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학 대사전

책머리에

 

1_문학 작품

1.

국문 시 / 일본어 시

2. 소설

3. 산문

 

2_미술 작품

1. 자화상 및 초상

2. 도안 및 삽화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표지 /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주소록 /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사인판 / 박태원 결혼식 피로연 방명록 휘호 / 잡지 조선과 건축의 표지 / 아동잡지 가톨릭소년표지 도안 / 김기림 시집 기상도표지 도안 / 단편소설 날개삽화 1 / 단편소설 날개삽화 2 / 단편소설 동해삽화 1, 2

3. 박태원 소설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연재 삽화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연재 삽화 1~연재 삽화 28

 

3_작품 속의 인명 및 작품명

 

4_이상의 삶과 문학

이상의 출생 / 이상의 성장 과정 / 경성고등공업학교 시절 / 조선총독부 건축기사 시절 / 다방 제비시절 / ‘구인회시절 /동경 시절

 

부록_이상의 사진 자료와 이상 연구 참고 문헌

 

[출판사 서평]

 

이상문학대사전李箱文學大事典은 올해 80주기를 맞는 이상이 남긴 모든 문학 예술적 자취를 사전식으로 망라하여 새롭게 정리한 책이다. , 한 권으로 만나는 이상의 문학 예술에 대한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_문학 작품에서는 이상의 문학 작품(, 소설, 수필 및 산문)의 서지 사항과 그 내용에 대한 해설을 중심으로 꾸몄다. 이상은 희대의 천재 예술가로 평가된다. 어떤 사람은 그의 문학이 드러내고 있는 파격적인 기법으로 인해 그를 전위적 실험주의자로 지목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를 19세기를 거부한 반전통주의자였다고 지목한다. 한국문학의 모더니티의 문제성을 초극하기 위한 그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그의 문학이 보여주는 난해성에 노골적인 반감을 표시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어떤 경우에도 이상의 문학은 하나의 테두리 안에서 그 성격이 고정되는 것을 거부한다. 해마다 수많은 평문과 연구 논문이 이상 문학을 위해 발표되고 있지만, 그 관심과 새로운 접근에도 불구하고 이상 문학의 실체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이상의 모든 것을 담았다고 자부하는 이 책이지만 이상 문학에 대한 비평적 논의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강조해 두고 싶다.

2_미술 작품에서는 이상이 남긴 미술 작품에 대한 정리?소개로 꾸며졌다. 이상이 직접 그린 몇 편의 초상화, 이상이 도안한 잡지 표지화, 작품 속의 삽화 등을 복원하여 수록했다. 특히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의 신문 연재 당시 이상이 그린 삽화를 확대?복원하여, 연재 당시의 소설 원문의 내용을 통해 박태원이 소설 속에서 서술하고 있는 내용과 이상이 자신의 삽화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내용이 어떤 관계였는지 설명하고자 했다. 이러한 새로운 시도는 화가를 꿈꾸었던 이상의 미술에 대한 열망과 함께 사물을 보는 이상의 독특한 시각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3_작품 속의 인명 및 작품명에서는 이상의 작품 속에서 언급되었던 인명과 작품에 대한 조사 내용을 사전식으로 배열했다. 이상은 자신의 글 가운데에서 특이한 패러디의 방식으로 다른 문인의 이름이나 작품을 인유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자기 문학의 세계와 대비하기 위해 다른 문인들의 작품들을 언급한 경우도 많이 있다. 이러한 특징은 이상 문학이 지니고 있는 특징적인 경향을 이해하는 데에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서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4_이상의 삶과 문학에서는 이상의 출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행적을 연대기적으로 정리하고 이를 입증할 수 있는 자료들을 최대한 조사?공개하였다. 이 책에서 이상의 호적부 제적등본을 다시 공개했으며, 그 부친의 이름을 김영창’(김연창이라고 소개된 책이 많음)으로 바로잡았다. 이상의 경성고등공업학교 학적부를 통해 그가 건축학과 수석 졸업자였음을 공식 확인하였고, 1929년 일본인 중심의 조선건축회정회원으로 입회했던 사실도 자료를 통해 다시 밝혔다. 1936년 이상이 동경으로 떠난 날짜도 1024일로 새롭게 추정했으며, 그가 묵었던 동경 간다의 하숙집 주소도 동경 간다구 진보정 3정목 10-1번지 4로 확정해 놓았다.

부록_이상의 사진 자료와 이상 연구 참고 문헌에서는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기념 사진첩 추억의 가지가지를 공개한다. 이 사진첩은 1929년도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생 가운데 한국인 학생 17명을 위해 이상이 직접 손으로 만든 것이다. 이 사진첩의 구성과 편집을 보면 이상이 얼마나 조밀한 성격의 소유자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상 연구에 참고해야 하는 중요 연구서와 자료를 목록화하여 추가했다.

