 책이다.
윤동주의 원고 노트를 소중히 간직한 후배 덕분에 윤동주가 차가운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눈감은 후에나마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일본의 한국어 말살 정책으로 발표하지 못한 시들을 『청록집』으로 펴내면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출발을 알렸던 박목월과 조지훈의 첫 만남, 친우의 천재적 예술성과 고뇌를 이해하고 이를 시와 그림으로 탄생시킨 이상과 구본웅의 우정, 최소한의 삶을 꾸려가되 최대한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예술의 역할을 강조했던 한용운의 기개 등, 그동안 자세히 알지 못했던 작품 속 뒷이야기들을 통해 삶과 문학의 긴밀한 연결고리들을 풀어냈다.
가을비 내리던 날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정지용의 『백록담』 초판본을 구한 이야기, 이상의 소설 「실화」 속 카페 NOVA를 찾아 신주쿠를 헤맨 이야기 등 작가의 생생한 체험이 읽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상상을 선물한다.
“오직 인간의 본질적인 표현이며, 그 새로운 창조”인 문학 안에서 공감을 이룸으로써 문학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그 가치를 깨닫고 나면, 인생의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한 저마다의 새로운 좌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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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드디어 출간됐다. 한 해 동안 발표된 작품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중ㆍ단편소설을 합리적이고 공정한 심사 과정을 통해 선정하는 이상문학상은 한국소설 문학의 황금부분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탁월한 작품성을 지닌 수상작들로 이루어져 있어, 현대소설의 흐름을 대변하는 소설 미학의 절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2016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은 심사위원 5인(권영민, 김성곤, 김인숙, 김종욱, 윤후명)의 심사숙고 끝에 김경욱의 <천국의 문>으로 선정되었다. 김경욱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서사방식과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기반으로 냉소적이고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작품으로 평단과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아왔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한 개인과 가족에게 드리워진 부성(父性)과 부정(父情)의 상실을 통해 상처 입은 가족 공동체의 모습과 그 해체를 면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를 돌보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욕망하는 딸의 내밀한 시선은 파괴된 자신의 삶과 유예되는 아버지의 죽음 사이에서 참혹하게 길항한다. <천국의 문>은 한 인간의 죽음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 죽음으로 치환하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죽음이란 무엇인지, 남겨진 가족들의 존엄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아울러 단편소설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치밀한 시간 구성, 밀도 있게 처리된 디테일의 묘사 방식과 현대적 죽음 자체를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시각으로 그려낸 <천국의 문>은 한국문학이 얻어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과 자선 대표작 <양들의 역사> 외에도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우수상 수상작인 김이설의 <빈집>,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 정찬의 <등불>,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상실을 맞이하는 순간과 시대적 아픔들을 끌어안는 작품들이 고루 포진하여, 독자들을 새로운 미래로 초대하고 있다.

권영민 교수 한 마디 심사평 : "<천국의 문>에서 그려낸 치밀한 시간 구성, 밀도 있게 처리된 디테일의 묘사는 근래 보기 드문 소설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패러디에서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되는 탄식이 씁쓸한 여운으로 이어진다."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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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한국학센터에서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의 하나로 2015320일 버클리대학 구내 데이빗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서 <무산 조오현 그리고 영혼의 울림>이라는 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의 특별 초대손님은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다.

조오현 큰스님은 대한 불교 조계종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으로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머물고 있다. 1930년경에 태어나 절간에서 80여년을 살아오신 선승으로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이다. 일찍이 시조에 관심을 두어 1960년대 후반부터 시조 창작을 해 오면서 () 시조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였다. 큰스님의 시조집 <아득한 성자>는 한국에서 많은 독자층의 사랑을 받았다. 큰스님의 시조 작품들은 권영민 교수에 의해 모두 <조오현 시전집 적멸을 위하여>(문학사상사)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이 행사에서 하버드대학 데이빗 맥캔 교수의 <시조한 무엇인가>라는 강연과 뉴욕 주립대학 뉴 팔츠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의 <무산 조오현의 () 시조>라는 주제 강연을 했으며, 초대손님 조오현 스님과 버클리대학 권영민 교수가 <영혼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그리고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시조시인 홍성란 씨, 박영희 씨, 강병천 씨와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낭송했다. 이 행사의 마무리는 한국에서 초청되어 온 한국 전통 가곡 무형문화재 전수자 이유경 명창의 가곡창과 시조창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대금 연주가 고진호씨와 가야금 연주가 홍세린 씨가 함께 공연했다.

