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에 실린 인물이라면 우리는 흔히 하늘에서 뚝 떨어진 사람처럼 생각해서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먹는다. 더구나 이상처럼 ‘박제가 된 천재’의 이미지로 남은 작가라면 더구나 그렇다. 하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상의 후배도, 또 이상의 아내도 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상이란 사람도 내가 겪는 것과 비슷한 절망과 희망을 느꼈던,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예컨대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시인인 서정주만 해도 젊은 시절에 이상을 실제로 만나본 일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박제가 된 천재를 아시오?>라는 글에서 이렇게 썼다.

“우리 누구보다도 4,5년은 나이 손위인 이상을 앞에 두고 그 성명 밑에 선생을 붙이지 않고 이상 씨라고 부른 것은 이편은 자존심이지만, 저편은 그걸 어찌 여길까. 에라, 만일 그걸 가지고 그가 꽁한다면 별사람도 아니니 더 찾지 않으면 될 것이다. 나는 그쯤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데, 이상은 역시 우리가 기대한 것 이상으로 그 별사람일 수 있어서 영 거기 꽁하는 눈치는 조금도 없었다.”

서울 을지로 4가 쪽으로 가는 구석진 뒷골목에 살던 이상을 만나러 갔을 때의 일을 두고 쓴 글이다. 해가 중천에 떠 있도록 잠을 자느라 부스스해진 머리로 후배들을 맞은 이상 앞에서 ‘선생’이라고 불러야만 하나, 부르지 말아야만 하나, 고민하다가 ‘에라, 모르겠다’며 이상 씨라고 부른 일을 두고 쓴 글이다. 그 날 서정주와 함께 이상을 찾아갔던 시인 오장환이 내놓은 습작시를 보고 이상이 괜찮다고 말한 걸 두고 역시 같이 찾아간 함형수가 “야, 이 자식아. 자기 시를 남한테 내놓는 것도 작작해야지 그게 뭐야? 이상이가 좋다고 맞장단 친 게 본심인 줄 알아? 그건 동이라는 거야. 자식이 너는 왜 눈치도 그리도 없니?”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 어쩐지 그런 일이 내 어린 시절에도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암튼 알쏭달쏭하다. 이런 일화들을 보면 이상이나 서정주나, 또 혹은 북으로 넘어간 오장환이나 나와 비슷한 사람 같아서 기분이 썩 나쁘진 않다.

이상을 천재로 만든 사람들은 그보다는 어린 세대들로 해방 뒤에야 대학생이 된 이어령과 임종국이었다. 그들이 보기에 식민지 시대의 훌륭한 선배 문인들은 한국전쟁 탓에 모두 월북하거나 납북됐고, 남쪽에 남은 문인들 역시 낭만적인 문인이라고는 일컫기 힘들었기 때문에 궁여지책으로 상대적으로 정치에 오염이 덜 된 근대문인을 찾다가 보니 요절한 이상이 ‘박제가 된 천재’로 재발견된 측면이 많았다. 하지만 이렇게 이상 신화가 자리 잡으면서 이상은 우리의 현실에서 멀어져 하늘을 둥둥 떠다니는 작가가 돼 버렸다. 말하자면 도쿄에서 폐결핵으로 죽어가면서도 레몬 향기를 맡고 싶었던 천재쯤으로 요약되는 셈이다. 거기에다가 <오감도> 연작 같은 난해시나 총독부 기수 경력, 금홍이 등을 비롯한 작부와의 동거 생활 등이 천재의 중요한 증거물로 제시됐다.

하지만 한 인간의 삶이 한 가지 증거물로만 채워진다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아침에 눈을 뜨면 나의 심사가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데, 만약 이상이 서정주도 만나본 일이 있는 실존인물이라면 그도 나의 심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이상과 동시대 인물로서 이상이 죽을 당시에 도쿄에 함께 있으며 이런 저런 잡일을 도맡은 바 있었던 김소운 같은 경우에는 이미 1937년 이상이 죽을 당시, 경성 부민관(지금의 서울시의회 자리에 있던 건물)에서 열린 이상 추도식을 보자마자 실제의 이상은 사라지고 이제 전설의 이상만 남게 됐다고 씁쓸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그가 들려주는 이상에 대한 기억들, 예컨대 카페를 사고 팔면서 큰 돈을 챙겼더라 등의 회고는 그런 씁쓸함의 결과물이자, 이상을 천재로 만드려는 시도에 대한 동시대인의 저항이라고도 볼 수 있으리라.