 

이상의 모든 것-지은이 권영민의 책머리에중에서

이상의 짧은 생애는 삶의 모든 가능성을 보여주는 극적인 요소가 강하다. 그의 개인적인 행적과 문단 활동은 객관적으로 서술되기보다는 오히려 과장되거나 신비화되어 왔다. 특히 그의 문단 진출 과정, 특이한 행적과 여성 편력, 결핵과 동경에서의 죽음 등은 모두 일종의 일화처럼 이야기되고 있을 뿐이다. 더구나 이상의 문학 텍스트 자체도 이러한 삶의 특징과 결부되어 잘못 해석되거나 왜곡 과장된 경우가 허다하다. 이상의 삶은 명확한 사실관계의 규명이 없이 어물쩍 넘어가거나 엉뚱하게 포장되면서 그가 살았던 삶 자체가 하나의 스캔들이 되고 말았다. 기왕의 연구자들이 그런 식으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그대로 자명해졌을 문학 텍스트마저도 엉뚱한 설명이 더해지고 해석이 과장되면서 애매모호한 상태를 그대로 방치하게 된 경우도 적지 않다. 실제로 이상 문학은 그 텍스트에 대한 깊이 있는 독해 작업도 없이 연구자나 평자의 자의적 해석에 이끌려 엉뚱한 의미로 과장되고 왜곡된 경우가 많이 있다. 그리고 모든 평가는 특이하게도 그의 천재성에 집중된다. 객관적으로 해석되지 않은 이 천재성(?)으로 인하여 이상 문학은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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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인의 육필(肉筆) 원고

 

 

나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글을 쓴다. 글자판을 두드리면 컴퓨터 화면에 글자가 찍힌다. 내가 글자판을 잘못 눌러도 어지간한 낱말은 컴퓨터 자체 내에서 잘잘못을 가려내어 철자법에 맞춰준다. 간혹 잘못 쓴 부분이 생기거나 추가해야 할 내용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잘못된 부분을 지워버리고 다시 고쳐 쓰기가 아주 쉽다. 글의 분량도 금방 계산해주고 글자의 크기나 모양도 마음대로 조절이 가능하니 그 편리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글쓰기가 모두 끝나면 원고를 파일 상태로 컴퓨터에 보관한다. 그리고 언제든지 필요하면 컴퓨터를 켜고 그 파일을 열어볼 수 있다. 원고를 부탁해온 출판사 편집부에는 이메일로 파일을 전송하면 그만이다.

컴퓨터가 널리 이용되기 전에는 누구나 원고지에 펜으로 글을 썼다. 원고지는 정방형의 칸을 일정하게 배열해 거기에 글자를 써넣도록 만든 용지이므로 글자 모양이나 글의 길이를 계산하기 쉽고 공백을 이용하여 글을 고쳐 쓰기도 편하다. 큰 신문사나 잡지사에서는 아예 자기네 전용으로 원고지를 만들어 사용하기도 했다. 원고지에 글을 쓰는 방식은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활판 인쇄가 널리 보급되면서 등장했다. 일본에서는 메이지 시대 전부터 이미 원고지를 이용하여 글을 썼다고 한다. 출판 인쇄 작업의 편의를 위해 고안해낸 것이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규격화된 원고지를 만들지는 않았지만, 글쓰기에 알맞게 정해진 크기의 용지를 사용했다.