이날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는 180석의 자리에 청중이 빈틈없이 몰렸다. 청중석에서 대담을 지켜본 미국의 계관 시인 로버트 하스(Robert Hass) 교수는 오늘 큰스님은 물에 비친 달을 퍼 올릴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큰스님의 말씀 속에서 삶의 지혜와 큰 가르침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많은 교민들이 긴 세월의 이민생활에서 처음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버클리대학 학생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며 취업난 등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

  다음에서 조오현 큰스님과 권영민 교수가 나눈 대담 전문을 소개한다.

 

권영민 교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버클리대학 동아시아어문화과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권영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설악무산 조오현 영혼의 울림>이라는 제목의 아주 특별한 행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행사는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가 세계의 무대에서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기획한 프로그램 중의 하나입니다.

설악무산(雪嶽霧山) 조오현 큰스님은 80년 동안 산중 절간에서 생활해 오신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조계종 종립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입니다. 설악무산 큰스님은 1960년대부터 시조 창작을 해왔고, 몇 권의 시조집을 내기도 하였지요. 최근 뉴욕주립대학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World Literature Today> <Buddhist Poetry> 등의 여러 잡지를 통해 큰스님의 시조를 번역 소개하여 살아있는 선시(禪詩)’로 주목받으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오늘 설악무산 조오현 큰스님과의 대담을 가지기 전에 제가 무산 큰스님을 처음 만났던 일을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벌써 15년 전의 일입니다.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이 열렸던 해였으니까요. 저는 제1회 만해축전이 열리는 백담사를 찾았습니다.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저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지요. 백담사는 한용운이 3.1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두 해 넘게 투옥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다시 찾은 곳인데, 여기서 시집 <님의 침묵>(1926)의 시들을 쓴 곳으로 유명합니다. 시집 <님의 침묵>의 시들은 지금까지도 그 창작 배경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 깊은 계곡의 작은 산사가 한국문학 최고의 문제작을 만들어낸 문학적 성소(聖所)가 되었습니다.

백담사 경내를 들어서면서 저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노스님을 한 분을 처음 뵙게 되었지요. 허름한 승려복의 그 노스님은 마치 만해 한용운의 형상처럼 그윽했습니다. 그 노스님은 일행과 함께 있던 저에게 합장하며 무얼하는 분이신가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문학평론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답하면서 머리를 숙였지요. 그런데 이 스님은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 계신 분이구먼. 문학평론이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뵙는 스님인데 이런 식의 대화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답니다.

평론이라는 것은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그물질이지요. 바탕 자체가 없는 글이 되기 쉬우니까요.”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비평활동을 그래도 수십년간 해오면서 이런저런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노스님은 그것을 허망한 그물질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글이란 자기 혼이 담겨야 제 글이지요. 그런데 요즘 평론이라는 것은 대개 남이 만들어 놓은 방법론을 빌어다가 다른 사람이 쓴 작품 가지고 왈가왈부 시시비비만 하지요. 그러니 허망할 밖에요.”

노스님의 이어지는 말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제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그 노스님은 손가락으로 백담 계곡을 가리키면서 내게 다시 한 마디를 더 하셨어요.

옛날이야기가 있어요. 저 계곡의 깊은 못에 커다란 물고기가 간밤 폭포를 타고 오르면서 용이 되어 승천했지요. 그런데 거기 무어가 남아 있을 거라면서 사람들은 그 물속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는 이미 용이 되어 등천했는데 그물에 무어가 걸리겠습니까?”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면서 그냥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고는 내 손을 한번 잡아주시고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절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노스님의 말씀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저 자신이 해 오고 있는 문학공부의 허점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 같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만 기가 죽었습니다.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만 산중에 가득했지요. 저는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설악의 높은 봉우리에 안개구름이 띠를 둘렀습니다. 설악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 노스님이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일행 가운데 한분이 가만히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설악산 신흥사의 회주이신 무산 조오현 스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또한번 화들짝 놀랐습니다.

