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풍속에 떠밀려 균형을 잃어가는 삶의 기로에서, 우리가 회복해야 할 가치와 방향을 찾기 위해 ‘문학’을 따라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해방 전후의 격변 속에서 한국사회의 지표가 되어주었던 작품들과, 보편적 삶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했던 작가들의 작품 속 비화들이 지금의 독자들에게 강건하고 올곧은 외침으로 다가선다.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탐방기 「권영민의 그때 그곳」과 전국 각지에서 진행된 <권영민의 문학 콘서트> 강연 중에서 대중들과 함께 깊이 나누고 싶은 주제들을 선별하여 2부 12장으로 구성한 책이다.
윤동주의 원고 노트를 소중히 간직한 후배 덕분에 윤동주가 차가운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눈감은 후에나마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일본의 한국어 말살 정책으로 발표하지 못한 시들을 『청록집』으로 펴내면서 한국 현대시의 새로운 출발을 알렸던 박목월과 조지훈의 첫 만남, 친우의 천재적 예술성과 고뇌를 이해하고 이를 시와 그림으로 탄생시킨 이상과 구본웅의 우정, 최소한의 삶을 꾸려가되 최대한의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예술의 역할을 강조했던 한용운의 기개 등, 그동안 자세히 알지 못했던 작품 속 뒷이야기들을 통해 삶과 문학의 긴밀한 연결고리들을 풀어냈다.
가을비 내리던 날 청계천 헌책방 거리에서 정지용의 『백록담』 초판본을 구한 이야기, 이상의 소설 「실화」 속 카페 NOVA를 찾아 신주쿠를 헤맨 이야기 등 작가의 생생한 체험이 읽는 이들에게 흥미로운 상상을 선물한다.
“오직 인간의 본질적인 표현이며, 그 새로운 창조”인 문학 안에서 공감을 이룸으로써 문학 읽기의 즐거움을 경험하고 그 가치를 깨닫고 나면, 인생의 파도를 헤쳐 나가기 위한 저마다의 새로운 좌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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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을 사랑하는 모든 독자들이 매년 손꼽아 기다리는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드디어 출간됐다. 한 해 동안 발표된 작품들 중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되는 중ㆍ단편소설을 합리적이고 공정한 심사 과정을 통해 선정하는 이상문학상은 한국소설 문학의 황금부분을 선명하게 부각시키는 탁월한 작품성을 지닌 수상작들로 이루어져 있어, 현대소설의 흐름을 대변하는 소설 미학의 절정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2016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은 심사위원 5인(권영민, 김성곤, 김인숙, 김종욱, 윤후명)의 심사숙고 끝에 김경욱의 <천국의 문>으로 선정되었다. 김경욱은 이미지를 구현하는 서사방식과 관념적이고 철학적인 사유를 기반으로 냉소적이고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작품으로 평단과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아왔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은 한 개인과 가족에게 드리워진 부성(父性)과 부정(父情)의 상실을 통해 상처 입은 가족 공동체의 모습과 그 해체를 면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아버지를 돌보지만 한편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욕망하는 딸의 내밀한 시선은 파괴된 자신의 삶과 유예되는 아버지의 죽음 사이에서 참혹하게 길항한다. <천국의 문>은 한 인간의 죽음을 개인이 아닌 사회적 죽음으로 치환하고, 현대사회에서 개인의 죽음이란 무엇인지, 남겨진 가족들의 존엄은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아울러 단편소설의 정석이라고 할 수 있는 치밀한 시간 구성, 밀도 있게 처리된 디테일의 묘사 방식과 현대적 죽음 자체를 특유의 하드보일드한 시각으로 그려낸 <천국의 문>은 한국문학이 얻어낸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작품집에는 대상 수상작인 김경욱의 <천국의 문>과 자선 대표작 <양들의 역사> 외에도 마지막까지 치열한 경합을 벌였던 우수상 수상작인 김이설의 <빈집>, 김탁환의 <앵두의 시간>, 윤이형의 <이웃의 선한 사람>, 정찬의 <등불>, 황정은의 <누구도 가본 적 없는> 등이 수록되어 있다. 상실을 맞이하는 순간과 시대적 아픔들을 끌어안는 작품들이 고루 포진하여, 독자들을 새로운 미래로 초대하고 있다.

권영민 교수 한 마디 심사평 : "<천국의 문>에서 그려낸 치밀한 시간 구성, 밀도 있게 처리된 디테일의 묘사는 근래 보기 드문 소설적 성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패러디에서 나도 모르게 내뱉게 되는 탄식이 씁쓸한 여운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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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 한국학센터에서는 한국문학의 세계화를 위한 특별 프로그램의 하나로 2015320일 버클리대학 구내 데이빗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서 <무산 조오현 그리고 영혼의 울림>이라는 행사를 가졌다. 이 행사의 특별 초대손님은 시조시인으로 유명한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다.

조오현 큰스님은 대한 불교 조계종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으로 강원도 설악산 백담사에 머물고 있다. 1930년경에 태어나 절간에서 80여년을 살아오신 선승으로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이다. 일찍이 시조에 관심을 두어 1960년대 후반부터 시조 창작을 해 오면서 () 시조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였다. 큰스님의 시조집 <아득한 성자>는 한국에서 많은 독자층의 사랑을 받았다. 큰스님의 시조 작품들은 권영민 교수에 의해 모두 <조오현 시전집 적멸을 위하여>(문학사상사)라는 책으로 정리되어 나왔다.

이 행사에서 하버드대학 데이빗 맥캔 교수의 <시조한 무엇인가>라는 강연과 뉴욕 주립대학 뉴 팔츠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의 <무산 조오현의 () 시조>라는 주제 강연을 했으며, 초대손님 조오현 스님과 버클리대학 권영민 교수가 <영혼의 울림>이라는 주제로 대담을 나눴다. 그리고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시조시인 홍성란 씨, 박영희 씨, 강병천 씨와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한국어와 영어로 각각 낭송했다. 이 행사의 마무리는 한국에서 초청되어 온 한국 전통 가곡 무형문화재 전수자 이유경 명창의 가곡창과 시조창 공연으로 이루어졌다. 대금 연주가 고진호씨와 가야금 연주가 홍세린 씨가 함께 공연했다.

이날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는 180석의 자리에 청중이 빈틈없이 몰렸다. 청중석에서 대담을 지켜본 미국의 계관 시인 로버트 하스(Robert Hass) 교수는 오늘 큰스님은 물에 비친 달을 퍼 올릴 수가 없다고 하셨는데, 우리는 큰스님의 말씀 속에서 삶의 지혜와 큰 가르침을 건져 올릴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많은 교민들이 긴 세월의 이민생활에서 처음으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버클리대학 학생들은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알아야 한다는 말씀에 큰 깨달음을 얻었다며 취업난 등으로 실의에 빠져 있는 젊은이들에게 큰 격려가 되었다고 했다.

  다음에서 조오현 큰스님과 권영민 교수가 나눈 대담 전문을 소개한다.

 

권영민 교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버클리대학 동아시아어문화과에서 한국문학을 강의하고 있는 권영민입니다.

오늘 우리는 <설악무산 조오현 영혼의 울림>이라는 제목의 아주 특별한 행사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 행사는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가 세계의 무대에서 한국문학의 새로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기획한 프로그램 중의 하나입니다.

설악무산(雪嶽霧山) 조오현 큰스님은 80년 동안 산중 절간에서 생활해 오신 한국 불교계의 큰 어른으로 조계종 종립 기본선원의 조실 스님입니다. 설악무산 큰스님은 1960년대부터 시조 창작을 해왔고, 몇 권의 시조집을 내기도 하였지요. 최근 뉴욕주립대학의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World Literature Today> <Buddhist Poetry> 등의 여러 잡지를 통해 큰스님의 시조를 번역 소개하여 살아있는 선시(禪詩)’로 주목받으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진 분입니다.

 

 

오늘 설악무산 조오현 큰스님과의 대담을 가지기 전에 제가 무산 큰스님을 처음 만났던 일을 잠깐 소개하고자 합니다. 벌써 15년 전의 일입니다. 백담사에서 처음 만해축전이 열렸던 해였으니까요. 저는 제1회 만해축전이 열리는 백담사를 찾았습니다. 한용운의 문학을 새롭게 평가하는 심포지엄에서 저도 논문 하나를 발표하게 되어 있었지요. 백담사는 한용운이 3.1운동의 주동자로 체포되어 두 해 넘게 투옥되었다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출감한 후 다시 찾은 곳인데, 여기서 시집 <님의 침묵>(1926)의 시들을 쓴 곳으로 유명합니다. 시집 <님의 침묵>의 시들은 지금까지도 그 창작 배경이 베일에 싸여 있지만, 이 깊은 계곡의 작은 산사가 한국문학 최고의 문제작을 만들어낸 문학적 성소(聖所)가 되었습니다.