나도 당연히 글을 쓰면서 원고지 뭉치를 끼고 살았다. 학생시절에 썼던 리포트는 모두 원고지에 작성했다. 잉크와 펜으로 쓰던 원고가 만년필 글씨로 바뀌었고 편리한 볼펜이 동원되기도 했다. 내 대학 졸업논문은 펜글씨로 원고지에 썼고, 1980년대 초반에 제출했던 박사학위 논문도 모두 2백자 원고지 천 매 가까운 분량을 만년필로 원고지에 작성했다. 본격적인 문단 활동을 시작하면서는 인쇄소에 부탁하여 나만을 위한 원고지를 만들기도 하였다. 다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원고지에 급한 글을 썼던 적도 있고, 밤늦도록 원고지를 책상 위에 펼쳐두고 마감날짜에 맞추기 위해 머리를 짜내기도 했다. 문단 초년생 시절 원고지에 글을 써내려가던 내 모습이 지금도 선하게 그려진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컴퓨터를 이용하기 시작하면서 원고지와 멀어졌다. 컴퓨터에 내 손 글씨를 모두 빼앗겨버린 셈이다. 나는 문학 연구 자료들을 쉽게 정리하고 보관하면서 컴퓨터의 편리함에 깊이 빠져들었다. 컴퓨터로 쓰는 글은 그 자체가 완성본처럼 그대로 남는다. 원고지에 글을 쓰던 때의 초고(草稿)가 컴퓨터에서는 사실상 사라진다. 글을 원고지에 쓰게 되면 당연히 초벌 원고가 남는다. 물론 초고 상태의 글은 아직 완성된 것은 아니라서 얼마든지 그 내용을 고치거나 바꿀 수가 있다. 글의 전체 흐름을 헤아리면서 초고를 손질하면 어느 정도 글이 정리된다. 나는 버릇처럼 이 초벌 원고를 다시 원고지에 깨끗이 베껴 쓰는 것으로 글을 마무리하곤 했다. 그리고 글을 완성 한 후에 남는 초벌 원고가 아까워서 한동안 그걸 책장 속에 보관했다. 초고는 글쓰기의 첫 단계에서 이루어졌던 생각의 발단을 그대로 간직하여 보여준다. 원고지 위에 어지럽게 고쳐 쓰거나 덧붙인 글귀를 보면 생각의 흐름도 알 수가 있다. 하지만 이곳저곳 이사를 다니면서 보관했던 초벌 원고들을 모두 버려야 했고, 컴퓨터 사용의 편리함에 빠져들면서 초고의 소중함 자체마저 잊고 말았다. 컴퓨터 글쓰기는 생각의 흔적을 지워나가는 작업이다. 새로운 생각이나 더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바로 전의 생각을 그대로 없애버리게 된다. 그런 방식으로 글쓰기가 이루어지니 초고라는 것이 남아 있을 수가 없다.

내가 자료 조사를 하면서 직접 눈으로 확인했던 우리 문인들의 원고지 글씨 가운데에는 심훈의 시집 <그날이 오면>의 검열본 원고와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원고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물론 그 원고에 담긴 사연도 사연이지만 원고지의 칸을 메워나간 글씨 자체가 시인의 기품과 그 시 정신에 그대로 어울려서 깊은 감흥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자료들이 다행히도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살아남고 전란을 겪으면서도 온전히 보존된 것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소설가 채만식의 육필 원고와 시인 김수영의 육필 원고도 이미 영인본으로 간행되어 널리 알려진 바 있다.

 

 

지금도 손으로 직접 원고를 쓰는 원로 문인들을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비평가 김윤식 선생은 그동안 백 권이 넘는 책을 출판했는데, 그 엄청난 글들을 모두 원고지에 직접 쓰신 것으로 유명하다. 볼펜 글씨로 꾹꾹 눌러쓴 김 교수의 글은 잡지사 편집부에서는 늘 화제거리였다. 소설가 조정래 선생도 손 글씨로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을 모두 썼고 지금도 원고지에 만년필로 글을 쓴다. 벌교에 있는 태백산맥문학관의 전시실에 어린애 키만큼이나 높게 쌓여 있는 소설의 육필 원고를 보고는 모두가 입을 벌린다. 소설가 김 훈 선생은 연필 글씨가 유명하다. 그 독특하고도 품격이 느껴지는 글씨를 일반인들이 컴퓨터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서체를 개방한다는 기사를 얼마 전에 읽은 적이 있다. 원로 시인 김남조 선생은 아예 컴퓨터를 모르고 살아오셨는데, 지금도 굵은 싸인펜을 잡고 원고를 쓰신다. 그 글씨에서 순정한 시 정신을 지켜 오신 영혼의 힘 같은 것이 그대로 느껴진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문인은 수천을 헤아린다. 이분들 가운데 손 글씨로 원고를 쓰는 사람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아마도 대부분 컴퓨터를 이용할 것이기 때문에 원고지 위에 또박또박 써내려간 글씨를 만나보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나는 가끔 우리 문인들이 직접 손으로 써내려간 육필 원고를 모두 한자리에 모아둘 수는 없을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일본이 자랑하는 여러 곳의 문학관에 가보면 가장 중요한 볼거리가 문인의 육필 원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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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주의 귀촉도그리고 소쩍새

 

  

초저녁부터 멀리 뒷산에서 소쩍새가 울어댄다. 소쩍다 소쩍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소쩍 소쩍하기도 한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풍년이 들까를 헤아렸던 할머니 생각도 난다. 밤늦도록 울어대는 소쩍새 소리가 한없이 처량하다. 나는 소쩍새 울음소리를 잘 알아들으면서도 소쩍새를 직접 본 적은 없다.