큰스님과의 이 첫 만남이 큰 인연이 되어 저는 가끔 백담사를 찾습니다. 지금은 인제에서 내설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속도로처럼 정비되어 있지만 백담 계곡은 여전히 깊지요. 거기에 만해 한용운을 닮은 큰스님이 지켜 계시고 만해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서 백담 계곡을 흘러넘칩니다. 여러분, 오늘 이곳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 제가 백담사에서 처음 만나 뵈었던 바로 그 노스님,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 앉아 계십니다. 무산 큰스님을 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큰스님을 박수로 환영하여 주십시오.

 

무산 큰스님.

큰스님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개인적으로 아주 큰 영광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산중 절간에서 생활하시는 분이신데, 먼 여행길에 오르시어 우리 버클리대학을 찾아 주셨으니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스님이라고 제가 선전을 좀 했습니다. 큰스님의 법어를 듣기 위해 우리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많이 오셨고, 이 지역에 사시는 교민들께서도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의 주관자로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조오현 스님

권영민 교수님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산중 늙은 중을 세계적인 명문 버클리대학에 초청해 주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이 자리에 나와주신 버클리대학 교수님들, 여러 학생들 그리고 함께 참여해주신 교민 여러분들께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의 관계자 여러분들이 따뜻하게 환대하여 주신 점에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권영민 교수

무산 큰스님.

저는 큰스님을 백담사에서 가끔 뵙고 덕담도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여쭙기는 처음입니다. 여러 가지 여쭙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 먼저 큰스님의 절간 생활은 어떠하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절간에서 큰스님은 하루의 일과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아마도 여기 오신 분들이 모두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어디 가서 입을 열지 않으면 본전은 하는데, 입을 열면 그만 손해를 봅니다. 선승의 법어라고 하니깐 잔뜩 기대를 갖고 오는데, 한참 들어보면 아무 내용 없는 말만 하니깐 실망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손해를 보더라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중의 절간 생활이라고 하지만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남의 비위 맞출 일 있으면 비위 맞춰주고, 아첨할 일 있으면 아첨하고, 야단칠 일이 있으면 야단치고, 뭐 이러다 보면 하루해가 다 갑니다. 이것이 나의 하루 일과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러시군요. 절간의 생활이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본선원의 조실스님이시니까, 큰스님의 가르침 아래 많은 선승들이 스님의 문정(門庭)에 모여 참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도 자주 큰스님을 찾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신다면, 큰스님께서 참선은 언제 어떻게 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방금 교수님이 내 절간 생활과 하루 일과를 물었고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하루 일과가 바로 나의 참선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세계적인 명문대학에 와서 강의하실 자격이 없어요. 교수님과 내가 이렇게 마주 앉아 서로 한 번 쳐다보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한 것이고, 교수님은 듣고 싶은 말 다 들은 것입니다. 이 외에 따로 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영민 교수

아무래도 스님 말씀을 알아듣기 어려운데요. 처음부터........

 

조오현 스님

나는 어렵게 말하지 않았어요. 교수님이 어렵게 듣고 있습니다.

선은 말과 글이 아닙니다. 선 학자들이 선을 말과 글로 만들어 놓았지요. 그 말과 글을 따라가면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결박입니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은 털이 없는데 토끼 뿔 거북이 털 이야기를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한 번 바라보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이 다 마음입니다. 이쯤에서 그만 합시다.

 

권영민 교수

, 알겠습니다.

방금 큰스님께서 일체유심조라 하시니 큰스님의 시조 마음 하나가 생각납니다. 제가 한번 읊어 보겠습니다.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다 놓아도

 

빛깔도 모양도

향기도 없는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더라

 

큰스님,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맘이 무엇이길래 천하장수도 들지도 놓지도 못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일이 꼬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때가 많습니다.