백담사 경내를 들어서면서 저는 만해 한용운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산사에서 뜻밖에도 노스님을 한 분을 처음 뵙게 되었지요. 허름한 승려복의 그 노스님은 마치 만해 한용운의 형상처럼 그윽했습니다. 그 노스님은 일행과 함께 있던 저에게 합장하며 무얼하는 분이신가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대학에서 문학평론을 가르치는 교수라고 답하면서 머리를 숙였지요. 그런데 이 스님은 내 말을 듣고는 크게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쓸데없는 공부에 매달려 계신 분이구먼. 문학평론이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뵙는 스님인데 이런 식의 대화에 어떻게 응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답니다.

평론이라는 것은 그럴 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참 허망하기 짝이 없는 언어의 그물질이지요. 바탕 자체가 없는 글이 되기 쉬우니까요.”

저는 어이가 없었습니다. 비평활동을 그래도 수십년간 해오면서 이런저런 책을 내기도 했는데, 이 노스님은 그것을 허망한 그물질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글이란 자기 혼이 담겨야 제 글이지요. 그런데 요즘 평론이라는 것은 대개 남이 만들어 놓은 방법론을 빌어다가 다른 사람이 쓴 작품 가지고 왈가왈부 시시비비만 하지요. 그러니 허망할 밖에요.”

노스님의 이어지는 말씀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습니다. 제 표정이 굳어 있다는 것을 눈치 채셨는지 그 노스님은 손가락으로 백담 계곡을 가리키면서 내게 다시 한 마디를 더 하셨어요.

옛날이야기가 있어요. 저 계곡의 깊은 못에 커다란 물고기가 간밤 폭포를 타고 오르면서 용이 되어 승천했지요. 그런데 거기 무어가 남아 있을 거라면서 사람들은 그 물속으로 그물을 던집니다. 물고기는 이미 용이 되어 등천했는데 그물에 무어가 걸리겠습니까?”

노스님은 말씀을 마치면서 그냥 웃자고 하는 말입니다.’ 하고는 내 손을 한번 잡아주시고 너털웃음을 웃으면서 절간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노스님의 말씀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습니다. 어쩌면 저 자신이 해 오고 있는 문학공부의 허점을 그대로 지적하신 것 같기도 하였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만 기가 죽었습니다. 백담사 계곡의 물소리만 산중에 가득했지요. 저는 고개를 들고 산등성이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설악의 높은 봉우리에 안개구름이 띠를 둘렀습니다. 설악의 진면목이 드러났습니다. 저는 그 노스님이 궁금했습니다. 나중에 일행 가운데 한분이 가만히 내게 알려주었습니다. 설악산 신흥사의 회주이신 무산 조오현 스님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또한번 화들짝 놀랐습니다.

큰스님과의 이 첫 만남이 큰 인연이 되어 저는 가끔 백담사를 찾습니다. 지금은 인제에서 내설악으로 들어가는 길이 고속도로처럼 정비되어 있지만 백담 계곡은 여전히 깊지요. 거기에 만해 한용운을 닮은 큰스님이 지켜 계시고 만해의 정신은 여전히 살아서 백담 계곡을 흘러넘칩니다. 여러분, 오늘 이곳 버클리대학 브라우어센터 소극장에 제가 백담사에서 처음 만나 뵈었던 바로 그 노스님, 무산 조오현 큰스님이 앉아 계십니다. 무산 큰스님을 단상으로 모시겠습니다. 큰스님을 박수로 환영하여 주십시오.

 

무산 큰스님.

큰스님을 이렇게 모시게 되어 개인적으로 아주 큰 영광입니다. 큰스님께서는 산중 절간에서 생활하시는 분이신데, 먼 여행길에 오르시어 우리 버클리대학을 찾아 주셨으니 다시한번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 기본선원 조실스님이라고 제가 선전을 좀 했습니다. 큰스님의 법어를 듣기 위해 우리 대학의 교수와 학생들이 많이 오셨고, 이 지역에 사시는 교민들께서도 이 자리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 행사의 주관자로서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조오현 스님

권영민 교수님 감사합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산중 늙은 중을 세계적인 명문 버클리대학에 초청해 주니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이 자리에 나와주신 버클리대학 교수님들, 여러 학생들 그리고 함께 참여해주신 교민 여러분들께도 고마움을 표하고 싶습니다. 버클리대학 한국학연구소의 관계자 여러분들이 따뜻하게 환대하여 주신 점에 특별히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권영민 교수

무산 큰스님.

저는 큰스님을 백담사에서 가끔 뵙고 덕담도 듣긴 했습니다만 이렇게 여러분 앞에서 말씀을 여쭙기는 처음입니다. 여러 가지 여쭙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만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 먼저 큰스님의 절간 생활은 어떠하신지 여쭙고 싶습니다. 절간에서 큰스님은 하루의 일과를 어떻게 보내시는지요? 아마도 여기 오신 분들이 모두 궁금해 할 것 같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어디 가서 입을 열지 않으면 본전은 하는데, 입을 열면 그만 손해를 봅니다. 선승의 법어라고 하니깐 잔뜩 기대를 갖고 오는데, 한참 들어보면 아무 내용 없는 말만 하니깐 실망을 많이 합니다. 하지만 오늘은 손해를 보더라고 자리가 자리인 만큼 말씀드리겠습니다.

산중의 절간 생활이라고 하지만 여느 사람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나는 해가 뜨면 일어나고, 배고프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싶으면 화장실 가고, 남의 비위 맞출 일 있으면 비위 맞춰주고, 아첨할 일 있으면 아첨하고, 야단칠 일이 있으면 야단치고, 뭐 이러다 보면 하루해가 다 갑니다. 이것이 나의 하루 일과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러시군요. 절간의 생활이 우리네 삶과 다를 바 없다고 말씀하시는군요. 저는 일반 사람들과는 다른 특별한 모습을 상상하고 있었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을 대표하는 기본선원의 조실스님이시니까, 큰스님의 가르침 아래 많은 선승들이 스님의 문정(門庭)에 모여 참선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선에 관심이 많은 일반인들도 자주 큰스님을 찾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반인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신다면, 큰스님께서 참선은 언제 어떻게 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방금 교수님이 내 절간 생활과 하루 일과를 물었고 나는 아주 정직하게 답했습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나의 하루 일과가 바로 나의 참선입니다. 이 말의 뜻을 잘 알아듣지 못한다면 세계적인 명문대학에 와서 강의하실 자격이 없어요. 교수님과 내가 이렇게 마주 앉아 서로 한 번 쳐다보면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말 다 한 것이고, 교수님은 듣고 싶은 말 다 들은 것입니다. 이 외에 따로 선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권영민 교수

아무래도 스님 말씀을 알아듣기 어려운데요. 처음부터........

 

조오현 스님

나는 어렵게 말하지 않았어요. 교수님이 어렵게 듣고 있습니다.

선은 말과 글이 아닙니다. 선 학자들이 선을 말과 글로 만들어 놓았지요. 그 말과 글을 따라가면 다 죽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이야기한다는 것은 자기결박입니다. 비유하면 토끼의 뿔이나 거북의 털을 이야기하는 것과 같습니다. 토끼는 뿔이 없고 거북은 털이 없는데 토끼 뿔 거북이 털 이야기를 내가 이 자리에서 죽을 때까지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렇게 한 번 바라보면 마음과 마음이 통하지 않습니까.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듯이 다 마음입니다. 이쯤에서 그만 합시다.

 

권영민 교수

, 알겠습니다.

방금 큰스님께서 일체유심조라 하시니 큰스님의 시조 마음 하나가 생각납니다. 제가 한번 읊어 보겠습니다.

 

그 옛날 천하장수가

천하를 다 들었다 다 놓아도

 

빛깔도 모양도

향기도 없는

 

그 마음 하나는 끝내

들지도 놓지도 못했더라

 

큰스님, 마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요? 맘이 무엇이길래 천하장수도 들지도 놓지도 못합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일이 꼬이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고 투덜거릴 때가 많습니다.