 

시인 서정주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귀촉도라는 시가 있다. 시집 󰡔귀촉도(歸蜀途)󰡕(1948)의 표제작이다. 시의 제목인 귀촉도라는 한자어는 글자 그대로 풀이할 경우 () 나라로 돌아가는 길이라는 뜻이 될지 모르겠다. 시인 자신은 이 작품 말미에 두견이라고도 하고 소쩍새라고도 하고 접동새라고도 하고 자규(子規)라고도 하는 새가 귀촉도귀촉도그런 발음으로써 우는 것을 말한다라고 부기해 두고 있다.‘귀촉도라는 말을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뜻하는 것으로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소쩍새를 두고 두견, 접동새, 자규 등의 별칭을 갖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최근 소쩍새와 두견새는 그 종자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 권오길이 찾은 발칙한 생물들>이라는 책을 보다가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두견새는 뻐꾸기의 일종이라 녹음에 헹군 울음을 명랑하고 경쾌하게, 싱그럽고 구성지게 주로 낮에 노래하는데, 소쩍새는 올빼미를 닮은 놈으로 가슴에 사무치고 에는 가엽고 애처로운 울음을 야밤에 울어댄다는 것이다. 사전에서마저 두견이와 소쩍새를 뒤죽박죽 혼동하여 둘 다 두견이, 접동새, 귀촉도, 자규, 불여귀, 소쩍새로 섞어 적어 놓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 책의 내용을 좀더 자세히 소개하기로 한다. 두견이는 4월경에 동남아시아에서 우리나라로 날아와 번식하고 9월경에 남하하는 여름철새이다. 몸길이 약 28센티미터로 얼핏 보면 뻐꾸기를 빼닮았으나 몸집이 훨씬 작아 영어로 ‘little cuckoo’라 부른다. 맑고 경쾌한 뻐꾸기 울음에 비해서 두견이 소리는 매끄럽지 못하고 좀 둔탁한 편이지만, 수컷은 나뭇가지에서 날면서 "쿗쿗 쿄끼쿄쿄, 쿗쿗 쿄끼쿄쿄, 삐삐삐삐" 하고 재빠르고 멋들어지게 울어 댄다. 두견이 노랫소리는 결코 가엽고 슬프거나 가련하고 애잔하지 않으며 되레 경쾌하고 상쾌한 기분까지 든다. 소쩍새도 여름철새이다. 몸길이 20센티미터 정도로 올빼밋과에 속한다. 우리나라에는 4월쯤에 날아와 10월까지 머물러 번식한다. 회갈색 바탕에 검정과 흰색의 얼룩무늬가 나 있어 침엽수의 수피(樹皮)와 비슷하게 위장하고, 사람 낌새를 채면 기겁하여 숨기에 역시나 관찰하기 어렵다. 깜깜한 야밤에 "춋쵸, 촛쵸, 소쩍", "촛촛쵸, 촛촛쵸, 소쩍다, 소쩍다" 하고 운다. 우는 새의 입속이 핏빛처럼 붉어서 옛사람들은 피를 토하면서 죽을 때까지 운다고 믿었다 

시인 서정주가 귀촉도를 처음 발표한 것은 1943년 잡지춘추(春秋)2호에서였다. 이 작품은 서정주의 시적 변모과정의 한 단계를 그대로 대변하고 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시의 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눈물 아롱아롱

피리 불고 가신 님의 밟으신 길은

진달래 꽃비 오는 서역(西域) 삼만 리(三萬里).

흰 옷깃 여며여며 가옵신 님의

다시 오진 못하는 파촉(巴蜀) 삼만 리(三萬里).

 

신이나 삼아줄걸 슬픈 사연의

올올이 아로새긴 육날 메투리.

은장도 푸른 날로 이냥 베혀서

부질없은 이 머리털 엮어드릴걸.

 

초롱에 불빛 지친 밤하늘

굽이굽이 은하물 목이 젖은 새

차마 아니 솟는 가락 목이 감겨서

제 피에 취한 새가 귀촉도 운다.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

 