 

조오현 스님

교수님, 그것을 내가 알면 미국 말도 못하는 늙은이가 왜 여기 앉아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겠습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경에 보면, 마음의 근원은 원래 고요적적 아주 담적하다고 합니다. 빛깔도 향기도 모양도 없이 이름 지을 수도 그림 그릴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늘이 덮지 못하고 땅이 싣지 못한다 합니다. 실로 만법을 구비하여 갖추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옛 사람들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거울은 맑고 비어서 능히 만상을 비춰 보입니다. 거울에 티끌이 끼인다 하여 그 밝음이 근본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를 벗기면 다시 맑아집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 했습니다. 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영민 교수

오늘 큰스님께서 우리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제 큰스님의 시조에 대한 말씀을 여쭙겠습니다. 한국의 전통시가인 시조를 선()의 세계와 연결시킨 것이 스님의 선시조라고 앞서 하인즈 펜클 교수가 말씀을 했습니다. 큰스님은 선과 시를 어떻게 구분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선과 시는 시선일미(詩禪一味)’라 하여 시와 선이 한 가지 맛이라고 합니다. 시와 선은 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 맛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禪而無禪便是詩),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詩而無詩禪儼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금나라 때의 시인이자 사가(史家)였던 원호문(元好問)은 시는 선객에게 비단을 깔아준 것(詩爲禪客添花錦)이요, 선은 시인에게 절옥도(禪詩詩家切玉刀)라 했습니다. 다 좋은 말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은 나무의 곧은 결이고 시는 나무의 옹이 점박이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은 내가 나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고 시는 인생에 대한 물음에 답이라고 할까요. 설혹 시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언어를 만나는 그 순간 언어의 때가 묻어 버렸기 때문에 시는 마음을 조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첨언하면 마음에 옹이가 박혀 점박이 결로 나타나는 것이 시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무런 작의가 없다고 불가사의한 무작묘용(無作妙用)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선시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비유하면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으면 맑은 호수에도 똑같은 하늘의 달그림자가 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달그림자를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대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건져내는 그 순간 달그림자는 부서지고 맙니다. 결국 시는 언어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무작묘용도 다만 말일 뿐입니다.

권교수님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이시며 40년 넘게 비평활동을 하셨습니다. 내 논리에 공감을 하십니까?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물론 큰스님의 논리에 공감합니다.

 

조오현 스님

중국의 시성 두보(杜甫)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나는 누굴 놀라게 하기 위해 시조를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시조를 하인즈 교수는 선시조라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나는 내 작품을 굳이 선시조니 그냥 시조니 그런 구분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교수님도 내 시조를 선시조라고 봅니까. 평론가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하신다면 말입니다.

 

 

권영민 교수

저는 하인즈 교수님 견해를 지지합니다. 옛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시언지(詩言志)’라고 했듯이 스님도 시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시는 시를 쓴 그 시인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이 말씀은 시를 인간 정서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정의한 서양의 시인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큰스님은 평생을 참선수행 해오신 선사이시니 큰스님의 시()는 자연스럽게 선심(禪心)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외면하다시피 하는 시조에 큰스님께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나더러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시조를 고집하느냐고 하셨는데 교수님은 한국 시조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제 내가 질문을 좀 하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에 답만 하다 보니 오늘 내가 미국에 와서 청문회에 출석한 것 같아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십니다. 귀찮은 질문이라도 답변을 해 주셔야 합니다.