 

조오현 스님

교수님, 그것을 내가 알면 미국 말도 못하는 늙은이가 왜 여기 앉아서 꼭두각시 노릇을 하겠습니까? 나도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불경에 보면, 마음의 근원은 원래 고요적적 아주 담적하다고 합니다. 빛깔도 향기도 모양도 없이 이름 지을 수도 그림 그릴 수도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하늘이 덮지 못하고 땅이 싣지 못한다 합니다. 실로 만법을 구비하여 갖추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답니다. 옛 사람들은 마음을 거울에 비유하기도 했는데 거울은 맑고 비어서 능히 만상을 비춰 보입니다. 거울에 티끌이 끼인다 하여 그 밝음이 근본적으로 없어지지는 않습니다. 때를 벗기면 다시 맑아집니다. 그래서 옛사람이 삼일수심(三日修心)은 천재보(千載寶), 백년탐물(百年貪物)은 일조진(一朝塵)이라 했습니다. 답이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권영민 교수

오늘 큰스님께서 우리들에게 큰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제 큰스님의 시조에 대한 말씀을 여쭙겠습니다. 한국의 전통시가인 시조를 선()의 세계와 연결시킨 것이 스님의 선시조라고 앞서 하인즈 펜클 교수가 말씀을 했습니다. 큰스님은 선과 시를 어떻게 구분하시는지요?

 

조오현 스님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선과 시는 시선일미(詩禪一味)’라 하여 시와 선이 한 가지 맛이라고 합니다. 시와 선은 한 마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한 맛이라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선이면서 선이 없는 것이 시(禪而無禪便是詩), 시이면서 시가 없는 것이 선(詩而無詩禪儼然)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중국 금나라 때의 시인이자 사가(史家)였던 원호문(元好問)은 시는 선객에게 비단을 깔아준 것(詩爲禪客添花錦)이요, 선은 시인에게 절옥도(禪詩詩家切玉刀)라 했습니다. 다 좋은 말입니다.

나는 개인적으로, 선은 나무의 곧은 결이고 시는 나무의 옹이 점박이결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은 내가 나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고 시는 인생에 대한 물음에 답이라고 할까요. 설혹 시가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비롯되었다 하더라도 언어를 만나는 그 순간 언어의 때가 묻어 버렸기 때문에 시는 마음을 조작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첨언하면 마음에 옹이가 박혀 점박이 결로 나타나는 것이 시라고 보고 있습니다.

아무런 작의가 없다고 불가사의한 무작묘용(無作妙用)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선시라고 주장하는 이도 있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생각일 뿐입니다. 비유하면 하늘에 보름달이 떠 있으면 맑은 호수에도 똑같은 하늘의 달그림자가 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달그림자를 바라볼 수는 있어도 그대로 건져낼 수는 없습니다. 건져내는 그 순간 달그림자는 부서지고 맙니다. 결국 시는 언어로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무작묘용도 다만 말일 뿐입니다.

권교수님은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문학평론가이시며 40년 넘게 비평활동을 하셨습니다. 내 논리에 공감을 하십니까?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저를 놀라게 하시는군요. 물론 큰스님의 논리에 공감합니다.

 

조오현 스님

중국의 시성 두보(杜甫)는 사람을 놀라게 하기 위해 시를 쓴다고 했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나는 누굴 놀라게 하기 위해 시조를 쓰는 사람은 아닙니다. 내 시조를 하인즈 교수는 선시조라고 좋은 말씀을 해 주셨는데 나는 내 작품을 굳이 선시조니 그냥 시조니 그런 구분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교수님도 내 시조를 선시조라고 봅니까. 평론가 입장에서 냉정하게 비판하신다면 말입니다.

 

 

권영민 교수

저는 하인즈 교수님 견해를 지지합니다. 옛 중국의 시경(詩經)에서 시언지(詩言志)’라고 했듯이 스님도 시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시는 시를 쓴 그 시인의 마음을 언어로 표현한 것입니다. 시가 마음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이 말씀은 시를 인간 정서의 언어적 표현이라고 정의한 서양의 시인들의 경우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큰스님은 평생을 참선수행 해오신 선사이시니 큰스님의 시()는 자연스럽게 선심(禪心)에서 나왔다고 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외면하다시피 하는 시조에 큰스님께서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신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나더러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시조를 고집하느냐고 하셨는데 교수님은 한국 시조를 어떻게 보십니까. 이제 내가 질문을 좀 하고 싶습니다. 교수님의 질문에 답만 하다 보니 오늘 내가 미국에 와서 청문회에 출석한 것 같아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오늘 이 자리의 주인공이십니다. 귀찮은 질문이라도 답변을 해 주셔야 합니다.

큰스님께서 제게 물으시니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시조는 잘 아시다시피 한국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노래해온 시가 형식입니다. 한국인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고 한국인의 말로서 그 형태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서양 사람들에게는 오랜 세월 노래해온 소넷이라는 단구의 시 형식이 있고, 중국 사람들은 단형의 절구(絶句)’를 즐겨 노래해 왔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하이쿠라는 짧은 시가 형태가 있습니다. 이러한 시 형식과 더불어 한국에는 시조라는 3장 형식의 시가 있었던 것이지요. 한국인들은 시조를 널리 사랑했습니다. 위로는 제왕으로부터 아래로는 촌부(村夫)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시조를 한 수 정도는 노래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람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주는 것이 시조 아니겠습니까. 큰스님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조오현 스님

나는 한국 시조의 전래과정은 잘 모릅니다. 그리고 서양의 소넷’, 중국의 절구’, 일본의 하이쿠도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잘 모릅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 어느 나라 그 어느 민족인들 원()과 한()이 없는 민족이 있었을까마는 우리 조상만큼 원과 한이 많은 민족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누가 언제 지었는지 모르지만 하늘에는 잔별이 많고 우리네 가슴에는 수심도 많다는 노래를 우리나라 사람들은 한 번 들으면 잊지 않고 곧잘 흥얼거린다는 그 사실이 증명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시조도 언제 누가 그 형식을 만들었는지 나는 모릅니다만 시조에는 인간살이의 희비애락이랄까 우비고뇌라 할까 그런 애달픈 가락이 사람을 사무치게 하거든요. 그래서 나는 한국 시의 근원은 시조이고 시조는 한국인들의 영혼의 모음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열 마디 말보다는 시조 한 수 음미해 보는 것이 시조의 진미를 맛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교수님은 고려 말 조선 초기의 이방원과 정몽주의 시조 이야기를 알고 계시지요?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시조를 한국 시의 근원이고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라고 하신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조선 왕조의 위업을 쌓은 이방원 즉 태종이 고려의 유신들을 회유하기 위해 쓴 시조는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라는 구절로 시작되지요. 이 시조를 들은 고려의 충신 정몽주가 자신의 변함없는 지조를 드러내기 위해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라고 시조를 노래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신념을 시조를 가지고 서로 묻고 답한 것인데 두 편의 시조가 시조를 쓴 사람의 마음을 그대로 말해 주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도 좋아하는 옛시조 한두 편 읊어주세요.

 

조오현 스님

사실 나는 여자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오늘 조선 중종 임금 시절(1488~1544)에 살다간 시인 황진이 이야기를 좀 하고 싶은데 시간이 어떻게 됩니까?

 

권영민 교수

시간 많이 있습니다. 시조하면 황진이를 빼고는 말할 수 없겠습니다.

 

조오현 스님

황진이는 조선 시대 빼어난 미인이었습니다. 이웃 총각이 그녀의 아름다움을 보고 혼자 짝사랑하다가 죽었답니다. 그런데 그 상여가 황진이 집 앞에서 그만 움직이질 않았습니다. 그것을 본 황진이가 자기의 속적삼과 꽃신을 얹어주니 상여가 비로소 움직였답니다. 그 후 황진이는 기생이 되었습니다. 누군가 여인의 아름다움은 축복임과 동시에 저주일 수 있다고 했지요. 황진이를 두고 한 말 같습니다.

황진이는 예술적 재능이 뛰어나 수많은 문인 석학들과 교유했는데 호협한 기개도 있어서 스스로 서화담, 박연폭포와 더불어 황진이 자신을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남아있는 이름만큼 황진이의 생애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교수님께서도 황진이 시조 이야기를 잘 아시지요?