귀촉도는 사랑하는 임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각 연마다 시적 정황을 바꾸어 그 깊은 슬픔을 표현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1연에서는 시적 화자의 곁을 영원히 떠나게 된 임의 죽음을 노래하고 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나게 된 임과 이별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피리 불고가는 길에 진달래 꽃비라고 묘사한 대목은 호사스런 상여(喪輿)의 행렬을 떠올리게 한다. 슬픔을 억제하기 위한 시적 장치에 불과하다.‘서역 삼만리라든지 파촉 삼만리라는 거리는 시적 화자가 심정적으로 느끼는 죽은 임과의 아득한 거리를 강조하기 위해 동원한 말이다. 임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난 것이다. 2연은 임을 떠나보내면서 시적 화자가 느끼게 된 회한(悔恨)의 정을 드러내어 보여준다. 이제 자신의 긴 머리카락은 누구에게도 아름답게 보일 필요가 없다. 그 머리를 은장도 베어내어 그것으로 메투리를 만들어 임이 신고 가도록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임에게 모든 것을 다 드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사무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3연은 밤이 늦도록 울어내는 소쩍새의 울음을 그려낸다. 밤하늘에는 굽이굽이 은하수가 흐르는데 소쩍새는 목이 터지도록 울어댄다. 그런데 그대 하늘 끝 호올로 가신 님아라는 마지막 행에서 소쩍새의 실체가 드러난다. 바로 하늘 끝으로 홀로 가신 임과 소쩍새를 동일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소쩍새는 시인 서정주의 상상력을 통해 새로운 전설로 태어난 셈이다. 죽은 임은 소쩍새가 되어 그 이별을 슬퍼하며 밤새도록 울어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는 서정주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던 시인 오장환의 시 귀촉도(歸蜀途)와 특이한 상관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오장환은 1941귀촉도라는 시를 잡지춘추(1941. 4)에 발표한 바 있는데, 여기에는 정주(廷柱)에 주는 시라는 부제를 달았다. 오장환이 일제 말기에 친구인 서정주를 생각하며 쓴 이 시에는 어두운 현실 속에서 방황하던 청춘과 그 망향의 슬픔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시의 텍스트에 파촉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라는 구절이 반복되고 있는데, 이 막막한 거리감은 앞서 소개한 서정주의 귀촉도에서 이승과 저승의 거리로 바뀌어 그려진 바 있다.

  

파촉(巴蜀)으로 가는 길은

서역 삼만리.

뜸부기 울음 우는 논두렁의 어둔 밤에서

길라래비 날려 보는 외방 젊은이,

가슴에 깃든 꿈은 나래 접고 기다리는가.

 

흙먼지 자욱히 이는 장거리에

허리끈 끄르고, 대님 끄르고, 끝끝내 옷고름 떼고,

어두컴컴한 방구석에 혼자 앉아서

창 넘에 뜨는 달, 상현달 바라다보면 물결은 이랑이랑

먼 바다의 향기를 품고,

파촉의 인주(印朱)빛 노을은, 차차로, 더워지는 눈시울 안에

 

풀섶마다 소해자(小孩子)의 관들이 널려 있는 뙤의 땅에는

너를 기두리는 일금 칠십원야(一金七十圓也)의 쌀러리와 죄그만 STOOL이 하나

집을 떠나고 권속마저 뿌리이치고,

장안 술 하룻밤에 마시려 해도

그거사 안 되지라요, 그거사 안 되지라요.

 

파촉으로 가는 길은

서역 하늘 밑.

둘러보는 네 웃음은 용천 병()의 꽃피는 울음

굳이 서서 웃는 검은 하늘에

상기도, 날지 않는 너의 꿈은 새벽별모양,

아 새벽별모양 빤작일 수 있는 것일까.

 

오장환의 귀촉도에 대해 서정주는 어떻게 화답하고 싶었을까? 오장환이 느끼고 있던 현실적 고뇌를 서정주는 어떻게 해석하고 싶었을까? 이런 질문은 두 시인의 오랜 우정과 문학적 관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부질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장환의 귀촉도를 두고 시인 서정주가 다시 귀촉도로 화답했다는 것은 주목해 볼 만하다.

서정주의 귀촉도는 전통적 정서의 세계를 매개로 하여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고 있다. 이 시에서 은하에 맞닿는 시적 공간의 폭은 한의 정서의 폭과 깊이에 서로 조응한다. 시인은 한이 서려 있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를 시적 공간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정한의 의미를 극대화시키고 있다. 특히 원형적 심상이라고 명명할 만한 요소들이 시적 긴장을 유지하면서 이별의 의미를 공간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밤도 소쩍새 울음소리가 멀리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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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올해는 없다

 

 

올해 가을에는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을 만날 수 없게 되었다. 노벨문학상을 주관하는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 수상자를 선정하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한 성명을 보면, 한림원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신 내년에 수상자를 2명 선정하겠다고 한다. 해마다 노벨문학상을 기다리는 독자들에게는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수상자를 내지 않겠다는 결정을 하면서 대중의 신뢰 회복을 언급하고 있는 스웨덴 한림원에 어떤 일이 생겼는지도 궁금하다.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내지 못한다고 발표한 이유는 무엇일까? 외신들이 전하는 뒷이야기가 흥미롭다. 노벨문학상을 선정하는 스웨덴 한림원 종신회원은 모두 18명이다. 그 가운데 카타리나 프로텐손이라는 여성 회원이 있다. 그녀의 남편은 스웨덴 최고의 사진작가로 유명한 장클로드 아르노다. 이들 부부는 스웨덴 문화 예술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저명인사로 손꼽힌다. 그런데 사진작가 장클로드 아르노가 지난해 11월 이른바 미투 파문에 휩쓸렸다. 18명의 여성들이 장클로드 아르노에게 지난 10여 년간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했던 것이다.