큰스님께서 제게 물으시니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시조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노래해온 시가 형식입니다. 한국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한국인의 말로서 그 형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노래해온 소넷이라는 단구의 시 형식이 있고, 중국 사람들은 단형의 절구(絶句)’를 즐겨 노래해 왔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하이쿠라는 짧은 시가 형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 형식과 더불어 한국에는 시조라는 3장 형식의 시가 있었던 것이지요. 한국인들은 시조를 널리 사랑했습니다.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촌부(村夫)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시조를 한 수 정도는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람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주는 것이 시조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한국 시조의 전래과정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서양의 소넷’, 중국의 절구’, 일본의 하이쿠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잘 모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민족인들 원()과 한()이 없는 민족이 있었을까마는 우리 조상만큼 원과 한이 많은 민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 모르지만 하늘에는 잔별이 많고 우리네 가슴에는 수심도 많다는 노래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들으면 잊지 않고 곧잘 흥얼거린다는 그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시조도 언제 누가 그 형식을 만들었는지 나는 모릅니다만 시조에는 인간살이의 희비애락이랄까 우비고뇌라 할까 그런 애달픈 가락이 사람을 사무치게 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국 시의 근원은 시조이고 시조는 한국인들의 영혼의 모음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는 시조 한 수 음미해 보는 것이 시조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시조를 한국 시의 근원이고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라고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조선 왕조의 위업을 쌓은 이방원 즉 태종이 고려의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쓴 시조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구절로 시작되지요. 이 시조를 들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자신의 변함없는 지조를 드러내기 위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시조를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시조를 가지고 서로 묻고 답한 것인데 두 편의 시조가 시조를 쓴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좋아하는 옛시조 한두 편 읊어주세요.

 

조오현 스님

사실 나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 조선 중종 임금 시절(1488~1544)에 살다간 시인 황진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권영민 교수

시간 많이 있습니다. 시조하면 황진이를 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조오현 스님

황진이는 조선 시대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이웃 총각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혼자 짝사랑하다가 죽었답니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그만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황진이가 자기의 속적삼과 꽃신을 얹어주니 상여가 비로소 움직였답니다. 그 후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여인의 아름다움은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일 수 있다고 했지요. 황진이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황진이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수많은 문인 석학들과 교유했는데 호협한 기개도 있어서 스스로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황진이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이름만큼 황진이의 생애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황진이 시조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권영민 교수

. 조금 알고 있습니다.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사모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진이는 화담이 사는 초당을 찾아 거문고를 타고 노래도 부르고 당시(唐詩)도 배우며 고담준론을 즐기곤 했었다지요?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시조가 유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황진이의 시조를 좋아하신다니 한 수 소개하여 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나는 황진이가 쓴 시조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황진이가 30년이나 면벽 수도했던 승려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나서 지은 시조입니다. 지족선사를 찾아간 황진이가 그 앞에서 유혹하자 부처가 돌아앉아 버렸다는 겁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덩어리가 되어 뒹굴었지요. 나중에 정신을 차린 지족선사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는 황진이 곁을 떠납니다. 그때 황진이가 떠나가는 지족선사를 향해 노래부른 시조 한 수를 읊어 보겠습니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여기서 청산은 황진이이고 녹수는 지족선사입니다. 황진이의 마음은 청산처럼 변치 않았는데 지족선사의 마음은 녹수처럼 흘러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두고 떠났다고 가슴 아파하는 그녀의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들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지족선사도 그냥 청산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버립니다. 내가 만약 그때 지족선사였다면 내가 청산이 되고 황진이가 녹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 시조에 그런 사연이 얽혀 있었군요.

 

조오현 스님 

모두 전해오는 이야기이지요.

황진이가 당시 최고의 명창 이사종과 함께 살다가 헤어진 후에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도 아주 유명합니다. 그 시조를 음미해 보면 부처되는 것보다 그녀와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조를 읊어 보겠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오늘까지 여인의 속마음을 이렇게 절절하게 보여준 사랑시가 없다고들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절창의 시조입니다.

이왕 황진이 시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황진이가 죽은 뒤에 태어난 백호 임제(林悌, 1549~1587)가 황진이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를 하나 더 소개해 보겠습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 임제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던 길에 송도를 지나게 되었지요. 임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명기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한잔 술을 따라놓고 통곡하면서 이 시조를 노래했답니다. 그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어요. 임제가 평양에 도착해보니 파면장이 날라왔어요. 사대부의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그를 파직시켰다는 겁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도 전에 한국에는 이미 이런 문학과 풍류가 있었습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옛시조의 의미를 좀더 깊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큰스님께서 발표하신 시조에 대해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는 스님의 모든 시조를 한데 모은 <적멸을 위하여>를 한 권씩 나누어 드리려고 저희가 한국의 문학사상사에 특별 주문하여 밖에 쌓아놓았습니다.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번역한 작품집도 함께 있습니다.

