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이렇게 저물어 갑니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세월의 덧없음이 유달리도 마음을 허전하게 합니다. 시인 김영랑은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을 안쓰러운 마음결에 담아 제야라는 시로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제운 밤 촛불이 찌르르 녹아 버린다 / 못 견디게 무거운 어느 별이 떨어지는가 // 어둑한 골목골목에 수심은 떴다 갈앉았다 / 제운 맘 이 한밤이 모질기도 하온가 // 희부연 종이등불 수줍은 걸음걸이 / 샘물 정히 떠붓는 안쓰러운 마음결 // 한 해라 기리운 정을 묻고 쌓아 흰 그릇에 /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 비사이다.’

 

한 해 동안의 삶을 돌아보면 기쁨보다 수심이 더 많습니다. 떨쳐버리기 어려운 그리운 정이 다시 마음속에 모이고 쌓입니다. 시인은 제야의 촛불을 밝힌 채 맑은 샘물을 떠놓고 그 맑음을 자신의 마음에 비춰봅니다. 이 마지막 날의 밤은 참으로 그냥 보내기 힘든 시간입니다. 지나간 1년이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힘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대는 이 밤이라 맑으라하면서 시인은 마음속 깊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시를 생각하니 어린 시절 시골 고향집의 섣달 그믐날 풍경이 떠오릅니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 동안의 묵은 먼지를 모두 쓸어내기 위해 집안 식구들이 나서서 하루 종일 수선스럽게 소제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집 청소가 끝나면 가마솥 아궁이에 불을 지펴 물을 데우셨습니다. 우리 형제들을 차례로 목욕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저녁에 부엌에서 시루떡 찌는 냄새가 온 집안에 풍겼습니다. 커다란 접시에 수북하게 시루떡을 담아 집안 곳곳에 놓아두었습니다. 집안에 잡귀가 들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었습니다. 누구도 이날 밤만은 잠을 자서는 안 됩니다. 잠을 자는 사람은 눈썹이 희어지기 때문입니다.

할머니는 들기름 접시를 소반에 받쳐놓으시고는 목화솜을 말아 심지를 만들어 식구 수만큼 접시에 늘어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각각 심지에 불을 댕기시면서 불꽃이 곧고 맑게 타올라야 내년 한 해 운수가 좋단다 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모두가 할머니의 말씀에 숨을 죽인 채 접시 위로 타오르는 빨간 불꽃을 지켜보면서 밤을 새우곤 했습니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맞던 섣달 그믐날의 풍경입니다만, 이런 단란한 제석(除夕)의 시간을 잊은 지가 오래입니다.

돌이켜 보면 지난 1년 동안 너무나도 많은 일이 터지고 번졌습니다. 온 국민을 슬픔으로 몰아넣은 세월호 참사는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았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참담해 하면서도 부끄럽고 죄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서민들의 하루하루 살림살이는 팍팍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정부에서 온갖 방책을 내놓아도 한 번 움츠러든 경기가 살아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가진 자들은 남보다 더 가진 힘으로 유세를 떨고 있는데,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가지지 못한 것을 죄로 여길 수밖에 없는 허망의 현실을 탓할 뿐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 채 하는 일 없이 사회로 내몰리고 있지만 누구도 묘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는 치정(癡情)처럼 얽혀서 말로는 국민을 위한다고 떠들면서도 자기네 권세 유지를 위해 서로 헐뜯으면서 파당 싸움에 힘을 쏟아붓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이니 아무도 마음 편하게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조용히 보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저 안쓰럽고 착잡한 심경에 사로잡혀 제야의 종소리를 흘려보낼 수는 없는 일입니다.

요즘에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데, 수세(守歲)라는 말이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 밤새도록 집안에 불을 밝혀두고 잠을 자지 않는 것을 두고 수세라고 했습니다. 집안에 불을 밝히고 잠을 자지 않아야 잡귀가 집안에 들어오지 못한다는 속설이 이 말에 따라붙어 있었습니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세어버린다는 이야기로 어린 시절 가슴 조리게 만들었던 기억도 이 말과 연결돼 있습니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밤이니 쓸데없는 일을 삼가고 일찍 잠자리에 들기보다는 지나간 일을 돌아보며 새해를 맞으라는 가르침을 하나의 금기(禁忌)처럼 제시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모두가 섣달 그믐날 밤에는 불을 밝히고 정갈하게 몸을 가다듬은 채 한 해를 정리하고 다시 조신하게 새해를 맞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한 해를 돌아보면서 경건하게 새해를 맞아야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제야를 밝히는 촛불조차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상은 각박하지만 모두가 사람의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힘이 있는 자가 약한 사람을 부축해야 하고 가진 자가 헐벗은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것은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상처받은 사람은 모두가 보살펴야 하고 절망에 빠진 사람을 위해 새로운 삶의 길을 서로 안내해야 합니다. 편 가르고 다투기보다는 모두 함께 나누며 더불어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사회 전체가 다시 활기를 얻을 수 있습니다.

섣달 그믐날은 한 해가 끝나는 날입니다. 이 밤이 지나면 모두가 새해를 맞습니다. 그러므로 가는 세월의 자락에 매달리기보다는 새해를 맞는 기쁨을 생각하고 싶습니다. 오늘 밤에는 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촛불을 환하게 다시 켜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몸과 마음을 가다듬고 이렇게 기도하고 싶습니다.

 

첫 눈뜸에 / 눈 내리는 청산을 보게 하소서 / 초록 소나무들의 / 청솔 바람소리를 듣게 하소서.’(김남조, 새해 아침의 기도)

 

권영민, 2014.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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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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