이상을 천재로 보지 않고 실제 생활인으로 본다고 해서 이상의 작품이 폄하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실제 생활인으로 이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이상에 대한 좀더 명확한 시선을 얻게 된다. 예를 들어 이상은 <육친(肉親)의 장(章)>이라는 글을 세 번 썼다. 그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아는 ‘육친의 장’은 이상이 죽고 난 뒤인 1939년 2월호 <<조광>>이라는 잡지에 실렸다. 그 글을 보면 아버지는 ‘크리스트에 혹사(酷似, 엄청나게 비슷한)한 남루한 사나이로’로, 어머니는 ‘근육과 골편과 약소(若少)한 입방(立方)의 혈청과의 원가상환을 청구하는 여인’으로 묘사했다. “날 왜 태어나게 했느냐?”는 절규가 가득하니 가히 절망에 빠진 천재의 목소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이 시에서 이상은 아버지를 암살하고 어머니로부터는 도망가겠다고 아우성친다. 이런 시들을 보면 이상은 ‘박제된 천재’가 분명하다.

<육친(肉親)의 장(章)>에 실린 이런 섬뜩한 내용은 1936년 10월 <<조선일보>>에 발표한 시 <문벌>, <육친> 등에서 다시 발견된다. 살아 생전 이상은 방대한 분량의 시작 노트를 만들어놓고 발표할 때마다 그 노트를 참조했었다. 그렇다면 이상이 죽은 뒤, 발표된 <육친의 장>은 거친 의미의 습작품이랄 수 있고, 이 습작품이 다듬어져서 <문벌>과 <육친>이 됐다고 볼 수 있다. 자연스럽게 우리는 1936년 10월 무렵, <육친의 장>을 고쳐서 <문벌>과 <육친>을 작성하는 이상의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그 당시 이상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저주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시에는 ‘내게 그만한 금전이 있을까. 나는 소설을 써야 서푼도 안된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이상이 소설을 써서 원고료를 받기 시작한 것은 <지주회시>를 발표한 1936년 6월 이후의 일들이니까, 우리는 이상이 <육친의 장>을 <문벌>과 <육친>으로 고쳐 쓴 시기가 1936년 6월부터 1936년 10월 사이의 어느 날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럼 1936년 6월 이후에 이상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과연 자기를 낳아준 부모를 저주하고 가족을 원수처럼 여기고 있었을까? 1936년 6월, 이상은 신흥사에서 변동림과 결혼했고, 그의 남동생 김운경은 직장에 취직했다. 8월 2일, 여동생 김옥희는 K라는 남자와 만주로 떠나버리고 옥희 걱정에 안절부절하던 이상은 도쿄서 온 친구들과 해질 무렵부터 술집으로 가 그 전 날 개막된 베를린올림픽 보도를 들으며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자신을 무척 따르던 여동생이었던지라 큰오빠로서 이상은 그래도 자신에게만은 말하고 갔으면 좋지 않았겠느냐며 아쉬워했다. 그 해 9월 30일은 추석이었는데, 그 날 이상은 미아리행 버스를 타고 큰아버지의 무덤에 성묘 갔다. 어린 시절에 큰집에 양자를 갔던 이상이었던지라 큰아버지는 그에게 아버지와 같았다. 이 때의 일들은 <추등잡필(秋燈雜筆)>, <동생 옥희 보아라> 등의 글에 남아 있다. 이들 글에는 ‘우리 삼남매는 모조리 어버이 공경할 줄 모르는 불효자식들이다’, ‘근래 이 삼촌이 지금껏 살아 계셨던들 하는 생각이 문득 드는 적이 많아서 중년에 억울히 가신 삼촌을 한번 추억해 보고도 싶고 한 마음에서 나는 미아리행 버스를 타고 나갔던 것이다’등의 구절이 나온다.