 

조오현 스님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졸작 허수아비를 읽어 보겠습니다.

 

허수아비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섰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허수아비>라는 시조를 들어보니 무욕청정하게 사시는 스님의 자화상이 무슨 영상처럼 선명합니다. 정말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곳 버클리 대학에는 세계적인 학자들과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허수아비의 그 텅 빈 하늘까지도 끌어안는 지혜로운 말씀을 한 가지 더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교수님 말씀과 같이 세계적인 학자님들 우수한 학생들이 죽을 일만 남은 산중 늙은이의 말을 들어 무엇 하겠습니까? 이분들은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들입니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사서삼경이나 팔만대장경도 다 압니다. 요즘은 인터넷인가 뭔가 하는 시대라 잠시 검색하면 알게 되어 있습니다.

교수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진리가 소음(騷音)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숲에서 우는 새 울음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 저 바다의 파도와 물빛 해조음 소리에 귀를 기울일지언정 옛 성현들의 말씀에 특히 종교인의 설교를 귀담아 듣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시끄럽다 이겁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새울음, 개울물 흐르는 소리, 파도소리 이 모든 소리가 진리의 원음이니까요. 내가 말을 안 하면 본전이라도 하지만 입을 열면 손해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 까닭도 거기 있습니다.

중국의 어떤 고서에 말을 안 하기가 제일 어렵다 했습니다. 요즘 나는 그 말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권영민 교수

수년 전에 큰스님께서는 절간에 부처 없다고 신도들 앞에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 법문이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간에 부처가 없다면 큰스님께서 평생을 믿고 의지해 오신 절대존자인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요?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내가 절간에 부처 없다고 한 것은 한국 불교가 아직도 기복(祈福) 불교 중심이라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기복 불교를 버리자고 한 소립니다.

교수님은 지금 절대존자는 어디 계시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인류에는 절대존자가 없습니다. 소위 부처님이라는 이름의 석가모니도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한 인간으로 팔십년 살다가 한 인간으로 죽었습니다. 그를 받드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의 가르침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의 가르침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등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존자는 아닙니다.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권영민 교수님 자신이고 맥켄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맥켄 교수님 자기 자신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모르고 있는 데 있습니다. 하루속히 자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내가 있음으로 존재합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절대존자임을 자각하면 모든 사람들 한 분 한 분이 다 절대존자임을 알고 받들게 됩니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49년간 설명하고 갔습니다. 이 깨달음이 그의 가르침 중에 핵심입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모두가 귀담아 듣고 감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여론 조사한 것을 어느 신문에서 보았는데 한국 국민의 70%가 미국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미국에 대한 인상은 어떠신지요?

 

조오현 스님

미국에 대한 인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말만 합니다. 미국이 오랫동안 우방국으로 한국을 도와 한국인의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선교사를 통해 먹을 것을 주고 경제개발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해 항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그 지긋지긋한 빈곤에서 벗어나 세계 10대 무역국이 된 것은 미국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도 깊이 고민해 볼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좀 냉정하게 비판하면, 어느 나라나 국익을 위해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미국은 미국중심주의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핵과 같은 살상무기를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라 합니다. 총기사고가 자주 일어나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는 살상무기를 만드는 그 막대한 돈으로 기독교의 복음사업에 사용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혼자 해 봅니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1231년 몽골족이 한국의 옛 이름인 고려에 쳐들어와 양민을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는 전쟁을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그때 고려는 적을 막을 총칼 등 무기를 만들지 않고 불경을 경판에 새겼습니다. 부처님의 생명존중사상으로 전쟁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경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팔만대장경입니다.