장클로드 아르노의 성폭행이 여러 피해자들에 의해 폭로되자 스웨덴 문화 예술계는 큰 충격에 빠졌다. 스웨덴 문화 예술계에서는 사건의 진상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한림원 종신회원 카타리나 프로스텐손은 자기 남편을 두둔했고, 한림원 자체에서도 이 사건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사태가 더욱 커지자 스웨덴 한림원에서 세 사람의 다른 종신회원들이 프로스텐손의 태도를 문제삼게 된다. 그리고 그녀의 종신회원직 해임을 한림원 사무국에 정식으로 요구한다. 게다가 프로스텐손이 노벨상 수상자를 사전에 유출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그러나 한림원에서는 이 요구가 부당하다면서 모두 무시해 버린다. 이렇게 문제가 뒤엉키게 되자 해당 종신회원들이 사무국의 처사에 반발하여 한림원을 집단 사직하기에 이르게 된다.

한림원 내부의 갈등이 바깥 세상에 널리 알려지자 여론이 들끓기 시작했다. 스웨덴 한림원이 여성 성폭행 문제에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는 비난도 거세게 일어났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스웨덴 한림원의 사라 다니우스 사무총장이 사태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다. 그리고 결국 프로스텐손도 사퇴하게 된다. 이 같은 혼란 속에서 금년도 노벨문학상의 심사 중단(?) 사태로까지 이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노벨재단에서도 스웨덴 한림원이 올해 노벨문학상을 내년으로 연기한다는 결정을 내리게 된 것에 대해 짤막한 성명을 발표했다. 스웨덴 한림원이 노벨문학상을 시상하는 기관으로서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고 있다면서 구체적인 조치들을 지켜보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미 결정한 대로 올해 10월에는 서점가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볼 수 없게 된 것이 사실이다.

 

 

노벨문학상은 1901년부터 시행되었는데 모두 110명의 저명한 문인들이 이 상을 받았다. 수상자를 결정하지 못한 것은 1914, 1918, 1935, 모두 세 번이다. 당시 노벨재단의 공식 성명은 마땅한 수상자를 찾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 기간 중이던 1940년부터 4년 동안은 수상자를 내지 못했다. 오랫동안 그 권위를 지켜온 노벨문학상이 대상작을 선정하고 시상하는 기관의 내부 문제로 수상작을 내지 못할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분명 노벨문학상의 큰 상처임에 틀림없다. 그렇지만 내년에 두 사람의 수상자를 낸다고 하니 내년의 노벨문학상에 호기심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동안 물망에 올랐던 문인들도 새로운 가능성에 기대를 가져봄 직하다. 일본의 문학 애호가들이 벌써부터 무라카미 하루키의 수상 가능성이 더 커졌다고 흥분하고 있다는 토막소식도 전해진다. 우리나라 작가 가운데에도 그렇게 거론될 만한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노벨문학상은 세계문학의 꽃이다. 물론 그 자체가 문학의 최고 가치나 수준을 말해주는 척도는 아니다. 하지만 노벨문학상 수상작이 된다는 것은 세계문학의 무대에서 가장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는 작품이라는 점을 말해준다. 노벨문학상을 받으려면 무엇보다도 작품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야 한다. 물론 세계 각국의 인종과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서 모든 독자에게 호감을 얻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떤 작품이 적어도 20여개 국가의 언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힌다면 그 문학인은 자신의 문학작품으로 세계의 무대에 서 있게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중요 작품 서너 편 정도가 이미 세계 각국의 독자들에게 읽히면서 사랑을 받고 있다면 그런 작가는 스스로 자신을 노벨문학상의 후보자로 올려놓은 것이나 다름없다. 최근에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작가 가운데 우크라이나 여성 작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프랑스 작가 패트릭 모디아노, 일본계 영국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 등은 이미 그들의 대표작들이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부터 우리나라에서도 번역 출판되어 꾸준히 읽혀 왔다. 한국어로 번역 소개될 정도라면 당연히 세계적인 작가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노벨문학상은 매년 생존해 있는 작가의 작품을 대상으로 심사를 거쳐 그 수상작을 선정한다. 수상작을 발표하면서 심사 과정이나 후보자들에 대해 어떤 정보도 내놓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다. 매년 수상자로 선정된 사람 이외에 누가 후보에 올랐는지 어떤 심사과정을 거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없다. 수상자가 발표 된 후 50년간 심사 내용에 대한 모든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노벨재단의 문서보관소에 1967년까지의 노벨문학상에 관한 여러 가지 자료가 모두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 물론 그 문서들 속에서 한국문학 작품에 대한 기록은 하나도 없다. 1967년까지는 단 한 번도 한국문학 작품이 심사대상에 오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일본문학의 경우 1958년에 처음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작가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소설가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1886-1965)와 시인 니시와키 준자부로(西脇順三郎, 1894-1982)가 후보로 추천된 것이다. 이 두 사람의 이름은 1960년에도 후보군에 포함되었다. 카와바타 야스나리는 1961, 1963년 연속으로 그 이름이 후보군에 오른다. 1963년에는 소설 금각사(金閣寺)로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가 새롭게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 해 미사마 유키오는 유력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의 나이가 40이 되기도 전의 이야기다. 미시마 유키오는 1965년에도 설국(雪國)을 쓴 카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와 함께 노벨문학상 후보로 추천된다. 1967년에도 두 사람이 동시에 후보에 올랐다. 그러다가 1968년 카와바타 야스나리가 후보에 오른지 8년만에 일본 최초로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미시마 유키오는 1970년 자살함으로써 후보군에서 벗어났다.