그런데 어째 좀 이상하지 않은가? 수필에 쓴 글은 가족에 대한 사랑이 가득 차 있는데, 같은 시기에 신문에 발표하려고 시작노트에서 옮겨 쓴 시들에서는 가족을 저주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1936년 6월에서 10월 사이 이상은 아버지, 어머니, 백부로부터 도망가고 싶다는 내용의 글을 쓰는 동시에 그들을 공경하고 추억해야 한다는 글을 쓴 것이다. 그렇다면 이상은 역시 의식이 둘로 분열된 천재였던 것일까? 이상을 천재로 만들려는 사람들에게는 가족을 사랑하는 이상은 불필요했기 때문에 역시 지금까지는 가족을 저주하는 이상 쪽에게 손을 들어주는 경향이 많았다. 그래서 이상 연구자들은 시에 등장하는 모조기독을 아버지로, 추악하고 심술궂은 여인을 어머니로, 묘혈에 계신 백골을 백부로 추정해왔다. 하지만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나중에야 밝혀졌다. 또다른 ‘육친의 장’이 발견됐기 때문이었다.

1956년 <<이상전집>>을 펴내려고 자료를 모으던 임종국은 이상의 어머니가 보관하던 사진첩을 넘기다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뭔가가 밀봉된 흔적이었다. “이게 뭔지 뜯어봤습니까?”라고 임종국이 묻자, 어머니와 동생 옥희는 그런 게 있었는가는 표정으로 사진첩을 들여다봤다. 자세히 보니 확실히 뭔가 다른 게 보였다. 임종국은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밀봉된 페이지를 뜯어냈다. 그 안에는 <척각(隻脚)>을 비롯한 9편의 미발표 일문 시가 들어 있었다. 개작한 뒤, 1937년 2월 15일 모종의 목적 때문에 한꺼번에 정서한 시들로 그 중 한 편이 바로 <육친의 장>이었다.

나는24세. 어머니는바로이낫새에나를낳은것이다. 성세바스티앙과같이아름다운동생․로오자룩셈부르크의목상을닮은막내누이․어머니는우리들삼인에게잉태분만의고락을말해주었다. 나는삼인을대표하여―드디어―

어머니우린좀더형제가있었음싶었답니다

―드디어어머니는동생버금으로잉태하자육개월로서유산한전말을고했다.

그녀석은사내댔는데올해는19(어머니의한숨)

삼인은서로들알지못하는형제의환영을그려보았다. 이만큼이나컸지―하고형용하는어머니의팔목과주먹은수척하여있다. 두번씩이나객혈을한내가냉청(冷淸)을극(極)하고있는가족을위하여빨리아내를맞아야겠다고초조하는마음이었다. 나는24세. 나도어머니가나를낳으시드키무엇인가를낳아야겠다고생각하는것이었다.

이 시를 읽으면 맏이였던 이상이 어느날 동생들을 대표해 “어머니, 우린 좀더 형제가 있었으면 싶었답니다”라고 말하는 광경이 떠오른다. 그 말에 어머니는 사내아이를 가졌다가 유산한 일을 들려준다. 세 남매는 살아 있었다면 열아홉 살이었을 그 남동생을 생각하며 아련한 기분에 젖는다. 그리고 이상은 이렇게 생각한다. 폐병에 걸려 두 번이나 피를 토해낸 내가 이 쓸쓸한 가족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루 빨리 아내를 맞이하는 일이라고. 자신도 결혼해 가족들에게 아기를 낳아야겠다고. 이건 아름다운 가족이야기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아름다운 사람이리라.

 

문학이란 글을 쓴 사람에게 감정이입해야만 한다. 그가 우리가 무관한 천재라면 우리가 어찌 그의 심정을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가 기인이라면 우리가 어찌 아버지를 모조기독이라는 부르는 그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문학을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결국 인간을 이해하게 된다. 교과서를 들여다볼 때도 우리는 인간을 들여다봐야지 못 보던 것을 보던게 된다. 이상을 천재라고 말하면 간단한 일이고, 그의 시를 난해시라고 일컬으면 시험에서 좋은 성적을 받겠지만, 인간을 이해할 방법은 없다. 우리가 이상을 천재의 구렁텅이에서 구해내야만 하는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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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문학콘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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