미국은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이니까 기독교의 정신을 생활화한다면 살상무기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미국이 인류평화와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핵을 폐기처분한다면 한반도를 위협하는 북한도 핵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핵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 등 다른 나라들도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사실상 핵은 인류의 재앙의 근원입니다. 지금 핵을 폐기하지 않으면 백 년 못 가서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핵 폐기야 말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며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대역사라 할 것입니다. 미국은 그런 능력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정신적 기반도 갖추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핵을 폐기하면 영원한 진리의 몸을 얻을 것입니다. 인류를 구한 구세주가 될 것입니다. 크게 버리면 크게 얻습니다. 미국이 세계 제일 강국답게 크게 한 번 버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뜻에서 평화의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에서 가지고 오신 죽비竹篦를 크게 세 번 치시고 합장하셨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아마 이 자리를 설악산 선방(禪房)으로 아시고 허공이 찢어지는 죽비(竹篦)를 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학생들과 교민들에게는 죽비 대신 마지막으로 축원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하지만 축원 같은 것 대신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미국에 와서 자기네 전통시가인 하이쿠라는 것을 널리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의 교과서에도 하이쿠가 수록되어 있다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민들은 시조를 흘러간 유행가로 사대부의 음풍영월로 생각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하버드대학 맥켄 교수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영어시조운동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습니다. 시조는 흘러간 유행가가 아닙니다.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조상 대대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모든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이 소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이 소리가 있는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시조는 한국인의 맥박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순신 장군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라는 시조 한 수로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6. 25 전란 중에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나온다.’라고 새로운 희망을 시조로 읊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맹서코 통일과 번영 이루고야 말리라.’ 라면서 자신의 포부를 시조로 풀어내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기 전에 19821223일 청주감옥에서 나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라고 읊은 시조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그 어른은 그 시조대로 자유의 종을 쳤습니다.

제가 이곳 여행을 결정하면서 한국에서 시조를 잘 짓는 홍성란 시인과 박영희·강병천 두 분 시인을 말동무 삼아 모시고 왔습니다. 백담사 무금선원 영진 스님도 함께 와 있습니다. 모두 시조를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주 부르는 이은상의 가고파」 「성불사의 밤와 같은 가곡은 모두 시조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동안은 바쁜 삶에 여유가 없어서였다고 하겠지만, 저는 이제부터 우리 시조를 사랑하고 노래하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이민 생활에 고생하는 교민들에게 축원을 드리지 못하니 죄송합니다.

 

권영민 교수

이제 말씀을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걸어 다니는 허깨비라 했다 합니다. 나도 허깨비가 되고 싶었으나 허깨비는 못되고 제자리걸음만 걷는 허수아비입니다.

감사합니다.

 

권영민 교수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신 무산 조오현 큰스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2015.3.20)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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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4일에 개최되었던 광복70주년 세계한국학대회 기조강연 내용 전문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현황과 그 전망

 

 

안녕하십니까?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주최하고 외교부와 광복70년 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2015년 세계한국학대회의 기조강연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행사는 세계 각 지역의 한국학 연구 현황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이에 근거하여 한국학의 새로운 방향과 그 전망을 모색하고자 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이 뜻깊은 기회를 만들어주신 한국국제교류단에 고마움을 표하며 이 자리에 함께 참여해 주신 세계 각국의 여러 교수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국학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 연구의 영역에서 한국에 대한 연구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번 세계한국학대회는 언어 문학과 역사 철학 등의 인문학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학의 연구 방향 자체가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여 문학과 역사 등으로 확대되어 왔고, 근래에는 정치 경제 등을 비롯한 여러 분야로 그 관심 영역이 넓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변화와 발전