 

권영민 교수

. 조금 알고 있습니다. 황진이는 당대의 석학 화담 서경덕(1489~1546)을 사모해서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고 들었습니다. 황진이는 화담이 사는 초당을 찾아 거문고를 타고 노래도 부르고 당시(唐詩)도 배우며 고담준론을 즐기곤 했었다지요? 두 사람이 서로 주고받은 시조가 유명하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큰스님께서 황진이의 시조를 좋아하신다니 한 수 소개하여 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나는 황진이가 쓴 시조 가운데 특별히 좋아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황진이가 30년이나 면벽 수도했던 승려 지족선사를 파계시키고 나서 지은 시조입니다. 지족선사를 찾아간 황진이가 그 앞에서 유혹하자 부처가 돌아앉아 버렸다는 겁니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덩어리가 되어 뒹굴었지요. 나중에 정신을 차린 지족선사가 스스로 부끄러움을 알고는 황진이 곁을 떠납니다. 그때 황진이가 떠나가는 지족선사를 향해 노래부른 시조 한 수를 읊어 보겠습니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님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변할손가

녹수도 청산을 못 잊어 울어예어 가는고

 

여기서 청산은 황진이이고 녹수는 지족선사입니다. 황진이의 마음은 청산처럼 변치 않았는데 지족선사의 마음은 녹수처럼 흘러갔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두고 떠났다고 가슴 아파하는 그녀의 마음이 지금까지 남아 우리들 가슴을 설레게 합니다. 지족선사도 그냥 청산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울면서 버립니다. 내가 만약 그때 지족선사였다면 내가 청산이 되고 황진이가 녹수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권영민 교수

아하, 그 시조에 그런 사연이 얽혀 있었군요.

 

조오현 스님 

모두 전해오는 이야기이지요.

황진이가 당시 최고의 명창 이사종과 함께 살다가 헤어진 후에 그를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도 아주 유명합니다. 그 시조를 음미해 보면 부처되는 것보다 그녀와 사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시조를 읊어 보겠습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 한 허리를 베어 내어

춘풍 이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오늘까지 여인의 속마음을 이렇게 절절하게 보여준 사랑시가 없다고들 합니다. 정말 아름다운 절창의 시조입니다.

이왕 황진이 시조 이야기가 나왔으니 황진이가 죽은 뒤에 태어난 백호 임제(林悌, 1549~1587)가 황진이를 생각하며 지은 시조를 하나 더 소개해 보겠습니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다 누웠는다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나니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백호 임제가 평안도 관찰사로 임명되어 평양으로 가던 길에 송도를 지나게 되었지요. 임제는 가던 길을 멈추고 명기 황진이 무덤을 찾아가 한잔 술을 따라놓고 통곡하면서 이 시조를 노래했답니다. 그 소문이 조정에까지 들어가게 되었어요. 임제가 평양에 도착해보니 파면장이 날라왔어요. 사대부의 체통을 지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조정에서 그를 파직시켰다는 겁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도 전에 한국에는 이미 이런 문학과 풍류가 있었습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들으니 옛시조의 의미를 좀더 깊이 헤아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큰스님께서 발표하신 시조에 대해 말씀을 여쭙고 싶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오신 분들께는 스님의 모든 시조를 한데 모은 <적멸을 위하여>를 한 권씩 나누어 드리려고 저희가 한국의 문학사상사에 특별 주문하여 밖에 쌓아놓았습니다. 하인즈 인수 펜클 교수가 번역한 작품집도 함께 있습니다.

 

조오현 스님 

고마운 일입니다.

그럼, 졸작 허수아비를 읽어 보겠습니다.

 

허수아비

 

새떼가 날아가도 손 흔들어주고

사람이 지나가도 손 흔들어주고

남의 논 일을 하면서 웃고 섰는 허수아비

 

풍년이 드는 해나 흉년이 드는 해나

논두렁 밟고 서면

내 것이거나 남의 것이거나

가을 들 바라보면

가진 것 하나 없어도 나도 웃는 허수아비

 

사람들은 날더러 허수아비라 말하지만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오는 것을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허수아비>라는 시조를 들어보니 무욕청정하게 사시는 스님의 자화상이 무슨 영상처럼 선명합니다. 정말 저 멀리 바라보고 두 팔 쫙 벌리면 모든 것 하늘까지도 한 발 안에 다 들어올 것 같습니다.

이곳 버클리 대학에는 세계적인 학자들과 우수한 학생들이 많이 공부하고 있습니다. 이분들에게 허수아비의 그 텅 빈 하늘까지도 끌어안는 지혜로운 말씀을 한 가지 더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교수님 말씀과 같이 세계적인 학자님들 우수한 학생들이 죽을 일만 남은 산중 늙은이의 말을 들어 무엇 하겠습니까? 이분들은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는 분들입니다. 성경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의 사서삼경이나 팔만대장경도 다 압니다. 요즘은 인터넷인가 뭔가 하는 시대라 잠시 검색하면 알게 되어 있습니다.

교수님도 아시는 바와 같이 진리가 소음(騷音)이 된지 오래 되었습니다. 현대인들은 숲에서 우는 새 울음소리, 개울물 흐르는 소리, 저 바다의 파도와 물빛 해조음 소리에 귀를 기울일지언정 옛 성현들의 말씀에 특히 종교인의 설교를 귀담아 듣는 이가 별로 없습니다. 시끄럽다 이겁니다. 그건 맞는 말입니다. 새울음, 개울물 흐르는 소리, 파도소리 이 모든 소리가 진리의 원음이니까요. 내가 말을 안 하면 본전이라도 하지만 입을 열면 손해 보는 사람이라고 말한 까닭도 거기 있습니다.

중국의 어떤 고서에 말을 안 하기가 제일 어렵다 했습니다. 요즘 나는 그 말에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권영민 교수

수년 전에 큰스님께서는 절간에 부처 없다고 신도들 앞에서 법문을 하셨습니다. 그 법문이 크게 화제가 되었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절간에 부처가 없다면 큰스님께서 평생을 믿고 의지해 오신 절대존자인 부처님은 어디 계신가요?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조오현 스님

내가 절간에 부처 없다고 한 것은 한국 불교가 아직도 기복(祈福) 불교 중심이라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기복 불교를 버리자고 한 소립니다.

교수님은 지금 절대존자는 어디 계시느냐고 질문하셨는데, 인류에는 절대존자가 없습니다. 소위 부처님이라는 이름의 석가모니도 우리와 똑같은 한 인간으로 태어났다가 한 인간으로 팔십년 살다가 한 인간으로 죽었습니다. 그를 받드는 사람이 많은 것은 그의 가르침이 아직도 남아 있고 그의 가르침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는데 등불이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절대존자는 아닙니다.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권영민 교수님 자신이고 맥켄 교수님의 절대존자는 맥켄 교수님 자기 자신입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 자신이 절대존자임을 모르고 있는 데 있습니다. 하루속히 자각해야 합니다. 모든 것은 다 내가 있음으로 존재합니다. 내가 없으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내가 절대존자임을 자각하면 모든 사람들 한 분 한 분이 다 절대존자임을 알고 받들게 됩니다.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깨달음입니다. 그는 이 깨달음을 49년간 설명하고 갔습니다. 이 깨달음이 그의 가르침 중에 핵심입니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의 말씀을 모두가 귀담아 듣고 감명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지난번에 여론 조사한 것을 어느 신문에서 보았는데 한국 국민의 70%가 미국을 지지하는 것으로 나왔습니다. 큰스님께서는 미국에 대한 인상은 어떠신지요?

 

조오현 스님

미국에 대한 인상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나는 내 하고 싶은 말만 합니다. 미국이 오랫동안 우방국으로 한국을 도와 한국인의 생명과 자유와 평화를 지켜주고 먹을 것이 없던 시절 선교사를 통해 먹을 것을 주고 경제개발에 도움을 준 것에 대해 항시 감사하게 생각하고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이 그 지긋지긋한 빈곤에서 벗어나 세계 10대 무역국이 된 것은 미국의 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도 깊이 고민해 볼 일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좀 냉정하게 비판하면, 어느 나라나 국익을 위해서는 다 마찬가지입니다마는 미국은 미국중심주의가 좀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미국은 세계에서 핵과 같은 살상무기를 제일 많이 생산하는 국가라 합니다. 총기사고가 자주 일어나 국민들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나는 살상무기를 만드는 그 막대한 돈으로 기독교의 복음사업에 사용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혼자 해 봅니다.

한국의 역사를 보면, 1231년 몽골족이 한국의 옛 이름인 고려에 쳐들어와 양민을 학살하고 재산을 빼앗는 전쟁을 일으킨 일이 있습니다. 그때 고려는 적을 막을 총칼 등 무기를 만들지 않고 불경을 경판에 새겼습니다. 부처님의 생명존중사상으로 전쟁을 막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 경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된 팔만대장경입니다.