노벨문학상의 수상자를 보면 110명의 수상자 가운데 프랑스의 철학자 베르그송(1927년 수상)도 있고, 영국의 철학자 러셀(1950년 수상)도 끼어 있다. 소설가가 절반이 넘고 시인 가운데 수상자는 34명이다. 그런데 수상 시인들의 면면을 보면 대개가 서구 언어권에 속해 있다. 소설의 경우에는 비서구 언어권의 작가도 여럿이 수상자가 되었는데 시인이 번역을 통해 노벨문학상의 수상자가 된 예는 없다. 인도의 시인 타골은 1913년 아시아 최초의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되었는데 그는 영어와 벵골어로 시를 썼다. 역대 최연소 수상자는 소설 정글북으로 유명한 영국 작가 키플링(J. Rudyard Kipling, 1865-1936)이다. 그는 1907년에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얻었다. 그의 나이 42세 때였다. 노벨문학상의 수상자들이 평균적으로 60대 중반에 상을 받았다는 통계도 있는데, 키플링의 수상은 약관의 나이에 이루어낸 업적임을 알 수 있다.

노벨문학상은 시상식에서 수상자 이외의 후보자들에 대해서는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 누가 그 해에 후보자로 부각되었는지도 밝히지 않는다. 그러므로 불필요한 잡음도 없어지고 모든 관심이 수상자에게만 집중되는 것이다. 매년 노벨문학상 발표 시기에 임박하여 외신을 타고 들어오는 후보자는 영국의 도박사들이 선정한 몇몇 문인들의 명단에 불과하다. 전 세계 문학 독자들이 좋아하는 문인의 이름이 그 명단에 오르내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도박사들이 점치는 사람 가운데 수상자가 된 경우는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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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

 

내가 미국 버클리 대학에서 여름방학을 맞아 일시 귀국을 준비하던 중에 하인즈 교수가 연락을 해 왔다. 미국 뉴욕주립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하인즈 펜클(Heinz Insu Fenkl) 교수는 무산 조오현의 시조에 빠져 있었다. <절간 이야기>의 번역 작업이 마무리 되고 있는데 원저자인 조오현 스님의 서문을 꼭 실었으면 한다는 것이었다.

하인즈 교수는 불교에 깊은 조예를 지니고 있으며 동양 사상이나 철학에도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고 있다. 그가 조오현 스님의 시조를 읽고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있다. 우선 전 세계 시인들 가운데 선시(禪詩)를 직접 쓰고 있는 현역 시인으로 무산 스님을 첫손에 꼽을 수 있다고 했다. 게다가 스님의 선시는 그 의미가 아주 깊은데도 쉽게 이해된다는 점을 주목했다. 그는 스님의 단시조 가운데 선정(禪定)의 세계를 그려낸 단시조 108편을 골라 번역하여 <For Nirvana (적멸을 위하여)>(컬럼비아대학 출판부)를 발간했다. 그리고 다시 두 권의 번역 작품집을 준비하고 있는 중이다. 그 하나가 <절간 이야기>의 영역본이고 다른 하나는 스님의 <연시조집>이다.

하인즈 교수는 내가 방학에 한국에 나가게 되면 한번 스님께 부탁을 올려달라고 말했다. 나는 미국 출발 전 날 백담사 무금선원에 연락을 취했다. 지난해 식도암 수술을 받은 후 스님은 항암치료를 받지 않고 그대로 절간에 머물러 계셨다. 나는 한국에 도착하면 선원으로 큰스님을 찾아뵙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내가 백담사를 찾은 것은 지난 524일이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난 뒤였다. 시자(侍者)가 나를 스님 계신 곳으로 안내해 주었다. 스님은 반갑게 나를 맞아주셨다. 많이 야위신 모습이었지만 그 카랑카랑하신 음성은 여전하였다. 큰스님은 내게 이렇게 물으셨다.