한국학은 동양학 또는 동아시아 연구에서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비해 그 역사가 아주 짧습니다. 역사가 오래지 않은 만큼 그 제도적 기반도 허약하고 연구 인력도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한국이 서구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당시 한국에 관심을 가졌던 서양인들은 대개가 종교활동을 위해 한국을 찾아온 선교사들이거나 정치 외교 분야의 관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입국하여 교회를 세우고 학교와 병원도 건립하여 한국 사회에 서구의 문물제도를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 거기서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를 쓰고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서구인들에게 심어주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한국학 연구의 출발은 이들의 저술 활동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서구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식민지 조선을 경영했고, ‘조선 연구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조사 연구를 시행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 방식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본적 식민주의의 담론 공간 속에서 일정한 성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은 전문 연구자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대로 식민지 조선을 그려냈고 조선인들에 대해 기록했으며, 그 자신들의 조사 연구 결과를 실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합리화하고자 했습니다. 일본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반식민주의 운동과 투쟁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이 이른바 문화적 민족주의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주의적 접근방법에 저항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대응 담론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동서 열강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남북한 분단 상황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유엔을 중심으로 서구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의 역사 문화와 한국인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역별로 그 경로가 복잡합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한국학은 한국전쟁 이후 등장한 한국 전문가들과 미국에 유학했던 한국의 전문 지식인들에 의해 그 기초가 만들어졌고, 1960년대 중반 이후 평화봉사단의 활동을 통해 그 기반이 확대되면서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평화봉사단출신 학자의 대거 등장은 한국학이 미국에서 지역연구의 한 분야로서 그 독자성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이들이 주도해온 폭넓은 교육과 연구,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한 학문적 계승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 지역에서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경우처럼 한국 연구의 독자적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구소련시대에 동구권에서 이루어진 한국 연구를 기반으로 그 방향이 새롭게 전환된 지역도 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 가운데 중국의 경우는 개방화 이후 한국과의 적극적인 학술교류를 통해 한국학의 영역이 크게 확대 발전하였습니다.

세계 각국의 여러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학 연구와 교육은 1991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설립 이후 해외 한국학 분야에 대한 지원 사업을 확대하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해 한국학 분야의 교수직 설치 기금을 지원하였고, 학문 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장학 지원도 지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학술교류 사업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러한 꾸준한 지원 정책에 따라 세계 각국의 중요 대학들도 한국학연구소를 설치하고 한국학 강좌를 개설하면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적극 표명하였습니다. 오늘날 해외 한국학의 확대와 그 발전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추진해온 지원 사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학의 연구의 과제와 전망

한국학 연구는 그동안 꾸준히 확대 발전되어 왔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학 연구를 위한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전문가를 제대로 키우지 않고서는 한국학의 발전과 그 세계적 확대를 말할 수 없습니다. 전문 인력이 부족하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어렵고 제대로 된 성과를 얻기도 힘듭니다. 더구나 한국학 연구에 뜻을 두고 있는 학문 후속 세대의 양성도 여전히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한국학 연구에서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 각국의 주요 대학에서 한국학 강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확대해야만 합니다. 대학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고정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연구와 교육에 전념할 수 있어야만 한국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세계 각국의 여러 중요 대학에 한국학 강좌의 개설을 위해 재정을 지원했습니다. 앞으로 이 같은 사업에 한국의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연구를 위한 가칭 <해외 한국학 연구 기금> 같은 것을 제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한국학 연구를 더욱 활성화하고 그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학술교류를 촉진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은 국내 학계의 다양한 연구 성과를 곧바로 접하기 어렵고 그 연구 내용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내외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학술 정보를 교환하고 연구 내용에 대해 활발하게 토의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고 이를 네트워크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연구의 주축이 되고 있는 중국학이나 일본학 분야와의 학문적인 접촉과 교류도 더욱 활성화해야 합니다. 한국학 연구의 성과가 일본학과 중국학의 경우와 서로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만, 동아시아 연구에서 각 지역 연구의 상호 관련성이 더욱 강조되고 상대적으로 한국학 연구의 위상도 제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속의 한국은 그 국가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한국의 언어와 역사, 사회와 문화 전반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과거의 인식에서 벗어나 한국과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파급되기 시작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기가 커지고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관심이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학의 연구 기반을 더욱 확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학의 학문적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국학이 동아시아 연구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오늘 세계 한국학대회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교육활동과 폭넓은 연구 성과가 앞으로는 한국학 연구라는 이름으로 더욱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권영민)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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