미국은 기독교의 정신으로 세워진 나라이니까 기독교의 정신을 생활화한다면 살상무기를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오늘이라도 미국이 인류평화와 모든 생명을 위협하는 핵을 폐기처분한다면 한반도를 위협하는 북한도 핵을 만들지 않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핵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 등 다른 나라들도 폐기처분할 것입니다. 사실상 핵은 인류의 재앙의 근원입니다. 지금 핵을 폐기하지 않으면 백 년 못 가서 인류는 멸망하고 말 것입니다. 핵 폐기야 말로 인류를 구원하는 것이며 지상천국을 건설하는 대역사라 할 것입니다. 미국은 그런 능력도 있고 그럴 수 있는 정신적 기반도 갖추고 있습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핵을 폐기하면 영원한 진리의 몸을 얻을 것입니다. 인류를 구한 구세주가 될 것입니다. 크게 버리면 크게 얻습니다. 미국이 세계 제일 강국답게 크게 한 번 버리기를 기대합니다.

그런 뜻에서 평화의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큰스님은 한국에서 가지고 오신 죽비竹篦를 크게 세 번 치시고 합장하셨다)

 

권영민 교수

큰스님께서 아마 이 자리를 설악산 선방(禪房)으로 아시고 허공이 찢어지는 죽비(竹篦)를 치신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 학생들과 교민들에게는 죽비 대신 마지막으로 축원을 해 주셨으면 합니다.

 

 

조오현 스님 

알겠습니다. 하지만 축원 같은 것 대신에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내가 들은 바에 의하면 일본인들은 미국에 와서 자기네 전통시가인 하이쿠라는 것을 널리 전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 미국의 교과서에도 하이쿠가 수록되어 있다 합니다. 그런데 한국 교민들은 시조를 흘러간 유행가로 사대부의 음풍영월로 생각하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를 보다 못한 하버드대학 맥켄 교수가 안타깝게 생각하고 영어시조운동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습니다. 시조는 흘러간 유행가가 아닙니다. 한국인의 영혼의 소리입니다. 이 소리는 조상 대대로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모든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이 소리가 잠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속에 이 소리가 있는 줄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시조는 한국인의 맥박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이순신 장군도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라는 시조 한 수로 나라를 구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도 6. 25 전란 중에 피 흘려 싸우던 들에 속잎 돋아나온다.’라고 새로운 희망을 시조로 읊었어요. 박정희 대통령도 맹서코 통일과 번영 이루고야 말리라.’ 라면서 자신의 포부를 시조로 풀어내었습니다. 김대중 선생이 대통령 되기 전에 19821223일 청주감옥에서 나와 미국행 비행기에 오르면서 돌아와 종을 치리 자유종을 치리라.’ 라고 읊은 시조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결국 그 어른은 그 시조대로 자유의 종을 쳤습니다.

제가 이곳 여행을 결정하면서 한국에서 시조를 잘 짓는 홍성란 시인과 박영희·강병천 두 분 시인을 말동무 삼아 모시고 왔습니다. 백담사 무금선원 영진 스님도 함께 와 있습니다. 모두 시조를 사랑하는 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이 자주 부르는 이은상의 가고파」 「성불사의 밤와 같은 가곡은 모두 시조를 노래한 것입니다. 그동안은 바쁜 삶에 여유가 없어서였다고 하겠지만, 저는 이제부터 우리 시조를 사랑하고 노래하라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이민 생활에 고생하는 교민들에게 축원을 드리지 못하니 죄송합니다.

 

권영민 교수

이제 말씀을 끝내야 할 것 같습니다. 더 하시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들려주시지요.

 

조오현 스님

셰익스피어는 인생을 걸어 다니는 허깨비라 했다 합니다. 나도 허깨비가 되고 싶었으나 허깨비는 못되고 제자리걸음만 걷는 허수아비입니다.

감사합니다.

 

권영민 교수 

긴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가르침을 주신 무산 조오현 큰스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고맙습니다.

(2015.3.20)

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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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7월 24일에 개최되었던 광복70주년 세계한국학대회 기조강연 내용 전문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현황과 그 전망

 

 

안녕하십니까?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주최하고 외교부와 광복70년 기념사업회가 후원하는 2015년 세계한국학대회의 기조강연을 맡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오늘 이 행사는 세계 각 지역의 한국학 연구 현황을 전반적으로 검토하고 이에 근거하여 한국학의 새로운 방향과 그 전망을 모색하고자 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습니다. 이 뜻깊은 기회를 만들어주신 한국국제교류단에 고마움을 표하며 이 자리에 함께 참여해 주신 세계 각국의 여러 교수님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한국학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지역 연구의 영역에서 한국에 대한 연구를 통칭하는 말입니다. 이번 세계한국학대회는 언어 문학과 역사 철학 등의 인문학 분야만이 아니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학의 연구 방향 자체가 한국어를 기반으로 하여 문학과 역사 등으로 확대되어 왔고, 근래에는 정치 경제 등을 비롯한 여러 분야로 그 관심 영역이 넓어지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변화와 발전

한국학은 동양학 또는 동아시아 연구에서 중국학이나 일본학에 비해 그 역사가 아주 짧습니다. 역사가 오래지 않은 만큼 그 제도적 기반도 허약하고 연구 인력도 특정 분야에 편중되어 있는 실정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다시피 한국이 서구 사회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당시 한국에 관심을 가졌던 서양인들은 대개가 종교활동을 위해 한국을 찾아온 선교사들이거나 정치 외교 분야의 관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한국에 입국하여 교회를 세우고 학교와 병원도 건립하여 한국 사회에 서구의 문물제도를 전파하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이 다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 거기서 한국을 소개하는 책자를 쓰고 한국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서구인들에게 심어주는 역할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한국학 연구의 출발은 이들의 저술 활동에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그런데 한국은 서구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식민주의적 관점에서 식민지 조선을 경영했고, ‘조선 연구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조사 연구를 시행했습니다. 일본인들의 조선에 대한 연구는 대개가 식민지 조선에 대한 통치 방식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일본적 식민주의의 담론 공간 속에서 일정한 성격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까지 조선연구에 관심을 가졌던 인물들은 전문 연구자도 있었지만 일본 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많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판단대로 식민지 조선을 그려냈고 조선인들에 대해 기록했으며, 그 자신들의 조사 연구 결과를 실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합리화하고자 했습니다. 일본 식민지시대 한국인의 반식민주의 운동과 투쟁에서 눈에 띄게 드러나는 것이 이른바 문화적 민족주의의 경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에 대한 일본의 식민주의적 접근방법에 저항하기 위한 한국인들의 대응 담론이었던 것입니다.

한국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의 종료와 함께 일본의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지만, 동서 열강의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의해 남북한 분단 상황이 초래되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전쟁이 일어났습니다. 유엔을 중심으로 서구 세계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한국전쟁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한국의 역사 문화와 한국인의 삶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사람들도 등장했습니다.

광복 이후 한국에 대한 국제적 관심이 서구의 여러 나라에서 학문적으로 체계화되기 시작한 것은 지역별로 그 경로가 복잡합니다. 미국의 경우를 보면, 한국학은 한국전쟁 이후 등장한 한국 전문가들과 미국에 유학했던 한국의 전문 지식인들에 의해 그 기초가 만들어졌고, 1960년대 중반 이후 평화봉사단의 활동을 통해 그 기반이 확대되면서 학문적 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특히 평화봉사단출신 학자의 대거 등장은 한국학이 미국에서 지역연구의 한 분야로서 그 독자성을 확립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하였던 것입니다. 현재 미국에서의 한국학 연구는 이들이 주도해온 폭넓은 교육과 연구, 그리고 그 성과에 대한 학문적 계승을 통해 성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유럽 지역에서는 프랑스, 영국, 독일 등의 경우처럼 한국 연구의 독자적인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도 있고, 구소련시대에 동구권에서 이루어진 한국 연구를 기반으로 그 방향이 새롭게 전환된 지역도 있습니다. 동아시아 지역 가운데 중국의 경우는 개방화 이후 한국과의 적극적인 학술교류를 통해 한국학의 영역이 크게 확대 발전하였습니다.