박사님은 언제까지 버클리 대학에서 가르치실 것인가요?’

당초에 약속이 2020년까지입니다. 그런데 내년까지만 하고 돌아올 생각입니다.’

나는 일년이라도 빨리 돌아와 큰스님 호쾌하신 선문답을 곁에서 자주 듣고 싶다고 했다. 스님은 그렇게 약속을 바꾸어도 되는 일인가를 내게 물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웃으시면서 이렇게 말씀했다.

박사님 돌아오실 때까지는 살아 있을 겁니다. 의사도 한 3년은 문제없다고 하였으니.’

나는 큰스님의 음성으로는 앞으로 10년도 걱정이 없어 보이신다고 말했다. 그리고 하인즈 교수가 부탁한 영역 <절간 이야기>의 서문 이야기를 말씀드렸다. 큰스님은 손을 내저었다.

그 책에 무슨 서문이 필요가 있나요? 그냥 엮어내라고 하세요.’

나는 그 말씀에 더는 책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내가 자리를 뜨려하자 큰스님이 이렇게 말씀을 하셨다.

꼭 내 서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내가 반갑게 하고 대답을 드리니 큰스님은 <절간 이야기> 가운데 일곱 번째 것을 서문으로 쓰라고 하셨다. 나는 그 일곱 번째 이야기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나는 부분대로 하겠다고 인사를 드린 후 방을 나왔다.

내가 거처를 나오니 시자가 나를 따라오면서 큰스님이 오늘 아주 즐거우신 모습이라고 귀띔을 했다. 그리고는 걱정스럽게 내게 말했다.

벌써 석달 가까이 조석공양을 거의 못하시지요. 겨우 미음 조금 넘기시는데 요즘은 그것도 힘들어 하십니다.’

그러면서 큰스님 암 수술하신 부위의 식도가 거의 막혀서 음식을 삼키실 수가 없다고 말해주었다. 곡차(막걸리)로 입을 추기실 뿐이라면서 한숨을 쉬었다. 외부에서 식도로 관을 삽입해야 한다는데 큰스님은 그런 의사의 처치를 듣지 않으신다고 했다. 아무래도 큰스님이 걱정이라는 것이다.

나는 하룻밤 백담사에서 머물기로 하였다. 저녁 공양 끝나신 후에 잠깐 다시 큰스님을 뵈올 생각이었다. 그리고 시자가 정해주는 방에 들어와 가방을 풀고 노트북을 꺼냈다. 컴퓨터에 보관되어 있는 파일 가운데 내가 엮었던 큰스님의 시전집 <적멸을 위하여>(문학사상사)를 열었다. 거기서 <절간 이야기>의 일곱 번째 이야기를 찾았다. 그것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이라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였다.

 

임제스님의 법제자 관계(灌溪)스님은 임종하던 날 시자와 한가롭게 차를 마시며

앉아서 죽는 것도(좌탈坐脫) 진기할 것이 없고, 서서 죽는 것도(입망立亡) 신통치 않고, 거꾸로 서서 죽는 것도(도화到化) 그리 썩 감심(感心)이 안되니. 옳지! 나는 이렇게 가야겠다.”

하고 일어나 마당에 가서 잠시 서 있다가 한 발짝, 두 발짝, , , 다섯, 여섯, 일곱 발짝까지 걸음을 떼어놓더니 그냥 그 자리에서 걸어가던 모양 그대로 죽었답니다.

이 일화를 우리 절 늙은 부목처사에게 했더니 부목처사는 뻐드렁니를 다 내어놓고

살아보니 이 세상에서 제일로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은 아무래도 죽는 날이 될 것 같니더.”

하고 빙시레 웃는 것이었습니다. - 절간 이야기7

  

나는 이 이야기를 몇 번이나 읽고 나서 방을 나왔다. 그리고 시자를 찾았다. 큰스님을 뵈어야겠다고 했더니 내일 아침에 뵐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날 밤 밤잠을 설치면서 설악 백담의 계곡 물소리를 들었다. 큰스님은 스스로 떠나실 날짜를 가늠하셨던 것일까? 다음날 아침 큰스님은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다. 나에게 서울로 올라가라고만 하셨다. 밖에 병원의 응급차가 도착해 대기하고 있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한국 현대문단에서 선시조의 개척자가 되었던 무산 조오현 대종사는 2018526일 열반에 드셨다. 큰스님은 기쁘고 즐겁고 좋은 날을 그렇게 스스로 택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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