세계 각국의 여러 대학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학 연구와 교육은 1991년 한국국제교류재단의 설립 이후 해외 한국학 분야에 대한 지원 사업을 확대하면서 획기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한국국제교류재단은 한국학의 세계화를 위해 한국학 분야의 교수직 설치 기금을 지원하였고, 학문 후속세대 육성을 위한 장학 지원도 지속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분야를 중심으로 다양한 학술교류 사업을 지원하였습니다. 이러한 꾸준한 지원 정책에 따라 세계 각국의 중요 대학들도 한국학연구소를 설치하고 한국학 강좌를 개설하면서 한국학에 대한 관심을 적극 표명하였습니다. 오늘날 해외 한국학의 확대와 그 발전은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추진해온 지원 사업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학의 연구의 과제와 전망

한국학 연구는 그동안 꾸준히 확대 발전되어 왔지만 아직도 여러 가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과제는 한국학 연구를 위한 전문 인력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한국학 연구의 전문가를 제대로 키우지 않고서는 한국학의 발전과 그 세계적 확대를 말할 수 없습니다. 전문 인력이 부족하면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어렵고 제대로 된 성과를 얻기도 힘듭니다. 더구나 한국학 연구에 뜻을 두고 있는 학문 후속 세대의 양성도 여전히 쉽지 않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한국학 연구에서 우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지원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세계 각국의 주요 대학에서 한국학 강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도 지속적으로 확대해야만 합니다. 대학에서 한국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 고정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연구와 교육에 전념할 수 있어야만 한국학의 발전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한국국제교류재단은 세계 각국의 여러 중요 대학에 한국학 강좌의 개설을 위해 재정을 지원했습니다. 앞으로 이 같은 사업에 한국의 기업들도 적극적으로 동참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학 연구를 위한 가칭 <해외 한국학 연구 기금> 같은 것을 제도화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한국학 연구를 더욱 활성화하고 그 수준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국제적인 학술교류를 촉진할 수 있는 새로운 프로그램도 필요합니다. 외국의 한국학 연구자들은 국내 학계의 다양한 연구 성과를 곧바로 접하기 어렵고 그 연구 내용에 대한 정확한 정보에 접근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국내외의 한국학 연구자들이 학술 정보를 교환하고 연구 내용에 대해 활발하게 토의할 수 있는 교류의 장을 만들고 이를 네트워크화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동아시아 연구의 주축이 되고 있는 중국학이나 일본학 분야와의 학문적인 접촉과 교류도 더욱 활성화해야 합니다. 한국학 연구의 성과가 일본학과 중국학의 경우와 서로 경쟁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만, 동아시아 연구에서 각 지역 연구의 상호 관련성이 더욱 강조되고 상대적으로 한국학 연구의 위상도 제고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 속의 한국은 그 국가적 위상이 크게 높아졌습니다. 한국의 언어와 역사, 사회와 문화 전반에 대한 세계인들의 관심도 커지고 있습니다. 한국에 대한 과거의 인식에서 벗어나 한국과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새로운 눈으로 보고 이해하려 하고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한국 대중문화를 중심으로 파급되기 시작한 한류의 영향으로 한국어 교육에 대한 열기가 커지고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새로운 흥미와 관심이 더욱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학의 연구 기반을 더욱 확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학의 학문적 위상을 한 단계 더 높이기 위해서는 이 좋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한국학이 동아시아 연구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오늘 세계 한국학대회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의 적극적인 교육활동과 폭넓은 연구 성과가 앞으로는 한국학 연구라는 이름으로 더욱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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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덧없음이 유달리도 마음을 허전하게 합니다. 시인 김영랑은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을 안쓰러운 마음결에 담아 제야라는 시로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제운 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 버린다 /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 어둑한 골목골목에 수심은 떴다 갈앉았다 / 제운 맘 이 한밤이 모질기도 하온가 // 희부연 종이등불 수줍은 걸음걸이 / 샘물 정히 떠붓는 안쓰러운 마음결 // 한 해라 기리운 정을 묻고 쌓아 흰 그릇에 /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 비사이다.’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면 기쁨보다 수심이 더 많습니다. 떨쳐버리기 어려운 그리운 정이 다시 마음속에 모이고 쌓입니다. 시인은 제야의 촛불을 밝힌 채 맑은 샘물을 떠놓고 그 맑음을 자신의 마음에 비춰봅니다. 이 마지막 날의 밤은 참으로 그냥 보내기 힘든 시간입니다. 지나간 1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하면서 시인은 마음속 깊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생각하니 어린 시절 시골 고향집의 섣달 그믐날 풍경이 떠오릅니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 동안의 묵은 먼지를 모두 쓸어내기 위해 집안 식구들이 나서서 하루 종일 수선스럽게 소제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 청소가 끝나면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데우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차례로 목욕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녁에 부엌에서 시루떡 찌는 냄새가 온 집안에 풍겼습니다. 커다란 접시에 수북하게 시루떡을 담아 집안 곳곳에 놓아두었습니다. 집안에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이날 밤만은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잠을 자는 사람은 눈썹이 희어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들기름 접시를 소반에 받쳐놓으시고는 목화솜을 말아 심지를 만들어 식구 수만큼 접시에 늘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각각 심지에 불을 댕기시면서 불꽃이 곧고 맑게 타올라야 내년 한 해 운수가 좋단다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모두가 할머니의 말씀에 숨을 죽인 채 접시 위로 타오르는 빨간 불꽃을 지켜보면서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맞던 섣달 그믐날의 풍경입니다만, 이런 단란한 제석(除夕)의 시간을 잊은 지가 오래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이 터지고 번졌습니다. 온 국민을 슬픔으로 몰아넣은 세월호 참사는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참담해 하면서도 부끄럽고 죄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서민들의 하루하루 살림살이는 팍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정부에서 온갖 방책을 내놓아도 한 번 움츠러든 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가진 자들은 남보다 더 가진 힘으로 유세를 떨고 있는데,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죄로 여길 수밖에 없는 허망의 현실을 탓할 뿐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하는 일 없이 사회로 내몰리고 있지만 누구도 묘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는 치정(癡情)처럼 얽혀서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면서도 자기네 권세 유지를 위해 서로 헐뜯으면서 파당 싸움에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아무도 마음 편하게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조용히 보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저 안쓰럽고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제야의 종소리를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즘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데, 수세(守歲)라는 말이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새도록 집안에 불을 밝혀두고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두고 수세라고 했습니다. 집안에 불을 밝히고 잠을 자지 않아야 잡귀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이 말에 따라붙어 있었습니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어버린다는 이야기로 어린 시절 가슴 조리게 만들었던 기억도 이 말과 연결돼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이니 쓸데없는 일을 삼가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보다는 지나간 일을 돌아보며 새해를 맞으라는 가르침을 하나의 금기(禁忌)처럼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섣달 그믐날 밤에는 불을 밝히고 정갈하게 몸을 가다듬은 채 한 해를 정리하고 다시 조신하게 새해를 맞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경건하게 새해를 맞아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야를 밝히는 촛불조차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은 각박하지만 모두가 사람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사람을 부축해야 하고 가진 자가 헐벗은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모두가 보살펴야 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해 새로운 삶의 길을 서로 안내해야 합니다. 편 가르고 다투기보다는 모두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 전체가 다시 활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가 끝나는 날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모두가 새해를 맞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세월의 자락에 매달리기보다는 새해를 맞는 기쁨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오늘 밤에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환하게 다시 켜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첫 눈뜸에 / 눈 내리는 청산을 보게 하소서 / 초록 소나무들의 / 청솔 바람소리를 듣게 하소서.’(김남조, 새해 아침의 기도)

 

권영민, 201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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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우리는 광복 70주년을 맞는다. 모두 힘을 합쳐 힘든 산업화의 과정을 통해 경제 성장을 얻어냈고, 숱한 희생을 바탕으로 민주화의 역정을 거쳐 사회 발전을 이룩했다. 이제는 우리 사회의 정신적 성숙을 의미하는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는 일이 남아 있다.    

문화의 개념은 그 폭이 아주 넓다. 삶의 이상을 실현하려는 인간의 모든 활동이 문화와 통한다. 문화는 삶의 과정에서 이루어내는 물질적 정신적 소산을 모두 포괄한다. 그러므로 문화는 인간의 삶 자체에 직결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이 본래적으로 지니고 있는 내적 능력을 통해 만들어내는 모든 산물이 문화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학문, 예술, 종교, 도덕 등의 정신활동이 그 중심을 이룬다. 결국 문화는 인간이 역사적 사회적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낸 삶의 방식 전체에 해당한다. 여기서 삶의 방식 전체를 문화라고 규정할 경우 그것은 어김없이 가치문제에 대한 판단과 부딪치게 되어 있다. 삶의 방식이 어떠한 원리와 어떠한 방법을 취하는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문화에 대한 관심은 문화의 의미와 본질을 밝히고자 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문화 발전의 참된 의미가 무엇이고 그 가치의 형성은 어떠한가를 사람의 삶의 과정 속에서 찾게 된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인식은 문화 현상 자체에 대한 자기반성에서 비롯된다. 물론 중요한 것은 다양한 문화 개념의 중심을 어디에다 둘 것이며, 비판의 의미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당연하게 제기되는 것이 바로 인문학적 성찰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그 산물로서 문화의 구성적 의미를 비판적으로 밝히는 학문이다. 인문학은 언제나 문화적 현상과 그 구성 자체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지향한다. 이것은 문학이나 역사 또는 철학 등을 통틀어 문화적 가치로 표현할 수 있는 인문학의 내재적 힘을 말한다. 문화를 생산하는 원동력이 인간의 삶이라면, 삶의 인간다움을 가능케 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은 인간의 본질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모든 학문의 기초가 되며, 인간의 정신과 인간 존재의 방식을 문제 삼는다는 점에서 문화의 기반을 이룬다. 하지만 인문학이 인간 삶의 가치를 구현해내는 학문이라고 해서 인간의 현실과 개개인의 삶을 그대로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간 정신은 어떤 조건으로 제약되는 것이 아니며 무한의 가능성과 힘을 가진 채 열려 있을 뿐이다. 바로 여기에 인문학의 존립 근거인 이른바 인문정신이 가로놓여 있다. 인문정신은 인간의 자기반성의 근원이며 또한 자기성찰의 중심에 해당한다. 인문정신은 인간이 자기 존재와 그 가치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길이다. 그리고 인간다움의 현실을 되찾고 인간의 삶의 풍요로움을 살릴 수 있는 힘이다.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먼저 인문정신을 구현할 수 있는 개인의 문화적 권리가 사회 제도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 한 사회가 스스로 문화를 창조해 가는 과정에는 문화적 주체의 확립이 필수적이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문화적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적인 권리를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 한국사회는 그동안 개인의 정치적 권리, 경제적 권리 등의 신장에 주력해 왔다. 하지만 경제 발전과 사회적 민주화 과정을 거치면서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영역이 문화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문화는 인간의 삶의 요체이기 때문에, 모든 문화적 주체는 공동체의 문화 활동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이를 향수할 수 있는 기본적 권리로서 문화적 권리를 갖는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문화의 융성이란 문화적 민주화의 실현과도 상통한다. 한국사회는 정치 사회적 민주화와 산업화 과정을 거쳐 경제 민주화의 단계로 발전해 왔다. 하지만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는 발전의 격차가 심화되면서 그것이 사회 갈등의 핵심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문정신에 기초한 문화적 민주화의 실현을 적극 추진해야 한다. 문화적 민주화는 사회발전의 개념에 사회 구성원들이 지닌 잠재력을 통합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화적 주체의 확립, 문화적 다양성의 보장, 문화의 개방성과 창의성의 촉진 등을 확립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뒤따라야 한다.

우리가 희망하는 문화 융성의 시대는 사회 구성원 모두가 인간다운 삶을 누리면서 각자가 문화적 주체로서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것이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균형있게 발전하고 모든 계층이 자유롭게 공동체의 문화 활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 곧바로 문화 융성으로 이어질 것이다. 광복 70년, 이제부터 우리는 문화 융성의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권영민, 20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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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박물관이 곧 문을 연다. 한글에 관한 모든 자료를 수집 정리 보존하기 위한 박물관이 생긴다는 것은 문화적으로도 큰 의미를 가진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특색 있는 박물관이 될 것이라는 점에서도 기대가 크다.

'한글'이라는 말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문자의 명칭이다. 그러나 이 명칭은 세종대왕 때부터 사용된 것이 아니다. 세종대왕은 새로 만든 문자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훈민정음이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말이라는 뜻을 지니는데, 이 말을 줄여서 '정음'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훈민정음은 조선 시대 말기까지 언문이라고 통칭된다.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이 '언문, 언서, 반절' 등으로 지칭하였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에는 국가에서 공식적으로 많은 중국 문헌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이 번역본 책들은 <두시언해> <소학언해> <화엄경언해> 등과 같이 모두 '언해'라는 명칭을 붙이고 있다. 한문으로 된 것을 언문으로 번역하였다는 뜻이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조선 시대에는 훈민정음이라는 명칭보다 언무이라는 명칭이 더 널리 통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개화계몽 시대에 이르러 언문이라는 명칭 대신에 국문이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한다. '나라의 말'이라는 뜻으로 국어라는 용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계몽운동에 앞장섰던 지식인들이 국문 글쓰기에 관심을 보이면서 <독립신문>(1896)과 같은 순국문 신문도 나오고 많은 도서들이 국문으로 출간된다. 대한제국 시절에 학부 내에 '국문연구소'(1907)를 설치하고 국어와 국문에 대한 연구를 전담하도록 한 것을 보면, 공식적으로 국문이라는 말이 우리글의 명칭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식민지 지배가 시작되면서 '언문'이라는 말이 다시 등장한다. 일본 총독부에서 우리말의 철자법을 정리하면서 '조선어 언문 철자법'이라는 공식 용어를 식민지 통치 기간 내내 사용하였다. 그리고 국어라든지 국문이라는 명칭은 일본어와 일본 글을 지칭할 경우에만 쓰도록 하였다. 한국인들이 사용하고 있는 말은 조선어이고, 글은 언문이라고 규정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등장한 것이 '한글'이라는 말이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우리글의 문화적 지위를 새롭게 주장하기 위해 고안된다. 이 말은 한글운동의 선구자였던 주시경 선생이 1910년 무렵부터 사용한 것이다. 공식적으로 이 말을 사용한 것은 주시경 선생이 1914년 조선어강습원의 명칭을 '한글배곧'으로 바꾸면서부터이다. 이 강습원에서 1915년부터 줄곧 '한글배곧'의 졸업증서 등이 발부되자 한글이라는 말이 널리 알려지기 시작한다. 한글이라는 명칭은 이때부터 일본인들이 다시 사용한 '언문'이라는 말에 맞서 당당하게 자기 위상을 갖추게 된다. 일본의 억압 속에서도 국어연구자들이 모여 1926년부터 한글 창제를 기념하기 위해 '가갸날'을 정하기도 하였지만 곧 '한글날'로 그 명칭을 바꿔쓰기 시작하였으며, <조선일보> 등의 언론기관이 나서서 '한글보급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뒤에 해방이 되면서 우리말과 글의 문화적 지위를 다시 찾게 되자, 여러 학자들에 의해 하나밖에 없는 글, 위대하고 큰 글, 바른 글이라는 뜻이 부연되어 덧붙여지면서 한글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진 것이다.

한글은 세계 인류가 자랑하는 기록 유산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문자를 연구하는 세계의 모든 학자들도 한글의 특이한 구조와 기능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 한글은 우리 민족의 글이지만 세계 각국의 대학에서 수많은 대학생들이 공부하고 있다. 이것은 불과 수십 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이다. 한글박물관의 개관을 앞두고 우리말과 글에 대한 시민의 의식도 한 단계 높아지기를 기대한다.(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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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편지를 받엇스나 엇전지 당신이 내게 준 글이라고는 잘 믿어지지 안는 것이 슬품니다. 당신이 내게 이러한 것을 경험케 하기 발서 두 번째입니다. 그 한번이 내 시골 잇든 때입니다.

이른 말 허면 우슬지 모루나 그간 당신은 내게 크다란 고독과 참을 수 없는 쓸쓸함을 준 사람입니다. 나는 닷시금 잘 알 수가 없어지고 이젠 당신이 이상하게 미워지려구까지 합니다. 

혹 나는 당신 앞에 지나친 신경질이엿는지는 모루나 아무튼 점점 당신이 머러지고 잇단 것을 어느날 나는 확실이 알엇섯고..... 그래서 나는 돌아오는 거름이 말할 수 없이 헛전하고 외로웠습니다. 그야말노 모연한 시욋길을 혼자 거러면서 나는 별 리유도 까닭도 없이 작구 눈물이 쏘다지려구 해서 죽을번 햇습니다..

집에 오는 길노 나는 당신에게 긴 편지를 썼습니다. 물론 어린애 같은, 당신 보면 우슬 편지입니다. 

"정히야, 나는 네 앞에서 결코 현명한 벗은 못됫섯다. 그러나 우리는 즐거웠섯다. 내 이제 너와 더불러 즐거웠던 순간을 무듬 속에 가도 니즐 순 없다. 하지만 너는 나 처름 어리석진 않엇다. 물론 이러한 너를 나는 나무라지도 미워하지도 안는다. 오히려 이제 네가 따르려는 것 앞에서 네가 복되고 밝기 거울 갓기를 빌지도 모룬다. 

정히야, 나는 이제 너를 떠나는 슬품을, 너를 니즐 수 없어 얼마든지 참으려구 한다. 하지만 정히야, 이건 언제라도 조타. 네가 백발일 때도 조코 래일이래도 조타. 만일 네 ‘마음’이 흐리고 어리석은 마음이 아니라 네 별보다도 더 또렷하고 하늘보다도 더 높은 네 아름다운 마음이 행여 날 찻거든 혹시 그러한 날이 오거든 너는 부듸 내게로 와다고-. 나는 진정 네가 조타. 웬일인지 모루겟다. 네 적은 입이 조코 목들미가 조코 볼다구니도 조타. 나는 이후 남은 세월을 정히야 너를 위해 네가 닷시 오기 위해 저 夜空(야공: 저녁하늘)의 별을 바라보듯 잠잠이 사러가련다.......”

하는 어리석은 수작이엿스나 나는 이것을 당신께 보내지 않엇습니다. 당신 앞엔 나보다도 기가 차게 현명한 벗이 허다히 잇슬 줄을 알엇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단지 나도 당신처름 약어보려구 햇슬 뿐입니다.

그러나 내 고향은 역시 어리석엇든지 내가 글을 쓰겟다면 무척 좋아하든 당신이- 우리 글을 쓰고 서로 즐기고 언제까지나 떠나지 말자고 어린애처름 속삭이든 기억이 내 마음을 오래두록 언잖게 하는 것을 엇지 할 수가 없엇습니다. 정말 나는 당신을 위해- 아니 당신이 글을 스면 좋겟다구 해서 쓰기로 헌 셈이니까요-.

당신이 날 맛나고 싶다고 햇스니 맛나드리겟습니다. 그러나 이제 내 맘도 무한 허트저 당신 잇는 곳엔 잘 가지지가 않습니다. 

금년 마지막날 오후 다섯시에 후루사토[故鄕]라는 집에서 맛나기로 합시다.

회답주시기 바랍니다. 李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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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학생 2014.08.02 06:18 신고 Address Modify/Delete Reply

    교수님 25일 이상의 집에서 강연을 들었습니다.
    성기의 비유이고, 어쩌고 하여
    성적으로 풀이되었다던, 그 시 제목이 무엇이었는지요 ..?

    • 문학콘서트 2014.08.16 16:21 신고 Address Modify/Delete

      안녕하세요. 아마도 '차팔씨(且8氏)의 출발'을 물어보시는 것 같습니다.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시입니다.

      龜裂이生긴莊稼泥濘의地에한대의棍棒을꽂음。
      한대는한대대로커짐。
      樹木이盛함

 

 

 

권영민 교수의 신작 <오감도의 탄생>(태학사)이 발간되었습니다.

신문에 연재되다 중단되었던 연작시 <오감도>의 나머지 미발표작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된 이 저서는, 사라진 나머지 시들의 행방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인 설명과 더불어 이상과 <오감도>에 대한 오랜 연구의 결과가 흥미롭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권영민 교수는 이상의 시 <오감도> 연작에 대해, "한국 문단에 늘 숙제처럼 남아 있던 미완의 『오감도』는 더 이상 한 편의 시가 아니라, 인습과 제도와 가치에 대항하는 시인 이상의 저항이자 창조적 도전"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한국 현대시에서 가장 난해한 시로 꼽히는 『오감도』. 『오감도』는 기존의 시적 정서나 진술 방식을 뒤엎고 사물에 대한 직접적이고 감각적인 접근법을 택했다. 그 결과 끊임없이 발전해가는 기술 문명의 정체를 포착하며 기괴하고도 거대한 하나의 상상도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물리학과 기하학과 같은 현대 과학과 맞물려 자신만의 시적 공간을 창조했다. 이상의 삶과 세계가 『오감도』에 모두 담겨 있다.
『오감도』의 연재 중단 후 나머지 미발표작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질문은 누구도 물은 적이 없다. 이상 자신도 이에 대해 직접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이 『오감도』를 미완의 상태로 방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그는 1936년 연작시 『역단』 다섯 편과 『위독』 열두 편을 발표함으로써 『오감도』에서 시작한 새로운 시적 실험의 완성에 도달한다. 이상이 당초에 계획했던 『오감도』의 양식적 특성은 『역단』과 『위독』을 함께 포함시켜야만 연작시로서의 규모와 성격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저자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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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노릇

문학의 주변 2014.06.02 12:18 |

요즘은 엄친(嚴親)이라는 말을 듣기 어렵습니다. 엄한 아버지가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집안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무너지고 있음을 뜻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닙니다. 예전 우리네 가정은 모든 살림살이가 아버지의 역할에 크게 좌우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언제나 집안의 중심이었고, 식구들이 전부 아버지에게 매달려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힘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권위는 누구도 넘볼 수가 없었습니다. 집안의 큰어른으로 언제나 자리를 지켰던 분이 아버지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거기에 딸린 가족들의 존재가 인정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가정에는 아버지가 잘 보이지 않습니다. 아버지들은 늘 이른 새벽에 직장에 나가고 밤늦게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지쳐 쓰러져버립니다. 식구들과 대화를 나눌 틈이 없으니 가정에서 외톨이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변변하게 벌어다 주지도 못하고 안팎으로 늘 쪼들리다 보면 가장으로서의 권위도 서지 않고 자식들에게도 말이 잘 먹혀들지 않습니다. 이렇게 힘을 잃고 지친 아버지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회적 책무가 너무 크다고 할지 모르겠습니다. 밖에서는 하는 일이 늘 불안한데, 일에 쫓기고 돈에 쪼들리니 마음의 여유를 갖기 어렵다고 하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직장에서는 자기주장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고 집 안에 들어와도 자기 속내를 다 드러내어 이야기할 수 없다고 할 것입니다. 자신의 지친 몸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쉴 수 있는 틈도 없는데, 아버지 노릇을 언제 하겠느냐고 불평도 하실 만합니다.

우리네 팍팍한 살림살이를 생각한다면 아버지의 역할을 놓고 따진다는 것이 조금 민망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아버지의 이미지가 돈 벌어오는 사람’, ‘밖에 나가 일하는 사람’, ‘밤늦게 들어오는 사람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가 밖에서 일이나 하고 돈을 벌어다주기만 하면 되는 사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버지의 존재를 이렇게 생각하도록 만든 것은 사실 다른 누구를 탓할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들 자신이 직장에 매달려 사회생활에 시달리는 동안 가정을 등한시하고 가족들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리를 잃고 스스로 그 권위를 무너뜨린 셈입니다 

아버지가 되기는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노릇을 제대로 하기란 정말 힘듭니다. 하지만 아버지의 역할을 걱정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들만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집안에서 제대로 아버지 역할을 못하면 그것이 곧바로 더 큰 사회적 문제를 야기할 수 있습니다. 아버지 역할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사회에서 자기 몫의 일을 충실하게 잘할 수 있는지도 걱정입니다. 아버지가 자기 자리에 서 있지 않으면 가족들이 항상 위태롭습니다. 집을 벗어나면 사회 어느 구석에도 아버지의 위엄스럽고도 자애로운 그늘을 대신해줄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해야 하는 일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으며 누구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아버지들이 스스로 아버지 자기 역할을 찾아야 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것은 돈만으로 해결되는 일이 아닙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많아도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아버지는 항상 가족 한가운데 있어야 하고 식구들 중에 누군가가 찾을 때 그 곁에 있어 주어야 합니다. 아버지가 있어야 할 자리에 제대로 서 있느냐, 못하느냐는 아버지 자신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바깥일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아버지의 참의미는 가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며, 아버지라는 호칭도 자신이 꾸리는 가정 안에서만 권위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존재는 항상 가정 안에서 결정되며 집 밖으로 나가면 남들에게 아버지가 별다른 뜻을 지니지 못합니다. 아버지로서의 의미는 오직 가정 안에서 최고로 존중될 뿐입니다. (권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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